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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0:54:00

이순신/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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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여담
2.1. 이순신 장검(長劍)에 얽힌 이야기2.2. 화폐 인물2.3. 엄격한 직장 상사2.4. 공정함과 애민(愛民)2.5. 사람을 보는 눈과 다루는 법

1. 개요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한 기타 내용들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여담

그 외에는 특별한 날 부하들과 연회에 참석하거나 조정 인사들을 맞이하는 행사에 기생들이 동행했다거나 '여진'이라는 하녀와 성관계를 했다는 내용이 몇 번 나온다. 다만 기생들이 동행하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마냥 문란한 것은 아니고 단순한 의전에 가까웠다.[20] 그나마도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여진이라는 하녀는 명백한 오역이라고 한다. '여진'은 하녀가 아닌데 여성이 아니라 '여진(余陣)'으로 '내 진영(陣營)'이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성웅도 여색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로 작용하는지 현대의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대중매체 중에는 이런 식으로 이순신의 여자 관계를 창작해서 넣은 작품들이 제법 있다. 김훈의 < 칼의 노래>에서도 '여진'이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21]

2.1. 이순신 장검(長劍)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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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4082400175_0.jpg 파일:external/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new_%EC%B6%A9%EB%AC%B4%EA%B3%B5%20%EC%9E%A5%EB%8F%84.jpg
이순신 장검 - 보물 제326호[29]

이순신의 검은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약 2m에 가까운 크고 아름다운 길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이순신의 키는 2m 50cm 내외가 될 것이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에 동래성에서 출토된 조선 갑옷을 통한 추정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 남성의 평균적인 키가 164cm라는 결론이 나와 실제로 키가 그렇게까지 컸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키가 컸다는 이야기와 6척[30]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장신이었던 걸로 보인다. 더욱이 이순신의 장검은 쌍수도이며 그 태생은 척계광에 의해 중국에서 도입된 칼로, 그 뿌리는 왜구들이 쓰던 오오타치이다. 조선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다는 일본인들도 잘만 쓰던 칼인지라 이 검을 사용했다고 해서 거인일 리는 없다. 키에 비례해서 검의 길이를 정하는 것은 현대 검도에서 초급자에게 권장하는 사항일 뿐이고 옛날 전장에서 키에 따라 무기를 정했을리는 만무해 키가 작은 사람도 4~5m 짜리 장창을 잘만 사용할 정도로 키와 무기 길이는 효율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당장에 무기 길이가 승패를 가르는 요소인 만큼, 키가 작다고 작은 무기를 드는 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일 정도이다. 물론 이순신이 수군 전체를 총괄하는 지휘관의 신분이었던 만큼 직접 일선에서 교전할 일이 없어 이 장검이 실전에서 사용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뿐 이 장검이 실전에서 사용 못할 무기는 전혀 아니다.
추가로 위 사진처럼 검날의 홈[31]에 칠해진 붉은색이 이순신 사후 누군가에 의해 칠해진 페인트라는 게 밝혀져 대한민국의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지금은 복원 작업을 통해 페인트를 지웠지만, 이미 대중들에겐 '충무공의 환도는 붉은색'이라고 각인되었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파일:attachment/AKR20100708197800005_01_i.jpg
1910년에 촬영된 쌍용검이라 추정되는 도검[32]

그리고 이순신이 사용한 또다른 칼이라는 쌍룡검은 사라진지 근 100년이 되었다. 그저 일제강점기 시절 어느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추정만 할 뿐 소재는 오리무중이다. 다만 이 쌍룡검이 실제로는 이순신의 검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현충사에 소장된 이순신의 장검을 실전에서 사용한 검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조선은 화약 병기나 원거리 병기에는 많은 투자가 이뤄진 반면,( 세종, 문종 문서로.) 검 문화가 덜 발달한 국가다. 조선의 병과상 검을 사용하는 병과는 팽배수, 도수(조선 전기)나 등패수(조선 후기), 조총병(조총 + 쌍수도 / 장도 또는 요도)로 한정되어 있었고[33], 전반적으로 보병은 창으로 상대를 막으려 했지만 이게 제대로 안 되어서 무너졌고 기병에서도 가장 선호되는 무장은 마편곤(馬鞭棍) 같은 기병용 타격 병기였다. 검 자체에 대한 대우나 일반적인 인식도 《 무예도보통지》에서 나오듯이 썩 좋지 않다. 조선의 검 문화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성호 이익의 《 성호사설(星湖僿說)》인데,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우리나라 병사들은 일본도를 얻으면 경사면을 갈아내는데, 이 경사면이 있어야 칼의 날이 손상당해도 쉽게 갈아서 쓸 수 있지만, 그걸 모르고 칼날의 경사면을 갈아내 버린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선 초기 《 문종실록》에서도, 병사들이 임의로 칼날을 분질러 길이를 줄이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검신을 아예 없애버리는 상황도 벌어져, 문종이 도검의 길이를 법적으로 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이순신 본인부터가 검에 대한 인식이 마뜩찮다. 일반적으로 왜검을 손에 넣으면 소유하거나 진상하는데, 이순신은 죄다 녹여서 물자로 전환시켰다. 이순신 본인은 검법이 맞지 않다고 했으나, 황진이 통신사를 수행하고 오면서 왜검을 사왔던 점, 조선이든 명이든 쌍수도를 적극 장려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어디까지나 핑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승산이 충분함에도 근접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패주하는 일이 많았던, 다시 말해 근접전 자체가 익숙지 않았던 조선군의 현황 속에서 일본도는 가지고 있어봤자 제대로 써먹기 힘들었다. 다만 이순신의 함대 내에 항왜(降倭) 출신 병사가 존재했음이 확인되므로, 이들은 자신의 일본도를 가지고 싸웠을 것이다. 1596년 1월 1일자 난중일기에 환도와 함께 왜검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일본도 양식의 검을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현충사에 전시된 검에 대해서도, 왕권을 상징하는 태아검(太阿劍)처럼 장식용 및 군기 확립을 위한 장식이라고 설명되어 있으므로 요주의.[34] 또한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새로 검을 만든 것이 편하게 쓰였다는 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장검은 태구련 등 대장장이들이 자신들이 대장장이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든 장식용 검으로, 갑오년에 만든 물건이고, 이순신이 새로 만든 검은 그 뒤인 정유년 이후이다.

