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7:23:27

이순신/평가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이순신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a0000, #a52a2a 20%, #a52a2a 80%, #6a0000)"
{{{#!wiki style="margin: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52a2a><tablebgcolor=#a52a2a> 파일:이순신 수결 흰색.svg 이순신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a52a2a><colcolor=#fff> 소속 <colbgcolor=#fff,#1f2023> 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생애 생애 · 전투 관련 · 여담
관련 장소 이순신이 태어난 곳 한양 건천동 · 이순신 일가의 생가 아산
이순신의 묘소 장군묘 · 이순신의 사당 현충사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 명량수도 ·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 이순신대교
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관련 물건 쌍룡검 · 백원 주화 ·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작품 장계별책 · 난중일기 · 이충무공전서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용모 · 창작물
평가 관련 기록 · 평가 · 의문점
창작물 성웅 이순신(1962) · 성웅 이순신(1971) · 난중일기(영화) · 칼의 노래 · 천군(영화) · 명량 · 한산: 용의 출현 · 노량: 죽음의 바다 · 칼의 노래(뮤지컬)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이순신 서명.svg }}}

}}}}}}}}} ||

1. 개요2. 각종 기록에서3. 사후 조선에서4. 현대 한국에서
4.1. 독재 정권 관련4.2. 정치적 견해에 따른 폄하4.3. 한국 인터넷상에 퍼진 오류들
5. 일본에서6. 북한에서7. 중국에서8. 서양에서9. 이순신 범장설
9.1. 부정론9.2. 긍정론
9.2.1. 다른 장수들과 비교할 때9.2.2. 함포 운용의 어려움9.2.3. 일본 수군의 강점9.2.4. 이순신의 실제 전투 방식9.2.5. 무기 우위의 상대성9.2.6. 출중한 군정 능력
10. 무예

[clearfix]

1. 개요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난중일기》, 을미년(1595년) 5월 29일. 이순신 본인이 스스로 내린 평가[1]
이순신은 뛰어난 군사 능력[2]을 십분 활용하여 초반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고, 계속해서 승전을 거듭한 끝에 조선 패망의 위기에서 구해냈다.[3]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전투에서 빛나는 전승을 거두고 단 한 번의 패배는커녕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은 해군 제독은 이순신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육상까지 포함해 세계 역사를 고루 둘러본다고 해도 이처럼 전설적인 신화를 이룩해낸 명장 잔 다르크 정도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세계의 전사(戰史)에서 일컬어지는 '전장의 신화'를 쓴 명장이 이순신 하나뿐인 것은 아니나[4]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정복자이며, 이들이 이뤄낸 전과의 동기는 현대 기준으로는 좋게 보이지 않는 패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들을 싫어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싫어한다.

비록 이순신은 조정, 특히 국왕의 의심을 받아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처분을 받은데다, 몇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일구어낸 병력과 물자들이 원균이라는 무능한 지휘관 탓에 모조리 사라지고, 전란 중에 난중일기를 통해 그토록 애달프게 그리워하던 어머니와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까지 모두 잃는 아픔까지 겪었지만, 한 마디 불평 없이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끝까지 싸워 승리를 얻은 만큼, 이순신은 그의 능력뿐만 아니라 성품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명장이나 구국영웅을 넘어선 성웅(聖雄)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순신에 대한 존숭은 국내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어서, 콧대가 높았던 진린도 이순신의 인품에 감복하여 나중에는 자신보다 두 살 적은 이순신에게 노야라는 극존칭을 사용하며 존경하였고 훗날 노량에서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할 정도였다. 심지어 적국이었던 일본에서도 이순신을 무신(武神)이라 치켜세우며 그를 기리는 사당까지 있는 실정이고,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가문은 한산도 대첩 패전일인 8월 14일(음력 7월 8일)에는 하루 식단을 전부 미역으로 하는 전통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역사 속의 여러 명장이나 위인으로 불리는 인물 대다수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나 인격과 성품, 가족관계에서 하자를 드러내거나 문제가 되는 사건에 휘말려 후대에 저평가를 당하는 경우도 적잖은데, 이순신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단 하나의 흠결마저 나온 것이 없다. 오히려 맨 앞의 서문처럼 난중일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순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인물이 이순신 본인이었다.

종합하자면 이순신은 그야말로 훌륭한 참군인의 표상 그 이상인, 위대한 인물이었다.

2. 각종 기록에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각종 기록에서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이순신 사후 조선에서 이순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리한 문서이다.

3. 사후 조선에서

이순신은 죽기 이전부터 이미 조선을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고, 선조를 제외한[5] 후대의 들과 신하들도 한결같이 모범적인 장수이자 중국의 명사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인물로 칭송하였다.

이순신 이전까지 조선에서 군사 문제를 논할 때 비교 기준은 중국이었다. ' 손빈, 한신의 계책', ' 송나라 악비' 등과 같이 중국의 이름난 명장들의 사례를 제시하며 비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사후 조선의 군사 문제에서 비교 기준은 이순신이 되었다. 신하들이 군사 관련 안건을 논할 때 "이순신의 계책에 따르면..."이라 하며 언급한 것이 실록에 여러 차례 대놓고 실려 있을 정도. 중국 역사에 능통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보기에도, 이순신만한 인물은 역사를 통틀어 중국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6]가 왜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 《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 1598년 11월 27일의 사관 논평[7]

상께서 말씀하셨다. " 전조 때에는 비록 군사력이 강하였어도 외적을 토벌하기가 어려웠는데, 변란이 잇따르니 진실로 경의 생각을 듣고자 한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소신이 보아하니 고 통제사 이순신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지금에는 이순신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왜란 때에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옛적의 대신들은 반드시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만한 인재를 천거하여 주겠는가?"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쓸 만한지를 어찌 알고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는 신이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고 그가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천거하여 다시 그를 통제사로 추천하였습니다. 신은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을 등용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도 비변사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일을 그르친 뒤에야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나 그땐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8]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9]
ㅡ 《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린 인조 이원익[10]의 대화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함이 마치 음식이나 여색을 즐기듯[11]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후략)
이항복, 《충민사기》

수군 통제사는 진실로 하늘이 낸 거룩한 분으로, 일선 장수에 임명되자 변경에 크게 자리잡고 한산 섬에서 적의 바닷길을 끊으면서 여섯 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수를 바꾼 일은 본래 적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장군이 군사를 내는 시기를 그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한 뒤에 아홉 척의 배와 남은 군졸로써 여러 번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으니 그 공은 종에 새겨 길이 남길 만한 일이요, 노량(露梁) 싸움에서 공이 임종할 때에 죽음을 숨기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싸움을 계속할 것을 분부하자 아들이 그 명령대로 하여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꾀가 더욱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ㅡ 《달천몽유록》, 1600년 소설[12]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
류성룡, 《징비록》

이순신(李舜臣)을 등용한 한 건(件)은 바로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었다.
허균, 《성소부부고》 #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꺾은 것은 저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13]과 같고 몸소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만둔 것은 저 제갈무후와도 같다. 그러나 나라 일에 죽은 것은 이들과 같을지라도, 큰 공을 거둔 이는 오직 공 한 분뿐이다.
김육, 『통제사이순신신도비명』

조그만 웅덩이에는 큰 고기가 없고, 작은 나라에는 큰 사람(巨人)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통제공 같은 분은 바로 그 수립한 바가 옛 사람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주아부ㆍ이서평(李西平 : 당나라 때의 명장 이성李晟)ㆍ 악무목 등에게 손색이 없으니, 심산 대택(深山大澤)의 용호(龍虎)와 같이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괴걸(魁傑)[14]한 인물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휴, 《백호전서》 중 <통제사이충무공유사>[15]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16]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17]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효종, 《조선왕조실록》 효종 11년 / 1659년 윤 3월 30일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숙종 현충사 제문》

이 충무공이 나옴으로써 조선이 망하지 않았고 통제영이 완성됨으로써 왜구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불식되었다.
ㅡ 원중거, 《승사록》[18]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정조, 《 홍재전서[19]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충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
정약용, 《 경세유표

전후 선조는 이순신을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했으나 선조 자신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20]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하였다. 이는 주위에서 모두 반대했음에도 선조 혼자 우겨서 이뤄낸 어이없는 성과(?). 그러나 당장 선조 사후부터 원균은 먹튀의 대명사가 되었고,[21] 이순신은 더할 나위 없는 조선의 성웅이 되었으며, 이것으로 아무리 왜곡하려 해도 왜곡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이순신의 시호인 '충무공'을 선조가 내린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인조 때 붙여진 시호다. 정확히는 1643년(인조 21년)에 내려진 시호라서 공이 죽은 후 꽤 오래 뒤에 붙여진 셈이다. 애당초 이순신 깎아내리기에 바빴던 선조가 원균을 1등공신으로 만드는 꼼수를 썼을지언정 결국 이순신이 1등공신이 된 것만 봐도 그 누구라도 이순신의 공을 가릴 수는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8년(1808년) 1월 10일
조선시대에만 해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서 충무공의 사당을 세운 경우가 있다.[22] 또한 위의 순조실록의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듯 이순신 사후 200년 이상이 지난 순조 시대에 이르러서도 통영 백성들은 이순신의 기일에 모두 소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이순신의 운구 행렬 때 백성들의 통곡만 봐도[23] 그가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순신은 간과(干戈)[24]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을 만들었는데 옹진이 아무리 피폐하였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ㅡ 영조, 《조선왕조실록》 영조 20년 / 1744년 2월 20일. 당시 황해 수사 박문수가 경비정을 만들 예산이 부족하다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자 내린 답변
다만 이처럼 하도 곳곳에서 칭송과 존경을 받고 대를 거듭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조정에서도 비교 기준으로 등극하다 보니, 조선 후기에는 관리들이 정말 어려운 사정에 처했더라도 이순신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냈는데 넌 왜 못하냐?!라는 식으로 갈굼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사례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어사 박문수. 박문수가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재직하던 시절 청나라 선박들이 불법 어업 및 밀무역을 숱하게 행하자 이를 단속하기 위한 함선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이에 필요한 예산 지원을 조정에 요청했다. 하지만 영조로부터 "이순신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대를 만들었는데 넌 고작 그거 하나 못해서 이렇게 찡찡대냐? 네가 알아서 해라"라며 퇴짜를 맞았다.[25][26]

이순신의 후손들은 너무 위대한 무장을 조상으로 둔 죄로 소질과 적성이 모두 무시된 채 반강제로 무과에 응시해야 했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는 조선 최고의 무반 명가로 자리잡았는데 이순신 아래로 무려 267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한 반면 문과 급제자는 단 1명에 불과하다.[27] 장남 이회 계열에서 114명, 차남 이열 계열에서 151명, 여기에 후사를 이어가지 못한 서자 이훈과 이신까지 합해 총 267명으로 특이하게도 선조~경종대까지는 몇 명 되지 않다가 영조 시기부터 급등해 고종 시기에만 93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순신의 장남 이회(李薈)와 조카 이분(李芬), 이완(李莞), 이봉(李菶)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숙부 곁에서 의병 신분으로 종군했다. 조카 이완은 정묘호란 당시 끝까지 싸우다 여의치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서자 이신(李藎)은 이완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서자 이훈(李薰)은 이괄의 난 때 전사하였다.

이런 모습은 이후로도 계속되어서 이인좌의 난 때 이순신의 후손이었던 5대손 충민공[28] 이봉상은 처조부가 윤휴였던 이인좌의 거듭된 설득에도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역적에게 항복할 순 없다며 항거하다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윤휴가 등장한 이유는, 다름아닌 자기 서형의 반려자가 이순신의 서녀였기 때문이다. 즉 윤휴의 형의 장인이 이순신이었다. 그리고 9대손 이용희(李容熙)는 병인양요에 참전했으며 형조판서를 거쳐 어영대장, 훈련대장, 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심지어 충무공의 13대손과 14대손은 독립운동가로서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또한 그 유명한 삼도수군통제사에도 역대 208명의 통제사 중 13명이 덕수 이씨 충무공파로, 이는 전주 이씨, 전의 이씨 다음으로 많은 것이다. 덕수 이씨와 앞의 두 성씨의 인구수 차이를 고려하면 놀라운 저력이다.

후손들도 이런 내력에 대해 부담스러워했는지, 이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 매천야록》에 실려 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당시 실각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던 대원군에게 이순신의 8대손인 이문영이 배알했다. 흥선대원군이 그에게 일본을 물리칠 방안을 물어보자 이문영은 거기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묻자 자신도 이렇게 못났는데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도 어찌 잘났겠는가[29]하고 대답했다고. 실제로 운요호 사건을 이끈 구로다 기요타카가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실없는 대답 같지만, 사실은 흥선대원군이 먼저 농담으로 꺼낸 질문에 이문영이 재치있게 맞받아친 것에 가깝다.

