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내용은 원세훈(1951)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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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87년 7월 10일 |
함경도
정평도호부 상선덕사 풍호리[1] (현 함경남도 정평군 호중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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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 |
함경도
정평도호부 흥인사 연봉리[2] (현 함경남도 정평군 독산리) |
사망 | 1959년 12월 25일 (향년 72세) |
북한 평양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211호 |
아호 | 춘곡(春谷) |
본관 | 원주 원씨[3]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2 |
상훈 |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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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자 민주당계 정당의 창설자.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성장과 일제강점기
1887년 7월 10일 함경도 정평도호부 상선덕사 풍호리(현 함경남도 정평군 호중리)의 빈농가에서 원도경(元道京)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함경도 정평도호부 흥인사 연봉리(현 함경남도 정평군 독산리).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한학을 공부하다 1905년 융희중학(隆熙中學)에 입학했다가, 1906년 지역 유지들의 도움으로 한성의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안창호, 이동휘, 이상재 등과 청년활동을 이끈다. 1911년 비밀결사인 독립단을 조직하다 일제에 발각되어 5달 동안 옥고를 치른다.석방 이후 동만주를 거쳐 간도에 모록의숙을 설립한다. 간도 일본영사관이 체포령을 내리자 간도를 떠나 베이징, 칭다오 등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연해주 일대에 자리를 잡는다. 1917년 이동휘, 문창범 등 러시아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이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결성하자 원세훈은 재무부장을 맡는다. 1919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대한 국민 의회로 확대, 개편되자 원세훈은 재무부장 겸 부의장으로 선출된다. 얼마 후 대한 국민 의회와 상해임시정부, 한성정부와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자 원세훈은 대한국민의회를 대표해 상해로 파견된다. 이 자리에서 원세훈은 통합 임시정부를 만주나 러시아에 건립할 것을 주장했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원세훈은 박은식, 김창숙 등과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요구한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자 원세훈은 창조파의 선두에서 상해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건립하자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고수파에게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다. 국민대표회의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해소되자 원세훈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다.
그곳에서 원세훈은 김규식 등과 국민위원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1925년 소련과 일본의 비밀 협정에 의해 추방된다. 이때 약혼녀와 헤어지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얼마 후 원세훈은 베이징대학 노문학과에 입학한다. 이때 안창호 등과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를 결성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927년 장쭤린 세력에 체포되어 평안북도 신의주시로 압송된다.
이후 몇 차례 망명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한 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는 집필활동에 전념했다. 일제강점기 말 일제의 전향 압박이 심해지자 경기도 평택군에서 은거했다.
3. 해방 이후
광복 이후 8월 18일 이병헌, 한학수 등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고려민주당을 창당한다. 8월 28일 김병로, 이인 등 민족주의 계열이 조선민족당을 창당하자 통합을 선언한다. 조선민족당은 민족주의 세력 단결이라는 명분 하에 다시 한국국민당과 통합, 한국민주당이 된다. 한민당에서 원세훈은 지금의 최고위원인 총무를 맡는다.[4]1945년 말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원세훈은 한민당의 임시 수석총무로 선출된다. 김병로, 이인, 김약수 등 당내 비주류는 친일 경력이 없는 원세훈을 수석총무 후보로 적극지지했다. 1946년 1월 7일 한민당을 비롯해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안재홍의 국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좌우의 주요정당 대표가 회동한다. 원세훈은 이 자리에 임시 수석총무로서 김병로와 한민당 대표로 참석한다. 이 날 4당의 대표는 "삼상회의에 대한 이해하에서 결의안의 조선 원조 정신을 적극 지지하고, 신탁 문제는 향후 수립될 임시정부를 통해 자주독립의 정신으로 해결한다"는 4당 코뮈니케를 발표한다. 그러나 한민당 당내에선 코뮈니케가 반탁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합의를 번복한다. 원세훈도 수석총무 자리를 김성수에게 빼앗긴다.
1946년 7월 여운형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자 좌우합작위원회의 우익 대표로 참여한다. 당시 원세훈은 김구를 설득하는 등 좌우합작에 적극적이었다.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이라면 토지개혁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지주 출신이 많았던 한민당 상당수 인사들은 좌우합작위원회가 내놓은 토지개혁안에 반대를 표명했다. 10월 원세훈은 김병로, 김약수 등과 한민당을 탈당한다. 이후 원세훈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간파 정치세력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했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원세훈은 김규식을 비롯해 민족자주연맹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김규식이 이를 거부하고 대신 남북 협상에 참여하자 이에 실망해 한동안 정치 일선을 떠난다.
그 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족자주연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윤치영을 꺾고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납북되었다. 1950년 12월 즈음 북한은 원세훈을 포함한 43명을 정치적 이용가치가 높다고 판단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으로 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았고, 그들을 회유하였다. 1956년 북한에서 납북인사들의 모임인 재북평화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그 후 1959년 국제간첩죄로 숙청당해 그 해 12월 25일 평양에서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991년 11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1994년 2월 6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배우 유순철이 연기했다.5. 선거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서울 제1선거구[5]) |
[[민족자주연맹| 민족자주연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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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08표 (45.05%) | 당선 (1위) | 초선 |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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