현충사 장검 날 옆면 홈 안에 칠해진 빨간 줄은 만들 때부터 있던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공업용 페인트로 칠을 해놓은 것이다.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칠했는지는 밝혀진 게 없으며, 페인트칠이란 사실이 2014년 8월 하순에서야 밝혀지면서 문화재청에서 이 페인트칠을 벗기기로 결정해 현재는 벗겨진 상태라고 한다.

워낙 귀한 유물임에도 보물로 지정된 것이 가치가 낮아서인지 몇몇 시민단체에서 '국보로 승격해야 한다.'라고 청원했으며, 마침내 2023년 6월 문화재청에서 해당 장검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35]하기로 결정해 '지정 예고'를 했으며, 이후 이의 신청과 문화재위원회 심사를 거쳐 2023년 8월 24일 국보로 승격되었다.( 관련 기사, 문화재청 보도자료)

2.2. 화폐 인물

<colbgcolor=#808080,#7f7f7f> 대한민국 주화
액면가 1원 5원 10원 50원 100원 500원
도안 무궁화 거북선 다보탑 벼 이삭 이순신

파일:₩500 앞.jpg
100원이 지폐이던 시절에는 500원권 지폐의 인물로, 100원이 동전이 된 현재에는 100원 동전에 그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f9a1a9ca.jpg
100원 동전에도 삽입되어 있는데 구 100원 동전에 있는 이순신은 구 500원권에 삽입된 이순신과 오묘하게 거의 비슷하다.

2.3. 엄격한 직장 상사

그가 남긴 기록이나 여러 문헌에 의하면 굉장히 깐깐한 인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충무공유사》의 기록을 해석한 결과, 원균을 가리켜 원흉(元兇)이라 부르며 싫어한 것이 밝혀져 충무공과 원균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의 행패가 그나마 점잖으면 원균의 인 평중을 붙여 "원평중", 또는 "원수사"라고 불렀지만[36], 행동이 도가 지나치면 가차없이 원흉이라 언급한다. 원균 역시 이순신이 지나칠 정도로 융통성이 없다면서 싫어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순신다운 현안이었다.[37]
[ruby(小有違令, ruby=소유위령)] [ruby(卽當軍律, ruby=즉당군율)]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굉장히 엄격한 상관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 ○○가 기강이 태만하므로 베었다, 곤장을 때렸다' 등으로 가득 차 있다(예를 들어 김완이나 황옥현 등). 오죽하면 일본 수군들과의 전쟁을 대비한 기록보다 군율을 어긴 아군을 처벌하는 내용이 더 많이 나올 정도. 특히 많이 처벌받았던 자들이 관할 지역의 아전들이었다. 고려시대에 지방의 지배계층이었던 향리들은 조선 건국 후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수령에게 무보수로 봉사, 보좌하는 아전으로 굴러 떨어졌고, 이에 살 길이 어려워진[38] 아전들은 중간에서 갖은 비리를 저질렀는데, 이는 조선 시대 내내 큰 사회 문제였다. 이순신의 처지에선 나라의 존망이 걸려 목숨을 걸고 싸우는 판에, 그들의 비리나 과실을 눈감아 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서 존경할 만하지만, 상관으로 모시기엔 힘든 인물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한다. # 능력이 엄친아급이니 보통 사람은 절대 따라해선 안 되는 인간의 표본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

불시에 병영을 순시해 무장과 병력 상태를 점검하는 일이 잦았는데, 무기에 털끝만한 녹이라도 슬어있으면 기본이 곤장으로 줄빳다 80대였다. 다만 곤장을 맞고 죽은 경우는 없고, 휘하 병력들이 평시에 잘 관리하면서 할 거 다 한 후에 시간이 남아 놀고 있는[43] 모습을 보면 오히려 상을 주기도 하는 등 신상필벌을 엄격하게 적용한, 그야말로 완벽한 원리•원칙주의자의 모습이다.

또한 완벽주의자로 가차 없이 백성들을 징집해 수군으로 훈련시켰으며, 전함 건조 등의 일도 철저하게 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칠반천역(七般賤役) 중 하나로 여겨졌는데, 한번 입대하면 빠져나오기도 힘든 데다 후손에게도 피해가 미치기에 탈영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로 인해 탈영자의 친족을 수군으로 강제 징발하는 법도 있었다. 이 때문에 그 법이 너무하다 하여 이 법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순신은 장계를 2차례나 올려 그 일을 반대했다.[44] 그런데 백성들 처지에서 보면 육군보다는 믿음직하고 부유한 충무공 휘하의 수군이 복무하기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45] 게다가 수군과 그 군영 근처에 있으면 힘들어도 굶을 일은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삼남이 전쟁터였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굶는 자가 속출했고 이는 임금인 선조나 조정 대신들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런 판국에 밥을 안 굶는다는 것 자체가 장수들과 병사들,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국인 셈이다. 이는 이순신이 섬에 둔전을 둬서 군량 확보에 신경을 써왔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이후에는 해로 통행첩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통행을 허가하는 대가로 쌀을 걷었는데, 며칠 안 가서 쌀 수천 석이 쌓였다. 이로써 군량 확보, 간첩선 방지, 백성들의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었다.

철저한 엄벌주의자로 수많은 부하들에게 형벌을 집행해서 어떻게든 수군에서 벗어나려 용쓰던 수졸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했다. 그러나 최고 지휘관으로서 군대의 규율을 잡는 것은 원래부터 당연한 일이었고 탈영, 물자 횡령, 적전(敵前) 도주는 현대에서도 최대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중죄이다.

때문에 후대의 역덕후, 밀덕후들은 이렇게 엄정한 이순신의 군기 확립을 두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사망 원인 2위 = 이순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46] 1위는 전염병이며, 0위는 원흉이다.