구한말 일제강점기에도 이순신의 후손 중 12명이 독립 운동을 하였고, 10명이 독립 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2013년 1월의 이달의 독립 운동가 이민화도 이순신의 후손이다. # 이민화는 김좌진의 부관으로 김좌진의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처럼 대대로 무신 명가로서의 명예를 지켰으나, 역시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후 종친회 내부의 알력 다툼 속에 충무공의 유물이 암시장에 나오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4. 현대 한국에서

"지금 《이순신전》을 선택해 고통에 처한 우리나라 국민에게 양식으로 삼게 하노니,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노라!"
신채호, 《이순신전》마지막 부분 中
"아직 조선이 망할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30]
"실로 하늘이 내린 인물. 그가 아니었다면 조선은 그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리라. 원칙적이고 기본을 중시하는 태도, 피아의 역량과 지형지물을 정확히 판단한 데 따른 창의적인 전략전술, 필사즉생의 정신, 선비보다도 더 선비다운 풍모와 자기 절제, 나라와 백성, 대의를 철저히 앞세우는 모습에서 '성웅'이란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은 인물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후기> 中[31][32]
파일:8Zxl47o.jpg }}} ||
DDH-975 충무공이순신함
* 대한민국 KD-2 구축함 1번함인 DDH-975 충무공이순신함은 당연히 충무공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후 동일함급은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이 된다. 하지만 밀덕들은 충무공이라는 상징성 강한 명칭을 고작 구축함에 사용한 것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35] ' 항공모함까지는 무리더라도, 이후의 이지스함에다 쓸 수도 있었는데 좀 참지…' 정도의 뉘앙스. KD-3 이지스함은 결국 세종대왕급으로 명명되었고, 이 중 3번함에 이순신의 조력자였던 류성룡의 이름을 딴 '서애 류성룡'이 붙여졌다.[36] 아무래도 해군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한국형 이지스함에 대왕 칭호가 붙을 정도로 이순신 장군 못지않은 국민적 존경을 받는 세종대왕을 붙이는 것도 합리적인 건 마찬가지이고 또 이순신 장군의 성격이라면 구축함이라도 불만이 없을 거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오히려 충심 깊은 이순신 장군의 성정에 비춰 보면 자신의 이름이 선왕보다 높은 함급에 붙으면 불충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다만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2016년 들어 최근 거론되고 있는 대한민국 해군의 핵잠수함 건조 추진이 만약에 이루어진다면.... 심지어 2017년 12월에는 F-35B 도입을 통한 항공모함 건조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 기대해보자.[37]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090511032620a000a010-001.jpg }}} ||

* 숫제 서울시는 광복 전 일본인들로 넘쳐나 왜색이 짙었기 때문에, 일본의 기를 누르기 위해 경성부 본정목에 충무로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다만 이 때문에 이순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띄워준 것이라고 왜곡되기도 하는데, 이미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에서부터 널리 숭배하던 인물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이미 전국에 크고 작은 이순신 사당이 여럿 세워졌고 민중에게 많은 존경을 받아왔다. 물론 추숭도 언제나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에 특별히 더 유난히 평가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없다. 역대 추숭을 찾아서 정리한 글 이를테면 중국 민중의 관우 신앙과 비슷하다.

4.1. 독재 정권 관련

일설에는 이순신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 국민들을 단합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악용된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49] 시기적으로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띄워진 위인이라는 요지이다. 다만, 이순신은 조선시대부터 저명했으며 교과서에 이미 등장했던 실제 유명했던 위인이었기 때문에, 유명한 것과 별개로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동시에 '이순신'이 문화 산업 안에서 캐릭터로서 주인공으로서 다뤄지기 시작한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1962년 무용극 성웅 이순신이란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물론 역사적으로 파시즘 성향의 국가나 세력이 과거의 전쟁 영웅이나 위인을 프로파간다로 악용한 사례는 상당히 흔하고,[50] 한국 역시 그러한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심지어 이순신 장군이 무명은 아니어도 생각만큼 유명하진 않았는데, 과거 군사 정권이 이순신을 띄우는 프로파간다로 유명해졌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한 주장이다.

물론 멸사봉공이란 문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전체주의적 요소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멸사봉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제 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 길들이기에 자주 사용하면서 등장한 단어로써 멸사봉공이라는 단어에서의 '공'이란 다름아닌 일본 제국주의 전쟁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일본 측 위키피디아 설명에서는 < 전국책>의 진책에서 따온 단어로 패전 이전까지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교육으로써 도입됐으며, 일본 기업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는 기업 내 (마치 봉건 시대 주군과 가신 사이의 관계나 다름없는) 상하 관계를 지칭하는데 쓰이기도 하고, 과도하게 강조될 경우 자신의 희생이 요구되는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출처 : 이윤옥 저 <오염된 국어사전> 27쪽 ~ 32쪽 및 일본어 위키피디아 '멸사봉공' 설명)

그러나 당시는 지금 같은 천부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백성[51]은 왕을 섬기는 게 당연한 것이고, 왕과 국가[52]를 구분할 줄도 몰랐다. 같은 나라 안에서 왕이 바뀐다면 몰라도 외세에 의해 왕이 살해 당한다면 그건 나라가 망했음을 의미한 게 그 시절이었다. 그 둘이 나뉘게 된 것은, 즉 '시민'이란 개념이 생긴 건 프랑스 혁명 이후다. 당연히 파시즘이란 개념도 민주주의의 대척점으로 생겨난 것. 따라서 이순신의 언행을 두고 전체주의 운운하는 건 온당치 않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순신은 파시스트였던 게 아니라 당시 충효사상을 강조하던 유교 사회에 태어나 살았던 인물일 뿐이고,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 자체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논리는 과거의 역사적 인물을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의 사상과 관점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은 당시 시대를 감안해도 충분히 훌륭한 인물이었다. 지장, 용장, 명장일 뿐만 아니라 덕장의 면목도 충분히 갖췄다. 이순신과 대비되는 원균의 경우 수급을 얻겠다고 죄 없는 백성들 목까지 베었다는 것이나 이순신이 죽자 남도 백성들이 통곡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이러한 반발로 인해 민주화 이후에는 역으로 '이순신은 조선 왕조가 아닌 백성에게 충성했다'라고 주장하며 이순신을 민본주의적 영웅으로 표현하는 창작물들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방향만 반대일 뿐 무리하게 이순신의 성향을 왜곡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랬다면 역성혁명 혹은 자살 의혹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왕권국가인 조선에서 나고자란 이순신의 충성은 왕과 백성 모두에게 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기에 왕 혹은 국가만을 생각했다는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와 백성만을 생각했다는 민주화 이후의 주장은 모두 이순신이 가진 충성의 단면만 두둔하는 것에 불과하다.

4.2. 정치적 견해에 따른 폄하

21세기에 들어와서 한국 사회에 헬조선 담론을 위시로 한 자국 혐오와 탈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지다 보니, 이런 두 가지 성향을 따르는 사람들이 탈민족주의 시각이 강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나 진영논리에 함몰된 사람들도 이순신을 폄하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박정희를 싫어하는 한국 강성 좌파 운동권에서는 이순신을 띄워준 박정희를 싫어하다 보니, 진영논리로 그 이순신의 대척점에 있는 원균을 띄워주고 "사실 원균은 용맹한 장군이었는데 이순신 성웅화 작업을 주도한 박정희 때문에 억울하게 간신이 되었다."라는 원균명장설을 내세운 바 있었다. 심지어는 "이순신이 원균을 질투해서 그의 공을 가로챘다."라거나 "이순신의 능력은 사실 별거 아닌데, 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가짜 영웅이다."라든지 "이순신은 조선 시대에 전혀 인정을 못 받았고 아무도 알지 못한채 그대로 묻혀 버렸는데, 박정희가 집권하면서(혹은 일제가 이순신을 찾아내서) 다시 발굴해서 띄워준 엉터리 영웅이다."라는 식의 역사왜곡마저 서슴치 않는다.[53]

원균명장설이 꽤 열풍을 일으켰던 1990년대에 나왔던 이순신이나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 중에는 이런 식의 이순신 폄하론을 실은 것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1994년 4월 출간된 재야의 괴벨스 고정욱의 소설 <원균 그리고 원균>과 1998년 10월에 출간된 김탁환의 소설 <불멸>과 1999년 9월에 출간된 신봉승의 소설 <권율> 또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순신의 전공은 하층 계급, 즉 일반 병사들과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이야말로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인데, 이런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근대 이전의 역사나 문화 유산들은 모두 지배층들이 피지배층들을 착취해서 만든 나쁜 것이므로 없애버려야 한다."는 홍위병이 되기에 딱 알맞다.[54]

다만 NLPDR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국내 좌파 운동권에서 쪽수가 많은 정파의 특성이 특성이다보니, 과거 운동권 출신치고 맑시즘 사관에 취해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편이고 지금도 그렇다.[55] 문제는 어설프게 맑시즘을 경도된 인물들은 상당히 많으며, 젊었을 때 구축된 사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들이 원균명장설을 지지하는 경우도 꽤 많다.

또한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이 박정희 집권 무렵에 세워졌다고 해서 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다소 특이한 경우지만 진보 진영 인사이자 맛 칼럼니스트인 황교익은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철거를 긍정하는 주장을 한 일이 있었다. #

그리고 이를 빌미로 한국의 모든 진보/좌파 성향 사람들이 이순신을 폄하한다고 매도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애초에 이런 진영논리로 이순신을 비하하는 작태를 보이는 몰상식한 사람들은 진보 세력 내에서도 극히 비주류일 뿐이며, 국가와 민족의 영웅으로 이순신을 고평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더 나아가서 진보적인 민중사관에 입각해서 이순신을 민본주의 성향의 영웅으로 재해석하는 주장들과 이를 반영한 창작물들도 나오고 있다.

또한 진보 인사들만 이순신을 폄하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보수 우익이지만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잡지인 미래한국에서는 영화 명량을 두고 "이순신은 엄연히 명량해전에서 패배했는데, 왜 영화 명량은 그런 이순신이 명량에서 이겼다고 역사왜곡을 했느냐?"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애당초 이순신 폄하의 가장 큰 결정체인 원균옹호론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좌우 구분이 없다. 당장 원균의 후손으로서 원균을 적극적으로 미화하는 정치인의 당시 소속 정당도 보수에 속한다.[56] 이 외에도 보수 우익이면서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가인 백지원도 그의 책인 조일전쟁에서 이순신을 다분히 폄하하는 시각을 드러냈다.

또한 탈민족주의와 자국혐오 일뽕 성향이 강한 네티즌들이 활동하며 보수 지지자들이 많은 일베나 디시 같은 사이트들에서는 이순신이 굉장히 폄하당하고 있다. 한 예로 2005년 지금은 없어진 모 인터넷 사이트에서 루XX[57]라는 닉네임을 쓰는 네티즌이 "한산도 대첩은 날조다", "영국 해군 제독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가 자신의 책에서 이순신을 찬양한 일이 없다. 내가 그 책을 갖고 있어서 안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순신을 마구잡이로 폄하하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여러 사료들에서 찾아내 제각기 반박을 하는 등[58] 한국 인터넷의 여러 게시판들이 한동안 매우 시끄러웠다.

4.3. 한국 인터넷상에 퍼진 오류들

다만 한국에 이순신에 관한 여러 잘못된 정보들이 퍼져 있긴 하다. 과도한 국뽕으로 부풀린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

많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순신이 지금까지 칭송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명량 해전이나 노량 해전 같은 일부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고), 비록 병력 측면에서 일본군에게 열세였음에도 늘 적절한 인력배치로 개개의 전장터에서만큼은 자신의 병력을 적의 병력보다 많게 유지하였던 뛰어난 전술적 식견에 있다.[59] 항상 열세인 상황에서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만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단지 명량의 결과가 이러한 과장에 불을 붙일 정도로 극적인 승리란 점이 큰 영향을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5. 일본에서

파일:attachment/uploadfile/46db00d7cf851bf4d93ad179b2ef317a.jpg

옛날 일본에서는 대략 이런 식의 맹장 이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1854년 일본의 출판사 금행당에서 발간한 《조선정벌기》라는 책 속의 이순신. 이 책은 임진왜란 전까지의 조선 역사를 서술하고, 전쟁 진행 상황을 일본 처지에서 그림으로 서술한 책이다. 한반도 모양에 맞춰 그린답시고 고증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지만, 제법 무섭게 그렸다. 특히 들고 있는 방천화극. 《징비록》이 일본에서 발행되면서 처음 알려졌지만,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는 김시민에 비해 인지도가 낮았고, 이후 메이지 시대의 해군 연구에 의해 일본 내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러한 평가들로 인해 일본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여진다. 기사 물론 넷우익들 중 일부는 "이순신? 누구?"라며 까내리려는 인간들도 존재하지만, 되려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도 모르냐"라며 일침하는 일본인들의 반응도 볼 수 있다.
이순신은 단기로 오랑캐 도적들을 무찔렀다. 일본군(和兵)이 (조선에) 도착하기에 이르러서는 전라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귀갑선(거북선)을 만들었다.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이 계림[60]의 으뜸이었다.
파일:attachment/64304451_2_99_20140616105503.jpg

이 그림 역시 《조선정벌기》에 묘사된 이순신으로, 이 그림은 사천 해전 때 부상을 당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 위의 텍스트 내용도, 싸움 중 총탄을 맞았으나 태연자약했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무인다움을 찬(讚)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묘사된 이순신은 대개 류성룡의 《징비록》의 영향을 받아 영웅다운 인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61]

1908년 발행된 일본 해군의 사토 데쓰타로 제독의 저서 《제국국방사론》에서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62] 이순신보다 뒤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때문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역사를 통틀어 정면 공격과 기습 공격, 병사를 뭉치고 산개시키는 전술에 모두 뛰어났던 장군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육군에서는 정복전의 대가였던 나폴레옹이 그런 장군이었고, 해군 중에는 더욱 천재적인 전술가로서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과 그가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의심의 여지 없는 최고의 해군 지휘관이다. 이순신과 비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덜란드의 미힐 더라위터르보다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호레이쇼 넬슨은 이순신에 비해서 인간성과 성실성의 측면에서 한참 뒤떨어졌다. (또한) 이순신은 거북선이라고 알려진 장갑 전함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관이었고 300여 년 전 해군 전술의 달인이었다.
《제국의 군사사》(일본어: 《제국 방위사》, p. 399, 일본 제국 해군의 사토 데쓰타로 제독 저)

/ 사토 제독의 《제국국방사론》 중 이순신에 관한 사토의 언급. 영문 위키백과 'Yi Sun-sin' 항목에서 발췌. 목차 중 'Legacy'의 3번째 단락 참고.

