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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6:26:36

신각

파일:조선군 좌독기_White.svg 임진왜란 조선 육군의 주요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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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해유령 전투
(1592. 5. 16.)
정암진 전투
(1592. 5. 24.)
이치 전투
(1592. 7. 8.)
우척현 전투
(1592. 7. 10.)
주장 신각 곽재우* 권율 김면*
전투 청주 전투
(1592. 8. 1.)
북관 대첩
(1592. 9. 16. ~ )
진주 대첩
(1592. 10. 6.)
행주 대첩
(1593. 2. 12.)
주장 영규* 정문부* 김시민 권율
* 의병장 }}}}}}}}}}}}}}}


申恪
? ~ 1592년( 선조 25)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임진왜란 시기
3. 평가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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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평산(平山)[1]. 임진왜란 당시 팔도 부원수로서 최초의 육전 승리를 거두었으나, 장계(狀啓)를 제때 안 올려 처형된 비운의 장수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생년이 없는 것[2]치고는 전반부 생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나마 많은 편이다.

아버지 신의충(申義忠)과 어머니 진주 하씨 하원로(河元老)의 딸[3]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뒤 전란 전 중앙군과 지방군을 비롯한 무반직 요직이란 요직은 대부분 역임했으며, 이 덕분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반이라 군 지휘에 약한 도원수 김명원을 보좌 겸 실질적인 지휘를 담당할 부원수에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호부사(종3품), 상호군(정3품 당하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정3품 당상관), 영흥대도호부사(정3품), 경상도 방어사(종2품),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 팔도부원수(종2품) 등을 지냈다.

2.2. 임진왜란 시기

2.2.1. 해유령 전투

왜란이 터지자 신각은 부원수 자격으로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한강 방어 임무를 맡았으나 중과부적에 병사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어 방어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군을 물려서 재정비하려 했으나 도원수가 군을 물리려는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군이 와해되어 버렸다. 한강 사수가 실패로 돌아가자 신각은 최대한 병력을 수습해 양주로 후퇴한 뒤 유도대장[4] 이양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과 합류했다.

그리고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일대인 해유령 근처에서 왜군 소부대를 기습, 70명을 참하여 임진왜란 중 조선군 최초의 육전 승리 기록을 세운다. 규모가 작아 무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연일 패보만 이어지는 상황 중에 귀중한 승리임은 부정할 수 없다.

2.2.2. 억울한 죽음

그러나 당시 파천 과정에서 온 혼란으로 김명원과 신각은 연락이 두절되어 김명원은 조정에 신각이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고 장계를 올린다[5]. 5월 18일 비변사에선 신각을 군법으로 다스릴 것을 청했고,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처형하게 한다. 그리고 잠시 후 해유령 전투의 승전보가 올라오자 그제서야 선조가 다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신각은 처형된 뒤였다. 예상 못한 대규모 침공으로 개전 이전 온건한 입장에 있는 신하들이 발언권을 잃고 전면 패주로 인해 일선 장수들에 대한 강경론이 제기된 시점인데 운 나쁘게 제대로 걸려버렸다.

