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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년 6월 3일 |
평안북도 창성면 | |
사망 | 1957년 5월 21일 (향년 64세)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서훈 |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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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2년 6월 3일 평안북도 창성면에서 부친 최성엽과 부인 차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경주 최씨로, 면암 최익현의 족친이다. 호는 운정, 예정이며, 이명은 김용수이다. 그리고 丁昌이라는 중국식 이름도 사용했다. 그는 유년 시절에 가족이 모두 창성에서 한성부로 이주하여 계동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 밖의 사항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최창식의 장녀이자 현재 미국 택사스에 거주하고 있는 최영방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최창식은 어렸을 때 전통교육을 이수했다고 한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1926년 9월 30일자 기사 '최내장의 내방'에서 최창식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일찍이 일본과 중국에 유학했다고 한다.1909년경 수송동에 위치한 사법부속학교 부속 고아원의 교원을 맡았으며, 1910년 말부터 김좌진 주도의 비밀결사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이 단체는 1911년 3월 7일 부호들을 협박하여 군자금을 마련하려던 중 이들의 계획이 누설되어 관련자가 모두 검거되었다. 최창식 역시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단체 조직 및 과정만 논의했을 뿐 소위 '도적질'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1912년 겨울부터 1916년까지 오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처음에는 동양사를 가르치다가 1914년 4월부터 1915년 3월까지 조선역사를 가르쳤다.
1916년 11월 20일 경성지방법원의 <최창식 판결문>에 따르면, 최창식은 오성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이재명이 이완용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과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의 행동을 찬양하였고, 한일병합은 부당하며 조선 민족이 모름지기 이들 열사의 사명을 계승하여 일치 협력, 국권회복의 결의를 다짐해야 한다는 취지를 역설하고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한다. 일제는 그의 언행을 위험하게 여기고 1916년 8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하였고, 11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하였다. # 한달 만인 1916년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 판결을 받아 풀려났으나 #, 오성학교는 이 사건으로 인해 폐교되었다.
조선총독부가 1930년 10월 22일에 발표한 <최창식, 김경선 공판청구서 전문>에 따르면, 최창식은 1918년경 베이징, 한커우, 상하이 등지를 돌며 인삼행상을 했다고 한다. 그가 언제 중국으로 갔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불확실하지만, 오성학교 사건 이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중 1919년 초 국내로 돌아와서 광화문에 위치한 배재학당 교사인 이중화의 자택에 은신했다. 이중화는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비밀회합 장소로 제공했고, 배재학당 기숙사를 밀회장소로 만들어 극비리에 3.1 운동 관련 전단을 만든 인물이었다. 이후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을 2월 초에 건네받은 최창식은 3.1 운동 국내대표단을 맡아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로 출발한 최창식은 봉천, 난징을 거치면서 3.1 운동의 지지와 확대를 위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난징에서 현순을 만나 1919년 2월 28일 금릉대학을 함께 방문했다. 이곳에서 재학 중이던 김성근, 현창운, 서병호 등을 만나 그들에게 3.1 운동에 관한 국내 사정과 독립운동에 대한 사명을 전달했다. 1919년 3월 3일 난징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한 최창식과 현순은 중국음식점에서 신한청년단원인 선우혁, 신규식, 이광수, 김철, 신현민 등을 만났다. 최창식과 현순은 그들에게 자신들은 국내에서 3.1 운동에 관한 외교, 선전, 연락을 위해 파견된 대표라고 소개하면서 독립선언서를 그들에게 보여줬다.
3월 4일, 두 사람은 중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쑨원과의 만남을 추진했지만 쑨원이 면회를 사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최창식은 다른 방법으로 중국의 지지를 얻기로 하고, 신현민의 소개를 통해 <더 상하이 가제트>의 주임 장경위와 영국기자 L.B. 심프슨을 만나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인들의 투쟁을 취재해달라고 요청했으며, 국제기자단 수십 명과 만남을 가질 기회를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각국 신문에 일본의 무단통치와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가 실리게 되었다.
