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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5-05 13:53:11

이범윤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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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범윤.jpg [1]
성명 이범윤(李範允)
여옥(汝玉)
생몰 1856년 5월 3일 ~ 1940년 10월 20일?
출생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
본관 전주 이씨
사망지 서울 공덕동?[2]
추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2. 생애3. 비판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한국 독립운동가, 의병장.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 생애

1856년 5월 3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서 부친 이경하(李景夏)와 모친 장수 황씨 사이의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범윤의 가문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 후손으로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으며 선대에 이이, 성혼의 문인들이 많았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망높은 가문에서 자란 것을 봤을 때 수준높은 유학 공부를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많은 조선 농민들은 간도로 이주해 간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했다. 이후 조선과 청나라 양국 사이에 간도 귀속 문제가 야기되었고 1882년 청나라는 임오군란에 개입하면서 조선에 정치적 간섭을 강화했고 간도에 거주한 조선인들에게 징세와 호적 정리를 실시하는 동시에 변발과 편복(便服)을 강요하면서 따르지 않는 자를 추방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1883년 어윤중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파견해 백두산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土門江)이 송화강 상류인 도문강(圖們江)이 틀림없으므로 간도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하게 하면서 간도 거주 조선인들에 대한 보호 정책을 추진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청나라가 약해지고 러시아 만주 일대를 장악했을 때 간도의 한국인들은 호기로 여기며 편복을 벗고 한복으로 바꿔 입으면서 대한제국 정부에게 보호를 간청했다. 1901년 대한제국 정부는 회령에 변계경무서(邊界警務署)를 설치해 간도에 대한 행정권을 펴기 위한 태세를 갖췄고 1902년 5월 22일 당시 46세였던 이범윤을 북간도시찰로 임명해 북간도로 파견했다. 이범윤은 1902년 6월 북간도에 들어가서 한국인들을 위로하며 인구와 호구를 조사했고 80세 이상 노인들에게 은총을 베풀었다. 백성들은 청국인의 학대에 고통을 받고 있다가 조국의 구원을 받게 되자 크게 기뻐하며 자진하여 한국 호적에 등록하고 한국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다.

이범윤은 1903년 5월까지 1만 3천여 명을 등록시키고 호적부 52책을 편제했으며 양국 지도에 기재된 부분을 수집하여 이를 종류별로 나누고 책을 완성한 후 대한제국 정부에 제출했다. 청국 군관민의 포학과 비적의 노략질로 백성들이 고통받는걸 목도한 그는 교민 보호관의 설치와 보호병의 파견을 정부에 요청했다. 이에 내부대신, 임시 서리, 의정부 참정인 김규홍(金奎弘)이 정부에 아뢰었다.
북간도(北間島)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淸) 나라의 경계 지대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북쪽 변경의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로서 그 지역에 이주하여 경작하여 지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 이제는 수만 호에 십 여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청인(淸人)들의 침어(侵漁)를 혹심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에 신의 부(部)에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파견하여 황제(皇帝)의 교화를 선포하고 호구를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해당 시찰관(視察官) 이범윤의 보고를 접하니, ‘우리 백성들에 대한 청인들의 학대가 낱낱이 진달하기 어려우니, 특별히 굽어 살펴 즉시 외부(外部)에 이조(移照)하여 청나라 공사와 담판을 해서 청나라 관원들의 학대를 막고, 또한 관청을 세우고 군사를 두어 많은 백성을 위로하여 교화에 감화되어 생을 즐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우선 호적(戶籍)을 만들어 수보(修報)한 것이 1만 3,000여 호(戶)입니다.

이 사보(査報)에 의하면,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 온 것은 이미 수십 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인데 아직 관청을 설치하여 보호하지 못하였으니 허다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청나라 관원들의 학대에 내맡기니 먼 곳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소홀함을 면치 못합니다. 우선 외부(外部)에서 청나라 공사와 상판(商辦)한 후에 해당 지방 부근의 관원(官員)에게 공문을 보내어 마구 재물을 수탈하거나 법에 어긋나게 학대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경계에 대해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전에 분수령(分水嶺) 정계비(定界碑) 아래 토문강(土門江) 이남의 구역은 물론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으니 결수(結數)에 따라 세(稅)를 정해야 할 것인데, 수백 년 동안 비어 두었던 땅에 갑자기 온당하게 작정하는 것은 매우 크게 벌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보호할 관리를 특별히 두고 또한 해당 간도 백성들의 청원대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그대로 관리로 특별히 차임하여 해당 간도(間島)에 주재시켜 전적으로 사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하여 조정에서 간도 백성들을 보살펴 주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종실록 고종 40년 8월 11일자 기사