정리하자면, 이순신은 마냥 엄격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관대하지 않고 철저히 원리 원칙에 따른 삶을 살아가며, 부하들에게 항상 최고인가, 최선인가 물으며 개인의 잠재력과 능력을 극한까지 뽑아내어 부려먹고, 부려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한 것은 상을 주고 벌 역시 너도 나도 공평하게 받으며, 때에 따라서는 할 일을 하고 한없이 풀어줘서 소탈한 모습으로 부하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니 뒷담을 하기도 어렵고, 종래에는 본인이 직접 진두지휘하며 최후의 전장에서 적을 분멸하다 장렬히 전사하는, 군인으로서 첨언할 수 없을 만큼 충정한 삶을 살다 떠난 사람이었다. 이러니 평범한 능력을 가진 부하들에게는 일은 더럽게 힘들지만 다른 졸장 아래로 들어갔다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절대 욕 할 수는 없는 그야말로 참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일기에서 남에게 긍정적 행위를 베푼 날을 찾아보자면 다음 등이 있다. 물론 누구를 처벌했다는 내용도 자주 나온다.
1592년 2월 21일 (양력 4월 3일)
(전략)신홍헌으로 하여금 술을 걸러 지난날에 심부름하던 삼반하인들에게 나누어 먹이도록 하였다.
1592년 5월 9일 (양력 6월 18일)
보성군수 김득광이 빼앗아 온 소녀 한 명은 나이가 좀 들었으나 머리를 깎고 왜인이 되었는데, 심문해 보니 5월 5일 동래 응암리에 사는 백성 윤백련이고, 나이는 열 네 살이며, 제가 아무날 어느 곳에서 왜인을 만나 누구누구와 같이 포로되었다가 그날 접전할 때 도로 붙잡혀 나오게 된 연유와, 왜적들의 모든 소행을 비롯하여 생년월일과 신분 등을 아울러 진술하였다. (중략) 이 말을 듣고 윤백련과 소녀 등을 순천ㆍ보성 등 관원에게 "각별히 보호하라"하고 돌려주었거니와, 흉추한 적들의 해독이 이 지경에 이르러 벌써 살육도 많고, 또 노략질도 많이 하여 모든 백성들 중에 어버이나 자식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연해안을 두루 돌아보니 지나가는 산골짜기마다 피난민 없는 곳이 없으며, 우리 배를 바라보고는 아이나 늙은이나 짐을 지고 서로 이끌며 흐느껴 울며 부르짖는 것이 다시 살 길을 얻은 것 같아서 좋아하고, 혹은 적의 종적을 알려 주는 자도 있었는데, 보기에 비참하고 불쌍하여 곧 싣고 가고 싶었으나,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전쟁을 해야 하는 배에 사람들을 가득 실으면 배를 운영하는 데에 편리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돌아갈 때 데리고 갈 예정이니 각각 잘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여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알아듣도록 타이른 뒤에 적을 쫓아내려 멀리 떠났다가, 별안간 임금 수레가 서쪽으로 몽진하신 기별을 듣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노를 재촉하여 그대로 돌아왔어도 불쌍한 정경은 오히려 잊을 수 없다. 이들 피난민이 집을 나온지 오래 되어 남은 양곡마저 떨어져 굶어죽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 도의 겸관찰사에게 "끝까지 찾아내어 구호하기 바란다"고 통보하였다. 왜선에 실렸던 왜의 물건은 모두 찾아내어 다섯 칸 창고에 가득히 채우고도 남았으며, 그밖의 사소한 잡물은 다 기록하지 못하고 그 중에서 전쟁에 쓸만한 물건을 골라서 별도로 그 종류대로 모아 놓았는데, 김해부 사람의 이관안(吏官案)과 분군성책(分軍成冊) 및 각종 활ㆍ화살 등은 아울러서 차례로 조목조목 적었거니와, 왜선에 실려 있었던 물건 중에 우리가 먹을 만한 쌀 300여 섬은 여러 전선의 굶주린 격군과 사부들의 양식으로 적당히 나누어 주고, 의복과 목면 등의 물건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적을 무찔러서 이득을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 했으나, 먼저 조정의 조치를 기다렸다.
1592년 7월 10일 (양력 8월 16일)
이렇게 종일토록 하여 그 배들을 거의 다 깨부수자 살아남은 왜적들은 모두 뭍으로 올라갔는데, 뭍으로 간 왜적들을 다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곳 백성들이 산골에 잠복해 있는 자가 무척 많은데, 그 배들을 모조리 불태워 궁지에 몰린 도적이 되게 한다면 잠복해 있는 그 백성들이 오히려 비참한 살육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잠깐 1리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47]
1592년 7월 15일 (양력 8월 21일)
여러 장수와 군사 및 관리들이 제 몸을 돌아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여전하여 여러 번 승첩을 하였다만 조정이 멀리 떨어져 있고 길이 막혔는데, 군사들의 공훈 등급을 만약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 받은 뒤에 결정한다면, 군사들의 심정을 감동케 할 수 없으므로, 우선 공로를 참작하여 1, 2, 3 등으로 별지에 기록하였으며, 당초의 약속과 같이 비록 왜적의 머리를 베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을 힘을 다해 싸운 사람들은 내가 본 것으로써 등급을 나누어 결정하고서 함께 기록하였다. 이 내용을 장계하였다.
1592년 7월 16일 (양력 8월 22일)
본영과 본도 소속 각 진포의 군량은 원 수량이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세 번이나 적을 무찌르느라고 해상에서 여러 날을 보내게 되어 많은 전선의 군졸들이 굶주리므로 원 군량은 벌써 다 나누어 주었다. 적은 물러가지 않으므로 잇달아 바다로 내려가 출전해야 하고 군량은 달리 변통하여 마련할 길이 없어 순천부에 두었던 군량 오백여 섬을 본영과 첩입한 방답진에, 흥양 군량 사백여 섬을 여도, 사도, 발포, 녹도 등의 네 개 포구에는 백 섬씩을 먼저 옮겨다가 뜻밖의 일에 대비토록 하고, 도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이 내용을 장계하였다.
1594년 4월 초3일(양력 5월 22일)
맑다. 오늘 여제(厲祭)[48]를 지냈다.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 천여든 동이를 먹였다. 우수사와 충청수사도 같이 앉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숙소로 내려왔다.
1595년 1월 초1일 (양력 2월 9일)
맑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라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또 나이 여든이나 되신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 여러 장수들과 여러 색리, 군사들이 와서 해가 바뀐 세배를 했다. 원전(元琠), 윤언심(尹彦諶), 고경운(高景雲) 등이 와서 봤다. 여러 색리와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1595년 5월 17일 (양력 6월 24일)
맑다. 아침에 나가 본영의 각 배에 사부, 격군의 급료받은 사람들을 점고했다. 저녁나절에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박, 권 두 조방장이 잘 맞추었다. 오늘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부어 만들었다.