이후 미국인 R. R. 게일리의 주선으로 미국공사관에서 일등비서관 찰스 A. 테니를 면회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정세와 방략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테니는 표면으로는 도움을 줄 수 없지만 이면으로는 어디까지든지 도와주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게일리에게 지시하여 주요 인사 2명에게 소개서를 작성했다. 소개서의 주요 인사 2명은 상해주재미국총영사 커닝햄과 중국기독청년회 전국총무인 데이비드 위(본명은 여일장)이었다. 이후 최창식은 여러 독립운동가와 함께 프랑스 조계지역인 김신부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였고, 4월 11일 이동녕, 이광수, 현순, 여운형, 신석우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임시정부 수립 후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각도 대의원 30명과 함께 임시 헌장 10개조를 채택, 발표하였으며, 임시정부 조직 관제를 선포했다. 이후 의정원회의에서 상임위원회의 내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국제연명회의 제안안 작성위원회에서 특별 위원으로 선임되어 국제연맹에 제출할 자주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또한 임시정부가 위원제를 폐지하고 차장제를 시행했을 때도 국무원비서장에 임명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 그는 최익현의 족친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현순과 친분이 두터웠다. 1920년 3월 안현경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현순은 자신을 하와이로 초대하겠다는 전보에 대해 최창식과 함께 가고 싶다면서 최창식이 가지 않는다면 자기도 가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사 표명을 했다고 한다. 이에 안현경은 이승만에게 최창식을 하와이에 보내어 그곳 신문을 담당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미주여행비가 도착하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설립 당시부터 자금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소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20년 5월 최창식을 포함한 조완구, 신채호, 안병찬, 조동호, 양헌, 선우혁, 윤기섭, 김두봉 등 민족주의자들은 자금을 확보할 목적으로 상해 한인공산당에 입당했다. 다른 민족주의자들은 비록 한인공산당에 입당했지만 공산 활동을 실제로 하지 않은 반면, 최창식은 실제로 사회주의자가 되어 공산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사회주의에 경도된 원인으로는 1914년 경성에서 만난 이래 특별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던 사회주의자 김만겸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임정 내부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연대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최창식이 사회주의를 껄끄러워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사회주의 사사응ㄹ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사회주의자가 되기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김만겸과 함께 공산당 선전 활동을 위해 <공산>이라는 잡지를 출간했다. <공산>은 3호까지 발행되었고, 총 5000부가 발행되었다.
또한 1920년 8월 자택인 통신소 애인로 52호에서 오인구락부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 내 산하기관으로서, 독립자금 모집을 위해 결성되었다. 오인구락부의 중심인물은 최창식, 김용원, 황학수, 홍진이었고, 결성 목적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하여 소련으로부터 자금을 원조받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김만겸의 소개로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러시아인을 초청하여 사회주의에 관한 강연을 했다. 오인구락부는 임시정부 산하기관으로 1920년 후반까지 임시정부를 후원했고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결성되어 좌우연대를 지향했다, 또, 최창식은 여운형과 함게 1920년 11월 신한문화동맹단을 결성했다. 이 단체의 결성 목적은 임정의 정치운동과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 문화를 선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연합이 깨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1920년 1월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공산당이 임시정부에게 돌아갈 소련의 지원 자금을 가로챘다는 의심이 확산되면서,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이동휘가 사임했다. 이때 최창식은 이동휘와 김립이 자금을 가로채는 데 일조했다고 확신하며 반 이동휘 계열 사회주의자들을 결집하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청년당을 조직하고 안병찬과 여운형을 참여시켰다. 임시정부에서 탈퇴한 이동휘, 김립, 김규면, 박진순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고 한국 국내, 중국, 만주, 일본 등지의 한인공산단체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을 모아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설립했다. 