당시 조정이 파악한 전세는 부산광역시, 김해시, 밀양시, 상주시, 충주시 경상도와 그 경계에서 왜군을 막을 요충지들이 모조리 함락되었다는 사실과 싸우다 달아나는 장수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이다. 당장 왜군이 첫 침공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사흘만에 도성에 알려졌다. 이마저도 원래 봉수 체계로 따지면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봉화 전달은 기상 상태가 최고로 이상적일 때 2시간, 최대 12시간 정도 걸린다. 이를 감안하여 봉화의 일일 보고는 아침에 출발하여 해질녘에 목멱산 봉수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짜여졌는데 봉화를 잘못 올려서 이렇게 늦은(?) 것.[6] 뒷날 병자호란 때도 증명되지만 양난 당시의 봉수 체계는 이론상으로나 설계대로 작동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쨌거나 당시 조선 조정은 의외로 사태를 굉장히 빨리 파악하고 있었는데 우선 17일 보고를 받자마자 즉시 이일 순변사로 임명해 상주로 보냈고, 곧바로 상주에서 이일의 패전 소식이 들리자마자 신립 삼도순변사로 보내 패배해 도주한 이일 이하 말 안 듣는 자는 모조리 처형하라 명한다. 그리고 27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삼도순변사 신립이 패하자 그 소식이 하루만인 28일 조정에 들어가 벌써 파천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다.[7] 이렇게 신속하게 정보를 받아 대응을 한다고는 하는데 정작 들어오는 정보들 다수는 어디가 어떻게 함락되고 일본군이 조선이 미처 대응하지 못할 정도의 미친 속도로 진격하고 있다는 사실과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도주하면 양반이고, 대부분의 장수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적전도주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러다 보니 신각이 도주했다고 보고한 김명원을 크게 질타할 수가 없었다. 신각과 연락이 끊어진 상황에서 정황상 가장 합당한 사안으로 보고했기 때문이다. 선조 역시 도주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비변사에서도 참수를 주장하니 달아난 장수를 참하라 명한 것 뿐. 왜 비변사에선 부원수란 고위직 급인 신각을 처형하라는 결정을 그렇게 쉽게 내리고, 반대한 신료가 아무도 없었을까? 도망간 장수가 너무 많아서 다 죽일 수는 없지만 본보기를 보여 일벌백계할 필요는 있다는 여론이 조정 대신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각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우호적인 의견은 혼란한 상황에서 연락이 제대로 닿지 못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상주와 탄금대서 몇번이나 죽을 뻔했고 모진 고생 끝에 평양에서 거지꼴로 합류했던 이일조차 장계는 꼬박꼬박 제대로 올렸다는 걸 감안하면 신각의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힘들다고 보기도 하지만, 예를 들어 장계를 올렸는데 연락병에게 중간에 사고가 생겼을 수도 있는 등 전투 후에 진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신각 본인에게 유책 사유가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해유령 전투의 결과가 신각 처형 전에 곧바로 조정에 알려졌고, 선조가 재빨리 처형 명령을 취소했음에도 늦은 것으로 봐선 전투 보고서인 첩서(捷書,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보고하는 글)를 신각이 조금만 더 일찍 올렸다면 신각은 얼토당토않은 사형을 면하고 최초 승전의 공을 크게 치하받았을 것이다.[8]

임진일록에 따르면 김명원은 최소한 12일까지는 신각의 소재지를 파악하고 있었는데 김명원 입장에서 신각의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한 기간은 13일에서 15일(16일의 승전 보고는 올라갔으므로)이므로, 상관에게 3일간 소재를 알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죽음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하여간 정말로 재수없게 죽은 인물. 징비록에서는 그에게 90살 노모가 있었기에 사람들이 더 안타깝게 여겼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선조 수정실록도 '신각이 비록 무인(武人)이기는 하나 나라에 몸바쳐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는데, 죄없이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라고 적었다.

2년 뒤인 1594년 음력 12월 21일 생원 유숙의 상소로 신각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복권되었다.

그가 왜란 이전 조헌의 말을 듣고 황해도 일대의 방비를 어느 정도 해 놓은 덕택에 훗날 황해도 연안성에 쳐들어온 일본군 이정암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물리칠 수 있었다. 당초 조헌은 선조에게 왜침이 있을 것이니 왜놈 사신 목을 베고 수도를 공격하소서라고 했으며 그 후 돌아와서 권징과 신각에게 편지를 보내 왜침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권징은 무시하고 신각은 받아들였다. 이때 권징은 평안감사, 신각은 연안부사였다. 사실 신각이 방비를 많이 했지만 이정암도 신각이 해놓은 방비에 더해서 준비를 해 놓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

본디 유순한 성격으로 도원수라는 직책에 충실했을 뿐 전시 행정가로서도 성실한 데다 유능했고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이 없었던 김명원은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멀쩡한 장군을 죽게 만든 데 책임을 느꼈는지, 정유년에 선조가 작정하고 이순신을 쳐내려 했을 때는 이원익, 정탁과 함께 이순신의 처형에 대하여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고 그의 구명과 재기용에 힘을 썼다.

신각의 아내는 신각의 장례를 치른 후 자결했다. 이후 정조 11년 신각의 아내가 정절을 지킨 것을 높이 사 정려문을 세웠다. #

3. 평가

해유령 전투 문서에서도 언급되어 있듯 임진왜란 최초의 개선장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이순신이다. 또한 이순신 이전에도 이미 곽재우 기강 전투에서 유격전으로 왜군을 박살낸 적이 있어서[9] 이도 저도 아닌 미묘한 포지션이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승전보를 알리고도 억울하게 죽었다는 상징성 면에서 대중들에게 극적으로 와닿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임진왜란 최초라는 타이틀에 실제 활약상이 가려진 케이스로, 실제로는 임진왜란 초창기에 가장 중요한 활약을 한 장수들 중 하나였다.