1595년 7월 14일 (양력 8월 19일)
저녁나절에 개였다. 군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宗)으로 하여금 사망한 군졸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쌀 두 섬을 주었다. 이상록 (李祥祿), 태구련(太九連), 공태원(孔太元) 등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병이 나아 펀안하시다고 한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1595년 8월 27일 (양력 9월 30일)
맑다. 군사 5480명에게 밥을 먹였다. 저녁에 상봉에 이르러 적진이 있는 곳과 적이 다니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바람이 몹시 사납다. 밤을 틈타 도로 내려왔다.
1595년 9월 초2일 (양력 10월 4일)
맑다. 새벽에 지휘선(上船)을 출항시켰다.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이고서 끌고 내려왔다. 충청수사, 우수사, 경상수사, 두 조방장과 함께 이르러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1596년 1월 23일 (양력 2월 20일)
맑다. 작은형님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마음이 몹시 어지럽다. 아침에 헐벗은 군사 열일곱 명에게 옷을 주었다. 또 옷 한 벌을 주었다. 종일 바람이 험했다. 저녁에 가덕에서 나온 김인복(金仁福)이 와서 현신하므로 적의 정세를 물어 보았다. 밤 열 시쯤에 아들 면, 조카 완(莞) 및 최대성(崔大晟), 신여윤(申汝潤), 박자방(朴自芳)이 본영에서 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편지를 받아 보니 기쁘기 그지없다. 종 경(京)도 왔다. 종 금(金)은 애수(愛壽) 및 금곡에 사는 종 한성(漢城) 공석(孔石) 등과 같이 왔다. 한밤에야 잠들었다. 눈이 두 치나 내렸다. 근래에 없던 일이라고 한다. 이 날 밤 몸이 몹시 불편하다.
1596년 2월 초5일 (양력 3월 3일)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야 개었다. 사도첨사, 장흥부사가 일찍 왔다. 그래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권숙(權澁)이 와서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종이, 먹 두 개와 대 검(佩刀)을 주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는 음식을 먹이고, 겸하여 활을 쏘고 풍악을 잡히다가 취하여 헤어졌다. 웅천현감(이운룡)이 손인갑(孫仁甲)의 애인을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가야금을 몇 곡조 들었다. 저녁에 김기실(金己實)이 순천에서 돌아왔다. 그 편에 안부를 물었더니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우수사의 편지가 왔는데 기한을 늦추자고 하니 우습고도 한탄스럽다.
1596년 2월 초7일 (양력 3월 5일)
아침에 흐리다가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좋지 않다. 저녁나절에 나가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장흥부사, 우후, 낙안군수, 흥양현감을 불러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1596년 2월 15일 (양력 3월 13일)
(전략) 이날 밤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아 자려 해도 잠잘 수가 없었다. 아랫사람들은 밤새도록 술마시고 노래했다.
1596년 3월 21일 (양력 4월 18일)
종일 큰 비가 내렸다. 초저녁에 도와리를 만나 구토를 한 시간이나 했는데, 자정이 되니 조금 가라앉았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앉았다 누웠다 하며 괜스레 일을 저지르는 것 같아 한스럽기 그지없다. 이 날은 너무 심심해서 군관 송희립(宋希立), 김대복(金大福), 오철(吳 轍) 등을 불러 종정도(從政圖)[49]를 내기했다. 바람막이 세 개를 만들어 걸었는데, 이언량(李彦良)과 김응겸(金應謙)이 감독했다. 한 밤이 지나서 비가 잠깐 그쳤다. 밤 세 시에 이지러진 달빛이 비치어 방 밖으로 나가 거닐었다. 그래도 몸은 몹시 노곤했다.
1596년 4월 11일 (양력 5월 7일)
맑다. 아침을 먹고 어사와 같이 마주하여 조용히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장병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활 열 순을 쏘았다.
1596년 5월 5일 (양력 5월 31일)
맑다. 이날 새벽에 여귀에게 제사를 지냈다. 일찍이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앉아 있었고 회령포만호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여러 장수들이 와서 모였다. 그대로 들어가 앉아서 위로하고 술을 네 순 배를 돌렸다. 경상수사가 술이 거나하게 취했으므로 씨름을 시켰더니, 낙안군수 림계형(林季亨)이 으뜸이다.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마시고 뛰놀게 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한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것이었다.
1596년 7월 21일 (양력 8월 14일)
맑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거제현령, 나주판관, 홍주판관과 옥포만호, 웅천현감, 당진포만호가 왔다. 옥포에는 배 만드는 데 쓸 양식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체찰사에 관계된 군량 스무 말을 주고, 웅천 당진포에는 배 만들 쇠 열다섯 근을 함께 주었다. 이 날 아들 회가 방자 수(壽)에게 곤장쳤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을 붙들어다가 뜰 아래에서 잘 타일렀다. 밤 열 시쯤에 땀이 줄줄 흘렀다. 통신사가 청하는 표범 가죽을 가지고 올려고 배를 본영으로 보냈다.
1596년 윤8월 14일 (양력 10월 5일)
맑다. 새벽에 두치(豆恥: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니, 체찰사와 부찰사가 어제 벌써 도착하여 잤다고 한다. 뒤미처 점검하는 곳으로 가서 소촌찰방을 만나고 일찍 광양현에 이르렀다. 지나온 지역이 한결 같이 쑥대밭이 다 되어 그 참상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임시로나마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겠다.
1597년 9월 9일 (양력 10월 19일)
맑다. 오늘이 곧 9일(중양절)이다. 군대 전부에게도 좋은 명절이다. 나는 복재기(喪制)이지만 여러 장병들에게야 먹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제주에서 나온 소 다섯 마리를 녹도와 안골포 두 만호에게 주어서 장병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는데, 저녁나절에 적선 두 척이 어란포에서 바로 감보도(진도군 고군면)로 들어와 우리 배의 많은지 적은지를 정탐했다.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끝까지 따라 갔더니, 적들은 어리둥절하여 배에 실었던 물건을 몽땅 바다 가운데로 던져버리고 달아났다.

