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08:36:57

남궁원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현재 회원
[분과별 예술 분야]
문학분과: 소설, 시, 아동문학, 평론
미술분과: 건축, 공예, 동양화, 서양화, 서예, 조각, 태피스트리
음악분과: 국악, 바이올린, 성악, 작곡, 지휘, 첼로, 피아노
연극분과: 극작, 무대미술, 연기, 연출
영화분과: 감독, 시나리오, 연기
무용분과: 무용
문학분과 미술분과 음악분과 연극·영화·
무용분과
유종호 전뢰진 안형일 김정옥
김우창 이신자 황영금 임권택
황동규 최종태 이경숙 조흥동
이근배 윤명로 이재숙 최청자
김원일 이종상 서계숙 박정자
서정인 유희영 한명희 김숙자
한말숙 박광진 윤대성
김후란 엄태정 나인용 김지미
김화영 김숙진 나덕성 손숙
김주연 강찬균 신수정 정승희
오세영 최의순 이경숙 김민희
정현종 정상화 김민 박명숙
유안진 윤승중 이영자 손진책
정연희 홍석창 백병동 정지영
김주영 조정현 장혜원 이호재
오정희 김형대 김성길 신영균
신달자 이철주 윤미용 신구
윤흥길 - 정진우 이강백
천양희 - 이만방 안성기
전상국 - 김우진 김긍수
최동호 - - -
권영민 - - -
김광규 - - -
작고 회원
문학분과 미술분과 음악분과 연극·영화·
무용분과
박종화 고희동 박태준 안종화
염상섭 이상범 현제명 이규환
조연현 장발 이주환 유치진
유치환 손재형 김성태 이해랑
서정주 배렴 김동진 오영진
윤백남 김환기 성경린 변기종
오상순 윤효중 김영의 서항석
이헌구 노수현 김원복 이광래
김동리 도상봉 정훈모 김동원
황순원 김인승 이흥렬 박진
김말봉 배길기 임원식 김정환
곽종원 허백련 김생려 이진순
모윤숙 이종우 김세형 조택원
신석초 김은호 이혜구 유한철
박영준 이병규 이상춘 이병일
김광섭 장우성 장사훈 이원경
이은상 김경승 김자경 김천흥
박화성 이순석 김기수 김소동
박목월 오지호 박민종 김충실
백철 김종영 전봉초 차범석
최정희 박영선 김성진 유현목
안수길 박득순 정희석 송범
윤석중 천경자 홍원기 장민호
오영수 이유태 황병덕 김수용
김기진 유영국 정회갑 최금동
임옥인 류경채 김순열 임성남
구상 김원 김순애 이근삼
손소희 김기창 이성천 신봉승
이범선 이종무 황병기 김기영
조병화 김충현 이인영 박현숙
김춘수 이준 백낙호 김문숙
정한모 허건 권오성 강성희
김윤성 박노수 강석희 김지헌
박연희 권옥연 김남윤 임영웅
선우휘 백문기 이규도 이병복
정한숙 문학진 박노경 김기덕
신동집 남관 백성희
강신재 이대원 박조열
박양균 권순형 황정순
한무숙 오승우 송수남
김성한 이광노 김학자
전숙희 윤영자 변장호
홍윤숙 권영우 남궁원
김남조 손동진 오현경
이호철 민경갑
김종길 조수호
김요섭 이수덕
홍성유 서세옥
문덕수 김흥수
이어령 김병기
박두진 한도용
서기원 송영방
조경희 권창륜
성찬경
김윤식
최일남
박완서
이청준
박희진
오탁번
신경림 }}}}}}}}}
남궁원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남우주연상
제11회
( 1972년)
제12회
( 1973년)
제13회
( 1974년)
황해
(평양폭격대)
남궁원
(다정다한)
박근형
(이중섭)
제19회
( 1980년)
제20회
( 1981년)
제21회
( 1982년)
이대근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남궁원
( 피막)
안성기
(철인들)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제8회
( 1972년)
제9회
( 1973년)
제10회
( 1974년)
허장강
(분례기)
남궁원
( 충녀)
하명중
(나와 나)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6년
이름 남궁원
분야 배우
은관문화훈장(2등급)

}}} ||
<colbgcolor=#000><colcolor=#fff> 남궁원
南宮遠|Nam Koong Won
파일:20120222055430_1.jpg
본명 홍경일(洪京日)
출생 1934년 8월 1일
경기도 양평군
사망 2024년 2월 5일 (향년 89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본관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
신체 180cm, 75kg
가족 배우자 양춘자(1941년 생)[1]
자녀 장녀 홍성아(1968년 생), 장남 홍정욱(1970년 생), 차녀 홍나리(1972년 생)
종교 개신교 ( 예장통합[2])
학력 경성창신공립국민학교 ( 졸업)
중앙중학교 ( 졸업)
중앙고등학교 (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 화학공학 / 명예학사[3])
데뷔 1955년 연극《표본실의 청개구리》

1. 개요2. 생애
2.1. 사망
3. 출연 목록
3.1. 영화3.2. 드라마3.3. 연극3.4. 광고
4. 참고/관련 문헌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res.heraldm.com/20110718000512_1.jpg

대한민국 배우.