우선 해유령 전투의 경우, 이 전투의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당시 일본군은 모종의 사유[10]로 보급이 끊긴 상태라 보급을 현지에서 충당했는데, 가토 기요마사의 병력 중 이 보급을 담당한 병력들이 신각군에게 몰살당하는 바람에 가토군은 쫄쫄 굶으며 북진을 하는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추위까지 겹쳐서 비전투손실이 극심한 와중에 정문부의 함경도 의병까지 만나며 가토군이 북관 대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결말로 끝나게 된다.

또한 상술했듯 신각이 연안 부사이던 시절 조헌의 조언을 받아들여 연안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마개조시켜 놓았는데, 이정암이 이 성을 쏠쏠하게 써먹으며 구로다 나가마사 연안성 전투에서 패퇴시켰고, 이것이 구로다군이 황해도를 포기하게 만드는 결정타가 된다.

또한 그의 억울한 죽음은 되려 훗날 조선을 구하게 되는데, 김명원이 죄없는 부하를 죽게 만든 일로 두고두고 자책하다가 이순신을 강력하게 변호하기로 마음먹기 때문. 이순신은 김명원을 포함한 일부 대신들의 변호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훗날 명량해전으로 나라를 구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 평안도, 가토 기요마사 함경도, 구로다 나가마사 황해도를 거점으로 주둔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신각의 공격으로 앞선 셋 중 둘이 철수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 셈. 고니시가 이순신이 보급을 끊어서 철수했다는 걸 감안하면 임진왜란 초창기에 중요한 활약을 했던 장수다.

4. 대중매체

아무래도 잘 안 알려진 인물이다 보니 임진왜란을 다룬 매체에서는 무용에 뛰어나며 혈기왕성한 젊은 장수 이미지 정도로만 묘사되는 편이다. 그러나 전란 전에도 여러 무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의외로 나이가 꽤 있을 수도 있다.


[1] 밀직공파 21세. [2] 16세기 전반에 출생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3] 임진왜란 당시 90세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1503년 출생으로 추정된다. [4] 조선의 왕이 도성을 비울 때 도성의 방비를 담당하던 2품 이상의 고위무관 [5] 일단 기재사초 하에 있는 '임진일록 1(壬辰日錄一)에 의하면 이항복이 형조판서로 오른 만력 20년 5월 12일, 이양원이 이일, 신각 이하 장수 10여명과 군사 5천여명과 함께 대탄에 주둔하여 진격을 도모하고 있다고 김명원이 아뢴 것을 보아 해유령 전투 이전에는 연락이 닿았던 걸로 추정된다. [6] 그나마 영남에서 한양 쪽이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이어지는 파발 체계는 신속하게 작동한 걸로 보인다. 4월 13일에 쳐들어온 왜적에 대한 공문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4월 15일 밤에 받아볼 수 있었다. [7] 이건 선조실록의 기록이고, 수정실록은 각각 28일과 29일로 적고 있는데, 정확한 날짜와 관련없이 어쨌든 탄금대 전투 종료 하루만에 도성에 소식이 들어가 파천 논의가 벌어졌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8] 한편 신각과 함께 왜적을 물리친 유도대장 이양원과 병마사 이혼의 최후도 씁쓸하기 그지 없는데, 이양원은 선조가 요동으로 피신했다는 오보를 듣고 식음을 전폐하고 울다 죽었고 이혼은 왜군에 투항한 조선인들, 즉 순왜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9] 물론 이건 의병들이었고, 조선 정규군으로서의 육전 최초의 승리는 해유령 전투가 맞다. [10] 히데요시가 일부러 보급을 안 해 줬다는 관점도 있고, 이순신이 해상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11] 하지만 선조는 처형 명령을 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각이 전리품으로 진상한 왜군들의 수급이 도착한걸 보자마자 당장 처형 명령을 취소하라고 급하게 전령을 띄우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고, 같은시각 신각을 처형을 시작하려 할 때 신각의 부하들 또한 처형을 잠시 미뤄달라 간곡히 부탁하지만 신각은 결국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