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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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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colbgcolor=#fff,#191919>유인석(柳麟錫)
본관 고흥 류씨[1] #
출생 1842년 1월 25일
강원도 춘천도호부 남산외일작면 가정리
(현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2]
사망 1915년 1월 29일 (73세)
만주 펑톈성 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
자 / 호 여성(汝聖) / 의암(毅庵)
가족 관계 아버지 류중곤(柳重坤)
양아버지 류중선(柳重善)
어머니 고령 신씨 부인
장남 류해동(柳海東)
차남 류제함(柳濟咸)

1. 개요2. 생애
2.1. 의병 운동의 전개2.2. 연해주에서의 활동2.3. 말년
3. 사상4. 평가
4.1. 긍정적인 평가4.2. 부정적인 평가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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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운동가, 위정척사파, 조선의 의병장이자, 유학자.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은 그의 며느리이다.

춘천 출신이지만 주로 제천 등지에서 활약을 했기 때문에 제천시에서도 한방 도시와 함께 많은 홍보를 하는 인물이다.

2. 생애

유인석은 1842년 강원도 춘천도호부 남산외일작면 가정리(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柳重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신철모(申哲模)의 차녀 사이의 3남 2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인 유중선(柳重善)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이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가 화서 이항로와 교분을 맺고 있던 터라 선생은 화서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존화양이 사상에 심취한다.

강화도 조약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과 함께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2.1. 의병 운동의 전개

1893년에 제천 장담(長潭 : 현 봉양읍 공전리 장담마을)으로 이사했으며, 이곳이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된다. 이후 을미사변이 터지고 단발령까지 겹치자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유인석 역시 이에 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제2차 의제 개혁 직후 '변고'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1895년 5월 2일, 3일 양일간에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하면서 사실상 의병 항쟁의 준비 단계를 밟는다.

유인석의 문인들인 이춘영과 안승우가 1896년 1월 12일, 김백선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을 축출하였다. 이후 단양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일시적으로 격퇴하였으나, 반격이 지속되자 유인석은 이들을 영월로 모두 모이게 하였고, 여기서 의병들의 간청으로 의병장에 오르게 된다.

이후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을 중앙의 명을 받아 단발령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살해하였고 제자인 이범직을 시켜 단발령을 시행하던 천안군수 김병숙도 살해했다. 그다음엔 단발령을 시행하던 평창군수 엄문환도 살해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에 지쳐 충주성을 버리고 제천으로 퇴각했다. 이후 단발령이 철회되고 김홍집 내각이 축출되자 거의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전언이 내려왔다. 그러나 정부가 특히 일제 침략 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또한 망국 개화 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의병 항전을 계속할 것이라며 항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제천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는 제천성을 상실했다. 이후 의병들을 이끌고 소규모 전투를 행하면서 서북으로 간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관군의 압박이 이어졌으며, 이후 서간도로 망명한다는 결정을 내리고는 의병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다. 일제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도 좋은 이유였지만, 동시에 유인석은 청의 군사적 원조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간도에서 무장 세력은 불법인지라 그곳 관리는 무장 해제를 요구했으며, 결국 유인석은 9월 28일 혼강(琿江)변에서 의병진을 해산한다.

2.2. 연해주에서의 활동

1897년 3월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으나 곧 다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1900년에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다시 귀국하였다.[3] 이때부터 황해도 평안도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향음례, 강습례를 수시로 열어서 존화양이 의식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취시켰다. 1906년, 31대 연성공 쿵링이의 지원으로 청나라 망명을 추진했으나 그의 다릿병이 심해져서 포기하였다.

1907년 7월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빌미로 일제의 압력을 받고 강제 퇴위했고, 8월 1일 정미7조약에 의거하여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되었다. 이에 유인석은 연해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8월 박치령(朴治靈) · 차재정 · 나희태(羅希泰) 등의 문인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하여 현지 사정을 탐문하게 했다. 그는 이전에 망명했던 서간도 대신 연해주로 망명한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는 청과 러시아는 모두 가히 기거할 만한 곳이나, 청은 약하고 러시아는 강하기 때문에 장차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청보다는 러시아가 나을 것"이라고 밝혔다.[4] 즉 청나라보다 상대적으로 국력이 강한 러시아로 망명하여 그 후원하에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1908년 초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그는 김학만(金學萬) · 차석남(車錫南) · 양성춘 등 그곳 한인사회를 주도해오던 이들과 협력하려 했지만, 그가 견지하던 '화이론'에 입각한 항일노선이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해 운신의 폭이 극히 제한되었다. 결국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석을 보낸 뒤 연추(煙秋. 현 크라스키노)로 이동했다. 그는 이곳에서 의병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연해주 의병세력은 이범윤 최재형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불화를 빛고 있었다. 이범윤은 1908년 7월에 추진한 국내진공작전이 실패한 뒤에도 무력항쟁을 추구했지만, 최재형은 실력 양성운동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러한 양측의 독립운동 노선 차이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었고, 급기야 1908년 말 이범윤의 심복들인 한기수(韓起洙)[5] · 박창수(朴昌洙) · 박준남(朴俊南)이 최재형의 부하 김기룡(金起龍)을 암살하려고 김기룡이 유숙하고 있던 최재형의 집에 쳐들어갔다가 발각된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듯 이범윤과 최재형 간의 불화는 갈수록 심해졌고, 연해주 의병의 중심인물들은 두 사람을 정점으로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전력의 분산이 일어났고 파르티잔스크에서 연추로 이송해 온 총기 400정이 되돌려보내질 정도로 그 양상이 심각했다. 당시 일제 정보기록은 "두수(頭首)가 서로 반목하고 있으므로 공동행동은 불가능하다"고 기재되었다.[6]