또, 1929년 해군 소좌 출신 작가 가와타 이사오(川田功)는 그의 소설 《포탄을 뚫고서》(砲弾を潜りて)에서 주인공인 한 해군 병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당연히 세계 제1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솔 능력, 그의 모계(謀計), 그의 용기, 하나라도 칭찬할 가치가 없는 것이 없다." (김준배 2018, 104에서 재인용) 출처

한편으론 1891년 강경한 확장주의자 가와사키 시잔이 쓴 위인전 《일본백걸전》(日本百傑傳)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순신, 정운(鄭運)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수군을) 한산도에서 대패시켰다. … (중략)… 옛날 나폴레옹 1세가 산을 뽑고 바다를 뒤짚어엎을 세력을 갖고도 영국을 무찌르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넬슨의 해군에게 제압 당하였기 때문이다. 조선반도의 쇠약함과 영국의 부강함은, 날을 같이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동서의 영웅(나폴레옹과 히데요시)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결과는 동일하다." (김준배 2017, 243. 재인용 및 일부 편집.) 출처

또한 메이지 덴노에게 직접 진상된 뒤 전국 중학교로 배포되었던 《제국해군사론》(帝国海軍史論, 1898)을 쓴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 長生)의 글 중에서 언급되는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임진왜란 같은 것을 사실대로 씀(直筆)으로 그 진면목을 기술하는 것은 자못 불쾌한 감이 있으나, 만일 해상권력을 쥐는 것의 필요성을 말하길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실패한 사적(事蹟)을 들어 은감(殷鑑, 실패를 거울삼는 것을 의미)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히데요시(秀吉)는 동양에 둘도 없는 영걸(英傑)로서 부하 장수도 모두 천군만마 중 뛰어난 인물들이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평양에서 북진할 수 없었다. (중략) 이것은 우리 수군(水軍)의 여러 장수들이 해전 전술에 졸렬(拙劣)하여 순신 때문에 시종 해상권력을 장악당한 죄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행동을 할 때도 우세한 해군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됨은 만세불변의 원리로서 또한 성공의 기초이다" (김준배 2018, 94-96 재인용. 필자 강조) 출처

추가로 오가사와라의 글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이순신 연구를 추가한 《제국국방사론》(帝国国防史論, 1907)을 쓴 해군대학교 교관 사토 데쓰타로(佐藤鉄太郎)의 글 중 다음 대목은, 지금도 종종 인용되고는 한다.
"(본인은 현재 일본의) 제국 국방의 방침이 과연 국가가 어려울 때 이에 응할 방법인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어 조선의 명장(名將) 이순신의 사적을 조사하여, 임진왜란 당시 (그가) 우리 수군을 격파한 것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인격과 위대한 공적은 격렬히 나의 정신을 일깨웠고, (나는) 공세적 국방의 의의(意義)에 관해 더욱 각성하는 바가 있었다.

이순신은 실로 세상을 뒤덮을(蓋世) 해군 장수로서, 불행히도 조선에서 살았기 때문에 용명(勇名)도 지명(智名)도 서양에 전해지지 않았으나, 불완전하지만 임진 왜란에 관한 전기를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 장수였다. 서양에 있어 이와 필적할 자를 찾는다면 확실히 네덜란드의 장수 미힐 더라위터르 이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넬슨 같은 자는 인격에서 도저히 비견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실로 장갑함(裝甲艦)의 창조자로서, 3백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 싸운 장수이다." (김준배 2018. 103 재인용. 필자 강조) 출처

참고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와 사토 데쓰타로 두 사람 모두 훗날 전시 총리까지 올라가는 스즈키 간타로의 동기들이다.

러일전쟁 후 각국 해군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일본 해군에 미국 해군사관생도들이 견학차 방문했는데, 한 생도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각하께서는 어떤 해군 제독을 가장 존경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도고 제독은 "나는 조선의 이순신 제독을 가장 존경한다네. 그 분에게 비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네."라고 대답했던 일화가 전해지나[63], 출처들이 하나같이 신빙성이 없는 서적들이므로, 사실상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추정된다.[64] 그러니 굳이 진위가 불분명한 도고의 어록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 도고가 개인적으로 이순신을 존경했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련 사료들이 확실한 증거가 없고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사항에 대한 근거가 되기엔 신뢰성이 부족하다.

일단 흔히 퍼져 있는 도고의 어록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 최초의 출처는 박정희 때 한일협정 당시 일본의 전 수상이자 막후 실력자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사이의 중계자 역을 했던 만주국 관리 출신의 친일파였던 사업가 이영개로[65] 자신이 직접 "지인에게 들었다"면서 한 말로 이는 그저 당시 한일 협정에 대한 반대가 극심하자 반일 감정을 누그려뜨리려 만들어낸 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기실 도고는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존경받는 인물로서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과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 말이라면 기록이 없을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발언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은 전무하다.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 않은 '도고의 어록' 같은 것을 굳이 인용할 이유는 없다.

이종락이란 사람이 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란 책에서 도고가 이순신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이 나오긴 한다. 이 책에는 1905년 일본 연합 함대 해산식 파티에서 도고의 말을 직접 들은 노부인의 회고담을 소개한다고 나와 있다. 당연 일본 측의 어떤 기록에도 이러한 말은 없다. 전문을 옮긴다.
"내(도고)가 이순신 제독과 동렬에 서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연합 함대는 발트 함대보다 규모가 크므로 일본 해군의 승리는 되려 당연하다. 허나 이순신 제독은 언제나 열세에 놓인 함선으로 전승하는 전과를 거뒀다.[66] 이게 내가 그를 못 따라가는 첫째 이유다. 둘째는 일러 전쟁에서 일본 육군은 연전연승했으므로 우리 해군 기지가 적군에게 위협된 적이 없다. 반대로, 조선의 육군은 연전연패해서 이순신의 수군은 언제나 기지가 위협되고 보급이 끊겼다.[67][68] 이런 어려움을 이긴 자가 이순신 제독이다. 셋째 이유는 나 도고는 황공하게도 위로는 천황, 아래로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단결된 성원을 받고 나섰다. 이순신 제독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에 시달리고 죄인이 돼 고문까지 받았다. 겨우 왕명으로 목숨을 건진 채 풀려나서 그 궁지에도 굴하지 않고 명량, 노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최후의 해전에서 전사했다."[69]

그러나 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라는 책은 왜성을 직접 탐방했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높지만 아마추어 연구가의 한계상 사료 해석에 한계도 있고, 학술 논문도 아닌지라 출처 표기나 사료 비평적인 면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도고가 노부인께 했다는 이순신 관련 발언의 경우 해당 책에는 저 문단 하나만 있고 인용 출처나 참고 문헌 목록 같은 믿을 만한 근거는 적혀 있지 않다.

실제로 도고가 '이순신은 나의 스승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구절 역시 한국인 실업가 이영개에게 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당시 일본 해군에서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도고 정도 되는 인물이 그렇게 발언했다면 일본 측에도 관련 기록이 남았을 법한데,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즉, 도고가 실제로 저런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실제로 도고 제독이 이순신을 추앙했다는 일화들은 전부다 출처가 불분명하며 전해들은 것을 옮겨 적은 "카더라" 수준이다. 일본에서는 역사적 사실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며, 한일 협정을 추진하던 1960년대 당시에 반일 정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영개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일본에서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다름아닌 역보정 관련 때문인데, 만약 자신들이 이순신을 폄하할 경우, 임진왜란 이후 몰락한 일본의 장수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폄하한 이순신에게 개박살이 난 졸장이나 잡장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즉 이순신을 폄하하는 것은 전국 3영걸 중 한 명이자 센고쿠 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외 토도 타카토라 등등 일본의 장수들을 죄다 까내리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순신을 폄하하는 것이 도리어 자충수가 되는 것. 특히나 당시 도요토미 정권 하의 무장들은 센고쿠시대를 거쳐 오며 히데요시 호령 하에 모인 다이묘 출신 장수들이 가토 기요마사 등과 같은 히데요시 직속 부하들보다 많았기에 더더욱 그 차이가 벌어진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를 폄하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영웅화하는 작업에 들어갔었고, 이와 맞물려 '육주해종(陸主海從)'의 기존 국방 노선을 '해주육종(海主陸從)'으로 바꿈으로써 해군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내려던 당시 일본 해군의 주요 인물들이 이순신의 영웅화를 통해 해군력 이론에 지역적 색채를 가미하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하였다. 메이지 일본과 이순신, 그 애증의 역사 간단히 생각해 보면 훌륭한 캐릭터 플롯에는 그에 걸맞는 훌륭한 적 혹은 라이벌이 필요한 법이고, 이에 이순신은 조선 최강의 이미지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라이벌로 보정받은 셈이다.

실제로 이순신의 영웅화를 통해 해군력 팽창의 정당화를 꾀하던 당시 일본 해군의 노력에 관해, 후대의 문필가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순신을 발견한 것은 메이지 일본 해군이었다. (중략) 1904, 5년경의 일본 해군사관은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학교에서 배우고, 책으로 읽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준배 2018 재인용) 출처

일본의 연구자들 역시 이순신의 능력과 그가 전쟁에 미친 영향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70] 실제로 일본에서 해군사 및 일본 전국사 연구의 대가 중 한 명인 키타지마 만지 교수의 경우 KBS 다큐멘터리에까지 나와서 이순신에 대해 뛰어난 평가를 내릴 정도. 그러나 현대에 와서 혐한들이 인터넷에 난립하면서 이순신의 전략과 의의로 폄하하는 왜곡 정보들을 퍼트리기 시작한다. 특히 왜곡된 문서가 많은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들 중에서도 이순신 관련 문서는 그 왜곡의 범위가 상당히 크며, 특히 사서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문장의 대목만을 짜깁기해 자국의 역사에 유리한 결론을 내기로 악명 높다. 아래는 위키를 제외한 이순신 관련 왜곡사례나 수법들이다.

6. 북한에서

이북에서는 두음법칙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리순신"이라 쓰인다.
리순신 장군은 량반 출신으로 봉건 지배 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봉건국가를 위해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조국 해방 전쟁 시기에 사회주의 조국을 위하여 자기의 가슴으로 적 화구를 막아 부대의 직격로를 열어놓은 애국자들과 비길 수 없다. 출처
요약하자면 인민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북한이 자신들의 체재에 알맞게 입맛대로 왜곡한 셈이다.

1967년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에서도 이순신은 명장으로 큰 우대를 받고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1967년 김일성 우상화가 시작되면서 김일성을 능가하는 영웅이 있다는 것은 북한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 대한 폄하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온 게 상기한 여러 망언들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선 이순신이 희대의 애국자요, 천재적 지략가로 세계 해전사에 이름을 떨친 명장이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고 있다. 다만 김일성만 못하다고 할 뿐이다. 김일성의 이순신 평가

아래는 1967년 이전 이순신에 대한 북한의 평가이다.
임진 조국 전쟁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전쟁에서의 리순신 장군의 역할의 평가에 대하여 반드시 언급하여야 하겠다. 당시 최대의 애국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천재적인 군사 지휘관인 리순신 장군의 임진 조국 전쟁에 있어서의 위대성은 그가 임진 전쟁을 조국 보위의 인민 전쟁으로 인식하고 인민에 의지하고 인민의 역량을 발휘시키고 인민의 역량을 굳게 결집하여 적을 대항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임진 조국 전쟁 과정에서 리순신 장군의 활동을 그 시대에 있어서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전 동양에 있어서 가장 열렬한 애국자이며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전쟁에 있어서 리순신 장군의 투쟁은 애국 인민의 산 표본으로 되었으며 그가 군사 예술의 우수한 정수로 되었으며 그의 전략 전술은 애국 투쟁의 영광스런 상징으로 되였다.
리청원, 《임진 조국 전쟁 1592년 ~ 1598년》 (1955년)
우리는 위대한 애국자이며 탁월한 전략 전술가였던 리순신 장군에 의하여 우리 수군 연합 함대가 지휘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순신 장군은 전쟁 전부터 왜적이 침입할 것을 예견하고 함선 건조, 함선 수리 특히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 무기의 제작, 군량 준비, 병사들의 훈련 등 모든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백방으로 군비를 강화하였다. 장군은 또한 탁월한 전략가로서 적아간의 력량 관계를 정확히 타산하고 이에 립각하여 격멸전을 용감하고 대담하게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군은 전반적 전국에 대한 전략적 견지에서 이를 분석하고 여기서 제기되는 과업을 능숙하게 해결하는 방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하루 속히 원쑤들을 우리 강토로부터 몰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당시 누구보다도 깊이 연구하였으며 또한 잘 알고 시기적절한 대책을 취하곤 했다. 이와 같은 리순신 장군을 자기들의 지휘관으로 모신 우리 수군 병사들은 장군을 무한히 존경하고 사랑하였으며 전체가 단결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원쑤들을 격멸하는데 언제 어디서든지 자기 생명을 서슴없이 바치였다. 제 아무리 우수한 무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리순신 장군과 같은 위대한 지휘관을 가지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와 같은 승리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길성, 《임진 조국 전쟁 시기 우리 수군의 투쟁》

이렇게 이순신을 고평가하던 북한 학자들은 유물 사관을 신봉하였단 이유로 반종파분자로 몰려 대거 숙청당했다.

