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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5:57:52

창녕 조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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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녕 조씨 종문.svg
昌寧 曺氏
창녕 조씨
}}}
<colbgcolor=#000> 관향 경상남도 창녕군
시조 조계룡(曺繼龍)
중시조 조겸(曺謙)
집성촌 서울특별시 서초구· 중구
부산광역시 기장군· 중구
대구광역시 달성군· 중구
강원도 강릉시
경기도 여주시· 파주시
충청북도 옥천군· 진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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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녕군· 창원시· 합천군
황해도 봉산군· 옹진군
평안남도 강서군· 대동군
평안북도 박천군
함경남도 고원군· 홍원군
인구 366,798명(2015년)
링크 창녕조씨대종회[1]

1. 개요2. 역사3. 기록4. 인구 변화5. 분파6. 항렬7. 집성촌
7.1. 서울·경기·강원7.2. 경상7.3. 충청7.4. 전라7.5. 북한
8. 주요 인물

[clearfix]

1. 개요

창녕 조씨(昌寧 曺氏)는 경상남도 창녕군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조계룡(曺繼龍)이다.

2. 역사

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 신라 제26대 진평왕 사위라 전해진다. 조씨 득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에 한 남자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진평왕 48년(626)에 아들이 태어나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조(曺) 자가 붉게 쓰여 있었다. 이것을 본 학사는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도 신기하게 여기며 성은 조(曺), 이름은 계룡(繼龍), 자는 인경(鱗卿)이라 하사하였다고 한다. 뒤에 진평왕이 그를 부마로 삼음으로써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대도독 총지휘제군사(輔國大將軍 上柱國大都督 總指揮諸軍事) 금자광록대부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 太子太師)에 이르렀다.

창녕 조씨 인물들이 정사에서 뚜렷하게 행적이 남겨진 것은 고려 후기부터이다. 특히 위화도 회군으로 유명한 조민수를 꼽을 수 있는데, 조민수(曺敏修)는 창성부원군이라는 작위를 받은 바 있으며, 이것은 시조 조계룡이 받았다는 작위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리고 공민왕 때 찬성사에 오른 조익청(曺益淸)과 시중에 오른 조한룡(曺漢龍)[2], 조민수의 막내 동생으로 밀직부사를 지낸 조경수(曺敬修부), 고려 말 태학사를 지내고 여말선초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조의생(曺義生)[3]과 역시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으로 제학을 지낸 조희직(曺希直)[4] 등이 있다. 또 조선 전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언해에는 고려 고종 40년(1250)에 지금의 춘천 지역에서 몽골군에 항전하다 아내와 같이 불속에 뛰어들어 죽은 조효립(曺孝立)의 기록이 실려 있다.

창녕 조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조민수의 동생으로 태조 때 경상도병마도절제사를 지낸 조익수(曺益修), 세종 시대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조상치(曺尙治),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영의정을 지낸 조석문(曺錫文), 성종 때 성리학의 대가로 두시언해와 만분가를 지은 대문장가 조위(曺偉), 조위의 동생으로 시에 뛰어났으며 중종의 명으로 2륜행실도를 편찬한 조신(曺伸), 연산군 때 호조참판을 역임한 조계형(曺繼衡), 광해군 때 공조참판을 지낸 조탁(曺倬),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고 광해군 때 대구부사를 지낸 조응인(曺應仁), 인조 때 합천군수를 지낸 조희인(曺希仁), 인조 때 정주목사를 지낸 조정립(曺挺立), 인조 때 창원부사를 지낸 조정생(曺挺生), 인조 때 예조좌랑을 지낸 조시일(曺時逸), 효종 때 양산군수를 지낸 조시량(曺時亮), 숙종때 문과에 장원 급제한 조효창(曺孝昌),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이자 북인의 거두로서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등의 의병장들을 배출한 조식(曺植), 고종 때 동지돈녕부사를 지낸 조진구(曺鎭九)와 조진억(曺鎭億), 고종 때 관찰사를 지낸 조시영(曺始永) 등이 이름을 날렸다.

통일신라의 고문헌을 인용[5]하여 녹두처사라는 신원 미상의 인물이 저술한 조선시대 야사서인 삼한습유기[6]에 의하면 조선의 조씨(曺氏)는 현도군(玄菟郡) 유민 자손이라 기록되어있다. 현토군은 옛 고구려와 양맥국, 개마국, 소수맥, 옥저(부조) 같은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이다.

3. 기록

4. 인구 변화

5. 분파

조씨(曺氏)는 창녕 조씨가 단일본이며, 분파는 약 49여 개에 이른다. 같은 조(曺)씨이면서 본관을 달리하는 집안이 있는데, 그 수가 많지 않을 뿐더러 모두 한 집안에서 나왔으므로 단일본으로 본다.