2.4. 공정함과 애민(愛民)

맑다. 체찰사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에 백성을 위해서 고통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났다. 호남순찰사는 헐뜯어 말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저녁나절에 나는 김응서(金應瑞)와 같이 촉석루에 이르러 장병들이 패전하여 죽은 곳을 보니,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윽고 체찰사가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하므로 배를 타고 소비포로 돌아와 정박했다.
1595년 8월 23일자 (양력 9월 26일) 일기
이순신은 상벌에 언제나 공정했으며, 백성들과 병사들의 식량 공급[50]과 생계, 부정부패 절대엄금 등 민생도 진심으로 최대한 신경 썼고, 장군이자 목민관으로서 병사들을 포함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보살펴 주었기에 덕장(德將)의 면모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일할 때 인근 태인현의 현감이 공석이라 태인 현감까지 겸임하게 된다. 그간 현감이 없어서 밀렸던 일들을 이순신이 바로 그 자리에서 신속하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태인현의 백성들이 현감으로 임명해달라고 청할 정도로 사무 능력은 물론이고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했던 점을 알 수 있다.

개요에서 앞서 말했지만 이순신은 승첩 장계를 적을 때 신분을 막론하고 일반 병졸이건, 승려이건, 노비이건 가리지 않고 일일이 그들의 소속, 계급, 이름을 빼먹지 않고 적어 그들이 이룩한 전공을 기록하였으며, 사망자, 전사자 역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장계에 그들의 이름을 올려 적절한 보상을 받도록 해주었다. 따라서 휘하 사람들은 이순신을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존경하며 반기를 들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문건에서 이순신이 벌하거나 벌하려 했던 죄인들이 한 행동들은 군기 위반, 탈영, 군용 물자 유용 및 횡령, 군무 이탈이나 군무 회피 알선, 유언비어 유포 등 현대 기준으로 봐도 전시엔 사형이나 중형을 피하기 힘든 중범죄였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원리 원칙을 집행하는 이순신의 처분이었기에 엄격했지만 가혹하지 않았다.[51] 애당초 가혹하기만 했다면, 수많은 백성들이 이순신의 통제영으로 피난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통제영 자체가 일본 수군과 싸우기 위한 전진 기지인 만큼 전쟁터와 가장 가까운데도 말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전멸하게 만들고 백성들도 대부분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 상황에서, 이순신이 돌아오자 백성들은 울며 절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돌아오자 "원균의 살점을 강제로 뜯어서라도 먹고 싶다"고 하는 등 원균을 철저하게 증오하며, "장군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난중일기》 1597년 8월 6일).
송시열이 예전에 그의 손님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장수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 역시 그처럼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52]
정약용 목민심서에 기록된 야사에 따르면 "이순신이 장인을 시켜 이나 인두, 가위 등을 만들어 조정에 자주 바쳤다"고 한다.[53] 이순신은 청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조정에 뇌물을 바쳐 스스로의 안위를 보전하는 듯한 문구로 볼수도 있는데 이 행위는 당시 의심이 많던 조정에 물자를 바쳐 적대감을 줄여, 마음놓고 전투에 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바친 내용물은 뇌물로 오해받기 쉬운 사치품이 아니라 무기와 도구 등 전투물자였고, 이후에도 공무에 필요한 종이, 둔전에서 생산한 곡식 등 공공성이 강한 물품이 주된 대상이었다. 이에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조정은 이순신에게 더욱 바치도록 닦달했다.

2.5. 사람을 보는 눈과 다루는 법

이순신은 사람을 평가하는 안목이 대단히 엄격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을 비롯해 자신이 만나거나 문서를 통해 알게 된 사람에 대한 장단점을 매우 상세하게 지적한다. 이게 얼마나 까다로운지,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도 분명히 유능하고 충성심이 강하다고 입증된 인물들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엄격하여 조선시대와 가치관이 크게 다른 현대에도 아래와 같은 평가들이 나올 정도였다.
"The person most critical of Admiral Yi... was Admiral Yi."
이순신 장군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었어요.
Extra Credits, 한국의 성웅: 이순신 편 中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제가 처음 본 소감으로는 '자신의 일기가 아니라 변명록이다' 라고 했을 정도로 소상하고 객관적이며, 마치 누가 나중에 보고 검토할 것을 예측했던 듯 깔끔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난중일기는 원래 개인일기이므로 사료로서의 가치를 그냥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장군의 이 일기는 무서우리만큼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매사를 기록하여 빈틈이 없기에, 개인의 기록임에도 사료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우혁, 슬픈 시각으로 보는 원균명장론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기록은 난중일기였다는 말도 있을 지경이다. 한 마디로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말이다.

이랬기에 사람을 다루는 재주도 상당해서, 명량 해전 이후 명나라 도독첨사였던 진린과 연합할 때도, 상대가 영의정인 류성룡이 최악의 연합이라 평가할 정도로 성질이 포악하고 조선인 때리기를 주저않는 그 진린이었는데도, 이순신과 함께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 나으리라고 존대할 정도였다. 이순신은 자신이 확보한 수급을 진린에게 양보해 공을 돌리기도 하고 명 수군의 행패를 이유로 병력 철수를 하려 해서 진린한테 명 수군의 기강을 잡을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 등 완급 조절을 통해 진린을 잘 주물렀다. 이러한 점이 유명 수군 도독이 부여된 여러 정황 중 하나가 아닌가란 말도 있다. 그러나 명량 해전을 다루는 기록과 기타 여러군데에서 보이는 이순신의 행적은, 그가 상대방을 대할 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예의를 갖추고 대했다는 담백한 증거이다. 사람 간의 이 기본적인 예의를 무시하여 발생하는 문제가 현대에도 빈번한데, 과거 400여 년 전의 성웅이 참으로 모범을 보인 것이다.