북한이 이순신에 대해 비교적 박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그가 우상화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만 해도 당장 북한 땅이 배경인 작품인 《 심청전》마저 폄하하고 을지문덕, 강감찬 등 모든 위인으로 평가받던 인물의 계급적 한계성이 강조되었다. 오직 동학농민운동 같은 인민의 항거만 강조되고 왕조 자체는 모조리 폄하한다. 고려도 신라처럼 외세는 끌어들이지 않았지만 다른 것을 모조리 폄하하고 있다. 심지어 고조선조차 이 당시에는 지배계급이 다수를 억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평가한다. 지방을 강조하는 것은 '지방주의'라고 하여 초헌법적 원칙인 10대 원칙 등에서 철저히 금기시되는 내용이다. # 그나마 민족에 대한 평가가 좋아진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개혁으로 독자성을 추구해야 했던 1980년대 후반, 단군릉을 만들며 고조선의 역사성이 다시 강조되는 것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다. 이순신은 그 이후 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활약에 대한 언급이 늘어난다.
파일:/image/001/2005/09/11/kp1_2050911l2257.jpg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이 공을 세운 해군에게 주기 위해 만든 훈장 중에 이순신 훈장이라는 것도 있다. 북한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너무 이순신만 띄워주고 그 밑의 인민대중들의 투쟁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다른 전근대 위인들처럼 김일성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즉각 평가절하되었다.[78] 여담으로 한홍구가 말했던 《거짓된 신화로의 이순신》이라는 것의 예로 든 것이 북한의 저런 모습을 든 것이다. 다만 2014년 들어서는 외세 배격을 목적으로 이순신과 거북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남한에서 제작된 이순신 관련 드라마와 영화가 북한으로 전해지고 주민들에게 유포되었다. 탈북자들에 의하면 북한내 최고위층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5월 풍계리 핵실험장에 간 남측 기자들의 이순신을 영웅으로 생각하냐는 질문에 북측 관계자가 '우리 민족을 구한 영웅인데 우리가 그걸 모르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

7. 중국에서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79]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80]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진린

중국에서도 장웨이린 교수 등의 일부 인물들이 호평을 내리고 있으며 그는 제갈량, 항우, 손자, 관우 같은 인물들이 서양과 일본에 패한 말기의 청나라에 있었어도 청나라는 역사 속의 그 결과를 피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순신은 다르다고 언급했다.[81]

8. 서양에서

영국 해군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82]은 그의 저서인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일본 정치사에서의 해양의 영향)에서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 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라 기술했다.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대등한 제독이 있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넬슨과 비견된다면, 그건 일생동안 패배를 몰랐으며 적의 앞에서 최후를 맞은 아시아 인종의 이 위대한 제독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행적을 좇아가면, 용맹한 수병들을 품고 한반도 해안가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수백 척의 일본 함선으로 항적도(航跡圖)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휘관도, 최소한 해전에서는, "전쟁이란 다수가 아닌, 단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그만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비판을 거부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 그의 경력을 몇 마디로 줄이면, 과거에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전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전 지휘는 전투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런 지휘와 같았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서 장렬히 희생함으로 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바다가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pp. 66-67.[83]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인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한 브리핑 중 이순신을 언급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강력한 연합군 함대가 한국 동남부에 위치한 부산항 입구에 정박한 일부 일본 함대를 공격하여 적함 80여척 중 27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전투함과 수송선을 포함한 70여척의 일본 함선이 이 연합국 함대에게 포착되어 섬멸되었다. 일본군 함대에 가해진 이 강력한 타격들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 육군을 고립시키고 본토 기지에서 차단시켰다.(잠시 뜸을 들이고) 며칠간 진행된 이 해군 작전은 1592년 여름에 수행되었으며, 연합군 함대를 이끈 지휘관은 한국의 이순신 제독(the Korean Admiral Yi Sun-Sin)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도 일본 해군은 이미 큰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1944년 10월 9일, 진주만 미 해군 기지에서 시행한 브리핑 中[84]

제2차 세계 대전 엘 알라메인 전투의 영웅이었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장군 또한 자신의 저서인 《 전쟁의 역사》에서 이순신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은 뭍에서 성공을 거둔 반면, 바다에서는 일대 타격을 받았다. 한반도 사람들은 항해에 능한 민족이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아의 해군 전술은 여전히 화살 공격을 가하고 배를 들이받 적선에 올라타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대포는 배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85]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를 고안했다. 그 배의 선체는 속도를 낼 수 있고 작전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갑판 위에는 거북 등처럼 철갑을 씌워, 불, 화살, 탄환 등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적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철갑 위에는 큰 못을 박았다. 뱃머리는 공격적으로 적선을 들이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으며, 둘레 전체에 포문이 설치되었다. 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 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 조선이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히데요시의 지상 공격은 마비되고 말았다.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과 중국인들이 지상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싸웠고, 일본인들은 바다에서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다. 한반도를 무모하게 침략해 실패함으로써 결말이 좋지 못했지만, 그의 모국에서의 군사적, 행정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中

Extra Credits[86]에서 이순신 이야기를 연재했었다. 1편 북을 계속 울려라, 2편 태산처럼 굳건하게, 3편 한산도의 밝은 달빛, 4편 사즉생, 5편 충무공, 6편 Korea Admiral Yi:Lies로 이루어져 있다. 좋아요가 평균 8천에 1만을 넘으며 다들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반응. 한국어 자막도 있고 고증도 충실하니 시간이 나면 감상해보자. 시리즈 마지막인 Korea Admiral Yi:Lies편을 보면 고증 담당자가 나와서 관련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 있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찾아본 자료 중 《난중일기》가 제일 이순신에게 비판적이었다고 말한다.

미국 해군 역사가 조지 해거만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300년 동안 멈추게 한 인물', 미국 리더십 전문가 짐 프리드먼은 '일본이 영국처럼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만들 기회를 빼앗은 인물', 미국 UCLA대학 역사학과 마크 길버트 교수는 '히데요시의 범(汎)아시아 야망(Pan-Asian ambitions)을 좌절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43년 미국 상원에서 알렉산더 와일리[87] 상원의원이 2차대전 일본과 전쟁 중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이 미국 의회 회의록에서 확인되었다.

레딧의 r/history에서 역사상 최고의 해군 제독을 꼽을 때 호레이쇼 넬슨, 체스터 니미츠 등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장군이 이순신이다. 간혹 판옥선의 동 시대 동양 기준 우수한 제원을 이유로[88][89]이순신을 '장비빨'이라고 시비를 거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원균 칠천량 해전으로 가볍게 논박되곤 한다. 레딧 역사 서브레딧에서 밀덕, 역덕들이 정리한 전 세계 역대 군지휘관 순위에서 해군 1위에 랭크되어 있다. 육군 1위는 칭기즈 칸, 공군 1위는 아서 해리스, 해군 2위는 나폴레옹을 무찌른 대영제국 불세출의 명장 호레이쇼 넬슨이고 영란전쟁때 대영제국 해군에 영원히 남을 대굴욕을 선사한 미힐 더라위터르가 3위에 랭크되었다. 러일전쟁 도고 헤이하치로, 태평양전쟁 체스터 니미츠, 살라미스 해전 테미스토클레스 등등 불세출의 해군 명장들이 전부 이순신 아래로 평가 받았다. 해군 평가는 리더쉽, 전술 능력, 작전술, 전략적 계획, 보급 관리, 전술/전략의 혁신과 창의성, 조직/이론의 혁신과 창의성, 임무의 난이도, 영향력, 승리 여부를 기준으로 한다. 이순신 외에 랭크된 한국의 위인은 육군 178위의 광개토대왕, 201위의 을지문덕이 있다. 레딧에서 12명의 해전 명장[90]을 제시하고 4명을 골라서 나머지 8명을 막는 놀이를 한 적이 있는데, 많은 역덕들이 Admiral Yi 한 명만 고르고 나머지 11명을 상대해도 충분하단 평가를 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91]

9. 이순신 범장설

9.1. 부정론

보통 함선 숫자만 보고 이순신이 무수히 많은 왜군을 물리쳤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인원 수는 조선 수군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선박 수가 많은 이유는 아타케부네 같은 대형함 대신 코바야부네와 세키부네가 절대 다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론적인 면에서는 조선 수군이 거의 모든 면에서 일본 수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이시이 켄지에 의하면 가장 소형함인 코바야부네는 화포를 장착할 수 없었으며, 세키부네는 선박 하나당 화포를 1문, 그것도 경량포인 불랑기밖에 달고 다니지 않았다.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함선이 조선의 판옥선처럼 안정감이 있는 함선이 아닌데다[92], 선상 백병전에 워낙 오랜 기간 동안 익숙해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화포 계통 무기를 조선군처럼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이 화포를 사용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군의 제일 큰 화약 병기는 오오츠츠(大筒)라고 하는, 단순히 구경을 늘린 화승총이었다. 그나마도 위력에 비해 다루기 까다롭고 화약 소모가 많은 등의 문제로, 널리 사용되진 않은 걸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는, 대구경 조총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는 등의 공식기록을 사실상 찾을 수 없는 것과, 칠천량 해전과 관련된 자료들 중에도 일본 측 기록에 '판옥선 한척에 대해 서너 척의 배로 포위하고 선상 백병전으로 가야 승산이 있다'라는 식의 자료들이 존재한다는 점 등이다. 일본에서 사실상 제대로 된 화포가 실전에서 선을 보인 것은 전쟁의 원인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인 오사카 전투 때이다.

이 때문에 일본 수군의 주력 전술은 조선 수군에게 가까이 붙어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중소형 함선이 주력이라는 일본 수군의 특성상 조선 수군의 주력인 판옥선에 도선하기 위해서는 공성전마냥 위로 기어올라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불리한 점이 있었다.

결국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이 가진 우위는 함선의 빠른 속도 정도인데, 이 역시 전반적인 체급 차이가 워낙 많이 났던데다 조선 수군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누리는 반면 일본 수군은 한반도 연안의 지형과 물길을 잘 몰랐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큰 이득이 된다고 보기는 힘들다.

즉 전반적으로 조선 수군의 장비 수준이 일본 수군의 그것에 비해 제원상 너무 앞서 있었기에,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순신의 공적은 소위 말하는 장비빨에 의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 범장설이다.

9.2. 긍정론

재밌게도 이순신의 전공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근거인 '조선 수군이 가진 우수점'은, 영국의 전설적인 제독 호레이쇼 넬슨을 칭송하는 근거인 ' 영국 해군의 강점을 이용한 과감한 전술 운용'과 완벽히 동일하다. 넬슨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기존 해군이 잘 사용하지 않던 중앙 돌파를 시도한 근거는 영국 해군이 더 많은 항해 경험으로 인해 난전에 돌입할 시 독자적 전투 능력이 뛰어난 영국 해군이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고 이 판단력이야 말로 넬슨 제독이 칭송받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순신은 접근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일방적인 포격전만 한것도 아니다. 안골포 해전처럼 육지가 둘러싼 포구에 방어선을 구축한 적을 공략해버리거나 웅포 해전에서는 상륙작전을 지휘하여 우세를 점해버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노량해전에서는 방어 대형으로 매복을 빠져나가려던 일본 연합 함대의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가 함대의 진형을 두동강내는 무서움을 보여주었다.

기본적으로 이순신의 전략이 조선 수군의 우수성에 기반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러한 요소와 확보한 정보들을 잘 활용해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적의 피해를 극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순신의 능력이다. 실제 기록을 보면 이순신은 적이 남아있지 않게 신중히 전략을 짰으며 일본측은 그것에 걸려들어 이순신이 우세를 점한채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음에도 제때 후퇴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 했다.

9.2.1. 다른 장수들과 비교할 때

당장 원균은 조선의 막강한 해군 전력을 인계받고도 칠천량 해전이라는 어마어마한 패전을 하고 본인도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원균만 그랬던 것도 아닌 것이, 김완은 세키부네 2척에게 배를 빼앗기고 본인은 생포당했고, 칠천량 해전 당시 이억기 최호의 분함대도 일본 수군에게 전멸당했으며, 배설은 한산도를 불태우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경상좌수군은 전쟁 내내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지 못했다. 명량 해전에서도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전투 초반 이순신의 대장선은 혼자서도 압도적인 수적 우위로 찍어누르는 일본 수군으로부터 잘 버텨내며 정말 최소한의 사상자만 냈지만, 나중에 온 안위의 함선은 일본 수군에게 둘러싸여 일본군이 판옥선에 올라가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바람에 이순신이 구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억기는 임진년부터 이순신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수없이 전공을 세운 역전의 용사이며, 최호 역시 의주를 방어하고 북방을 안정시킨 백전노장이었다. 즉 이들처럼 원균과 궤가 다른 평균 이상의 지휘관들 역시 일본 수군의 작전에 제대로 말려들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일본 수군이 정말로 마냥 약체였다면 왜 조선 수군이 이러한 위기를 겪었는지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결국 이순신의 승리가 장비빨이라는 식의 논리는 당시 해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술되어 있듯, 조선군은 병사들의 낮은 숙련도와 사기를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 능력으로 보완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실제로 칠천량의 조선군은, 후대의 박문수가 지적했듯이 원균 같은 무능한 자가 지휘관이 되자, 그런 우수한 무기 체계와 전술로 승전을 경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듯이, 말 그대로 뿔뿔이 흩어져 패전했다.

9.2.2. 함포 운용의 어려움

임진왜란이 벌어진 16세기 말 당시에도 해전을 치를 때에 함포가 매우 유용한 장비였던 것은 맞지만, 태평양 전쟁 때 벌어진 해전마냥 오로지 함포만으로 적선을 격침시키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유럽의 예만 보아도, 레판토 해전이나 칼레 해전 등등에서 함포 같은 화약 무기가 어느 정도 활약한 것은 맞지만, 두 전투에서 모두 기본적인 전투 방식은 포격을 가하면서 접근한 뒤 배 위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함포가 해전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유럽에서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인 19세기 중후반, 철갑선과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등장한 뒤였다.

당시 유럽에서의 배는 크게 범선 갤리선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당시 범선은 함포를 탑재하기 유리했던 반면, 갤리선은 기껏해야 뱃머리 쪽에 다는 게 고작이었으므로 포격전에 불리했다. 만약, 당시 함포가 정말 엄청난 우세를 가져다주는 무기였다면, 갤리선은 함포의 등장과 동시에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15세기 ~ 16세기경까지만 해도 갤리선은 범선에 비해 아주 압도적으로 밀리지는 않았으며, 어느 정도 공존할 수 있었다. 즉 16세기 당시의 대포는 반동 제어나 재정전 시간 등이 월등했던 유럽에서조차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은 무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순신의 승리가 전적으로 기술과 무기 덕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애초에 당시 판옥선의 화약 무기는 폭발성 무기가 아니었다. 중세기 화약 무기답게 완벽하지도 못했고, 그 당시 포라는 개념 자체가 폭발하는 탄환이 아니라, 쇳덩이를 날려서 적의 배를 깨부수는 목적으로 쓰는 건데, 이는 포를 정확히 상대 배의 흘수선 밑으로 여러 발을 맞춰야 배가 격침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화포를 실은 포가의 각도를 적절히 조절해야만 흘수선을 제대로 맞힐 수 있다는 말인데, 조선시대의 포가는 사용자가 포각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으며, 그마저도 임진왜란 당시에는 포가라고 할 법한 물건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93] 이렇게 정확한 조준 사격이 쉽지 않은 화포를 흔들리는 선상에서 방포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의 대포는 유효 사정거리가 그리 길지 못하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
[ 펼치기 · 접기 ]

함상에서의 화약 무기 운용, 특히 대포의 운용에는 많은 제한 사항이 따른다. 적 함선 뿐만 아니라 대포가 거치된 아군의 함선도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상에 떠있는 선박은 롤링(rolling), 요잉(yawing), 피칭(Pitching) 등 다양한 흔들림(동요 動搖) 현상의 영향을 받는다. 이 같은 흔들림 현상은 지상에서보다 함상에서의 화약 무기 명중률을 현저하게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

