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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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곡산 연씨[1] |
초명 | 연민수(延敏守) |
이명 | 연기호(延基浩, 延基鎬), 연봉렬(延奉烈) |
출생 | 미상 |
미상 | |
사망 | 1911년 |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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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연기우는 연기호(延基浩), 연봉렬(延奉烈) 등의 이명으로 불리며 본관이 곡산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가 언제 태어났으며 어느 곳 출신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며, 강화진위대 부교(副校) 출신이라는 설과 적성의 선비라는 설 등이 제기될 뿐 신원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2002년 간행된 <곡산연씨대동보> 1권 43쪽에는 그가 연소득(延小得)의 세 아들 중 장남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연기우의 부하로 활동했던 강호여가 <늙은 빨치산들의 회상기>에서 밝힌 회상에 따르면, 연기우는 50이 넘었으며 성균관 진사여서 학식이 고상하고 의분이 특별한 애국지사여서 사람들이 그를 '대장님, 진사님'하며 존경했다고 한다.1907년 7월 정미 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당하자, 강화도 진위대는 의병으로 전환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그러나 8월 11일 일본군이 강화읍성을 기습하자, 강화 의병은 강화도를 떠나 육상으로 후퇴했다. 이때 이들과 함께 하고 있었던 연기우는 장단군 덕울포에서 의병대를 일으켰다. 그는 해산 군인들을 능력에 따라 부서를 정하고 임무를 부여했으며, 엄정한 군율로 결사토적(決死討賊)할 것을 맹세했다.
1907년 가을, 허위 이하 의병장들은 48개 의진 약 1만 명의 의병대를 총동원해 서울 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이때 연기우도 여기에 참가했고,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1908년 1월 이인영을 13도창의대진소의 대장으로 추대했다. 연기우는 13도창의대진소의 대대장의 직책을 맡아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맞섰지만 일본군의 역습에 밀렸고, 후원군이 오지 않아 할수 없이 퇴각하다가 김규식과 함께 부상당했다.
이후 연기우는 마전과 장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여러 의병장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는 창의존양군수부(倡義尊攘軍帥府)의 대장이라거나, 동한창의존양대장(東韓倡義尊攘大將) 혹은 창의한북대장(倡義漢北大將)이라 표방했다. 또한 임진강을 넘나들며 경기도의 포천, 삭녕, 철원, 연천, 마전, 장단, 적성 등지를 무대로 일본군과 교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2월 24일자 <거룩한 의병대장> 기사에서 연기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의병대장 연기우씨는 근일에 부하 40여 명을 거느리고 삭녕, 적성 등 군에 종종 왕래하는데 연씨는 지혜와 용맹이 겸전하여 일 헌병과 접전하되 한 번도 패하지 아니한 고로 그 지방에 주재하는 일 헌병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가는 곳마다 민간에 터럭만한 폐단이 없는 까닭에 인심이 안온하다더라.
강호여는 연기우 의병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 의병대 지도간부들 대장은 연기우, 한문 지식이 상당한 당시 진사, 중군장 원철준, 좌익장 임학도, 우익장 이수영, 선봉장 심상근 모두 일등 포수들 애국자였다. 군대 서기장 김극수, 길흉판단 선생 백군보가 참모부에 있었다. 군인들은 300~400명에 달하였는데 절대 다수는 40~50세가 되는 깊은 산간에서 한평생 짐승잡이 하던 1등 포수들이었고 (중략) 연기우 대장 명령으로 적으면 20~30명씩 많으면 40~50명씩 영솔하고서 전투공작을 하였고, 길흉판단 선생이 손가락을 폈다 구부렸다 하면서 길흉을 판단하고 공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대 규율은 엄숙하였고, 장교들이나 군인들 간에 친목하였고 애국정신만은 과연 경탄하게 튼튼하였던 것이다.
연기우는 각 군의 면장들에게 군자금 조달 명령서를 발부했으며, 부민(富民)들에게는 군수전을 요청하였고, 통과하는 마을이나 각 면에는 옷이나 짚신의 제공 등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주민이나 부호들로부터 조달받은 군자금과 물자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의 1910년 2월 1일자 <장하고 굳은 마음> 기사에 따르면, 연기우는 아들이 찾아와서 가족이 거의 굶어죽게 되었다며 구제해줄 것을 청했지만 엄절히 거절하고 조금도 얘휼하는 뜻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부하 한 사람이 군수전 중 오십 환을 연기우의 아들에게 줬는데, 연기우는 이를 알고 "그 돈은 공용에 쓸 것이니 사사로이 쓰는 것이 불가하다"라며 그 돈을 즉시 환수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북간도의 이범윤(李範允)을 통해 신무기를 구입했고, 1909년 5월에는 강원도 이천에서 프랑스인 천주교ㅗ 전도사의 집을 침입해 다량의 탄환과 총기를 빼앗아 무장하기도 했으며, 헌병보조원이 소지한 서양총 탄환을 몰래 빼내어 무장을 강화하기도 했다. 일제 경찰이 집필한 <폭도에 관한 편책> 1908년 2월 14일자 기록에 따르면, 연기우는 피스톨을 찼고 다수의 부하들은 다갈색의 양복을 입고 학생모를 썼으며, 나머지 부하들은 한복을 입고 30년식 총 7정, 엽총 14정, 화승총 10정을 휴대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가짜 의병들을 처벌하고 토색질을 일삼는 토호들을 처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1910년 3~4월 사이에 경기, 황해지역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했을 때 연기우 의진의 중군장 김중운, 선봉장 연성칠 등이 전사하는 등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연기우 본인도 철원에서 체포되었다가 부하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황성신문> 1910년 6월 18일자 기사에 따르면, 철원 헌병대는 삭녕군 갈현리 민씨 가에서 연기우의 방탄 요갑을 압수했는데, 소가죽과 말편자로 만든 요갑으로 총탄이 뚫지 못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곧이어 7월에는 그의 부하 현학인(玄學仁)이 부하 11명을 데리고 자수했으며, 역시 그의 부하였던 이주보(李周甫)는 서울 전동에서 체포되었다.
1911년 12월 28일, 의병장 연기우가 사살되었다는 내용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가평군 파견소의 헌병대가 연기우와 부하 3명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이때 연기우의 인장과 모자, 편지와 서적 등을 압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3년 후인 1914년 6월 28일, 인제분대 암정파견소 헌병들이 지난 14일에 연기우 부자를 체포하여 취조 중이라는 <매일신보>의 보도가 있었다. 어느 쪽이 맞는 지는 현재까지 확실하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연기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상주공파 26세 우(羽)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