게다가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외교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한인들의 의병활동에 제약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09년 1월 하순에는 연추에 주둔 중이던 연대 소속의 러시아 군인 250명이 의병 사무소로 가 일체의 총기와 탄약을 압수하고 의병 해산을 강요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의병의 기세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연해주뿐만 아니라 간도에서도 현지 관헌의 탄압을 받아 의병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1908년 11월에는 연추에서 간도로 파견된 의병 2백 명이 현지 관헌의 간섭으로 해산되고, 그 지휘관인 이경화(李京化)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구금되는 사태가 구금되기도 했다.

유인석은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의병 통합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08년 음력 10월 의병규칙(義兵規則)을 집필해 이범윤의 항일운동을 후원했다. 총 35개 조목으로 규정된 의병규칙 중, 의병통합을 전제로 단일 편제를 언급한 제25, 26조의 내용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제25조에서는 전국 각 읍을 단위로 의진을 편성하되, 각 읍마다 공격부대인 용진(勇進)과 수비부대인 수방(守防) 2개 부대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이때 용진부대는 가장 용맹한 의병을 선발하여 편성하고, 그 나머지 군사들을 모아 수방부대를 편성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각 도마다 이들 용진, 수방대를 통할하기 위한 대진(大陣)을 세워 이를 도통령(道統領)이 지휘토록 하고, 나아가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근거지를 물색하여 이곳에 중앙대진(中央大陣)을 세우고 그 최고 지휘자로 도통령(都統領)을 세운다는 것이다.

26조에서는 위의 통령 체제와 더불어 총재 체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아가 통령, 총재 간의 상호관계에 대해 규정하였다. 전국의 의병은 13도 도총재를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 각 도에는 도총재를 두고, 도총재 아래에는 다시 각 읍마다 읍총재를 두었다. 그리고 읍총재는 실질적으로 각 지역 단위인 읍진을 통솔하는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여기에 실제 지휘관인 통령 편제도 동시에 설정하였다. 즉 전국 의병의 최고 책임자인 십삼도도총재의 휘하에서 그의 절제(節制)를 받는 최고 지휘관인 통령을 두도록 했고, 또 도통령(都統領) 아래에는 각 도마다 도통령(道統領)를 두어 각 읍의 진장(陣將)을 통솔토록 규정하였던 것이다. 유인석은 26제 말미에서 전국 의병이 단일 체제, 지휘계통으로 통합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대저 지금의 의병은 스스로 일으킨 일을 주장하여 각기 의견이 있고 각기 규모가 있으므로 뒤섞여 통일되지 않고 있다. 통일되지 못하면 많을수록 더욱 어지럽고 웅직이면 더욱 화합하지 못하여 난동이 되고 화합치 못함에 세력을 이루어 적을 견제하지 못한다. 모름지기 서로 계통을 받아 톰과 어깨가한 곳에서 지령을 받는 것 같이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한 곳에서 명령을받지 않으면 일을 성공시킬 가망이 있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일에 계통이 없고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면 집에서 백 가지 일이면 백 가지 일을 하나도 이룰 수 없고 나라에서 백 가지 일이면 백 가지 일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자연한 이치이다. 지금 이 의병이 이치를 외면하고 이루기를 바라면 누가 일을 해결한다고 하겠는가. 이것이의병의 제일 큰 관계가 되는 것이니 혹 소홀하게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1909년 초, 유인석은 의병세력을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하기 위한 사전 준비로 연해주와 한인사회를 규합하기 위한 향약 조직인 '관일약(‘貴一約)'을 약정했다. 그는 관일약을 약정하게 된 이유와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관일약을 왜 만들었는가. 그만둘 수 없어서이다. 어찌하여 그만둘 수 없는가. 지금 동쪽의 섬의 복으로 인해 나라가 망하고 도가 없어지고 몸이 보전되지 못하고 사람이 모두 멸망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고로 이 약(約)을 만든 것이다. 이 약은 장차 재앙을 면하기 위한 것인데 그만둘 수 있겠는가.
'의암집(毅庵集)', <관일약서(貴一約序)>

유인석은 "관일약약속"에서, 유인석은 관일약의 결성 목적과 대의 등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금 만고천하에 없는 대복(大福)를 당하여 나라가 망하고 도가 망하고 신체를 보존하지 못하고 사람이 다 멸망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관일약(貴一約)을 세움에 약속의 조목이 있으니 애국심(愛國心) · 애도심(愛道心) ·애신심( 愛身心) · 애인심(愛人心)이고, 약속의 요령이 있으니 사애(四愛)에 마음을 두어 하나로 일관하고 중만(衆萬)이 동심(同心)하여 하나로 일관하는 것이다. (하략)