천자총통(天字銃筒)에서 대장군전(大將軍箭)을 발사할 경우, 탄도 곡선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한 박혜일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사각 5도일 때 사거리는 152m, 10도일 때는 289m, 20도일 때는 525m라고 한다. 이러한 사거리 계산이 정확한 것인지는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사각(射角)에 따라 상당한 사거리 차이가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5도 ~ 10도 수준의 롤링은 황천이 아닌 일반적인 해상 조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각 5도를 적용했을 때 5도의 롤링으로 인한 오차가 더해진다면 사각이 10도가 된다. 박교수의 계산 결과를 참고할 경우, 이때 발생하는 사거리 오차는 137m나 된다. 단거리라면 표적이 되는 선박의 크기가 있으므로 롤링에 따른 오차를 극복할 수 있겠지만,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사격 시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당히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각 변화에 따라 발사체의 비행 최고 고도 문제이다.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 사격 시, 계산 결과를 보면, 사각 10도에서 대장군전 비행 중 최고 고도는 13m다. 이 정도 비행 고도라면, 어느 정도 사거리 오차가 발생하더라도 표적 선박의 높이가 13m 이내라면 어떻게든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에 명중할 수 있다. 하지만 사각 20도면, 대장군전의 비행 중 최고 고도가 50m, 사각 30도면 최고 고도 100m, 사각 44도면 최고 고도가 200m에 달해서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다. 조선 수군이 10도 ~ 20도 정도 수준의 사각으로 사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5도 ~ 10도 수준의 롤링이 발생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 사각은 15도, 20도, 25도, 30도로 변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사거리 오차는 둘째 치고, 대장군전의 비행 고도 자체가 50m ~ 100m로 높아지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높이라면 총통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의 돛보다 더 높은 고도로 선박 상공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롤링에 따른 사각 변화와 이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보다는, 사각(射角) 변화에 따른 발사체의 최고 비행 고도의 변화가 명중률 향상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오차 부담 때문에 20도 이상의 사각으로 사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요잉 등에 따르는 좌우 오차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체 길이가 30m 정도인 일본의 대형 아다케 정도라면, 배의 중심부를 겨냥했을 때 배의 선수와 선미 사이의 각도 차이는 사거리 50m일 때는 33도, 사거리 100m일 때는 그 절반 정도인 17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거리 100m일 때는 17도, 사거리 50m일 때는 33도 이상의 요잉이 발생하지 않는 한 오차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나마 요잉은 롤링보다는 부담이 적다는 의미이다.

박혜일 교수는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때의 사거리와 비행 고도를 계산했지만, 롤링과 요잉, 피칭 등에 따른 오차 문제는, 천자총통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총통에 적용되는 공통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오차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방법은 가급적 근거리에 접근한 후 사격을 하거나, 사각(射角) 자체를 가급적 작게 잡는 것뿐이다. 만약 사각 5도로 사격할 때 발사체인 대장군전의 최고 비행 고도는 3.2m에 불과하므로, 이 경우에는 사거리 오차가 발생해도, 좌우 조준만 정확하다면 어떻게든 표적이 되는 선박을 맞힐 수 있다. 10도의 경우에도 최고 고도는 13m이므로, 어느 정도 오차 극복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흔들림 현상이 있는 함선에서 화약 무기를 사격할 때 높은 명중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해서 사격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사각을 선택, 수평에 가깝게 사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 19세기 이전 조선의 포가(砲架)는 사각(射角) 조절이 매우 어렵거나 불편한 방식이며, 이마저도 이순신이 활약하던 시대에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조선군이 간접 사격에 참조할 수 있는 사각별 사거리 제원이나 화약량별 사거리 제원(諸元)이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는 실정이다. 이 경우 체계적인 사거리 수정은 불가능하고, 경험에 기초한 임의적인 조절만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수평 사격에 가까운 낮은 사각이 아닐 경우, 화약 무기 운용 요원의 숙련도가 이례적으로 높지 않는 한, 실질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명중률을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유럽 전근대 해군들이 상대적으로 수평에 가까운 사각으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도, 이 같은 롤링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나 비행 고도 오차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박혜일 교수는, 이렇게 롤링에 따른 사각의 불확실성, 화약량과 발사체의 무게 차이를 고려할 경우, 사거리 약 70m 정도까지는 높은 명중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100m가 넘어갈 경우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선 수군 처지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전거리는, 표준형 조총 유효사거리인 50m를 벗어나면서도,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거리라고 할 수 있다. 천자 총통을 기준으로 할 경우, 아무리 크게 잡아도 이상적 사각은 20도 미만, 유효 사거리는 400m 이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피차 이동하는 선박 간에 벌어지는 해전에서 과연 아군이 원하는 교전거리를 계속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근접한 상태에서의 교전도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군에서 유효사거리가 50m가 넘는 9몬메 이상의 대형 조총을 사용하기도 했으므로, 실제 교전 상황은 훨씬 복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수군 함선이 조선 수군 함선에 과도하게 접근했을 경우에도, 화약 무기 운용상의 제약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가 완전히 붙는 접현전(接舷戰)의 경우에도 화포의 사용이 제한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일본의 대형 아다케 등 적의 함선 높이가 판옥선과 동일하거나 더 높다면, 접현전 상태에서도 화포 운용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세키부네나 고바야처럼 일본 함선의 높이가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보다 현저히 낮은 상태라면, 접현(接舷) 시에 하향 사격을 해야만 사각이 나올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하향 사격 시 대포 운용에 어떤 제한 사항이 발생하는지 여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럽에서는 하향사격(Depressed Fire)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 시대 화약 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만약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포가(砲架)의 형태가 동거(童車)라고 가정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일정 거리 이상 접근했을 때, 특히 완전히 배가 붙는 접현(接舷) 상태에서는, 총통의 사각 제한 때문에 사격 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는 질려포통(疾藜砲筒) 등 손으로 투척할 수 있는 화약 무기나, 활 등 일반적인 투사(投射) 무기를 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조선군의 화포에 몇 차례 맞는다고 안택선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94] 그 화포가 빠른 속도로 연사가 되는 것도 아니며, 조준이 쉬운 것도 아니고, 발사하여 명중하더라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일본 수군이 모두 죽는 것도 아니다. 일본 수군이 바보도 아니고, 화포에 여러 차례 당했으니 기를 쓰고 판옥선에 달라붙으려고 했을 것은 자명한 일.

물론 상기한 설명은 선상에서 화포 운용의 어려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위의 내용에만 집중할 경우, 자칫 '대포는 이순신의 기적적인 승리 행진과 별 관계가 없다'고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상에서의 고민과 별개로, 이순신의 전투에서 대포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대포의 화력은 조선군이 일본군에 비해 유리했으며, 이를 이용한 것이 이순신의 전술의 핵심 중 하나였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단지 대포가 있으니까 이긴 것이지, 이순신의 존재가 승리의 요인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엄청난 왜곡이고 오류라는 것이다.[95] 애초에 임진왜란의 해상전은 동아시아의 해상전이 함포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상태이며, 이러한 개념을 체계화하고 실전에서 응용하고 조선군의 장점을 극대화시켰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역사상 유례가 거의 없는 수준이다.

9.2.3. 일본 수군의 강점

왜선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날래고 또 수가 많았다. 판옥선은 무겁고 둔중하다. 속도는 전투력의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이며, 이것은 조금만 잘못하면 순식간에 접근당해 4면에서 몰려드는 일본군을 상대로 그들의 특기인 백병전에 말려들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순신은 이런 일본군의 강점을 발휘하기 힘들도록 거리를 유지하는데 애를 써야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적을 분산시키고 적의 접근을 막으며, 반대로 우위에 설 수 있게끔 아군에게 유리한 위치로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이순신의 대표적인 승전으로 꼽히는 명량 해전도 울둘목의 좁은 해로를 이용하여, 왜선의 포위 기동을 봉쇄했으며, 한산도 해전의 경우도 틀어박힌 적을 유인해 쌍학익진으로 적을 단숨에 격멸한 사례도 있다.

또한 왜선에 타는 조총수 및 보병들은 대부분 아시가루로, 100여 년이 넘는 센고쿠 시대를 거쳐오며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역전의 숙련병들인데 비해, 조선 수군의 병졸들은 태반이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농민 출신들이었다. 이를 위 문단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조선 수군이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거나 군율이 흐트러져서 접근을 허용하면 아주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말이 된다. 물론 조선군이 백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백병전으로 이행하면 순식간에 전투력이나 사기 면에서 밀리며 패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는 몇 배, 어떤 경우는 스무 배가 넘는[96] 수적 우위의 병력으로도 왜군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는 것으로 일관했던 조선의 육지 전투에서 증명된다. 100년이나 되는 기간 동안, 말 그대로 사람을 때리고, 찌르고, 베고, 쏘아 죽이면서 훈련된 것이 당시의 왜군이었다.[97] 이러한 병사 개개인의 백병전 능력 차이를 간과한 채 조선 수군이 일방적으로 유리했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일본도 전란 중반에는 밀폐형 층루선(層樓船)과 대조총(大鳥銃)을 일부 투입하는 등 전력을 강화했다.

9.2.4. 이순신의 실제 전투 방식

한편 화포 운용의 측면이 강조되다 보니 아예 이순신이 화포를 주력으로 활용해서 이겼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은데,[98] 이순신에게는 화포를 마구 쏴도 될 정도로 물자가 넘치질 않았으므로 원거리 포격으로 왜적을 때려잡은 장군님! 같이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난중일기의 전투 기록들에 적힌 전과에서 '얼마를 불태우고 적 얼마를 죽였다'라는 식으로 계속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이순신 함대의 주된 화력 투사 방식은 궁시와 소구경 화포[99]의 사격을 통한 인명 살상 및 화공의 형태였다. #

게다가 위에서도 서술했듯 목선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해도 포격만으로 적선을 깨부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으므로, 화공을 펼치는 게 훨씬 효율적인 전투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만 보아도 이순신이 조선 수군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선상 백병전을 가능한 미루고,[100] 대신 적을 묶어둔채로 전통적 강점이었던 사격으로 적군을 압살한 훌륭한 전술가라는 점이 드러난다. 실제로 조선 수군의 전투 양상을 보면 일단 화포를 사용하여 적을 대충 무너뜨리고 화살 세례를 퍼부은 다음 왜선으로 건너가서 남은 적을 정리하는 방식이었다.[101] 어떤 면에서는 해상 포격을 선보인 전술적 선구자로서의 면모보다는 당대에 활용할 수 있었던 해전 전술을 극한으로 연마해서 선보인 완성형 전술가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기도 하다.

이순신은 정보전과 탐색전도 항상 철저히 하여, 단 한 차례도 왜군의 기습이나 야습을 허용하지 않았다. 왜군이 야습을 시도하다가 되려 역관광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9.2.5. 무기 우위의 상대성

애초에 무기라는 것 자체는 그 나름의 특성이 있고 장단점이 있는 것이지, 완벽하게 모든 면에서 상대방의 무기를 상회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즉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는 건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

그 예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전차 미국 전차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것은 명중률과 위력, 그리고 장갑에서 뛰어났던 것이지, 속도 양산 능력, 신뢰성, 정비성에선 미국에 한참 밀렸다. 그래서 독일의 높은 포 명중률과 위력, 그리고 두꺼운 장갑이 큰 장점이 될 수 있는 장거리 전투나, 매복 전투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반대로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물량이 많고 보급이 빵빵한 미국에 비해 불리했다.

당시 독일의 명장이라 불린 장군들은 이런 독일 전차의 특성에 맞게, 상대방을 자신에게 유리한 장거리전이나 장애물이 많아 매복하기 좋은 곳으로 이끌거나, 상대방이 지나갈 만한 길목에 매복 부대를 배치해 두는 등, 자신의 무기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고, 그에 비해 약점을 최소화하면서 운용하고, 독일 무기의 진가를 발휘할 상황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높은 전과를 올렸고 명장으로 불리는 것이지, 단순히 무기의 성능이 앞선다는 것만으로는 수적으로 독일을 압도하는 미국을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독일 전차보다 떨어진다는 평을 받던 미국 전차도, 미국의 명장 조지 S. 패튼이 미국 전차의 우월한 기동성을 활용, 상대방의 주력 부대를 만나면 우회해 다른 길로 새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독일군 전선 깊숙이 들어가서 전선을 교란시켜버리는 방식으로 운용함으로써 독일군을 궁지에 몰아버린 것을 보면, 무기는 그 자체의 성능도 중요하지만 적과 아군의 무기 특성을 파악하고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진리를 알 수 있다.

실제로도, 한 체급 떨어지는 T-34 전차 한 대로, 비숙련 인원들이 모는데다 첫 출전이라서 전차의 특성도 파악이 안 된 티거 2를 세 대나 박살낸 소련군의 알렉산드르 오스킨 중위의 사례나, 저 위 패튼의 창끝이라고 불리며 역시 한 체급 아래인 셔먼 전차들을 이끌고 웬만한 중전차대대 수준의 전적을 내고 다니던 크레이튼 에이브람스의 경우를 봐도 유능한 지휘관의 가치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현대전으로 봐도 에이브람스 전차를 갖고선 제대로 된 전차도 별로 없던 IS에게 털린 이라크군이 있다. 그리고 조선군의 무기가 비록 뛰어났을지라도 전쟁 준비가 잘 갖춰진 일본군은 더 많은 물량이 있었고, 여러 모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보다 조건이 더 유리했다는 것을 유념해야할 필요가 있다.

9.2.6. 출중한 군정 능력

이순신에게 보급이 끊기기 전의 왜군은 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출병했으나,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된 뒤에도 조정으로부터 쌀 한 톨도 지원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라 조선 수군은 군자금, 군량, 화약, 금속, 배를 수리할 목재 등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했다.[102][103] 또한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朝廷)을 유지해주기 위해서 공물을 바쳐야 했는데, 심지어 공문서 쓸 종이조차 없어서 이순신이 그 종이를 지원해주는 상황이었음에도 조정에서는 늘 공물이 부족하다고 닦달했다.[104]
전쟁에는 군량이 필수인데, 이순신은 한산도에 진영을 잡을 때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경지에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조선 조정에 건의까지 하였다. 결국은 어렵사리 한산도 군량 생산 승인을 얻었다. 백성들은 이순신 옆에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고, 백성들은 편히 농사를 짓고 그런 군량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바치기도 했다. 이러한 군정권자로서의 우수함은 함선의 사양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이순신 개인의 유능함을 간명하게 드러내 준다.