1960~1970년대를 풍미한 한국의 명배우. 한국의 그레고리 펙이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외모가 상당히 흡사하다. 당시만 해도 배우 신성일과 함께 황태자급 지명도와 인지도를 자랑했다.

아들도 아버지만큼이나 유명한 기업가이자 전직 국회의원인 홍정욱인데,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남궁원은 본명이 아니다. 본명은 홍경일. 남양 홍씨이다.

2. 생애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서울에서 보냈다. 전쟁 때 적치하에서 혹시 인민군에 징집될까봐 마루 밑에서 숨어 지내는 생활을 했고 서울 수복후에는 집안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 생활을 했는데 그는 그때를 영어 공부 하는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중앙고등학교 졸업 후 한양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다녔으나 연예계에 데뷔한 후 대학을 중퇴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미남인게 소문이 나서 영화계 사람들이 영화배우하라고 그를 쫓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전쟁 직후 부실한 대학 교육에 만족하지 못해서 군대를 다녀온 뒤 미국유학 준비를 했다. 콜로라도 주립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 가기로 결정되어 있었는데, 불운하게도 어머니가 자궁암 3기 진단을 받고 돈이 필요해지자 친구의 아버지인 영화사 사장에게 찾아가 배우로 데뷔하겠다고 말하고 큰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치료비에 그 돈을 다 들였음에도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자마자 그와 계약한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으러 나오라고 보챘는데, 애초에 미국유학만 생각했을뿐 배우가 될 생각이 없었던 남궁원은 마음이 심란했으나 이것도 운명이려니 하고 영화계에 들어섰다고 한다. 몇 년 뒤엔 신상옥 감독이 세운 신필름의 전속배우가 되고 스타가 된다. 데뷔초에는 멋진 외모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1960년대 중반에는 연기력에서도 인정받는 배우가 된다.

반면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대한민국 영화계가 정말 돈이 없던 시절이라, 남궁원처럼 품위있는 외모와 건장한 체격을 가진 미남 배우에게 어울리는 영화가 별로 없었기에 캐스팅 운은 별로 없었던 편이다. 1928년생이고 남궁원보다는 땀냄새나는 한국적 남자의 외모를 가져 현대극과 시대극을 오가며 영화계를 풍미했던 신영균과 1937년생으로 젊어서는 반항적 청년, 나이 들어서는 고뇌하는 인텔리역을 맡으며 주연을 도맡아 하던 신성일 사이에 낀 세대였기 때문에 남궁원은 대형배우의 외모를 가지고도 위 두 사람만큼은 각광받지 못했다. 또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협객영화, 건달영화가 유행하긴 했으나 남궁원같은 귀족적인 외모의 배우에겐 어울리지 않는 영화였고, 양복이 잘 어울리는 서구적 외모와 큰 키를 가진 그는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서는 더욱 자기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그가 머슴역을 한번도 못 해본 것이 안타깝다고 말할 정도였다. [4] 당시 007 시리즈를 흉내낸 스파이 영화가 잠깐 제작되기도 해서 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상시키는 스파이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충무로의 주류영화는 아니었다.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 씨는 그런 그를 보고 안타까워서 "너는 지금 나온 게 참 아깝다. 한 10년, 15년 뒤에만 나왔어도..."라고 할 정도다.

연기는 물론 원래 보이스도 좋은데, 후시녹음이 일반적이던 1960년대엔 남성우 성우가 전담이었고, 1970~80년대에는 영화나 광고에서 거의 유강진 성우가 전문 성우로 더빙을 했다.(신성일의 전담성우로 유명한 이강식 성우도 몇 작품 맡기도 했다. 당시 신성일과 남궁원의 후시녹음은 유강진 아니면 이강식 성우가 전담이다.)

아들은 하버드 대학교 출신으로 7막 7장의 주인공인 홍정욱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 및 전 (주) 헤럴드[5] 회장이다.