또한 그는 1909년 음력 11월에 관일약의 약정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통고문에서 “장차 여기(국외)에 함께 거주하는 여러분과 더불어 먼저 마음을 같이하는 일심 단체를 조직한 다음 마침내는 한 나라의 일심 단체를 만들고, 먼저 保身守道를 한 다음 마침내는 국권회복과 인류구제를 기약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관일약이 시행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여러 현존하는 문건 등을 통해 볼 때 관일약의 시행범위는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에서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동지들이 관일약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관일약의 시행에는 함북 경성 출신의 의병장 이남기(李南基)가 실무를 맡아 크게 힘썼던 듯하다. 그는 1908년 경성에서 지장회(池章會) · 김정규(金鼎奎) · 서상도(徐相都) 등과 함께 망명한 뒤 연추로 건너가 유인석의 막료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1910 년 음력 3월, 그는 북간도로 파견되어 관일약 보급과 의병 규합의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한다.[7]
유인석은 관일약과 함꼐 의병 통합을 위한 전위 결사의 형태로 입의안(立義案)을 실시했다. 입의안은 일정한 양식을 갖춘 의병 동맹록으로, 1909년 음력 12월에 작성한 <의무유통(義務有統)> 가운데 '입의안'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총재 이하 대소 의원(義員)은 일안(一案)에 함께 성명을 쓰고 그 아래에 두 줄로 자(字) · 생년 · 본관 · 주소 · 가족을 쓰고 아울러 현재의 주소를 쓴다. 특히 자신의 직업을 쓸 뿐만 아니라 출재(出財), 무기 제공, 마음과 힘으로 후원한 사람에 이르러서도 모두 써서 나라를 위하여 충의를 숭상한 훌륭한 일을 소멸되지 않게 하고 순서는 때의 선후로 하고 등급으로 하지 않는다. 대체로 입의안(立義案)으로는 의병 총 수를 알 수는 없고 또 일심단결의 체제와 일이 성공된 뒤에 이 안(案)으로 온 나라에 알리게 하고 후세에 전하여 대의에 가담한 공로를 빛내는 데 었다.

입의안의 시행과정은 관일약과 거의 동일한 형태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입의안이 작성된 것은 관일약 관련 문건들이 작성된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입의안이 국내외 각지로 전파되어 의안(義案)에 명단이 오르는 시기는 1910년 봄으로 인정된다. 이는 연해주에서 작성된 입의안 시행 통고문이 북간도에 실제로 도착하는 것이 음력 3월 초이며, 그 통고문이 작성된 일자가 음력 2월 29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김정규는 관일약 관련 문건들과 함께 입의안 문건을 이때 전달받았는데, 그 가운데 입의안의 통고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이곳(연해주)에 만거(萬居)하는 천만 동포를 돌아보건대, 마음을 쏟고 힘으로 도우고 몸으로 감당하니, 진실로 국가를 위하고 충의를 숭상하는 방책이 없지 않아 이제 의안(義案)을 세워 성명을 연서함으로써 그 실상을 드러내었도다. 그윽이 생각컨대, 저 중국 동포 군자도 어찌 이와 다르리오. 다만 성세(聲勢)와 의기(義氣)가 상통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받들어 청컨대, 여러분은 충성을 떨치고 의리에 의지하는 마음으로 먼저 성명을 허락하여 이 입의안(立義案)에 함께 하게 된다면 성기(聲氣)가 상응하여 한 마음으로 단체를 이루어 대의를 펴고 대사를 이룰 수 있으리라.
용연김정규일기(龍淵金鼎奎日記), 1910년 3월 7일.

유인석이 1909 년부터 1910 년 전반에 걸쳐 추진한 의병세력 통합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관일약과 입의안은 결국 ‘의병통합’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궤적을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양자간 차이를 두었는데,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관일약(貴一杓)을 만들고 또 동의안(同義案. 입의안의 또다른 표현.)을 만들었다. (중략) 혹자가 물어 말하기를 “약속(約束)과 의안(義案)은 어찌하여 문건을 각각 하여 그 일을 다르게 합니까. 나는 말하였다. “의안(義案)을 하는 것은 일을 성공하기 위함이요. 관일약은 성공시키고 바른 데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910년 6월 21일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 창설되면서 결실을 맺었다. 13도의군 도통령으로는 이범윤이 선출되었고, 유인석은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었다. 이때 그는 '통고13도대소동포(通告十三道大小同胞)'를 발표해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항일구국전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유인석이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암살한 뒤 일제 형사들에게 취조를 받을 때 '의병 총대장'으로 거론한 김두성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안중근은 김두성이 강원도 출신이며, 허위, 민긍호, 홍범도, 이범윤, 이은찬, 신돌석 등이 그의 휘하에 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김두성의 직함이 ‘팔도총독’이며, 이는 전국의병의 총대장이라고 한다. 또한 자신은 김두성으로부터 ‘특파독립대장'에 임명되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유인석은 강원도 춘성군 출신이며, 당대의 거유(巨儒)였고, 13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되는 등 연해주 의병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만큼 그가 김두성일 가능성은 분명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또한 안중근은 일제의 심문을 받을 때 형사가 유인석과의 관계를 묻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유인석은 작년(1908년) 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다. 유는 그때 15세 가량의 남자를 데리고 있었다. 금일의 국가형세에 대해 선생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말했더니 ‘어떻게든 애국하여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을 뿐 많이는 말하지 않았다. 귀가 어둡고 눈이 약해 매우 노쇠하였다. 학자의 풍모로 다언(多言)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므로 그냥 떠났다. 노쇠한 그는 다만 일본인을 미워할 뿐이며 세계의 대세 동양의 백면(百面)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뿐 결코 금일의 형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한인 중에는 본국에서 학자가 왔다 하여 모두 가서 여정을 위로하나 금일 동지에 있는 한인은 그와 같은 완고하고 시세에 어두운 사람과는 의사가 합치하지 않으며, 다만 노인이므로 경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시의 심문에 대한 안응칠의 공술(제2회)'