[1] 물론 같은 덕수 이씨라고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말하는 역적의 가문은 아마도 이순신의 일가와 그 친척으로 한정한 것에 가깝다. 일례로 삼수의 옥 당시 이이명은 역모 혐의로 죽었는데 그는 전주 이씨다. 그럼 조선 왕가가 역적 집안인가? [2] 임진왜란 당시엔 조선군 전체가 먹는 군량 중 상당수를 조선 수군이 조달했었으며, 또한 명군이 참전한 이후엔 명군의 군량도 챙겨야 했기에 수군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3] 밥에 고기와 적, 나물들을 고루 얹어 장국을 부어 먹는 국밥이다. [4] 생선전과 소고기 내장 모듬전. [5] 낙지를 넣어 만든 탕이 아니라 두부를 지져 닭고기, 표고, 석이, 다시마 같은 재료들과 함께 끓여 여기에 가루즙을 풀어 넣어서 부드럽게 만든 두붓국. 연포탕의 연포는 軟泡로, 연한 두부를 뜻한다. 원래 조선 시대때는 두부가 귀해서 양반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해안가 지역에서 비싼 두부대신 낙지를 넣어 연포탕을 만들기 시작했고, 후에 낙지가 귀해지고 두부가 흔해지자 오히려 반대로 두부 연포탕이 자취를 감추고 낙지 연포탕이 남게되었다. [6] 꿩고기를 다져 동글동글하게 빚어 쇠고기 장국에 넣어 만든 국. [7] 꿩고기의 살만 발라내어 쇠고기와 섞어 다진 것에 갖은 양념을 하여 꿩의 다리 모양으로 만든 후에 묽은 밀가루 반죽을 풀어 쪄 낸 음식. [8] 대합, 모시 조개, 재첩 등을 껍질째 씻어서 맹물에 넣고 끓인 국. [9] '눈 오는 날 찾는다'는 뜻으로 쇠고기 등심을 넓게 길게 저며 썰어서 꼬치에 꿴 후에 기름장에 양념을 발라 구운 것이다. [10] 宗婦, 가문의 종손의 부인을 일컫는 말. [11] 사채업자가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다기보다는 현금화하기 어려워서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순한 골동품이라면 모를까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문화재는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해외로 밀반출하는 형식이 아니라면 현금화하기 어려운 재산에 속한다. [12] 2001년에 15대 종손인 이재국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 종부가 사망신고를 늦추고 양자를 들였지만, 사후입양의 법적 효력 문제 등으로 파양하면서 문중과 분쟁이 일어났다. [13] 충무공 종가를 매입한 풍암공파는 충무공의 할아버지인 이백록의 후손이며, 충무공파는 풍암공파의 방계 후손이다. [14] 친형제도 아닌데 1살이라도 차이나면 형, 동생이 갈리는 것은 현대에 들어서다. 절친한 친구 사이로 유명한 오성과 한음도 5살이나 차이난다. [15] 류성룡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될 때 선조에게 "이순신은 저와 동향 사람인데 강직하여 직무에 맞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런 이미지 때문에 끝까지 이순신을 두둔했다라는 잘못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다만 이때는 선조의 강짜가 매우 심해 중신 중 그 누구도 입을 제대로 열지 못할 분위기인걸 감안하기는 해야 한다. 이후 전후에 저술한 < 징비록>에서는 이 때 자기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해당 부분은 쏙 빼놨다. [16] 어쩔 수 없는 것이 대척점에 있는 원균이 서인인 윤두수의 인척으로 있어서 당파 논리대로라면 이렇게 분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 선조수정실록>도 그렇고 후손인 이봉상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진 경종 영조 시기 2품관에 오른 상황을 봐서도 반드시 당파로서 구분할 수 없다. [17] 그러나 이순신의 이러한 성향은 정치적으로는 좋지 않은 결과를 나타내서 원균의 재부상을 이끌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민심이 죄다 이순신에게 쏠리고 한산도 통제영에 피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니 그 점이 선조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이유가 된 것이다. 애초 한 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내려갈 수밖에 없는 양립 불가능한 파라미터의 결과이니 말이다. 어차피 원균의 재부상은 당시 왕이었던 선조의 강력한 의지가 바탕이 된 탓이 크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으며 그것이 전란을 승리로 이끈 제일의 영웅이라 할지라도 중앙 집권 국가에서 왕이 1번 쳐내기로 마음먹었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차라리 입과 기득권으로 권력이 유지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정치병 환자를 내친다는 생각을 안 했다는 것에서 안타깝다고 생각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당시 전란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진 상황에서 선조를 뒤엎으려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온 나라가 더욱 헬게이트가 열리는 일이기에 이순신의 성품상 이런 상황으로 만들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18] 관직자의 경우 조선통신사같이 멀리 이동할 일이 있다면 가다가 가까운 관아로 가서 관직자임을 밝히고 그 관아에서 숙박을 해결하였고, 상인들은 자신들만의 조합을 결성해서 조합원이 멀리 이동할 일이 생기면 가다가 가까운 다른 조합원의 집에서 숙박을 해결하였으며,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는 가다가 가까운 민가에 요청해서 숙박을 해결하곤 했다. 전래동화 은혜 갚은 까치에서 까치를 잡아먹으려는 수컷 구렁이를 호신용으로 들고다니던 활로 쏘아죽여 까치를 구한 선비가 계속 길을 가다가 산속에서 밤이 되자 산속에 있던 여자(변신한 암컷 구렁이) 혼자 사는 민가에 가서 하룻밤 머물고 갈 수 있냐며 부탁하고 이에 그 여인이 허락하면서 저녁 밥상을 내주는 대목이 바로 이 시대의 여행자들이 숙박을 해결하는 보편적인 방법을 보여주는 장면인 셈. 관직자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케이스는 당연하지만 아주 공짜는 아니고, 이 기회를 통해 다른 지역의 소식을 전달받을 정보 창구의 기능과 동시에, 미리 대상자와 연줄을 만들어두어서 나중에 유용하게 써먹으려는 목적을 띤 접대였고, 나아가 자신은 타인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유교적 가르침을 준수하고 있다는 과시적인 목적 또한 있었다. 