당대의 여러 배우들과 달리 밤무대 출입을 안 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아들 홍정욱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학비 문제로 밤무대 출연을 자주 했다고 한다. 게다가 두 딸도 미국/독일로 각각 유학을 간데다 부인이 암투병 끝에 살아나기도 했으니 여러가지로 돈이 많이 들었을 듯. 홍정욱이 지금도 안타까워한다는 일화. 밤무대도 밤무대지만 역시 아들 유학비 문제로 온갖 에로영화는 물론이고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나 흑역사급 퀄러티를 자랑하는 로봇 태권브이 90에도 출연한 바 있다.

다만 말년에 아들 관련한 일로 인해서 구설수에 오른적도 있다. 범법 행위는 아니고 '족벌 운영'처럼 홍정욱이 설립한 회사에 아버지인 남궁원을 이사로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여담으로 아들보다 키가 크고(남궁원 180cm, 홍정욱 177cm), 풍채도 듬직하고 남자다워서 홍정욱은 아버지에게 키 때문에 열폭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2014년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레드카펫 행사에는 민도희와 함께 레드카펫에 올랐다. #

1972년 명동에 '빅보이'라는 햄버거 가게를 개업해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햄버거 가게를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6]. 그때까지 햄버거는 미군부대에서나 먹을 기회가 있던 낯선 서양요리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인들에게 햄버거가 너무나 낯설고 입맛에 맞지 않았던데다 가격대도 높았던 까닭에[7] 성공하지 못하고 채 2년도 안 되어 햄버거 사업을 폐업했다고 한다[8].

1934년생으로 나이가 이미 팔순을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동연배인 이순재와 함께 절대 동안이다!. 2015년에 YTN 초대석에 나와 방송 인터뷰를 하였을 때는 꼿꼿한 수트 차림에 60대 정도 밖에 보여지지 않는 초절정 미노년 간지를 내뿜는다. 중후한 중저음이 매력포인트인지라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안녕하세요. 남궁원입니다"라고 운을 띄면 들리는 환호성은 여전한 인기를 실감할 정도.

여담으로, 위에 서술한 YTN 인터뷰에서 "시대극과 현대극을 거슬러 여러 배역을 맡았었지만 이미지에 맞지 않아 머슴역은 못 맡았다는게 아쉽다"라고 하였다.

신인시절에 유명배우 도금봉과 동거 관계였다. 당시 남궁원은 4살 연하의 신인배우였고, 도금봉은 이미 스타였던데다 전 남편과 사이에 두 아이도 있는 상태여서 그 당시 사회적 관점으로는 꽤나 입방아에 오를만한 스캔들이었다.[9] 결별 당시 기사

그러다 2019년 9월 27일 자신의 손녀가 마약 밀반입해 아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얼굴까지 먹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사

최근 근황에서 밝히길 2015년 때의 인터뷰 때와 달리 병환으로 인해 건강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2022년 1월에는 병원에서 장기간 입원 치료를 해오다 자택에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며, 2년 전부터 투병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게다가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거동도 많이 불편해진 상태라고 하며, 이에 많은 사람들이 매우 아쉬워하고 있다.

2.1. 사망

결국 2024년 2월 5일 오후 4시 경 서울아산병원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그와 친분이 있었던 배우 신영균 최불암이 빈소를 찾았고, 윤석열 대통령,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 등 여러 정재계 인물들이 화환을 보내왔다. 장남인 홍정욱 전 의원은 "아버지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자랑스럽다"며 그를 회상했다.

3. 출연 목록

3.1. 영화

3.2. 드라마

3.3. 연극

3.4. 광고

4. 참고/관련 문헌

5. 관련 문서



[1]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노스웨스트 항공에서 승무원으로 근무했다. [2] 송파동 비전교회 은퇴장로이다. [3] 1954년에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고 2014년에 명예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4] 다만 1981년 영화 ' 피막'에서 머슴 삼돌이 역을 맡은 적 있으나, 주연이 아니어서 비중이 적다. [5]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영자신문인 코리아헤럴드와 석간 경제신문인 헤럴드경제가 나오는 회사다. 2002년 홍정욱이 인수하여 헤럴드미디어로 회사명을 바꿨다가, 2012년에 (주)헤럴드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6] 당시 미군부대 앞 영세한 가게들이 유사 햄버거를 만들어 팔긴 했으나 제대로 된 햄버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7] 개업 당시에 햄버거 단품 160원 밀크쉐이크 90원의 가격이었는데, 당시 서울에서 짜장면이 60 ~ 80원 정도였다고 한다. [8] 1979년 롯데리아가 개업하면서 한국에서 햄버거 시대가 열리고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햄버거가 어느 정도 대중화된다. [9] 당시는 이혼녀가 아니라 미혼녀였어도 동거 자체가 굉장한 스캔들이다. [10] 35분 쯤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