안중근은 여기서 유인석을 완고하고 시세에 어두운 사람이라고 비판적으로 평했지만, 독립운동 방략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를 예방한 사실만큼은 밝혔다. 또한 그는 '유음석(劉陰錫)'의 제자인 이진룡을 찾아가 이토를 사살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고 진술했다. 여기서 유음석은 유인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안중근은 유인석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가명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직후, 이상설은 유인석에게 편지를 보내 피신을 권유했다. 이에 유인석은 거주지를 옮겨 이종루(李鍾壘)의 집에서 유거하면서 다음과 같은 답신을 이상설에게 보냈다.
대감이 매우 근심해 주어 지극히 감동될 뿐이다. 대저 왜놈들이 후간(候簡)을 보내 정탐하는 데 이르게 되면 정세는 혹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등박문(伊購博文)을 죽인 것은 내가 그 계획을 아는 것이 아니지만 억지로 나로부터 했다고 한다면 혹 되겠는가. 대체로 인석이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이석대( 이진룡의 이명) 역시 오지 않았을 것이며, 이석대가 오지 않았으면 안응(安應)도 형세가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혹 나로부터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와 이석대를 여기에 오게 한 것은 이등박문(伊購博文)의 소행이다. 그 놈이 죽은 것은 그 자신으로부터이지 어찌 다른 사람으로부터이겠는가.

2.3. 말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발표되자, 그는 이에 반대하는 성명회 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13도 의군이 강제 해산되자, 그는 무장투쟁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모든 지사(志士)와 사우(士友)들은 국내에 머물지 말고 간도로 건너와 함께 수의(守義)하여야 한다.”며 ‘수화종신(守華終身)’할 것을 주장하였다. 1913년에는 그의 사상을 집약한 우주문답을 저술했으며, 1914년에는 서간도로 돌아갔다가 1915년에 관전현의 방취구(芳翠溝)에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시신이 서간도에 묻혔다가 광복 후에 한국으로 이장되어 강원도 춘성군에 매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 사상

유인석은 화서(華西) 이항로의 문인으로, 그의 위정척사 사상을 충실히 물려받고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사망 때까지 견지했다. 그에게 있어 중국은 천지의 중심이고 지구의 중심이며, 상달(上達), 즉 도리에 통달하는 것이야말로 추구해야 할 바였다. 반면 외국은 치우쳐 변두리에 있는 나라이며, 그 행하는 바는 하달(下達)인데, 하달이란 형기를 이루는 것이다. 상달은 중국의 장기요, 하달은 외국의 장기이다. 이것이 서로 달라지게 된 것은 풍기와 품격이 서로 달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가 볼때 중국은 편벽하여 풍기가 고르지 못한 외국과 구별되며, 중국은 외국의 상위에 위치하는 것이 정상적인 질서라고 봤다.

그는 이러한 중화-이적의 세계관은 일반론에서 그치지 않고 당대 조선과 외국과의 관계인 세계관에도 작용한다고 봤다. 그는 조선은 당요(唐堯) 때부터 나라가 시작되어 기자가 동방으로 와 홍범구주(弘範九疇)를 펴 보이고 팔조금법(八條禁法)을 가르치고 조선조에 이르러 공자, 맹자, 정자(程子), 주자의 학문이 번성했기 때문에 중화라고 평가했다. 반면 그가 보기에 서양은 청나라에 비교하면 만층(萬層)이나 뒤진 것이므로 이수(夷獸)의 일부분이었다. 따라서 그는 세계를 중화(중국)-소중화(조선)-중화에 근접한 이적(청)-이수(서양)의 질서로 나누고, 이것이 바람직하며 유지되어야 한다고 간주했다.