이로써 1921년 5월 상하이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존재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원이 된 최창식은 1921년경 김만겸,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사회주의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사회주의 사상에 관한 여러 종류의 신문과 잡지들을 비치했고, 이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언제든지 와서 비치된 책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가 이 연구소를 조직한 목적은 청년들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지식 부족을 해결하고,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청년사회당을 조직하여 매일 2시간 씩 사회주의에 관한 강연을 하였으며, 도서당을 설치하여 사회주의 서적을 수집하고 사회주의에 관한 지식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1921년 6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산하 기관으로 고려공산단 상해회가 결성되었을 때 최고 책임자인 집행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의 구성원은 30세 이하의 공산주의 청년들로 이루어졌으며, 30세를 초과한 단원은 찬성원으로 간주되며, 찬성원은 회의 참석 및 발언권은 부여되지만 의결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고려공산청년단원들은 매주 토요일에 정례 회의를 개최했고, 쑤저우에 고려공산청년단의 인쇄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1921년 6월 29일 박헌영과 함께 고려공산청년단 동경회의 조직과 국내 및 재일본 조선인 노동청년단체들 간의 연락선을 확보하기 위해 도쿄로 단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최창식은 1921년 8월부터 10월까지 고려공산청년단의 회계를 책임졌으나, 보관금의 수입과 지출에 문제가 발생하자 인책사퇴를 했고, 여운형이 최창식의 자리를 대신 맡았다. 이후 현순의 집에서 기거하던 그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조선민족대표단으로 참가했다. 그는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원 자격으로 1921년 11월 3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극동민족대회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전에서 열렸으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혁명단체 대표자들의 연석회의였다.
이르쿠츠크파는 극동민족대회에서 민족통일전선 정책에 동조하지만 임시정부를 민족혁명 단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최창식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극동민족대회가 폐회된 뒤 김규식과 함께 이르쿠츠크를 경유하여 6월 17일 밤 상하이에 도착한 뒤, 중국인 사회주의자들을 설득하여 1922년 봄 사앟이에 중한호조사를 조직했다. 중한호조사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외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고, 총사는 상하이에 두었다. 중국 각지에 지사를 두어 총사, 문사, 이사를 선출했으며, 1922년 9월 30일에는 상하이 중한호조사 총사에서 제2회 정기대회를 열어 이사 16명을 중국인과 한국인으로 선거했다.
선출된 이사들은 이사회를 열고 각 분과임원을 선정하고, 각과에 간사를 선임했다. 이때 최창식은 간사에 선임되었다. 중한호조사의 단원들은 조직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사보를 여러 차례 발행하기도 했다. 특히 상하이 중한호조총사는 쑨원의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 기반을 만주까지 확대했다., 중한호조사는 이렇듯 중국 각 지역에 조직되어 한중이 서로 협력하여 일제에 맞서는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최창식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1922년 7월 안창호, 김만겸, 여운형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했다. 시사책진회는 별다른 활동도 못하고 한 달 만에 해체되었지만,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일제 정보 기록에 따르면, 소련으로부터 50원에서 100원의 봉급을 받는 고려공산청년단원이 최창식을 포함하여 여운형, 박헌영, 김단야, 김만겸, 안병찬, 원세훈, 정해룡, 박원근[1], 최창훈 등 1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중 임시정부와 연계된 단원은 최창식, 여운형, 김만겸 뿐이었다. 최창식은 임정을 부정하는 이르쿠츠크파의 공식 입장과는 달리 임시정부와 사회주의 단체의 연계를 촉구하였고,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병행했다.
1921년 4월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최창식은 이광수, 왕삼덕, 이유필 등과 함께 반 임시정부 성격을 가진 군사통일회의 개최를 반대했다. 그는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전제 하에 개혁을 주장했다. 임시정부 내에서도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의견과 그대로 두자는 의견이 대립하다가, 각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1923년 1월 임시정부의 향방을 결정할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승인했다.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이승만 임시대통령 탄핵안이 제기되었고, 1924년 4월 28일 임시의정원은 임승만 탄핵안을 12명의 의원이 서명하여 제출했다. 이 안건을 심사할 특별위원으로 최창식을 비롯한 5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이승만 탄핵안 논의는 임시헌법 개정문제로 이어지면서 임시의정원의 권력구조 개편 논의로 확대되었다. 1924년 5월 최창식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사실 5월 8일 의장단 선거에서 여운형이 의장에 선출되고 최창식이 부의장에 선출되었지만, 5월 14일 여운형이 의장직을 사임하는 바람에 최창식이 의장에 선출된 것이다. 최창식이 이승만의 탄핵을 주도하자 이에 반감을 품은 경기도 출신 인사들은 그에게 의정원 의장과 경기도 의원을 사직하라고 압박했다. 최창식은 1924년 6월 7일 의정원 의장과 경기도 의원직을 사직하려 했지만 9대 1의 표결로 반려되었다.
