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07:38:17

김인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파일:김인전.jpg
이명 인옥(仁玉)
경재(鏡齋, 經齋)
본관 김해 김씨
출생 1876년 10월 7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촌리
사망 1923년 5월 12일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정묘역
서훈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교육계몽운동2.3. 대한민국 임시정부2.4. 갑작스런 사망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김인전은 1876년 10월 7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촌리에서 수원군수를 역임한 부친 김규배(金奎培)와 모친 김씨 사이의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6살 때부터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김해 김씨 족보'에 따르면 남다르게 총명하여 유교 경전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불교·도교 등에도 학문적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뛰어난 문재를 지니고 있어 한시를 잘 짓고 서예도 일가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같이 독립운동에 종사했고 서예에도 능했던 신익희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경재 선생에게서 한학을 다시 배웠고, 그분의 학덕에 감복했다.

한편 김인전은 기독교에 입교하고 이상재와 함께 황성기독청년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을 펼친 아버지 김규배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27세 때인 1903년에 기독교에 입교했고 서구의 사상을 익혔다.

2.2. 교육계몽운동

1906년 11월, 김인전은 가산을 털어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에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교육계몽운동에 착수했다. 그는 후학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국권을 회복할 길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데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김인전은 한영학교의 운영을 작은아버지에게 인계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는 1911년 창설된 장로회 계통의 신학교였으며 이승훈, 길선주, 양전백, 송병조 등 많은 독립투사들을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김인전은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동기생이었던 송병조와 교분을 쌓아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한편, 김인전은 방학 기간을 이용해 전북 군산의 영명학교에서 임시 교원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했으며, 산중에 있는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강론을 통해 민중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그리고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주 서문외(西門外)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활동, 예수교 장로회 성경학교 교수·전북노회장(全北老會長) 등의 교직을 이용한 전도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서문외 교회는 곧 신흥학교 기전 여학교 등의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암암리에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비밀리에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송죽형제회(松竹兄弟會)를 조직했다.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3월 5일, 군산에서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김인전은 3월 13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학생 및 교사,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을 규합해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로부터 시위 주동자로 지목되자, 그는 한동안 잠적했다가 마침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하이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상하이로 망명한 김인전은 임시정부의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으로 임명되어 공채 발행을 통한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을 맡았다. 그리고 1920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어 재무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상임위원회, 그리고 정무조사특별위원회 군사분과 위원을 도맡았다. 이듬해 4월 6일 제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5월에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교민 자제의 교육을 위한 교과서 편찬을 추진했고, 인성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해 직접 민족교육을 지도했다.

1921년 중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열강들이 군비 축소 문제와 극동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켜 파리강화회의 때 이루지 못한 조국 독립을 관철시키기 위해 임시 대통령으로 미국에 상주하고 있던 이승만을 전권대사, 서재필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해 회의에 참여시키게 했다. 또한 임시의정원은 외교단을 지원하기 위해 1921년 8월 17일 홍진과 김인전을 비롯한 모든 의원이 참석한 태평양회의 외교회원회를 조직했다.

그해 9월, 김인전과 회원들은 한국 독립의 승인을 요구하는 대 태평양회의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다음 3가지의 행동 강령을 발표했다.
1. 태평양회의에 참여한 열방(列邦)이 동양평화의 근본문제인 대한독립을 완전 승인하기까지 적극적 활동을 계속할 일
2. 내외 각 지방에 있는 각 단체나 개인은 물론이고 호상 연락을 취하여 성히 고취하고 선전하여 일치 행동을 도모할 일
3. 전 국민으로 하여금 대내외에 맹렬한 운동을 행하게 하고 상당한 금전을 수합하여 경비에 충용할 일

또한 외교후원회는 그해 10월 이승만과 서재필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은 사안을 제안하도록 지시했다.
1. 각국 정부에 대하여 우리 대표를 출석 참가케 함을 요구할 것.
2. 열국에 대하여 우리 대한의 완전 독립 승인을 요구할 것.
3. 일본에 대하여 일본이 한국을 병합함이 불법행위 또는 강박에 의함을 긍정하는 동시에 병합 이래 대한국가 또는 국민에게 입힌 일체 손해를 배상케 함을 요구할 것.
4. 중화민국의 주권과 영토권을 완전 회복케 하며 국제간 평등권을 향유케 함을 요구할 것.
5.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침략 정책을 방지하여 무조건 철병을 요구할 것.

1921년 11월 11일 태평양 회의가 열렸다. 이에 김인전은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 신익희 등 동료 의원 25명 전원과 함께 세계의 평화, 동아의 행복과 정의 인도를 위해 한국 독립 및 자주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하는 한국독립청원서를 각국 대표들에게 발송했다. 그리고 송병조, 손정도, 김병조, 이원익 등 평양신학교 출신 목사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대한야소교진정회를 통해 각국 정부와 교회 단체에 한국의 실정과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발송하게 했다. 그러나 태평양회의는 한국 문제에 대한 어떠한 공식적인 토의를 하지 않은 채 막을 내렸고, 임시정부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1922년 2월에 열린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인전은 전원 위원회 위원장 및 내외무상임위원회, 재무상임위원회, 교육실업상임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했다. 또한 한국과 중국의 우호를 돈독히 하기 위해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고 위원을 역임했다.

1922년 4월 3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이후 민의를 수렴한 입법활동, 임시정부의 유지 강화, 독립운동 활성화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시기 상하이에서는 독립운동가들 간의 갈등과 대립이 지속되었다. 1921년 1월 26일엔 이동휘 국무총리가 사임했고, 5월 12일엔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 주요 국무위원이 사퇴했고,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같은 해 5월 하와이로 돌아간 뒤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탄핵당했다. 이렇듯 임시정부가 혼란에 휩싸이자,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임시정부를 아예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를 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졌고, 임시정부 수호 지지자들은 이에 맞서 개조론을 제기했다.

김인전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22년 7월 안창호, 신익희, 김구, 조소앙, 이시영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했다. 그는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준비위원회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켜 국민대표회의가 원만히 개최될 수 있도록 힘썼다. 한편, 그는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적 노력이 별 성과 없이 끝나자 무장 독립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2년 10월 1일 상하이에서 김구, 손정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조직을 추진했다. 10월 28일 한국노병회가 발족했을 때, 김인전은 이사 겸 경리부장에 선임되었다.

2.4. 갑작스런 사망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김인전은 3월 3일부터 전라북도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연일 계속된 회의에서 각 지역 및 단체 대표들과 조국 광복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하고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통일적 최고 기관으로 개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그의 생각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가 주축이 되어야 한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개조해야 한다는 개조파 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이런 상황에 낙담한 데다 그동안 과로하느라 심신의 피로가 겹친 그는 5월 3일 하숙집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그는 상하이 동인병원에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5월 12일 사망했다. 향년 48세.

김인전의 장례식은 5월 14일 임시정부 주관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외인묘지에 안정되었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중국 정부에 의해 상하이 송경령능원 내에 안치되었다가 1993년 8월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등과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임정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김인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