하지한 지나친 유능함이 이순신에 대한 조정의 의심을 사는 원인이 되었는데 온갖 명성을 독차지한 이순신이 세금이 되는 쌀을 걷고 당시 생산이 제한되는 대포를 대량 보유했으며, 백성들이 이순신이 있는 조선 수군은 안전하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몰려드니까 더이상 통제가 불가능해지기 전에 쳐내야되는 대상으로 낙인 찍힌 것이다. 여기에 원균의 이간질과 거짓보고 사건, 요시라의 가토 상륙 사건 까지 더해지니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부류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상관인 도체찰사 이원익 권율은 여러번 그를 만나왔기 때문에 무고함을 주장 하였고 덕분에 파직만 되었지만 문제는 그 원균이 전임자의 유능한 능력만큼의 무능함을 지닌 인물이라 이순신이 자급자족으로 이루어 온것들을 송두리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이순신이 원균에게 통제사 직을 인수인계할 때 한산도에는 배와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예비 식량이 있었으며, 예비 화약은 4,000근 그리고 선적되지 않은 총통이 300자루가 있었다. #

10. 무예

무장으로서 이순신 개인의 무예에 대한 평가는 완벽에 가까운 전술적 평가에 비해선 떨어지는 편이다. 다만 이것이 확대해석되어 평균 이하라는 평가도 도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흔히 이순신의 무예를 저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근거는, 활 50발을 쏘아 42발을 맞추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무과에 32세의 늦은 나이에 급제했고, 무과 성적이 29명 12등으로 중간 수준이었다는 점, 낙마로 처음 친 과거 시험에선 떨어졌단 점, 몸이 아파 고생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자주 나온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이순신의 무예를 평균 이하라고 평가하는 의견에는 거의 다 반박의 여지가 있다.

일단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나이인 32세는 늦은 나이가 아니었는데, 애초에 당시 무과 합격 평균 연령은 34세였다. 게다가 29명 중 12등이라는 성적도 어폐가 있는 게, 최종 선발자 29인 중 12등이란 거지, 무과 응시자 자체는 당연히 훨씬 수가 많았다. 후대 정조 시기에 시행한 한 무과의 응시자 수가 약 3만 5천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이순신이 합격한 무과의 응시자도 수 천은 됐을 것이다. 게다가 합격자 29인 중 25인이 현역 군인었다.[105] 문과에서 무과로 전향한 사람이 현역 군인들과 경쟁해서 29명중 12등이면 그런대로 준수한 성적이다. 더군다나 이순신은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별시가 아닌 4년마다 치르는 정식 무과시험인 식년시에 응시했다. 애초에 무과가 무술고시 같은 시험인데 여기서 극소수의 합격자들 사이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다고 무예가 별로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당시 조선에서 무과에 합격한 응시자들보다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다.[106]

과거 도중 낙마하여 불합격을 한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낙마는 실력이 있더라도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사고라 이를 통해 실력을 판가름하긴 어렵다. 심지어 그 이성계조차 낙마하여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설령 당시에 기마 실력이 부족했다고 해도 결국 두 번째에 합격했으니 적어도 과거에 합격할 정도의 기마술은 있었다고 봄이 옳다. 애초에 조선시대 무과 시험에서 보는 기마술은 그냥 빨리 달리는 게 아니라 마상 무예는 물론 말을 달리면서 중간에 다른 말로 갈아타거나, 안장 위에서 비보잉이나 서커스에 가까운 동작을 하는 등 지금으로 치면 거의 묘기 승마였다. 일단 무과에 합격한 시점에선 기마술이 부족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순신이 자주 아팠음을 근거로 무예가 부족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지만, 이순신이 몸이 아프다는 난중일기의 기록들 대다수는 백의종군 후 두 달간의 투옥과 고문에 의한 후유증 때문이다. 또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당했다는 통념과 달리, 당시 이순신은 파직 후 단 한차례 심문을 받았을 뿐이며, 풀려난 뒤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시고 나서 말을 타고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투옥 및 심문 과정에서 받았을 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심리적인 충격은 적지 않았을 테니 이것이 건강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있고, 이전에도 사천 해전 때 입은 총상의 후유증, 업무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잔병치레, 음주로 인한 숙취, 두통 정도는 있었다. 따라서 왜란 시작 이후에는 이순신이 여러 이유로 몸 상태가 안 좋았을 확률은 높지만, 태생이 무예를 익히기 어려운 병약한 체질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랬다면 애시당초 무과에 합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107]

물론 그의 활쏘기 기록인 50발 중 42발 명중은 장병의 2/3가 활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활쏘기가 일반적이었던 조선 시대에는 장군이나 전문 군관 같은 정예병들 사이에선 그다지 높은 성적은 아니었다.[108][109] 하지만 최정예병들과 비교하면 하위권일지언정 객관적으로 봤을 때 크게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시 이순신은 이미 50대 전후였다. 현대 기준으로는 중년 정도의 나이지만[110], 당시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무장으로선 적지 않은 나이이다. 이를 감안하면 세월이라는 어쩔 수 없는 요인에 의해 실력이 하락했을 가능성도 있다. 활은 다루는데 상당히 많은 힘이 들어가는 무기다. 당장 명궁으로 유명한 정조 역시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활의 적중률이 하락했다.[111] 물론 정조는 1년 동안 꾸준히 활쏘기를 수련하는 무관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기준으로 보긴 어려울 수 있지만, 요컨대 사람의 활쏘기 실력이 일평생동안 꼭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만 위는 어디까지나 50발 중 42발을 맞춘다는 게 이순신의 일반적인 실력이라는 점에서의 가정이다. 이순신이 활을 쐈다는 기록은 수백 개나 있지만 실제 몇 발을 맞췄는가는 42발을 맞췄던 단 하루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실제 이순신의 정확한 실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순신은 원균, 서성(徐渻), 군관 3명 등 여러 사람과 활쏘기 시합을 하여 이기기도 했다.[112] 이를 고려하면 그의 실력이 원균은 둘째치고 적어도 군영의 군관들과 비교했을 때는 딱히 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무관 출신인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활쏘기를 하였는데, 그의 활쏘기가 우습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본인에게나 타인에게나 엄격한 이순신의 성격을 고려하면 정말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확률이 높으며, 스스로 활쏘기에 자신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군관이나 무관 등 정예병들 사이에서도 그냥 잘 쏘는 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무예에 관해 주변에서 직접적으로 남긴 기록들이 존재한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서는 이순신이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다."라고 기록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고 더욱이 글씨도 잘 썼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충무공행록에는 "22세 겨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팔 힘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이순신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113]라고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이순신이 한창 무예를 훈련하던 당시에는 그 실력이 뛰어났음을 짐작 가능하다. 또 이를 고려하면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당시 무장에게 필요한 창술, 검술 등도 당연히 기본 이상은 하였을 확률이 높다.[114][115]

이순신의 용맹이나 무예는 실제 전공에서도 드러난다. 흔히 이순신 하면 원거리에서 화포 등으로 적군을 제압하는 수군 지휘관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이순신은 무과 급제 이후 여진족과 맞닿는 최전방 국경에서도 3년간 복무했었는데, 니탕개의 난때 여진족 수괴인 울지내를 생포하고, 녹둔도 전투 같은 야전에서도 활약한 인물이었다. 특히 녹둔도 전투에서 이순신은 수십 명에 불과한 병력을 이경록과 단 둘이 지휘하여 여진족의 1천 기병을 끝내 이겨냈다. 심지어 반격하여 포로 일부를 되찾기도 했다. 이는 그의 무예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100명 이하의 소부대를 지휘해 많은 병력의 적을 깨뜨리려면 이를 1선에서 이끌어야 할 장수 개인의 무예가 꽤 중요하다. 삼국지에서도 제갈량 같은 인물이 고작 몇십 명이나 몇백 명만 지휘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런 식의 기록은 당대의 맹장인 장료 같은 장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인데 이순신에게 이런 기록이 존재한다. 즉, 함경도 군관 시절의 이순신은 개인의 용맹도 꽤 뛰어났거나, 적어도 무장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순신은 심지어 수군에서 총지휘관으로 있을 때도 직접 선봉에 나선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노량해전은 배들 간의 선상 백병전도 이루어질 정도로 격전이던 전투였는데, 이순신 역시 몸소 시석[116]을 무릎쓰고 힘껏 싸우며 전투를 독려하다가 탄환에 맞았다고 한다.[117] 명량해전에서 다른 전선들이 주저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선봉으로 나가 싸운 것 역시 유명하다. 이렇듯 이순신은 용장의 면모도 확실히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했을 때, 이순신의 무예가 부족했다는 인식은 여러모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순신이 이성계 신립, 황진처럼 당대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무예가 아주 특출난 장수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적어도 무장으로서 평균은 됐을 것이며, 오히려 평균보다 높은 수준의 무예를 갖추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보는 편이 옳다.