의장으로 돌아온 최창식은 임시의정원 의원들과 함께 6월 16일에 '대통령이 직소에 귀환하기까지'라는 조건하여 대통령의 '유고'를 결의하였고, 박은식을 대리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기호파인 조완구가 1924년 12월 19일 이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이 성명서를 임시의정원 명의로 발표하려 했지만, 과반수 의원의 동조를 얻지 못하여 조완구 개인 명의로 공표했다. 그 내용은 의장 최창식이 음모적 수단으로 의장에 당선된 뒤 의장의 직권을 남용하여 박은식을 대통령 대리에 선임시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에 발행된 <상해평론> 창간호에는 조완구의 주장과 반대되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헌법 개정은 보수파의 반대로 안건이 제출되더라도 표수가 문제였고, 통과되더라도 이승만이 위원제에 동의할 리 없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였다. 이때 최창석은 먼저 통과될 안건에 대해 가결 정족수의 동의자를 얻어, 먼저 대통령 유고안을 통과시키고, 그 다음 박은식을 대리 대통령으로 선임하여 미주에 있는 이승만이 간섭할 여지가 없도록 만들어놓겠다는 계획을 구상했다. 따라서 최창식이 의장의 직권을 이용하여 박은식을 대통령에 선임시킨 게 아니라, 임시정부의 개혁을 위해 이승만 유고안을 결의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최창식은 의정원 의장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무장독립운동 단체에도 참여하여 활동했다. 1922년 10월 28일 10년 안에 100만원의 전쟁 비용을 조성하고 1만인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자는 목적으로 결성된 한국노병회에서 통상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7년 4월 1일 한국노병회 제5회 정기총회에서 이사에 당선되었다. 그는 한국노병회의 회원 모집을 위해 회원들과 함께 만주와 조선 내에 단원을 파견했으며, 길림에서 검거된 독립운동가들의 석방을 위하여 상해 각 단체와 연합하여 북경정부와 길림당국에 청원했다. 그 결과 길림에서 검거된 독립운동가 전부가 방면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노병회는 청체 상태에 빠졌다. 사실 100만원에 달 전쟁비용을 조성하고 1만 명의 노병을 양성하는 건 중국에 망명한 처지에 놓인 한인들에게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다. 더욱이 1925년 이사장을 맡던 김구가 그만두면서 단체를 운영하는 데 차질을 빚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한국노병회의 방략을 새롭게 재정비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이에 한국노병회는 1926년부터 이유필이 이끄는 병인의용대가 중심이 되면서 의열투쟁 방향으로 전환했다.
병인의용대는 비밀결사단체이자 임시정부의 산하기관으로 1926년 1월에 결성되었고, 임시정부의 권위옹호와 일제의 관청과 헌병대의 시설을 파괴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926년 3월 23일 일제 정보요원이 본국 정보부에 보고한 <인쇄물 송부에 관한 건> '불령단 관계잡건선인의 상해지방 부서'에 따르면, 최창식은 병인의용대에서 참모격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가 편찬한 <독립운동사: 의열투쟁사>에 따르면, 병인의용대는 3개조로 나뉘어 1대 대장 최병선, 부대장 고준택, 2대 대장 김석룡, 부대장, 고준택, 3대 대장 강창제, 부대장 강영근, 총무 겸 전략참모 강창제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최창식이 병인의용대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던 걸 볼 때, 그는 참모의 직책과 부대장 직위를 대리했을 뿐 실질적인 권한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5월 1일, 최상식이 가담한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메이데이를 기해 국내세력과 기념시위를 벌이려 했다. 그런데 마침 순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제2의 3.1 운동을 도모하기로 결의하고 6.10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최창식은 상하이에서 김단야, 조봉암, 김찬 등과 함께 <상복 통곡하는 민중에 고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한 뒤, 이것을 자신이 경영하는 상해 삼일인쇄소에서 인쇄하여 경성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 격문은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되던 만세운동계획이 발각되면서 종로경찰서에 압수되었다.