이러한 그의 세계관에서 봤을 때, 서양의 문물을 받들고 '개화'를 운운하는 것은 중국이 '이적'에 의해 더럽혀진 뒤 세계 유일의 문명국이 된 조선을 야만화시키는 짓이라고 보고 강하게 배척했다.
(서양) 저들의 정치가 윤상(倫常)과 덕예(德禮)에서 나왔는가? 일체 이와 반대되므로 애초에 논할 가치도 없다. 그들의 물질이 지극히 정교하다고 하나 기술자들의 말단 기예에 불과하다.
'의암집'
학술을 바로잡는 것이 천하를 위하는 지름길이요, 급선무이다. (중략) 무릇 공맹과 정주에 의해 계승된 도학의 술이 천지 사이에 바른 것이 되었다. (중략) 올바른 스승을 섬겨서 두 종(宗)이 없게 하고 올바른 학문을 배워 이단사설이 없게 하는 것이 천하에 있어서 가장 큰 일이다.
'우주문답'

그는 개화파를 이적을 끌여들여 맥을 끊어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자들로 인식했고, 중화를 해치려는 저들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중국과 조선이 서양의 법을 따르면 (서양의) 옷 입는 까닭과 같이 되어서 옷을 버리는 것이니, (결국) 옷을 벗고 알몸으로 있는 것과 같다.
'우주문답'
나라가 망하는 것은 개화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개화를 한다면서 그 하는 바는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를 폐하며 인륜을 무너뜨리고 법률과 기강을 문란케 하고 나라를 팔아 결국은 나라가 망함에 이르렀다. 구법을 써서 망하더라도 어찌 개화를 해서 망하는 것보다 심하겠으며,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바르게 하다가 망하고 깨끗하게 하다가 망하는 것이니, 개화를 해서 극악하고 더럽게 망하는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비록 수구인을 탓하지만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를 폐하고 나라를 팔아 망하게 한 것은 모두 개화인들이 한 짓이요, 망국을 애통하여 순절하며 의거한 자는 모두 수구인들이다.
'우주문답'

그는 또 서양을 따라 부국강병을 꾀하고 강한 병기를 만들어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은 덕을 베풀어야 할 정치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서양이 병기에 강하며, 이미 그 예리함을 다하고도 또 예리함을 궁구하여 더 예리하게 할 수 없는데도 더 예리하지 못할까 근심한다. 한 번에 백 사람, 천 사람을 죽이고도 오직 사람을 더 잘 죽이지 못할까 근심하니, 그들이 병기를 얻은 이래로 사람을 죽인 숫자는 계산 잘하는 만 사람을 동원하여 헤아린다 해도 다 헤아릴 수 없다. 천지는 만물을 생육(生育)시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며, 우리 인간도 그와 같은 마음을 지녔다. 그런 까닭에 만물을 생육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다.
'우주문답'

유인석은 개화파 인사들이 "도덕만 힘쓰다가 외국이 대포를 가지고 쳐들어오면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인도와 같은 나라도 도덕만 힘쓰다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실력을 기르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물을 것을 예상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진실로 도덕에 힘쓴다면 어찌 외국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도는 결코 현허(玄虛)하고 미망(迷妄)한 것이 아니고, 충실하고 현저한 것으로서 그것을 확립하기만 하면 체(體)가 되고, 시행하면 용(用)이 된다. (중략) 그러니 중국의 4억 상하대소인 모두로 하여금 이 도로 말미암고 이 덕에서 가지런해져서 힘쓴다면, 변화가 무궁하여 외국의 대포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은 오직 대포만 있는데 우리가 이를 갖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의 이천만 인이 일찍이 도덕을 힘쓰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금후로 전보다 훨씬 더 힘써야 할 것이다.

인도는 청정적멸(淸淨寂滅)을 힘쓰고 세상 일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현실적인 아무런 일도 하는 것이 없었던 까닭에 서양의 침략 앞에 호랑이 밥이 됨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중략) 도덕을 힘써서 생긴 실력이 온전한 실력인 것이다.
'우주문답'

또한 유인석은 춘추대의를 이념적 토대로 삼았다. 그는 단발령 시행 후 의병을 일으킨 뒤 백관에게 격문을 보내 자신의 행동이 춘추대의에 입각해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공자가 춘추를 지었는데 그 대의는 '토적하여 복수하고, 중화를 높이며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공자를 다시 높이지 않으며 춘추를 다시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만이거니와 진실로 높이고 믿는다면 그 대의를 어찌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인석은 포의로 의병을 일으켜 장차 공자와 춘추의 대의를 실행하려고 드디어 스스로 믿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행위하는 데에 대하여 미혹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아! 애통합니다. 변고가 끝이 없어 과거 만고에도 어찌 다시 이것이 있었으며 미래 만대에도 어찌 다시 이것이 있겠습니까? 이때에 토벌 복수하며 존화양이하여 춘추의 대의를 밝히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의암집'