[1] Extra History 이순신 편에서 고증 자료를 찾는 과정을 다룬 영상에서 제작진이 '난중일기가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자료였다'는 의미로 언급한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바로 이순신이었다(The person most critical of Admiral Yi was Admiral Yi)."라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자평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유교 사회에서는 자신의 공적을 사람들 앞에서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낮추는 것이 기본적인 미덕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처럼 남들에게 보일 일이 없는 자신의 일기에서까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2] 당시 일본군 센고쿠 시대를 막 끝내고 일본 열도 천하통일한 상태였기에, 그 시점에서 수많은 실전을 치러온 전사들로 거듭나 있었다. 그런 적들을 상대로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거느리고 개전부터 종전까지 완벽한 승리로 이끌었다. [3] 이순신이 전세에 끼친 영향들 1, 2, 3 [4] '전략의 아버지'로 칭송받으며 전쟁 패러다임을 바꾼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 바르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끊임없는 의심과 견제를 받으면서 이탈리아, 달마티아, 북아프리카 서로마 제국의 거의 대부분을 수복한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사막 유목집단에 불과했던 베두인들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두 제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로마 제국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쫒아내 중동에서 이슬람의 지배를 확립했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중국 대륙에서 유럽까지 누비며 총 65번의 회전을 경험하고 32개의 나라를 멸망시켰던 사준사구의 일원 수부타이 등. [5] 애초에 선조 본인도 신하들에게 대놓고 저격만 안 당했을 뿐이지, 왜란 중에 벌였던 온갖 추태 때문에 일찌감치 인망을 잃어서 암암리에 찐따 취급받고 있었던 판국이라 그가 인정을 하든 말든 별 상관은 없긴 하다. [6] 호남(湖南)과 호서(湖西), 즉 전라도와 충청도를 말한다. [7] 해당 부분은 <졸기>라는 것으로 죽은 인물에 대한 평가가 적히는 부분이다. 실록을 편집할 때 수많은 사초에서 사관들이 쓴 졸기 중 의미있는 인물의 것만 추려 그 중에서도 가장 객관적이고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대표로 등재한다. 즉 해당 내용은 이순신에 대한 당시 조선의 가장 공식적인 평가인 셈.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더라도 보통 흠결이 최소 한두 가지는 들어가기 마련인데 이렇게 찬사로만 가득한 졸기는 보기 힘들다. 심지어 왕이나 왕후의 사망 기사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쓰는 사례가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이순신에 대한 찬사는 그렇다 쳐도, 칠천량의 대패를 두고 원균을 기용한 조정, 즉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책임을 대놓고 명시하며 까버렸다. [8]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이 작전상 물러난 것을 이르는 것. [9] '비변사 때문에 이순신이 물러났다'는 식의 이야기인데 물론 이순신을 물러나게 한 주범은 선조이지만 차마 신하가 왕 앞에서 선왕 탓을 할 수는 없으니... [10]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당시에 정탁, 권율 등과 같이 이순신을 구명했었다. [11] 이순신이 음식이나 여색을 즐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링크를 한 것처럼 이 표현은 《논어》에서 등장한 관용적 표현이다. 《논어》 <자한> 편에서는 '덕을 좋아하는 것을 마치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논어》 <학이> 편에서는 '어진 이를 어질게 대할 때는 여색을 즐기듯이 해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현대식으로 설명하자면 '공부를 게임하듯이 좋아하고 즐겼다'와 비슷한 느낌이다. [12] 어떤 선비가 꿈에서 임진왜란 때 싸우다가 죽은 영웅들(김시민, 송상현, 조헌 등)이 한자리에 모여 한 마디씩 하는 걸 목격하는 내용의 소설인데, 여기서 다른 영웅들은 이순신을 가장 상석에 앉힌다. 전사한 원혼들에게 신립은 욕을 먹고 원균은 몰매를 맞는다. [13] 장순과 허원은 모두 당나라 안사의 난 때 활약했던 장수들이다. 함께 수양성을 지키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전했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고 안록산이 이끄는 반군의 회유를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모두 충절을 지켰던 인물들로 칭송받았으며 도교에서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14] 으뜸가는 [15] 윤휴의 이복 형의 장인이 바로 이순신이다. 백호전서를 읽어보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질 정도로 이순신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6]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항목. 흔히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막거나 승리하는 것에 대한 로망과 명량해전의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이순신이 적은 병력으로 능히 많은 수의 적을 막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명장의 기준인양 포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명량해전이나 특수한 몇몇 상황에서의 전투를 제외하면 이순신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적보다 병력의 수가 많거나 비등한 전투를 해왔다. 병법에 이르길 최고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며, 차선으로는 적과 나를 가늠하여 최선의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이순신이 진정으로 명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수히 많은 정찰을 통한 적과 아군간의 전투역량 간파와 전시임에도 흔들리지 않는 엄정한 군율 및 뛰어난 행정력을 바탕으로 한 보급과 그렇게 쌓아온 역량으로 전장의 상황을 두루 보면서, 싸울 필요가 없을 땐 싸우지 않고 이득을 보는 전략을 택하고, 싸워야 할 땐 최선의 전략을 수립하여 불패의 신화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순신이 상대해왔던 적들은 일본 전국시대의 전란을 처절하게 겪은 장수들이었음에도, 이순신의 전략에 말려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이순신은 철저하게 승리가 미리 계산된 전투를 해왔다. [17] 사실 명량 해전 거북선은 한 척도 없었다. 그냥 판옥선 가지고 다 때려부순 전투였다. [18] 계미사행(1763)의 수행원으로 조선 통신사를 다녀온 뒤 쓴 기행문이다. 그러나 이 기록이 쓰여진 지 불과 200년도 안 되어... [19] 윤휴와 더불어 조선 후기 이순신 팬덤의 양대 산맥. 《홍재전서》나 《실록》 곳곳에서 이순신에 대한 칭송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20] 선조 입장에서 보면, 원균을 통제사로 기용한 게 바로 자신인데 그 꼴이 났으니 공신에 올리기라도 해야 자신의 인사 실책을 어떻게든 덮고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지킬 수 있는 셈이다. [21] 당장에 신하들은 원균을 선무공신 2등에 추천했고 그나마도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2등 공신에 올린 것조차 진심이라기보다는 선조 눈치가 보여서 그렇게 올려놨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 추측이 맞다고 치면 아무리 왕 눈치가 보여도 신하들 입장에서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동급에 놓는다는 건 차마 있을 수 없는 일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22] 이게 한두 번이 아니다. 임란 직후 이순신 휘하에서 복무했던 병사들이 돈을 모아서 공적비를 세운 일부터 시작해 통영 백성들이 돈을 모아 사당을 세우기도 했고, 아예 통영 쪽으로 부임한 현감이 자비를 털어 공적비를 세운 일까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세워진 사당과 공적비는 10개 이상이며 대부분이 지금도 남아 있다. [23] 운구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공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에 가십니까?"라고 하면서 운구를 붙잡고 울고불고 하는 통에 운구를 옮기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24] 전쟁에 쓰는 병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25] 현대와 달리 조선 시대에는 중앙 정부가 지방 관아나 군영에 예산을 거의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관아나 군영마다 아록전(수령의 녹봉을 충당하기 위해 배정된 토지), 공수전(조선 전기에 지방 관아 운영비를 충당할 목적으로 배정된 토지), 관둔전, 군둔전이 배정되어 있었다. 거기에 잡세를 거두거나 광산, 염전, 어살에 세금을 거두고 여러 경제 활동을 벌여 예산을 마련했다. 운송수단이 미비했던 당시에는 여러 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중앙 정부로 옮기고, 다시 여러 지방 관아와 군영에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과 비용이 너무 들었기 때문이다. [26] 다만 박문수의 경우는 절차를 건너띄어서 문제가 된 것이 컸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황해도 관찰사에게 먼저 지원을 요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조정에 가서 돈 달라고 해야 하는데 박문수는 어째서인지 중간과정을 뛰어넘고 바로 영조에게 쪼르르 달려간 것이다. 그러니까 영조 입장에서는 지방에서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인데 그럴 생각도 않고 바로 중앙 정부에 와서 돈 달라고 한 것으로 비친 것이다. 거기다가 전시상황도 아니었고 비록 황해도가 전라도보다 빈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시 황해도가 임진왜란 시기의 전라도보다도 가난할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순신 같은 먼치킨이랑 비교한 건 전형적인 꼰대질이지만... [27] 그나마 이 한 명의 문과 급제자도 1875년 고종 때에 배출했다. 반대로 율곡 이이의 계열인 문성공파는 문과에만 줄줄이 급제했다. 이는 덕수 이씨의 특징으로, 문성공파 중심의 문골 세력과 충무공파 중심의 무골 세력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있다. [28] 이게 붙은 이유로 좀 웃픈데 '충'자가 붙은 건 주목할 만한 충심을 보여주어 붙은 것이지만, '민'자가 붙은 것은 충심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정작 주목할 만한 다른 업적을 세운 것은 없어서이다. [29] 여담이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가에 대한 충심을 지키다가 도쿠가와에게 찍혀서 사후 가문이 몰락했다. [30]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장면에서 나온 해설. 그리고 이 해설은 과장도 허풍도 아니었다. [31] 박시백 화백은 《조선왕조실록》 완간 후 가장 높이 평가하는 조선의 인물로 세종과 이순신을 뽑은 적 있다. [32] 선조실록 편이었던 10권의 표지 인물 선정 과정에서 율곡 이이도 손색이 없었으나 이순신이라는 너무 거대한 산이 있었다는 후일담을 밝혔다. 실제로 이순신이 10권의 표지 모델이다. [33] 세종: 종로구 통인동, 이순신: 중구 인현동 [34] 심지어 이 이른바 <충무공 어록>이라는 걸 일선 부대에까지 정훈교육자료로 뿌려놨다. [35]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위인을 고작 KD-2 구축함의 함명으로 사용했다고 불만인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당시의 나라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이 건조되기 전까지 해군은 충무공의 이름을 아끼고 아끼고 고이 간직해뒀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지스함에 그 영예로운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IMF로 인해 KD-2 사업이 위기에 처하고 이지스함 개발 계획까지 휘청거리게 된다. 이처럼 앞으로의 꿈이 모두 물거품이 될 지도 모르는 불분명하고 불안정한 상황에서 결국 어쩔 수 없이 KD-2의 1번함 네임쉽(name ship)에 충무공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36] 실제로 류성룡으로 명명된 이유 중 하나가 이순신 장군을 추천하고 여러 차례 도움을 주는 등 평소 충무공과 인연이 깊었기 때문. [37] 독도급 강습상륙함의 후속인 경항공모함 CVX 미 해군 와스프급 상륙모함 아메리카급 강습상륙함을 모델로 F-35B와 같은 수직이착륙 고정익기 운용까지 염두에 두고 건조될 예정이다. 이 CVX의 초도함이 진수될 때쯤이면, 현 충무공이순신함은 거의 퇴역시기에 다다르게 된다. [38] 영어로 General은 육군 지휘관을 의미하고, Admiral은 해군 지휘관을 의미한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해군)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Admiral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오히려 한국어의 '장군'에 해당하는 단어라는 이유로 General을 사용해 버리면 이순신을 잘 모르는 영어권 국가의 외국인이 봤을 때 이순신을 육군 지휘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39] 다만 제독 문서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육군의 General과 해군의 Admiral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동·서양의 역사적·제도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전근대 동아시아권에서는 대체적으로 육상과 해상의 군 조직이 명확히 분리되지 않거나 일원화된 양상을 보였던 반면 유럽권 국가들에서는 육군과 해군이 개별적으로 성립하고 발달하였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유럽권에서는 육군과 해군의 계급 체계도 서로 달랐고, 육군과 해군의 계급 명칭을 엄격히 구분하는 관행 역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후 19세기~20세기 들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화를 통해 서양의 근대적 군사 제도와 체계를 도입하며 이러한 관행이 동아시아권에도 정착되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근대 동아시아권의 인물인 이순신에게 근대 이후가 되어서야 도입된 서양의 잣대를 무작정 들이미는 것은 사실 조금 무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순신은 엄연히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커리어를 쌓았기 때문에 육군 지휘관이냐 해군 지휘관이냐를 무 자르듯이 엄밀하게 따지려 드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수군으로서의 업적이 좀더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므로 해군에서 내부적으로 제독으로 칭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해군과 관련이 없고 해군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일반인들이 장군으로 부르는 것까지 무작정 잘못되었다며 제독으로 부를 것을 강요하는 것은 지양하는 편이 최선이라 할 것이다. [40] 또한 각 지역마다 위인 한 사람씩 선정해 사당을 보수하고 그 행적을 널리 알리게끔 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장사(壯士) 김덕령, 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이 무렵 부각된 위인들. [41] 보통 뒷면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초상화 있는 쪽이 앞면이다. [42] 사실 무속 신앙에서는 정말 별별 인물들을 다 신으로 모신다. 심지어 억울하게 죽은 남이 같은 인물들도 '원한이 있기 때문에' 신으로 모셔진다. 이 외에도 더글러스 맥아더 관우 같은 외국인도 모셔지는 경우가 있다(다만 관우는 임진왜란 때 들어온 명군에 의해 도입된 까닭도 있다.). 대중에 이름이 알려질만한 군인이면 신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많다. 맥아더의 경우에는 아직 죽지 않았을 당시에도 신으로 섬겨졌다. [43] 무속의 관점에서 이순신은 자신의 집이 아닌 외지에서 객사했고, 그것도 물에서 죽음을 맞았는데, 이러한 죽음 방식은 무속에서는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죽음의 방식이라고 간주된다. 더구나 이순신은 죽기 직전까지도 "적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즉 적들을 모두 몰아내기 전까지 나는 죽지 않겠다는 강한 원념을 품고 있었고, 그의 원념과 달리 일본 주력군은 전멸당하지 않고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죽을 당시의 상황이 비극적일수록, 그리고 생전에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은 인물일수록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특히 강하게 남게 된다는 것이 무속의 설명이며, 이 점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존재하는 신에 대한 관념이기도 하다. [44] 이 사당에는 충무공 이순신 뿐만 아니라, 최영, 정운 등도 모셔져 있다. [45] 이 덕에 이순신은 이일이 모함을 했음에도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처벌이 끝났다. [46] 임진왜란뿐 아니라, 조선 중기까지 조선에서는 청어잡이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청어는 명나라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했으며, 대마도에 보내 왜구들을 달래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47]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신화와 같은 업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전쟁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순신 혼자서 바다를 막은 것만으로 조선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절대 아니다. 고금을 통틀어 전쟁의 근본은 육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이순신의 업적이 너무 찬란해서 묻힌 사항이지만 당시 왜군은 센고쿠 시대를 지나며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가히 역전의 용사들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은 바다에서 도저히 이순신을 이길 방도가 없자 육지를 통해 전라도로 진격, 이순신의 뒤를 치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전력으로나 수적으로나 열세였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각지에서 들불같이 일어난 관군과 의병 그리고 승병들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가며 적을 막았기에 전라도와 이순신의 통제영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것이 이순신의 빛나는 승리를 뒷받침했던 것이다. [48] 한 명은 2013년에 입교한 해사 71기, 다른 한 명은 2014년에 입교한 해사 72기다. 이중 72기생의 아버지 또한 해군 장교 출신이며, 해사 40기로 최종적으로 해군군수사령부 참모장까지 지내고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49] 사실 이 정도는 양반이고 아예 이순신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구의 가공인물인데 박정희가 날조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인터넷 게시판에 버젓이 돌아다닌다. [50] 다른 예로 잔 다르크는 페미니스트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의 인물인데 페미니즘 세력에서 페미니즘의 심볼로 이용하는 모습도 나오고 있다. [51] 이 단어 자체가 어떤 뜻을 갖는지 알고 나면 이해가 더 쉽다. 