고종은 이를 윤허하고 간도에서 공을 많이 세운 이범윤을 종3품 북간도 관리사로 임명해 간도에서 한인 동포들에 대한 행정 및 보호 사무를 전담하게 했다. 이범윤은 관리사로 임명될 때 고종으로부터 권능을 상징하는 2두 마패를 받았다. 이후 그는 지금까지 한국의 행정권이 미치지 못했던 간도에 자치 기관을 세워 자율적 행정을 하고 10호를 1통, 10통을 1촌으로 하여 통장과 촌장을 두고 상부상조하게 했다.

그러나 청국 군경 및 지주들의 폭력이 여전하자 이범윤은 정부에 보호병의 파견을 요청했지만 응답이 없자 산포수와 기타 장정을 모집하여 '사포대(私砲隊)'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1천여 명 규모의 충의대를 조직해 한인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했다. 충의대는 산포수 외에 본국에서 건너온 대한제국 군대와 의병들도 참가해 항일 의식이 투철했는데 유지 비용은 간도민으로부터 징세하여 충당했으며 청국 관리에 납세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하고 청국이 임명한 관리를 잡아 가두었다. 이 때문에 청국 관민과 충돌이 자주 발생하자 청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사포대와 관리사의 철수 및 소환을 수 차례에 걸쳐 요청했고 양국의 위원을 각기 파견해 경계를 확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모두 묵살되었다.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범윤은 사포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에 가담했다. 그는 함경도 무산, 회령, 종성, 온성과 간도의 양수천자, 화령, 6도구 부근에 사포대 연병장을 두고 모아산, 마안산, 두도구 등지에는 사포대 병영을 각각 수축했으며 서울에서 총기와 탄약을 들여와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이후 이범윤은 사포대 장병들을 이끌고 1905년 7월 러시아의 아니시모프 장군 부대와 연합하여 함경북도에 침입한 일본군과 교전해 일본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5년 5월 한국 정부는 청나라 정부의 요구를 계속 거부했지만 나중에는 청나라와의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이범윤에게 소환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범윤은 소환에 응하지 않다가 1905년 11월 초 국외 망명을 결심해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등지로부터 700여 명의 사포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훈춘을 거쳐 1906년 연해주 노보키에프스크로 옮겼다.

연해주에 도착한 이범윤은 지역 한인 사회의 유지이자 거부인 최재형(崔在亨)의 지원으로 의병 부대의 편성에 나섰다. 그는 최재형의 후원으로 직접 연해주 각지를 순회하며 의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 활동에 나섰다. 당시 연해주에서는 마적의 습격에 대비해 총기의 민간 소유를 공인하고 있었고 총기와 탄약의 매매는 국가의 허가를 받은 뒤에야 이뤄질 수 있었지만 사실상 자유롭게 매매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범윤은 의병 부대의 무기와 장비를 러시아 군인들로부터 저가로 구입하거나 한인 사회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그가 연해주에서 모은 총기의 종류는 주로 러시아제 5연발총과 14연발총이었다. 이 총들은 국내 의병들이 휴대한 화승총에 비해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의 의병 부대는 보다 높은 전투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범윤은 동의회(同義會)와 창의회(彰義會)를 결성하여 의병 부대의 인적·물적 기반으로 삼았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한인 동포들의 단결 도모와 환란 구제를 표방하면서 1908년 5월경 결성한 항일 단체로 최재형이 총장, 이범윤이 부총장, 안중근 엄인섭이 평의원을 맡았다. 창의회는 이범윤이 의병 부대를 지원할 목적으로 1908년 7월 조직한 항일 단체로 이를 바탕으로 1908년 여름 노보키에프스크에서 최재형과 연합하여 3~4천 명의 청년들을 모아 의병 부대를 편성했다. 의병 부대의 진용은 다음과 같았다.
총독: 이범윤
총대장: 김두성
대장: 전제덕(全濟德), 김영선(金永先), 김모(金某)
좌영장: 엄인섭
우영장: 안중근
영장: 백규삼(白圭三), 이경화(李京化), 김기룡(金起龍), 강창두(姜昌斗), 최천오(崔天五), 장풍한(張風翰)