그는 또 을미사변에 대해 의병을 일으킨 게 아니라 단발령에 대해 의병을 일으킨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국모가 화를 당한 것을 애통해 하는 것은 신하와 백성이 같지만, 그것은 조정의 신하된 자들 일이고 재야 백성의 일은 아니나, 단발령은 중화의 도를 끊는 것이므로 귀천과 대소를 떠나 모든 사람의 책무이므로,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곧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어 거의를 하게 되었다."고 답했다.[8] 이는 그가 춘추의 정신인 '정명주의'를 따랐음을 암시한다. 정명주의는 공자가 말한 "그 지위에 있지 아니한 자는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말을 실천하는 것으로, 그는 자신이 조정의 신하가 아닌 이상 조정에서 변고가 발생했다면 조정에서 해결해야지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지만, 단발령은 모두의 문제이므로 일개 선비인 자신이라도 나서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을미년과 정미년 연호는 명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을미년의 경우 존양의 의리를 위해서 그랬고, 정미년의 경우 새 연호를 채택한 것이 개화당의 무리가 대명의 신방이 오랑캐의 반열을 쫓아가는 일이라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고종을 황제로 높인 뒤에도 '광무'란 연호를 쓰지 않고 순종의 연호 '융희'를 쓰지 않다가, 나라가 망한 뒤에는 융희란 연호를 사용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람은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 없고 또 삭발한 머리로 참람된 황제는 황제라고 할 수가 없어 아직 선왕. 선조의 황제로 칭한 제왕을 황제로 하여 천하의 참된 임금이 나오기를 기다린다고 하셨으니(중략) 내가 그 의리를 지킨다. (중략)

우리나라는 중화가 되었다 할 수 있는데 우리 군왕을 왜국이나 서양 사람들이 칭하는 황제와 동등반열로 하므로 임금을 높이기 위해 황제라 칭하거나 연호를 안 썼다.(중략) 그러나 이제 강제로 합방되어 우리 황제 지위를 폄하하고 연호를 폐하므로 우리 임금 존숭의 뜻으로 썼다.
'의암집'

이렇듯 정명정신을 중시하는 그에게 있어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은 중화문명이 파괴되는 것이었다. 그는 1895년 복제개혁이 발표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아, 애통하다. 사천년 중화의 정맥과 이천년 공맹 대도와 우리나라 오백년 예악의 전형과 집집마다 수십 대 전해온 의관법도가 오늘날 끊어지게 되었도다. 글을 읽어 선비된 자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 선비가 지켜야 하는 바는 선왕의 도를 지키는 것이니, 선왕의 법복이 아니면 입지 않고, 선왕의 법언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선왕의 법행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선왕의 법복을 바꾸니, 이것은 그 지킴을 앓는 것이다. 그 지킴을 잃었으니 어찌 선비가 되겠는가? 이것은 천지에 죄를 짓고 성현에게 죄를 짓고,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산다한들 장차 무엇하겠는가?
'의암집'

이후 단발령이 선포되자, 그는 울분을 토했다.
원통하기 짝이 없다. 국모의 원수도 이미 절치부심하고 있는데 잔혹함이 더욱 심하여 군부가 지존함에도 또 모양을 헐고 갓을 깨고 옷을 찟는 사태를 보게 되고 또 이같이 망극한 화를 만나 장차 나라가 망할 날이 닥쳐와서 우리들 각각의 천부의 윤리도 보존할 수 없으며 우리의 몸도 금수가 되고 부모에게 받은 머리칼도 깎아야 하니 이것이 웬 일이며 웬 변이냐. 요·순·우·탕의 성왕의 전함도 금일에 일러 끊어져 버리고 공맹, 정주의 성현의 맥도 다시는 지킬 사람이 없다.
'의암집'

그가 우주문답에 써놓은 마땅한 세계 질서는 다음과 같다. 그는 중국을 '제왕'이 다스리는 것은 천지 개벽 이래 세워진 대일통의 규범이며, 중국이 외국을 '통할'하고 일국이 만국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바꿀 수 없는, 올바른 이치라고 주장했다. 그 증거라는 것이 하늘이 낙서(洛書)를 내려주어 구주(九疇)를 다스리게 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성들이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것은 천하에 도가 없기 때문이며,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국회를 구성하고 법을 의논하는 것은 도를 없애고 기강을 그르치는 것이라고 분명히 써놓았다. 그리고 가장 중국다운 것은 황제로서 대통을 세우고 공자로서 '종교'를 삼으며 오륜을 지키고 전통적인 의발을 준용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빼놓지 않았다.

유인석은 정치에서 두 가지를 가장 중요시 했는데, 법치를 하지 말고 '선정'을 베풀라는 것이었으며 ' 정전(井田)'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나라를 위해 도(道), 덕(德), 학(學), 정(政), 형(形), 문(文), 무(武)를 강조했다. 그는 삼강오상의 도를 근본으로 하여 육경과 사서를 강학하여 도덕을 이룰 수 있다고 했고 이로써 옛날의 이상적 통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면 나머지 일은 염려할 것이 없다고 했다. 유인석은 복고를 통해 강국이 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서 삼대의 학제를 회복하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을 들었다.

4. 평가

4.1. 긍정적인 평가

유인석은 구한말 국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들고 일어난 의병장들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장기적으로 투쟁한 인물이다. 그는 을미의병 때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항전했고,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뒤 의병 해산 칙령을 내렸을 때 거의 모든 의병장들이 부대를 해산하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해산을 거부하고 투쟁을 지속하다 여의치 않게 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했다.