6.10 만세운동 이후, 최창식은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혁명청년사에서 6.10 만세운동에 관한 결과보고회의를 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이 회의에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인사 모두 참석했다. 최창식이 먼저 사회를 했고, 김단야가 만세운동 경과 보고를 하였으며, 뒤이어 안창호가 연설했다. 이 회의의 안건 중에는 전민족의 일대당체를 성립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자는 민족유일당운동과 연관된 것이었다. 또한 중국 국민당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최창식은 6.10 만세운동에 관하여 <6월 운동에 나섰다가 체포된 경성한인학교 당국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1926년 8월 5일자 <혁명청년> 2호에 기고했다. 이 글은 6.10 만세 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의 처벌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이뤄졌다. 즉, 배재고보 학생 8명의 무기정학과 중앙고보 학생 4명의 퇴학, 7명의 1주간 정학, 3명의 3주간 정학, 협성고 학생 3명의 1개월 정학, 중동고보 학생 3명의 무기정학 등에 관한 처벌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관련해 4가지 강령을 제시했다.
첫째, 한국 민중이 6.10 만세운동의 정신을 정치적 목표로 삼고, 일본 제국주의를 향하여 투쟁해야 한다.
둘째, 민족해방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타협하는 친일파를 처벌해야 하며, 한국 혁명적 교육정신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셋째, 한국 민중에게 민중교육을 제창해야 한다.
넷째, 6.10 만세운동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하며,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의 퇴학을 구제해야 한다.
둘째, 민족해방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타협하는 친일파를 처벌해야 하며, 한국 혁명적 교육정신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셋째, 한국 민중에게 민중교육을 제창해야 한다.
넷째, 6.10 만세운동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하며,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의 퇴학을 구제해야 한다.
그는 <혁명청년> 2호에 <제국주의전쟁에 반대>라는 글도 실었는데, 일본 제국주의에 투쟁하고, 한국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일본을 빨리 박멸하자는 내용이었다. 또한 최창식은 1926년 8월 1일 동방피압민족연맹의 조직에도 참여하여 독립신문사 대표로서 집행위원에 임명되었다. 이 단체는 나가사키에서 열린 아시아민족대회를 반대하기 위해 중국의 국민운동가들과 연합하여 결성한 단체로, 한국노병회, 대한애국부인회, 정의연대, 병인의용대, 혁명청년사와 연계하여 상해한인혁명단체연합회의를 개최해 제국주의 일본을 규탄하고 피압박 민족이 단결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최창식은 1925년 7월 임시대통령직을 맡던 박은식이 병사한 뒤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이뤄서 임시정부를 강화시키기 위해 임정 내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결집체인 독립운동촉진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회장 안공근과 최창식을 포함하여 여운형, 김규식, 안창호, 김구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다. 이 단체의 결성목적과 강령은 민족해방운동을 위하여 독립운동의 조직적 대단결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활동은 하지 못하고 한 달여 만에 해체되었다.
박은식 서거 후, 임시정부는 국무령에 이상룡을 선출했으나 1년만에 사임하자 다시 양기탁을 국무령으로 선출했으나 그도 곧 자진사퇴했다. 이후 안창호를 물망에 올렸으나 그 역시 취임하지 않겠다며 난징으로 떠나버렸고,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에 의정원은 1926년 2월 19일 국무령이 취임할 때까지 의정원 행정부가 이정책을 수행하기로 하고, 의장이 정무를 집행할 것을 결의했다. 이로써 의정원 의장 최창식이 집정 자격으로 국무령을 대리했다. 그는 1926년 6월 중순 직접 진강에 있는 홍진을 찾아가 국무령이 되어 달라고 설득했다.