이범윤은 의병의 복장을 대체로 러시아 식의 카키 군복을 착용하게 하고 겨울에는 털모자를 쓰게 했다. 이범윤은 고종으로부터 의병 활동의 군자금을 얻어내기 위해 1907년 여름에 두 부하를 서울에 파견했다. 이들은 러시아 총영사에게 황제의 알현과 청원서의 전달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러시아 총영사가 거절하면서 실패했다. 하지만 1997년 11월 24일자 <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1909년 4월 16일 원산 주재 러시아 영사 니콜라이 비루리코프[3]가 러시아 총참모부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고종이 루스코-키타이스키 은행 해삼위지점에 엔화 30만엔을 예치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전보에는 '고종 황제가 비밀리에 독립군에게 협조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돈을 빼앗을 우려가 있다'고 적혀 있어 연해주 의병군 자금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1908년 9월 대한협회에서 군자금 1만 7천원을 이범윤 앞으로 우송한 일이 있었으며 이범윤이 1910년을 전후해 노보키에프스크 사무소에 함흥 일대 부호 명부를 비치해놓고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간도 지역 의병장들도 휘하의 인물을 파견해 군자금을 조달해 노보키에프스크 사무소로 송금했는데 특히 유인석은 그의 문인 박치익을 통해 군자금을 자주 보냈다. 돈을 각지에서 모아 군자금을 마련한 이범윤은 연해주 한인 교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포고해 의병 모집에 나섰다.
광무황제는 나를 북간도관리사로 임명하셨기에 나는 블라디보스톡관원과 연락하여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한인협회를 창립하였다. 연해주 거주의 모든 우리 형제들이 잠을 자고 있고, 우리의 형제들은 모두다 조선출신들이다. 이국에서 정처없이 살고 있지만 고국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나는 조선인 홍범도를 의병장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무기, 자금 등을 모으기를 명령한다. 연해주 동포여, 합심하여 우리 독립을 달성하자. 구국의 사업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들은 조선으로의 환국 후에 후한 상을 얻을 것이다.

이범윤은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면서 선발대를 한반도에 잠입시켜 일본군 수비대의 배치 상황을 정탐하고 철도 전선을 절단해 적의 통신 연락을 두절시키게 했으며 1908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수행했다. 좌영장 엄인섭과 우영장 안중근은 각각 1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7월 5일 노비키에프스크를 떠나 장고봉을 넘어 국내로 진공했는데 이때 두만강 하류를 건너 경흥군 홍의동을 점령하면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해 4명의 적군을 사살했다. 7월 9일 이범윤의 의병대는 경흥 북방으로 진격했고 7월 10일 새벽 신아상 헌병 분견대를 습격해 적병 1명을 사살하고 5명을 행방불명 시켰으며 분견대 진지를 파괴했다.

이후 7월 11일과 12일에 회령-경성간의 철도와 전선을 파괴하여 일본군의 통신 연락을 마비시켰고 7월 13일 경원군 고건원의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해 적군 5명을 사살했으며 7월 14일 경성군 계상면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전주를 파괴했고 7월 16일 회령군 용흥면 용성사를 점령하고 일본군 통신 전화선을 절단했다. 7월 17일 회령군 남방 2km 지점까지 진군했으나 7월 19일 영산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기도 전에 일본군 수비대의 급습으로 두 차례의 교전 끝에 패했다. 이후 후퇴를 시작했고 7월 21일 멱사동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격퇴했으며 7월 25일 경성군 장풍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하고 점령했다.

8월 4일 경흥군 노서면의 서수라를 점령한 뒤 일본인 어장을 습격해 일본인 어부 14명을 살상하고 어구를 노획했으며 8월 9일 회령군 중도 북방에서 일본군 척후병과 교전하여 격파했다. 8월 25일 경성군 장풍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격퇴했고 9월 3일 경성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명천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축출하고 명천읍을 하루 동안 점령했다가 9월 4일 철수했다. 9월 18일 경성과 명천 사이의 7반동에서 일본인 통신 기술자를 사살하고 전선을 파괴했으며 9월 19일 일본군 ' 폭도 토벌대'와 교전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한반도를 벗어났다.

1908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간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친 이범윤은 아군의 전력이 적보다 열세하다는걸 뼈저리게 느꼈다. 게다가 청나라와 러시아가 일본의 항의를 받고 한인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금지하자 이범윤은 작전을 변경해 일제의 핵심 요인을 암살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이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자 이범윤은 유인석과 함께 안중근 의거를 국권 회복 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그는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13도 의군에 참여했다.