이후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그는 연해주로 망명한 뒤 이범윤 계열과 최재형 계열의 극심한 대립으로 분열해버린 독립운동세력을 통합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이는 성과를 거두어 13도 의군이 창설되어 잠시나마 통합된 조직으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하게 했다. 그 후 한일병합이 선포된 뒤 일제의 압력으로 인해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서간도로 이동한 뒤 후학을 양성하며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다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이렇듯 유인석은 자신이 품은 '대의(大義)'를 끝까지 추구했고, 가혹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 방략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등 진정으로 한민족의 독립을 꿈꾼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관념이 수구적이고 시대에 뒤쳐진다는 비판을 받을 지언정,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이상을 끝까지 추구하면서 단 한 번도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실천적 삶은 수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그의 문하에 들어간 제자들 중 많은 이들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렇듯 유인석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이였다.

유인석의 문인으로서 독립운동에 뛰어든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4.2. 부정적인 평가

유인석은 자신의 최고 신념이었던 위정척사까지도 더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된 1910년대 이르러서도 봉건적 복고 세계관을 결코 버리지 않았으며, 그것만이 정의이고 반드시 다시 구현해야 할 사회 정의이자, 정확히 말하자면 '진리'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찌보면 위정척사의 대표격인 최익현보다도 더 극단적인 복고를 외쳤던 인물이었다. 결국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격동의 시대에서 뒤쳐지고 구시대적인 자신의 길만을 고집했다가 실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인석은 신분제도, 중화사상 지지로 비판받으면서 그중에서 위선적인 행동과 위법행위를 저지른것이 가장 심하게 비판받는다. 먼저 관찰사 김규식, 천안군수 김병숙, 평창군수 엄문환을 처형한 것이다. 물론 유인석이 평생 중화론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개화를 극도로 증오한 것을 고려해 볼때, 그가 김규식, 김병숙, 엄문환을 처형한 것은 모순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이 세 관료가 단발령을 강행했다는 것 자체가 인륜을 파괴하고 조선을 금수의 세상으로 만드는 최악의 범죄 행위라고 봤다. 이는 그가 '의암집'에서 " 을미사변은 조정 대신들이 처결해야 할 문제지만 단발령은 모두의 문제다."라고 밝힌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단발령은 중화 질서를 유일하게 간직한 조선을 서양 오랑캐와 비슷한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었고, 공맹과 주자가 이어온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비록 존왕양이를 숭상하는 입장이었지만 고종의 연호인 '광무'와 순종의 연호인 '융희'를 "개화파가 붙여준 연호"라는 이유로 단호히 거부했던 그였기에, 왕이 임명한 관료라는 사실보다 단발령을 시행해 '조선을 금수로 만들어버린'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러나 유인석이 저지른 관리 살해가 그의 생각으로 정당성이 있으며 유인석에 대한 글마다 그들을 친일파로 몰고 있지만 실제론 김규식, 김병숙, 엄문환은 일본과 내통한 정황이 없고 유인석이 그들을 살해한 이유도 그저 단발령을 강행했다는 이유뿐이다. 당시 김규식과 김병석, 엄문환은 지방 관원으로 당연히 중앙정부의 명령에 따르는 입장일 뿐인데다 단발령 시행과 친일은 관련없는 사안인 만큼 유인석이 관료들을 살해하고 다니는 건 어떠한 정당성도 없는 명백한 반역에다 살인 행각일 뿐이다. 이런 건 그가 평소에 주장하던 존왕양이 정신의 척화사상에 위배된다. 아무리 그래도 동학도를 배척했으면서 자신도 동학도와 같이 지방관료를 그것도 악질 탐관오리가 아닌 황제가 임명한 일반 관료를 함부로 처형하였기에 같은 척사파이자 존왕양이파인 최익현보다 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최익현도 유인석과 마찬가지로 수구적이었지만 역신과 매국노가 아닌 이상 황제가 임명한 일반 관료는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인석은 의병 활동 당시에 평민 출신의 의병 지휘관인 김백선을 독단으로 처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사건 자체는 조금 더 복잡한 사건이었는데, 김백선이 항명한 안승우는 유인석과 달리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양반 가문 출신의 의병장으로 후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장이었다. 김백선의 원군 요청을 안승우는 '대장을 옹위해야 하는 중군의 소임 때문에 병사를 함부로 뺄수 없다.'며 무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크게 패한 김백선은 격분하여 원군을 안 보냈다며 안승우의 면전에서 칼을 빼들고 항명하다가 곁에 있던 유인석이 부하를 시켜 김백선을 군기 문란죄로 처형한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칼을 빼들고 항명하였다고 해도, 김백선의 지휘계통상 직속상관인 안승우가 처벌할 일이지 총사령관도 아니고 옆부대 지휘관인 유인석이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래서 이는 명백한 직권남용에다 공식적인 재판이나 절차에 따르지 않은 사적제재와 살인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 갑오개혁으로 개선된 형법 기준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게다가 유인석은 김백선을 처벌하면서 '그대는 본시 한낱 포수에 불과한 상민이었거늘, 어찌 분수를 모르는가? 여봐라! 저자를 군령위반 죄로 다스려서 포살하라!' 라며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이를 그대로 이야기하며 처형하는데 사실 어딜봐도 단순히 군령위반으로 처벌했다기 보다는 신분제를 중시했던 유인석의 한계가 강하게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단순히 유인석이 양반 신분을 이용하여 싫어하는 평민 출신 지휘관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고 평민을 대놓고 아랫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 결국 이로 인해 제천 의병 등 다른 평민 출신 의병들이 유인석의 행위에 크게 반발해 대거 이탈하면서[9] 의병은 결국 패배하게 된다.