만약 방문객이 사정이 있어서 장기간 머물러야 한다면 그 집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켜주는 개인 과외를 해주거나 집주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식으로 은혜를 갚기도 했는데 식객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장기 투숙객들을 일컫는 단어이다. [19] 말인즉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데 주막이 등장한다면 고증 오류이다. [20] 통념과는 달리 기생은 성접대를 하는 매춘부가 아니라 종합 엔터테이너였다. 연회 참석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춤과 노래를 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높으신 분들이 지적인 대화를 나눌 때 알맞게 장단을 맞춰줘서 높으신 분들의 흥을 돋울 수 있도록 글과 문학까지 공부해야 했다. 남자여도 양반집 자제가 아니라면 글을 배우는건 쉽지 않은 당시 사회상에서 사대부 가문 출신 여성이 아닌 일반 여성의 몸으로 글을 배운다는건 엄청난 특혜로, 기생들 중 오늘날에도 유명한 황진이가 여러 시들을 남겼다는 건 그만큼 일반 여성임에도 사대부 집안 남성 못지 않게 글과 문학들을 상당히 수준 높게 배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생이 성접대를 일삼는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만든것은 다름아닌 일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일본에서 비슷한 일을 하지만 성접대도 일삼는 게이샤와 같은 부류로 취급해버렸고, 기생 문화가 쇠퇴해서 사라지고 남은 빈자리에 일제가 남겨둔 잘못된 잔재만 남아서 기생을 매춘부로 취급하는 관념이 퍼져버린 것이다. [21] 근데 문제점은 여진이라는 인물과 백의종군 때 만나 같이 성관계를 맺는 대목이 있어 독자들도 당황스러울 정도. 여진은 소설에서 '명량해전이 곧 끝나고 전후 처리하던 중에 죽은 조선 여자가 있다고 해서 보았더니 여진이었다'라는 대목도 있다. 여진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과 만나 "나으리, 날이 밝으면 절 죽여주십시오."라고 부탁했지만 이순신이 죽이지 않자 다시 돌아갔는데 알고보니 구루지마의 첩이 되어 성관계를 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그런데 실제 역사의 고증성에 문제도 있거니와 만화책 <칼의 노래>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대목을 넣기 민망한지 그냥 이순신 밑에서 일하던 여종으로 나온다. 최후는 소설과 다르게 이순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 조정에서 보낸 자객들이 작전을 시행하는 도중에 마주쳐서 자객들이 그녀를 죽이려던 찰나에 큰 소리로 "왜적이 나타났다"고 외친 덕분에 이순신의 목숨을 살렸다. [22] 이 행사에는 김기현 대표를 비롯해 이용호·김승수·구자근 국민의힘 의원, 나경원 전 의원, 강승규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 등 다수의 여권 인사가 참석했다. [23] 평균적으로 10일에 1번씩 마셨다. 그리 자주하진 않았으며 독서는 선비의 당연한 교양이며 나머지는 장수들과 어울리는 직무의 연장선이니 딱 이거다 하는 본인을 위한 취미 생활은 특별히 없었다. [24] 또다른 취미로는 부하장수들을 앉혀놓고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있었다. 이때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에게 "에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닐세!" 하고 훈수를 두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25]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자신이 활쏘기를 얼마나 했는지를 '활 ~순(巡)을 쏘았다'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여기서 '1순(巡)'은 한 사람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화살 다섯 개를 쏘는 것을 의미한다. '5순'을 쏘면 화살 25개를 쏜 것이고, '10순'을 쏘면 화살 50개를 쏜 것이다. 이순신은 활쏘기를 하면 대개 10순을 쏘곤 했다. [26] 짐작했듯이 삼국지연의 속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가운데 북두칠성에 수명을 연장케 기도하는 대목이다. [27] 우연이었는지 운명이었는지, 이순신이 받은 시호 ' 충무'는 제갈량도 받았던 시호였다(이순신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충무공, 제갈량은 충무후). [28] 실제로 '삼국지연의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워낙 술수와 계책이 오가는 삼국지연의의 특성상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그걸 토대로 교활한 지략가가 됐을 공산이 높아서이다. [29] 장검 뿐만 아니라 갓 머리에 장식으로 달았던 것으로 보이는 옥로 1점과 관복을 입을 때 두르던 각대와 모습이 같은 허리띠(요대) 1점, 복숭아 모양을 한 술잔 1쌍이 같이 보물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이 외에도 그동안 종가에 보관하다가 15대 종부 최순선이라는 사람이 온갖 사고를 저지를 때 극적으로 살아남은 '선무공신 교서'를 비롯한 일부 고문서들이 추가로 보물로 지정했다. [30] 현재 1척은 대략 30cm에 해당한다. 동시대에 명나라에서 1척이 현재와 비슷한 약 31.1cm인 것을 보아 31.1*6 = 187cm라는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한 신장이 나온다. 남자 키가 180이 넘으면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31] '혈조'라 부르는 양식으로, 검이 몸에 박혔을 때 피가 흘러나오게 하는 용도다. [32] 실제로 원융검기에 묘사된 쌍룡검은 길이가 1장이 넘는다는 묘사가 있을 정도로 오히려 현존하는 이순신의 장검보다 길이가 더 길었을 가능성이 높아 사진에 나온 도검은 원융검기에 나온 쌍룡검의 모습과 괴리가 심하다. [33] 하지만 등패수(籐牌手)의 경우 방패 안에 표창을 가지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이것을 투척한 후, 전방에서 아군의 진영을 보호하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한다. [34] 하지만 이순신이 이 검을 전장에 가져오지 않고 장식용으로만 썼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고 그저 2m에 달하는 장검을 실전에서 쓸 수 없다는 근거없는 고정관념 및 검에 사용 흔적이 없다는 점 때문에 막연히 장식용으로만 추정할 뿐이다. 