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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5-27 20:37:55

신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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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전투의병
민종식 신돌석 정용기, 정환직
파일:external/kuiwon.files.wordpress.com/shin-dolseok.png
신돌석 장군 기념관 내의 충의사에 있는 초상화.
성명 신돌석(申乭錫)[1]
본명 신태호(申泰浩)
일명 신태을(申泰乙)
신태홍(申泰洪)
신대호(申大浩)
본관 평산 신씨
출생 1878년 11월 26일
조선 경상도 영해군 축산면 도곡리
사망 1908년 12월 11일
대한제국 경상북도 영덕군 북면 눌곡리
순경(舜卿)
가족관계 아버지 신석주(申錫柱)
어머니 분성 김씨 부인
부인 한재여
장남 신만이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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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시기 항일 의병 활동을 한 중인[2] 출신 의병장. 본명은 신태호(申泰浩), 자는 순경(舜卿),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 야사가 풍부한 인물로 현대 한국인들이 그에 갖는 인식 대부분이 야사에 편중되어 있고 실존 인물 신돌석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아래 내용들은 그래도 객관적 사실들을 규합한 신장군실기, 신의장전, 독립운동사 자료집 등에서 발췌한 내용들이다.

2. 생애

경상북도 영덕군[3] 축산면 출생으로 축산면에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건강하고 용감하기로 소문이 났고 거리가 되는 시내를 단번에 뛰어넘을 정도로 몸이 튼튼했다 한다. 1896년 을미사변 단발령에 반발해 일어난 의병들처럼 19살의 나이에 궐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의병들이 다시금 일어나자 신돌석 역시 의병을 일으켰는데 전선주 파괴와 전선 가설을 방해한 활동들이 이 시점에서 이뤄진다. 야사에 따르면 일제가 전선을 잇는 작업을 하는 중 단숨에 총을 가진 왜병들을 때려눕힌 뒤 나무 전신주 여러 개를 뽑아서 패대기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단신으로 행했다는 것은 설화적인 면이 강하고 의병들과 함께 전투를 거쳐 성과를 거둔 것이 이처럼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전신주는 일제 침략의 첨병 취급을 받아 의병들의 공격 대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1907년 울진에서 의병을 모집해 영덕의 관공서들을 습격하며 활동했고 원구에서는 일본군과 전투하며 성과를 보였다. 그의 병력은 산악 지역에서 주로 유격전을 펼치며 지세에 능하지 못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성과를 보였다. 1896년 시작한 의병 활동을 바탕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자연스럽게 추대되어 활동했는데 신출귀몰한 그의 작전에 경악한 일본군은 신돌석을 크게 경계했으며 회유책이나 현상금을 걸어서 그를 포획하려 했다. 1907년 13도 연합 의병을 위해 경상도 지방에서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상경했으나 그의 출신 때문에 배제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쨌거나 중인 출신이었기에 평민이라 배제당했다는 것은 야사에 가깝고 기록에 따르면 1907년 11월 양주에 집결했지만 12월 재편성 과정에서 배제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양주에 이르러지도 못했다는 설'과 '집결했으나 배제되었다는 설'이 공존한다.

최후에는 그의 부하였으나 일본이 내건 투항자 면책 선언에 마음이 꺾여 투항한 김상렬 형제의 손에 살해당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는 일본 한국의 기록이 엇갈린다. 일본측 기록에서는 형제 중에 동생쪽이 그의 부하였는데 신돌석이 그를 다시 의병진으로 데려가기 위해 형의 집을 찾아가 강권하나 완곡하게 거부하자 집 근처 계곡으로 데려가 구타하다가 이웃집에 숨어있다 뒤쫒아온 옛 부하인 동생에게 짱돌로 머리를 가격당해 사망했다. 신돌석 사망 직후 신고를 접수한 영덕경찰서장이 올린 보고서에는 형을 구하려 신돌석을 살해한 동생은 겁에 질려 그대로 달아나 숨어버렸고 형이 신고를 해서 경찰측에서 신원을 확인하고 과정을 조사했을 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국가보훈처를 비롯한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운동사 자료집과 이에 수록된 신장군실기, 신의장전 등의 한국측 기록에서는 흔히 알려졌듯이 신돌석의 고종사촌들이 포상금을 노리고 신돌석을 살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외에도 이름이 다른 김씨 형제들이 포상금을 노리고 신돌석을 살해했다는 기본 바탕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덕 눌곡에서 김상렬 김상근 형제에게 독주를 권해받아 이에 취한채 사망했다는 기록, 밤중에 암살당했다는 기록, 옛 부하인 김상렬의 간청으로 투숙하다 암살당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보다시피 공통적으로 김상렬 형제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술에 취하게 한 뒤 살해했다는 것도 비슷한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죽음과 관련된 비극적인 야사가 하나 있는데 이 고종사촌 형제가 신돌석에게 고기를 극진히 대접하고 자고 있을 때 공격했는데 이 때 공격받은 신돌석은 이렇게 외쳤다 "형님, 형님, 누군가 나를 찔렀소!" 마지막 순간까지도 형제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이후 고종사촌들은 신돌석의 목을 가지고 일본 헌병에게 바쳐 상금을 요구했지만 일본 헌병은 사로잡아오지 않고 그냥 죽인건 소용없다며 이들을 빈 손으로 돌려보냈는데 고종사촌들은 격분하고 오열하면서 후회했다고 한다. 상세한 내용은 야사로 전해지지만 신돌석이 포상금을 노린 형제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전해지는 기록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파일:external/cine114.net/shszone_3541.jpg

5. 같이보기


[1] 錫 자 대신 石을 표기하기도 한다. [2] 교과서나 인물사전 등에서 평민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 평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향리 가문으로 명백한 중인 계급이다. 조선시대에 평민은 를 가질 수가 없었다. 신돌석이 평민이라는 인식을 퍼뜨린 것은 체제 특성상 하층민 중심의 무장 투쟁을 강조하는 북한 학자들이고 이를 과거 남한 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다만 "아전에서도 밀려나 갓을 쓸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영양군 출생으로 보통농가에서 자랐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출신 자체는 중인이나 큰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사회가 그러했듯이 평민과 다를 바가 없었던 중인이라는 것. [3]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영해(寧海)도호부다. [4] 대영팬더판에 MBC 전속 성우들이 출연하였다고 KMDB에서 기록되어 있고 발매한 바로 그 해에 MBC에서 방영한 것으로 봐서 MBC와 대영팬더의 협력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5] 어린 시절 신에서 자기 소개할 때 본명이 아닌 신돌석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