13도 의군은 만주와 노령의 의병 지도자들이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투쟁 역량을 결집하여 재차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고자 결성한 것이었다. 이는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 부대를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함으로써 투쟁 역량을 결집하고 나아가 작전과 지휘를 단일 계통으로 통일하기 위해 1910년 6월 우수리스크 부근의 추풍에서 편성한 것이다. 13도 의군은 도총재를 정점으로 실제 전투력을 지닌 창의군(彰義軍)과 장의군(壯義軍) 두 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유인석이 도총재, 이남기가 장의군 총재, 이범윤이 창의군 총재를 맡았다. 이상설 외교 통신원으로서 외교 통신, 사무, 조직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안창호, 홍범도, 이진룡, 이갑 등은 동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이범윤을 비롯한 13도 의군의 간부들은 일제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고 이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이범윤은 성명회 개최시에 유인석, 김학만, 차석보, 김좌두, 김치보 등 6인의 대표자로서 활동했으며 미국, 중국, 유럽 등 여러 국가 정부와 신문사에 호소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발송했다. 선언서 말미에는 유인석, 이범윤, 김학만, 김좌두, 홍범도, 정재관, 이규풍 등을 비롯해 중국과 러시아에 산재하는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가 포함된 8,624명의 서명을 첨부한 서명록을 덧붙였다.

이에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항의함과 동시에 이범윤, 유인석, 이상설, 홍범도 등 주요 인사들의 체포 및 인도를 요구했다. 러시아 당국은 성명회를 주도하고 있던 이범윤을 비롯한 13도 의군의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성명회와 13도 의군은 1910년 9월 해체되었으며 이범윤 역시 10월 24일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이범윤 등의 인도를 요청했지만 러시아 당국은 이를 거부하고 이범윤 등을 이르쿠츠크로 호송했다. 그는 이르쿠츠크에서 7개월간 유형 생활을 한 뒤에 1911년 5월 18일 석방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범윤은 이종호, 이상설, 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1911년 5월 20일 자치 결사 권업회(勸業會)를 창립했는데 목적은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독립 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것이었다. 권업회는 창립 당시에는 최재형이 회장, 홍범도가 부회장을 맡았지만 1911년 12월 17일 총회에서 조직이 회장제에서 총재제로 바뀌면서 유인석이 수총재로 선임되고 이범윤, 김학만, 최재형, 최봉준이 총재로 선임되었다. 권업회는 연해주 각처에 지회와 사무소를 설치하여 한인 사회를 효과적으로 조직했고 1914년 무렵 회원 수가 8,579명에 달했다.

1914년 9월 권업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과 연합한 러시아 당국이 반일 단체를 놔둬서는 안된다고 판단하는 바람에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이범윤은 여러 독립운동에 참가했으며 1919년 만주와 노령의 민족 지도자들이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할 때 대표 39명 중 1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이범윤은 북만주 연길현에서 진학신(秦學新), 최우익 등과 함께 의군부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그 뒤 서일의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무장 투쟁을 본격화했고 1920년 4월 항일 운동의 원로로서 '대한광복단'의 명예 단장에 추대되었으며 자유시 참변 이후 북간도 지역에 흩어진 각 독립군단들이 1922년 8월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될 때 총재로 추대되었다.

이후 대한독립군단이 중심이 되어 북간도 지역 독립군단들을 통합하기 위해 1925년 3월 10일 길림성 액목현에서 부여족 통일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이범윤도 회의에 가담했다. 회의 결과 대한독립군단과 북간도에서 재정비한 북로군정서 등 각 단체들이 통합에 합의하여 신민부를 창립했다. 이범윤은 독립운동 원로로서 신민부의 자문 기구로 설치된 참의원 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신민부가 무관 양성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小秋風)에 설립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의 고문을 맡았다.