사실 일본군에게 패퇴할 당시 김백선은 원군을 요청했지만 안승우는 대장을 호위해야 하는 중군의 소임 때문에 원군을 보낼 상황이 못 되었고, 그래서 대신 다른 의병장들이 원군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보내겠다고 해놓고 결국 보내지 못했거나, 기껏 보낸 원군이 정작 전투를 기피하고 퇴각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문에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대거 잃고 패하여 분노한 김백선은 알려진 대로 본영으로 돌아가 안승우에게 칼을 빼들며 따지며 분노했고, 진작부터 김백선을 곱지 않게 보던[10] 유인석은 군율 위반을 이유로 김백선을 처형했다. 또한 당시 상황상으로 안승우가 지키는 지역은 방어에 유리한 제천성으로 일본군에게 빼앗길 경우 허리가 잘리는 모양이 되어 심각하게 불리해질 수 밖에 없으며, 실제로도 김백선 처형 이후 일본의 재공세에 함락되어 안승우도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게 될 정도로 공세가 강하게 집중된 지역이었다. 군 지휘계통과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때, 처형까진 아닐지언정 처벌이 필요하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유인석이 즉시처형이라는 가혹한 조치를 하는 바람에, 의병 내의 양반과 평민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평민 출신의 포수들과 농민들이 김백선의 처형에 반발하며[11] 양반 의병장 지휘에서 대거 이탈하여 독자세력을 만들었고 이는 가뜩이나 허약한 의병세력의 분열을 초래하여 의병이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유인석이 "나라가 망하더라도 공맹과 주자가 이어간 오랜 질서를 지키는 것이 중하다."는 사고관을 끝까지 고수한 데서 비롯되었다. 군사적으로 유능한 평민들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외적에 대항하는 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김백선의 일을 그대로 묵과해버린다면 차후에도 비슷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평민이 양반을 우습게 보는 등 신분질서가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다. 개화파를 조선을 금수로 만든 역적으로 여기고 개화파가 실시한 갑오개혁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그는 갑오개혁으로 인해 신분제가 철폐된 것 역시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김백선을 처형한 건 유인석의 입장에선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의병은 단합해도 승패를 장담할수 없는 상황에서 유인석이 독단으로 김백선을 처형하는 월권행위를 저지르고 본인의 봉건적인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어 의병들의 반감을 크게 사게된것은 의병의 단합을 파괴하는 행위였으며 이는 의병을 실패하게 만드는데 큰 원인을 제공한터라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실책이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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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7세손 석(錫) 항렬. 유관순 열사 및 유관순 열사의 오빠 유우석(柳愚)과 같은 항렬이다. [2] 인근의 발산리와 함께 고흥 류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유봉석· 유중악· 유하석· 유홍석도 이 마을 출신이다. [3] 이때 중국에서 반일운동가로 활동하자 그에게 분노한 일본에서 암살자들을 파견하여 암살을 시도했으나 유인석이 사전에 도주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4] '의암집(毅庵集)' 부록 '년보(年讀) 699쪽. [5] 독립유공자 한기수와 동명이인이다. [6] 회비경송(會秘警送) 제 706호(1908년 11월 22일) [7] 용연김정규일기(龍淵金鼎奎日記) 1910년 3월 7일자 기록 [8] '소의신편' [9] 특히 제전의병의 핵심적인 간부였던 민의식과 서석화가 가장 심하게 반발하며 김백선이 처형된 다음날에 바로 휘하 병력들과 함께 의병을 이탈했다. [10] 당시 유인석 진영에서는 김백선이 유인석이랑 의병 수뇌부와의 갈등이 심하여 자기가 이끌던 포수들과 함께 독립을 한다느니, 심지어 김백선이 윗선을 다 엎어버리고 자기가 대장이 되려 한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돌았다. [11] 특히 조선의 신분제는 1894년에 법적으로 폐지되었기에 유인석이 이를 알면서도 김백선을 양반에게 항명한 죄로 처형한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의병 지도부가 월권행위를 저지른 유인석을 처벌하지 않다보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12] 초반에 제천의병의 숫자가 3500명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유인석이 의병을 해산시킬때까지 남아 있었던 제천의병이 초기의 10%도 안되는 219명에 불과했다. 특히 다른 의병들도 김백선 처형을 알게되고는 유인석에게 협력하는것을 끝까지 거부했고 유인석이 의병을 해산시킬때까지도 협력하지 않았다. 이만큼 유인석의 행위가 의병들한테서 분노를 크게 샀던 것이다. [13] 이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