해당 문서 참조 [52] 사실 이때는 국가라는 개념 자체도 없었다. 적어도 현대인인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아니다. [53] 물론 전부 말도 안 되는 개소리들이다. 역사 왜곡을 넘어 망언 수준의 하등 가치없는 쓰레기같은 말들이다. 정치 성향과 이데올로기를 떼놓고 보더라도, 박정희가 싫다고 해서 전국민적인 존경을 받는 한국사 최대의 위인을 근거없이 까내리는 작태는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누가 봐도 그저 한심스럽기 짝이 없을 뿐이다. [54] 실제로 홍위병들은 중국에서 이순신처럼 추앙받았던 영웅인 악비의 무덤을 파괴하기까지 했다! [55] 하지만 아직도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을 강하게 따르고 있는 진보 성향 인사들, 예를 들어 박노자 같은 경우는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종종 드러낸다. [56] 웃긴 것은 이 양반은 원균의 적통 후손도 아니고 그 동생인 원연의 후손이다. 그리고 원연은 원균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인데 자기 직계 선조도 아닌 방계, 그것도 역적을 미화하는 괴상하고 패륜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57] 참고로 이 인물은 일본 웹사이트에서도 활동했는데, 일본의 극우 혐한에 열렬히 동조하면서 한국을 비하하는 게시물들을 집중적으로 올렸고, 그 때문에 혐한 성향이 강한 일본인 네티즌들로부터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답다."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아울러 일본의 극우 혐한 인사한테 직접 혐한 자료들을 갖다 줄 정도로 활동력도 강했다. [58] 모 네티즌이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가 쓴 책에서 이순신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열렬히 찬양한 부분을 찾아내 스캔해서 직접 인터넷에 올리면서 루이지의 주장은 완전히 논파되었다. [59] 예시를 들자면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보여주었거나, 혹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입이 닳도록 강조했고, 어떻게든 기동에서 우위를 확보하려고 애쓴 이유였던 부분적 수적 우세의 활용이다. [60] 鷄林. 원래 신라의 별칭이지만 '고려'와 함께 조선을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 일본 본토에서의 무사나 상인들조차 조선 사발을 그냥 고려 자기라고 불렀다. '조선', '고려', '계림' 등은 애초에 서로 통용되는 말이었던 것. 일본은 조선의 국호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온 외교관이 국서에 '고려'라는 말을 썼다가, "남의 나라 국호도 모르면서 외교를 하려 하느냐? 고려는 400년 전 망했다"라고 쫓겨난 적도 있다.(조선만 그런게 아니라 중국 왕조가 송-원-명-청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중국을 쭉 당나라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나 우리도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만들었음에도 왜라고 불렀다. [61] 김시덕, 《그림이 된 임진왜란》 [62] 일단 넬슨은 자기를 지켜주고 보살펴준 상관의 아내를 유혹하여 불륜을 저질렀고 타고난 성정이 워낙 드세다보니 주변 인물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63] 다른 유명한 일화로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에서 "넬슨과 나는 비교하되, 이순신과는 비교하지 마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도고 제독에 관한 이런 일화들의 원전은 가와타 이사오가 쓴 《砲弾を潜りて》(博文館, 1925年)이며, 이 책은 전기 소설이다. [64] 이와 관련된 내용이 몇 개의 서적에서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사료로서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은 모양.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라는 발언이 실려 있다는 《日・朝・中三国人民連帯の歴史と理論》라는 서적도 일본과 중국의 국교 회복 서명 운동의 실시를 도모함과 동시에, 한일 회담의 분쇄를 목적으로 한 서적인 듯하며, 그리 신뢰할 수는 없는 서적이라는 듯.( #). [65] 참고로 이영개는 평범한 친일파가 아니라, 일본군에 비행기를 갖다바치고 그 대가로 조선인에게 참정권이 없었던 일제 강점기 때에 무려 일본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만큼 거물급 친일파였다. 그러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달아났는데, 대략 1964년 즈음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려고 했을 때 국내의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일부러 도고가 이순신을 존경했다는 식의 거짓말을 지어내어 퍼뜨렸다는 것이 유력한 견해 https://blog.naver.com/kc6731/120205408814. [66] 사실과 다르다. 명량 등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이순신 장군은 대부분 왜적보다 우세한 병력으로 전투에 임했다. [67] 사실과 다르다. 이순신 장군은 현지에 둔전을 개척해 보급을 스스로 조달하였기 때문에 보급이 끊긴다는 것은 근거지를 뺏기는 경우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다. 당연 무패의 이순신 장군은 보급량이 부족할지언정 보급이 아예 끊긴 적은 없다. [68] 그러나 이것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조정에 공물까지 갖다바쳐야 했던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면 얼추 맞다고 할 수도 있다. 쓰시마 해전에 국운을 건 일본과 이에 따른 전폭적 지원을 받던 도고 제독에 비해 확실히 어려운 상황이었음은 사실이다. [69] 출처 :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 이종락 지음, 선인 출판, 2010년, pp.27 ~ 28 [70] 순수 연구 목적으로도 이순신이 전쟁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고 전술했듯이 일본 측에서 억지로 이순신을 까내리면 자신들이 까내린 그 이순신에게 먼지나게 털린 일본의 장수들은 더더욱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도 있다. [71] 조선 측은 최고 지휘관인 이순신 및 그 밑의 일부 지휘관 그리고 명군 지휘관 1명이 전사하고 진린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는 등 피해를 안 본건 아니었지만 일본군은 전투에 참여한 함선의 2/3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이순신을 죽인 것이 무색할 정도로 피해를 많이 보았고 시마즈 본인도 여러 차례 죽을 뻔했다. 더욱이 이 때 조선군은 60척이었는데 조선군만 놓고 보면 1:5였고 명군이 합쳐져야지 6:5로 일본의 열세인데 조선의 피해는 뚝 떼놓고 명군으로만 규모와 피해를 집계해서 보면 총 300척 중에 1척이 격침된 게 전부다. 명군의 피해를 놓고 보면 일본군은 명군이나 조선군에게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을 뿐 역관광을 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다못해 조선 수군을 궤멸시켰다고 쳐도 총 전력손실을 보면 조명 연합군은 전체의 1/6만 타격을 입었을 뿐인데 일본군은 2/3나 박살났다. 아무리 병력 면에서 조명 연합군이 약간 유리했다 하나 아무리 최대로 가정해도 1/6이 박살난 조명 연합군과 2/3가 박살난 일본군을 비교해보면 일본군이 역관광시켰다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72] 예시로 전열보병 시대의 전투에서 기병이 하는 일이 정찰과 퇴각하는 적에 대한 추격 및 격멸이었다. [73] 현대전에서 퇴각하는 군대를 굳이 추격하지 않는 이유는 인도적인 이유가 아니라 매복이나 역습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74] 오히려 이순신에게 복수하겠다며 해안 마을과 피난하는 민간인들을 어린아이조차 가리지 않고 한 명도 남김없이 학살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행태가 바로 전쟁범죄다. 심지어 이순신 자신조차 일본군의 보복으로 가족들이 위험에 처했고 그 와중에 막내아들 이면이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러니 더더욱 노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을 최대한 많이 몰살시키려 할 수밖에 없었다. [75] 노량 해전 이후 2년 뒤 가중내란이 있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할 의사 자체도 적었다. [76] 예컨대 원균을 배설보다 낫게 서술하여 개인 감정만 드러낸 《난중잡록》. 신뢰도가 높은 강항의 기록도 그의 처지상 풍문이 상당수 섞여 있고, 교차검증 시 틀린 부분이 있는 경우가 있다. [77] 한국 서울의 관청가인 세종로에는 이순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군사 정권의 힘의 상징으로 설치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더불어, 그 외에도 부산 용두산 공원이나 목포 등, 다수의 조선반도 남해안에는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있다. [78] 물론 정상적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6.25 전쟁을 일으켜 민족에게 동족상잔의 상처와 기나긴 고통을 남기고 3대에 걸친 세습 철권 통치로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북한을 말그대로 생지옥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극악무도한 독재자인 김씨 일가 따위가 감히 충무공보다 훌륭하다고 지껄이는 것은 그 자체로 충무공에 대한 모독이다. [79] 하늘을 날줄로 삼고 땅을 씨줄로 삼음. 경과 위는 위도, 경도할 때의 그 경위다. 즉 천하를 재단할 만한 큰 재주를 말함. [80]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대단히 큰 공로를 일컫는다. 여와가 하늘을 보수했다는'보천'과 희화가 해를 목욕시켰다는'욕일'의 전설에서 따온 사자성어. [81]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말한 이들도 능력은 걸출했던 영걸임에는 틀림없었으나 최후에는 결국 자신들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는데 반해, 이순신은 패망으로 기울어진 전쟁의 판도를 뒤집고 끝내 나라와 민족을 구해냈기 때문이다. [82] George Alexander Ballard, 1862~1948. 파쇼다 사건 제1차 세계 대전 등에 참전한 군인이면서 역사가를 겸했기에 알게된 듯 하다. [83] 무슨 문헌을 참고하고 썼는지, 계속 'Yi-sun'이라고 이순신 장군을 호칭한다. First name이 '이순'이고 Last name이 '신'인 것으로 착오했을 수도. [84] 1944년 10월 10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인용. [85] 정확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활쏘기·충각·백병전을 벌이는건 일본 수군의 전법에 더 가깝다(활과 충각은 좋은 성능의 국궁과 견고한 판옥선으로 인해 조선 수군에서도 사용했지만 조선 수군의 전법은 근접전보다 적선의 접근거부 & 포격전에 가깝다). 이러한 서술은 몽고메리가 아시아의 전반적인 해군 수준을 몰랐거나 하등하게 본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이미 고려 말부터 해전에서 화포가 사용되었으며, 조선 왕조에 들어서도 해상 포격 전술은 왜구를 상대하는 데 주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해상 포격전에 특화된 함선인 판옥선이 정걸의 주도하에 주력함으로 개발되었고, 이순신은 판옥선의 장점을 극대화 시켜 일본군을 압살했다. 그 외 베트남도 비슷한 시기부터 화포를 장착한 함선을 이용했고, 인도네시아 군도의 국가들 역시 카락선보다 큰 함선에 대포를 달아서 포르투갈 원정군이 애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86] 게임 개발자가 진행하는 채널로, 주로 게임과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한다. 그러나 별도로 'Extra History'라는 코너에서 역사 관련 영상도 올리고 있다. [87] 20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친한파 미국 정치인으로, 1963년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자는 주장에 대해 현신규 박사의 녹화사업 성과를 소개하고 원조를 유지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88] 조선의 표준 전선인 판옥선은 일본이나 중국의 전선에 비해서 화력, 내구력, 운용능력이 모두 뛰어났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화력 투사를 전제로한 함선이다보니 선상 백병전을 위한 승조원 수가 제한적인 점 정도. 그나마도 판옥선의 선고가 일본 전함에 비해 높아서 판옥선에 접현을 하여 선상 백병전을 하려면 승자총통을 맞아가며 공성을 해야했다. [89] 동양 기준인 이유는 유럽에선 이미 판옥선보다 4배 큰 배들이 돌아다니던 시점이기 때문. [90] 호레이쇼 넬슨, 프랜시스 드레이크, 도고 헤이하치로, 체스터 니미츠 등 해전 역사에 남을 역대급 명장들이었다. [91] 다만 이는 10배의 적을 격퇴한 이순신 특유의 업적에 비유한 밈적인 발언이기는 하다. [92]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오기 위해서는 평저선은 무리고 첨저선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속도를 내기 좋고 원양에 나갈 수 있겠지만 대신 전투에서 안정성이 낮고 회전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93] 사극에서는 흔히 바퀴가 달린 사각형의 동차에 화포를 실어서 사용한 것처럼 묘사하는데, 동차는 임진왜란보다 한참 이후인 19세기에 쓰여진 융원필비에서 처음 등장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직후에 쓰여진 신기비결에서는 화포를 땅에 잘 고정시키고 쏘라고만 되어 있는데, 포가가 있었다면 이런 서술이 있을 이유가 없다. [94] 누차 강조하지만, 당시의 포탄은 말 그대로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오늘날처럼 명중하는 순간 폭발하는 게 아니다. 맹꽁이 서당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조선군이 쏜 포탄이 일본군 진지에 떨어지자 일본군 병사 몇 명이 이리저리 굴리고 놀다가 폭발해서 다 날아간다. 반대로 말하면 당시의 포탄은 터지는 게 아니라 그냥 굴리고 놀 수 있는 쇳덩이였다는 말. [95] 우리는 아주 훌륭한 반대 예시 하나 이미 알고 있다. [96] 예컨대 용인 전투에서 왜군은 2,000명 미만이었고, 조선군은 4만 명 이상이었다. [97] 당시 일본 농민들은 전투에 직접 참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전투가 끝난 뒤 패잔병 사냥을 하여 무기나 재물을 챙기는 부업을 하였기에 살인에 대한 마음가짐이 조선과 하늘과 땅 차이였다. [98] 이 경우 이순신은 근대적 해전을 실전에서 가장 먼저 보인 선구자로서의 면모가 부각된다. [99] 화약 사용량 대비 사거리가 길고, 약한 화력은 산탄을 장전해서 인명 살상용으로 쓸 수 있다. [100] 물론 해야 한다면 마냥 피하지도 않았다. 아예 일부러 적선에 갈고리를 걸어 접근한 후 근접전을 펼치기도 했다. [101] 물론 개개인의 백병전 능력이야 조선군이 왜군에게 밀린다지만, 조란환 등 산탄으로 한번 쓸려나가고 화살 세례를 맞아 갑판위가 피바다가 되버린 상태의 왜군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02] 실제로 《난중일기》에 병사들이 상륙해서 배 만들 목재를 조달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103] 이 행위는 왜군도 자주 했다. 전장에서 자원을 모아서 무기를 만들어 싸우는, RTS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임진왜란 때는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바로 그 이순신 장군에게 보급로를 싹 털려서 어쩔 수 없었던 거지, 일본 본토는 계속 보급을 해 줄 의지도, 보급품도 있었다. 물론 정작 중요한 이순신을 뚫을 수가 없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104]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이를 묘사했다. 극중 군졸인 대만이 도성으로 보내는 공물을 보면서,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이거 그냥 확 불 질러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하자, 영갑이, '누가 아니래냐? 총알에, 화포에, 피해가면서 전쟁하는 놈들 애쓴다고 곡물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둔전소에서 곡식 나오는 족족 도성으로 보내라, 명나라 놈들한테 보내라, 참말로'라 대답한다. 그에 호응하는 군졸들이나 백성들은 덤. 실제로도 수군 간부 / 병사들이나 백성들 할 것 없이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다. [105] 무과의 정원은 28명이지만 문과와 달리 무과는 합격 정원이 칼같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실제론 정원보다 많이 뽑는 경우가 많았다. [106] 기록을 보면 딱히 무예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는 무장들도 평범하게 적 몇 명을 베어 죽였다던가, 몇 명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들을 꽤 찾아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전근대의 장군들은 현대의 특수부대원처럼 일반적인 병사들보단 평균적으로 개인능력이 뛰어난 게 보통이었다. [107] 그리고 마냥 병약=무예가 약하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 오키타 소지처럼 폐병환자지만 최정예 치안조직인 신센구미의 최선봉에 선 경우도 있고, 체 게바라는 천식 환자였지만 격오지를 누비며 게릴라전을 이끄는 군사 지도자기도 했다. [108] 임진왜란 때보다 약간 후대인 부북일기의 기록을 보면, 당대 최정예병이었을 함경도 군관들은 50발 중 43발을 맞추면 가장 못 쏘는 축에 들었다. 군관 이시복은 무려 200발을 모두 명중시켰다고 전해진다. # [109] 오늘날을 기준으론 무척 잘 쏘는 편이다. 5시 1순의 방식으로 쏜다면 적어도 2번은 몰기(모두 명중)를 했다고 볼 수 있는데, 대한궁도협회의 승단 심사기준은 8단이 9순(45시)에 37중, 9단이 39중이다. [110] 현대에도 중년 정도 되면 평소에 몸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은 이상 몸이 조금씩 무너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111] 정확하게는 40세 전후 때 가장 적중률이 좋고, 이후 적중률이 떨어졌다고 한다. 출처 [112] 이 중 서성의 경우는 문관이긴 하다. [113] 출처 [114]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무장이라면 원래 활과 함께 창, 칼도 익히는 것이 기본이다. 애초에 활쏘기 자체가 한국에서 워낙 중시되고, 실력을 가늠하기 쉬워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무예를 익혔을 장군들도 그냥 무예 관련 기록은 활쏘기 정도만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려의 한희유나 이성계, 왜란 당시 조선의 맹장이던 황진이나 이종인 등을 보면, 이들 모두 무예에 대한 기록은 말타기와 활쏘기밖에 없지만 정작 칼이나 창으로 뛰어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115] 물론 왜란 직전 조선은 워낙 평화가 오래 지속되는 등 여러 이유로 시험 등에 직접적으로 평가되고 중시되는 활쏘기에 치중된 면이 있었다. 여러 기록에 창과 칼을 익히지 않아 문제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왜란 당시에 여러 장수들이 창칼로 활약한 것을 고려하면 FM대로 익힐 사람들은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역시 본인의 칼에 관한 시를 몇 개 남긴 점이나 그 철저한 성격을 고려하면 창검술도 제대로 익혔을 확률이 높다. [116] 화살과 돌. 적들의 공격을 비유한 것이라 보면 된다. [117] 지휘관인 이순신이 이러한 것을 보고 의아해 할 수 있는데, 전근대에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 전투 독려 등를 위해 지휘관급이 몸소 일선에서 싸우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물론 직급이 올라가고 대군을 지휘하기 시작하면 몸을 지키고 지휘에 집중하는 게 일반적이긴 했다. 실제로 노량해전 때 이순신이 몸소 나서자 걱정한 부장들이 만류했다는 류성룡의 기록이 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891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891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