이범윤은 1926년경 70세의 나이로 신민부 고문에서 물러나 은퇴했다. 그 후 그가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파악이 어려운데 일설에 따르면 이범윤은 1937년경 북만주에서 비밀리에 서울로 들어왔는데 조선총독부 관헌에게 발각되지 않았다고 하며 1940년 10월 20일 서울 공덕동 자택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이 사실인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3. 비판

이범윤이 이끄는 연해주 의병의 국내침공작전이 전개되던 1908년 무렵, 의병부대 내에는 두 계열의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이범윤, 안중근 등 연해주 의병파와 <해조신문>을 창간한 최봉준을 중심으로 한 해조계몽파의 분열이었다. 전자 계열은 국내 의병전쟁에 호응하여 무력으로 국토를 회복하고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후자는 교육과 계몽, 실업에 의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8년 3월 27일 <해조신문>에 '본사 최봉준공 역사 논평'이라는 글이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의병운동이 한인의 산업과 국내의 교역을 방해하니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이범윤의 의병대는 의병 모집 및 군자금 확보가 점차 어려워졌고, 자연히 양측의 대립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그러던 1908년 8월 말, 연해주 의병의 두 지도자였던 최재형과 이범윤 사이에도 불화가 일어났다. 당초 의병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최재형은 국내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실력 양성운동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반대로 이범윤은 대일 항전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1908년 말 이범윤의 심복들인 한기수(韓起洙)[4] · 박창수(朴昌洙) · 박준남(朴俊南)이 최재형의 부하 김기룡(金起龍)을 암살하려고 김기룡이 유숙하고 있던 최재형의 집에 쳐들어갔다가 발각된 사건이 벌어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이범윤은 전체 의병부대를 자신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두려 했고, 최재형, 이위종 등은 이범윤의 권위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1909년 1월 20일, 최재형은 <대동공보>에 광고를 게재해 한인의 애국심을 이용하여 자금을 모집, 남용하고 무뢰한 행동을 저지르는 의병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앞으로 한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도용하고 자금을 모집하는 의병들에 대해서는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박기만(朴基萬) 외 24명이 연명으로 연해주 한인 사회가 이범윤의 적극적인 의병 노선을 후원해줄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맞섰다.

이렇듯 이범윤과 최재형 간의 불화는 갈수록 심해졌고, 연해주 의병의 중심인물들은 두 사람을 정점으로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전력의 분산이 일어났고 파르티잔스크에서 연추로 이송해 온 총기 400정이 되돌려보내질 정도로 그 양상이 심각했다. 당시 일제 정보기록은 "두수(頭首)가 서로 반목하고 있으므로 공동행동은 불가능하다"고 기재되었다.[5]

여기까지는 노선의 차이로 인한 갈등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범윤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말았다. 1909년 초, 그는 정금석, 정태유, 이성옥, 김익한 등에게 유완무를 포살하라는 문적을 내렸다. 이에 정금석 등은 그해 2월 24일 유완무를 홍기하의 깊은 골짜기로 유괴하여 죽인 뒤 유완무의 말과 유품들을 가져다 팔아서 나누어 가졌다.

유완무 김구 치하포 사건 이후 해주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그를 구출하려 한 적이 있었으며, 이후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한인들의 신망을 받던 인물이었다. 아무리 독립 노선에 차이가 크고 서로 간의 갈등이 심했다고 해도,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함께 하면서 한인들의 존경을 받던 동지를 참혹하게 살해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결정이었다. <권업신문> 1912년 11월 17일자 기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리와 류씨는 과연 나라일로 위하여 동서로 분주하던 이가 아닌가. 그와 정분 있는 친구도 있을지며 그와 동정 있는 지사도 있을지어늘 어찌하여 그이 죽은 이후에 지금까지 그의 원한을 씻으려 하는 이가 없었느뇨. 아무렇게나 이번 이 안건을 조사한 이에게 대하여 일반 양심있는 자는 함께 감사할 뜻을 올릴 바로다. (중략) 오호라! 의병도 하며 무엇도 한다하던 이범윤씨가 참 이일이 있는가. 우리는 급히 그 대답을 듣고자 하노라.

계봉우 역시 1920년 5월 15일 <독립신문>에 게재한 '의병전'에서 이범윤의 유완무 살해를 비판했다.
범윤이 일시의 감정으로서 중요인물인 유완무를 살해한 그것이 또한 (독립군의) 군심이 흔들리는 데 다대한 원인이 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1979년작 KBS-TV 8.15 특집극 <대한국인>에선 배우 장항선이 연기했다.
[1] 단, 이 사진이 이범윤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출처도 불분명하고 저화질 상태의 사진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 [2] 현충원에 묘가 있긴 한데 가묘이다. [3] 러시아 참모본부 정보국 대위 [4] 독립유공자 한기수와 동명이인이다. [5] 회비경송(會秘警送) 제 706호(1908년 1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