이순신의 지위가 수군을 총괄하는 지위인 만큼 직접 적과 무기를 맞대며 교전한 일이 없다보니 검에 사용 흔적이 없는건 당연한 일이고 이는 이순신이 보유했다는 또 다른 짧은 도검 또한 마찬가지이다. [35] 문화재청 보도자료. 만약 장검이 국보로 지정되어 분리되면 현재 보물인 '이순신 유물 일괄'에는 요대함을 추가로 지정하기로 했으며, 동시에 ‘도배구대’라는 이름의 잔과 받침은 ‘복숭아모양 잔과 받침’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36] 당연하다. 옛날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해서 자를 부르거나 그나마도 함부로 부르지 못해서 호 아니면 직책으로 부르기도 했다. [37] 원균이 원칙도 중시하면서 조금의 융통성도 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 인간은 융통성 수준이 아니라 무원칙적인 말도 예의바르게 말한 것에 가까운 존재였다. 오히려 원균 사후 진린과의 일 등에서도 보듯 융통성이 있던 사람은 이순신이었다. [38] 조선의 중앙 집권화는 국가 경제력이 빈약한 상태에서 무리수를 두어 시행했기에 아전들에게까지 줄 재정이 없었다. 관리들의 녹봉조차 박봉이며 이것마저 줄 재정이 없어 못 주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다보니 관료들은 녹봉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개인 재산 축재에 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과거 합격자들에게도 줄 녹봉이 없어 무보수로 일하거나 임용되기를 장기간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39] 소설 칼의 노래에서도 명량 해전을 치르기 전에 한 노인이 백성들에게 헛소문을 퍼뜨려 산으로 모두 도망갔는데 이 때를 틈 타 소를 훔치려다가 이순신에게 적발되어 사형에 처했다라는 대목이 있다. [40]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북한에 관한 유언비어나 선동, 미화 하는 행위 등을 할 경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당할 수 있으며, 전시에는 국가비상사태인데다 국민들의 정서가 민감해져 있는 만큼 그 처벌의 수위가 심하면 더 심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전시에는 계엄령이 선포 될 확률이 높은데, 계엄령 치하에서는 기본권 조차도 제한 될 수 있으며 이는 전 세계 어느 자유국가들도 마찬가지다. [41] 추가로 덧붙이자면, 이 시기 조선은 당연하게도 인권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며 처벌의 수위가 현대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게 잔혹하던 시절이다. 이것을 이순신 개인의 문제로 끌고 가는것은 옳지 않다. [42] 당시 소 5마리 ~ 6마리의 값은 상태가 양호한 호랑이 가죽 1장과 가격이 비슷한데 호랑이 가죽이라는 물건은 명나라 청나라에 진상하는 용도로만 쓸 정도로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43] 참고로 이런 모습을 현대에도 보이는 부대 중 하나가 영국 최정예 특수부대 SAS다. 말그대로 평소에 군기라고는 없이 놀땐 개판 5분 전으로 놀다가 할 땐 엄격하게 하며 성과를 내는 엘리트 집단이다. 이런걸 보면 이순신의 방침은 시대를 앞서간 사상인 것. [44] 사실 조선만 이런 것은 아니고 옛 시절의 해군은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영국 해군만 해도 오만 범죄자를 집어넣는 것으로도 모자라 밤에 호각을 분 순간 길거리에 있는 장정들을 닥치는 대로 징집해 끌고 간 사실은 이미 혼블로워 같은 작품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 Impressment, Press Gang이라 부르는데, 특히 나포한 미국 식민지 출신 선원의 강제 영국 해군 징집은 미국 식민지가 독립을 선포하는 27개 원인 중 26번째였다. 그나마 이때의 조선은 아직 연좌제가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이었고, 도망간 친족을 찾아내면 나갈 수라도 있었다. [45] 아닌 게 아니라 국난이라 어쩔 수 없이 병역과 노역을 해야한다면, 싸움을 업으로 삼고 신립을 육상에서 격파한 왜구와 직접 창칼을 맞대어 죽는 것보다는 철저한 관리로 애시당초 패배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충무공 휘하에 있는 것이 복무자 입장에서는 훨씬 낫다. 난중일기와 각종 장계, 실록을 통해 비교해봐도 충무공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에 걸맞게 조선 수군은 한중일 삼국이 엮인 지옥같은 전쟁에 참전하던 군대치고는 사상자도 매우 적은 편이었다. [46] 물론 반 농담으로, 그만큼 원리원칙을 중시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후술할 1위/0위는 진담이지만. [47] 이순신은 패잔병들이 육지로 올라가 저지를 만행을 우려해 늘 적선 두어척은 남겨두고 돌아하는 척 매복했다가 다음날 새벽 즘 적들이 탈출할때 한번에 섬멸시켰다. [48] 무연고자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 [49] 승경도로 보인다. [50] 난중일기 등의 기록에서 조선 수군의 병영식으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사슴고기, 개고기, 전복, 대구(어류), 청어, 숭어, 조기, - 동아, 고래고기, 꿩고기, , 국수, 약식, , 팥죽, 홍시, 곶감, 참기름, 벌꿀, , 연포( 두부), 수박,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는 현대 해군에서 식단으로 내놔도 모자람이 없다. 당시 조선에서 의 가치는 집 한 채보다 비쌌고, 제주 사람이 아니면 임금만이 부족함 없이 먹을 수 있는 귀한 식품이었는데 이것들을 병사들의 식단에 내놓은 것이다. 특히 진린이 왔을때 진린과 명의 장병들한테 고기 생선을 푸짐하게 대접해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때 진린은 마늘을 유독 좋아해서 구운 마늘을 한줌이나 먹었다고 한다. [51] 권율은 탈영병을 즉결 처분했다 하여 일시 해임되기도 했다. [52] 그러나 충무공이 물길에 익숙했던 것은 포구의 백성에게 들어서만은 아니다. 여러 차례 해진(海鎭)의 장수를 지낸 어영담이 물길의 요해처를 잘 알았기 때문에 충무공을 도운 것이 많았으니, 견내량(見乃梁) 해전과 명량 해전은 오로지 지리를 이용해 승리를 거둔 경우라고 하였다. 거기에 조선은 수운을 해야 하는 나라이기에 송시열이나 청성잡기 저자는 현실 실무를 모른다는 비난을 듣기 좋은 소재이다. [53] 다산연구회 편역, '정선 목민심서' ,창비, 2005,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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