홍진은 민족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중도적인 성향을 보였다. 또한 민족의 대단결을 추구하는 등 나름의 복안을 품고 있었고, 임시정부를 끝까지 유지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최창식은 이러한 홍진이야말로 국무령이 되어서 임시정부를 재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그를 국무령으로 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홍진은 이를 수락하고 국무령에 취임한 뒤 3대 정강을 제시했다. 첫째 비타협적 자주독립의 운동을 촉진하는 것, 둘째 전 민족을 망라하고 공고한 당체의 조직을 만들고, 다음으로 전 세계 피압박민족의 연맹과 협동전선을 조직하는 동시에 우방과 제휴하자는 것이었다. 최창식은 홍진 내각에서 내무장에 임명되어 홍진의 활동을 지원했다.
1927년 3월 21일 삼일당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참석한 그는 4월 11일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총회 참가인원은 약 40명이었으며, 참석자들은 유일당의 조직을 촉성할 것과 민족의 독립적 역량에 집중하고 노력할 것을 강령으로 결의했다. 총회에 참석한 민족주의 계열은 홍진, 이동녕, 이규홍, 조상섭, 조완구, 나창헌, 최석순, 김철, 김갑, 오영선, 안태근, 김구, 윤기섭, 송병조, 김규식이었으며,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최창식, 홍남표, 조봉암, 황훈, 강경선, 김두봉, 정백, 현정건, 이민달이었다.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 활동방향과 목적은 유일당을 조직하는 데 있었다. 창립선언을 통해 한국의 유일한 대독립당 성립을 촉성함과 동시에 한국독립에 필요한 민족적 일체와 혁명역량의 총집중이란 두 가지 강령을 제시했다.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는 임시정부계통의 우파 인물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ㆍ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핵심인물이 참여하면서 협동전선의 성격을 강하게 표방했다. 그러나 1928년 12월에 코민테른이 12월 테제를 통해 좌파세력에게 민족부르주아와 결별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민족유일당운동에 결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1929년 10월 26일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해체를 결의하기 위한 모임이 열렸다. 최창식은 이 회의에서 사회를 맡았다.
유일당운동이 결렬된 후 좌우세력은 분립하여 좌익진영에서는 유호동맹을 결성하고 우익진영에서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유호동맹에서는 한국독립운동을 표방하는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할 것을 주장했다. 최창식은 유호동맹 결성식에 참가하긴 했으나 가입해서 활동하진 않았다. 그는 모든 공식적인 활동을 그만두고 삼일인쇄소를 개인적으로 인수하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모두의 인쇄물 간행을 맡는 등 막하에서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1930년 4월 28일, 최창식은 상하이의 자택에서 일제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그가 인쇄하던 사회주의 선전인쇄물이 압수되었다. 이후 4월 30일 중국 관헌들에 의해 인쇄공 조태의, 이교덕, 김경선과 함께 국내로 호송되었다. 일제는 상해 일본총영사관경찰서를 거쳐 조선으로 최창식을 호송하기 위해 5월 20일 영장을 발부했다. 국내에 도착한 뒤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3년 8월 출옥 후 가족을 찾아 다시 상하이로 갔으나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각기병에 걸려서 더는 독립운동을 수행하지 못했고, 다시 국내로 돌아온 뒤 안국동 6번지 송천여관에서 머물렀다.
8.15 광복 후 몸 상태가 호전된 그는 상하이에서 중한민주혁명동지회를 조직하고, 중국 공산당의 신사군과 연계하며 사회주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김구 등의 한국독립당 계열은 그를 경계했고, 김구는 1945년 10월 30일 중국 국민정부에게 최창식을 고발했다. 이에 중국 당국은 최창식을 감시, 조사했고, 신사군과의 연계가 드러나자 상해경비사령부를 파견하여 그를 체포했다. 그는 1년 반 동안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석방 후 상하이에 머물던 최창식은 1957년 5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최창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6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참고 문헌
- 이한나, <최창식의 재중독립운동과 민족통일전선 추구>,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