6. 항렬

오늘날의 창녕 조씨의 항렬은 비교적 근래에 재정립한 것이다. 창녕 조씨는 조선 중기 이후 각 파에서 항렬자를 엄격히 제정하여 사용하다가, 갑술대동보(1880)를 발간할 때 전국의 종친들이 모여 각 파에서 사용하는 항렬자를 통일하였다. 고려 말기의 인물로 추정[20]되는 갱시조(更始祖) 삼송 형제(송무松茂, 송군松君, 송학松鶴)[21]1세로 하여 세대수를 초기화하고 그 22세손을 ◯승(承), 23세손을 병(秉)◯, 24세손을 ◯환(煥) 자로 정한 후 그 이후 세대부터 각 항렬별로 세 자씩의 돌림자를 정했다. 돌림자의 원칙은 오행(五行)인 목화토금수를 부수로 하는 글자로 정했다. 각 세대당 세 자씩 돌림자를 정한 이유는 같은 이름이 많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분파마다 상이하지만[22] 오늘날 활동하는 창녕 조씨의 항렬은 대략 24세에서 28세인데, 오랜 역사에 비해 대수가 짧아 보이는 것은 고려 중기를 기준으로 세대수를 한 번 재정립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녕조씨 대종회에서는 각 문중의 파보에 제시되어 있는 항렬자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을 인지하고 이를 통일하기로 했다. 2016년 6월 초부터 9월 말까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창녕조씨 족보를 비롯하여 중앙화수회, 대구종회 등 여러 종회에 보관된 파보의 항렬자를 조사하여 정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항렬자를 2017년 전종대회에서 표준항렬자로 확정하였다. 따라서 아래 항렬표는 2017년 창녕조씨 대종회에서 새롭게 제정한 표준 항렬자이다.
22세 ◯承(승)
23세 秉(병)◯
24세 ◯煥(환)
25세 圭(규)◯, 喜(희)◯, 在(재)◯
26세 ◯鉉(현), ◯鎬(호), ◯鐘(종)
27세 永(영)◯, 海(해)◯, 洙(수)◯
28세 ◯根(근), ◯植(식), ◯穆(목)
29세 容(용)◯, 炯(형)◯, 然(연)◯
30세 ◯載(재), ◯坤(곤), ◯塤(훈)
31세 鎰(일)◯, 鍵(건)◯, 鏞(용)◯
32세 ◯泰(태), ◯淳(순), ◯淵(연)
33세 東(동)◯, 相(상)◯, 英(영)◯
34세 ◯燮(섭), ◯烈(열), ◯杰(걸)
35세 均(균)◯, 重(중)◯, 垣(원)◯
36세 ◯鎔(용), ◯鎭(진), ◯錫(석)
37세 潤(윤)◯, 準(준)◯, 汶(문)◯
38세 ◯稷(직), ◯栢(백), ◯杓(표)
39세 熙(희)◯, 煐(영)◯, 螢(형)◯
40세 ◯堉(육), ◯墩(돈), ◯培(배)
41세 鐫(전)◯, 銓(전)◯, 鑽(찬)◯
42세 ◯浩(호), ◯河(하), ◯洛(락)
43세 和(화)◯, 楨(정)◯, 桓(환)◯
44세 ◯勳(훈), ◯黙(묵), ◯愚(우)

7. 집성촌

7.1. 서울·경기·강원

7.2. 경상

7.3. 충청

7.4. 전라

7.5. 북한

8. 주요 인물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거나 등재기준을 만족할 정도의 저명성 있는 인물만 기록 가능합니다.

[1] 홈페이지 체제에서 다음 카페 체제로 바뀜 [2] 조한룡의 아버지는 조정통으로 고려시기 시중에 올랐고, 조정통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강진조에 나오는 조정(曺精)이란 인물과 동일인이다. 조정통은 바둑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며, 조한룡을 포함한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해 오룡(五龍) 집안이라 불렸다. 조한룡은 태종14년 입적하여 청간(淸簡)의 시호가 내려졌다. [3] 자는 원촌(遠村) [4] 조한룡의 손자로, 공민왕때 정언(正言, 종6품)으로 재임했고, 부인은 강윤충(康允忠)의 딸이며 조선 태조 이성계와 처사촌 지간이다. 신돈의 비행을 탄핵하다 진도로 유배되었고, 진도군에 세거하는 후손들의 파조이다.(청간공파, 정언공파로 불리운다.) [5] 청학집(1614년)에 삼한습유기가 신라 서산(瑞山)의 석실에서 발견되었다고 기록된것을 참고하면 저자인 녹두처사가 옛 신라의 고문헌들을 참고해서 저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처사(處士)라는 용어는 고려시대 초기~조선시대 중기에 사용되었다. 일제시대 학자 이마니시 류가 소장한 운학선생실기에는 나단산(羅端山)으로 적혀있지만 가장 오래된 판본인 규장각본을 포함한 다른 판본들에 전부 서(瑞)로 적혀있어서 한자어 라(羅)가 신라의 약칭으로 쓰였음을 참고하여 신라 서산이라 해석하여 읽기도 한다. [6] 원본은 실전되었고 청학집에 일부 내용이 적혀있고 참고로 삼한습유기의 일부 기록은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보이므로 삼한습유기 문헌을 발견한 청학상인 위한조(魏漢祚)가 삼한습유기의 실질적인 저자라 보기도 한다. [7] 세조 때 영의정 조석문은 3차례 공신(적개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에 책록되었다. 중종 때 문신 조계형은 정국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삭훈되었다. [8]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9] 경상북도 김천출신인 문장공 매계 조위(曺偉)를 파조로 한다. [10] 문정공 남명 조식을 파조로 한다. [11]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활약한 고려의 무신 성시공을 파조로 한다. [12] 고려 후기 연저수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좌정승에 올라 하성부원군에 봉해진 양평공 조익청(曺益淸)을 파조로 한다. 창녕조씨 대종회 추산 전국 40만 창녕조씨 중 약 65% 정도가 양평공의 후손이라한다. [13] 조민수의 동생으로 단성좌명공신 좌찬성 조경수(曺敬修)를 파조로 한다. [14] 고려 때 시중(侍中)을 역임한 조한룡(曺漢龍)을 파조로 한다. [15] 조민수의 동생 찬성공 조경수의 막내 아들로 김천입향조인 참의공 조심(曺深)을 파조로 한다. [16] 조선 중기 평안도도사를 역임한 조광익(曺光益)을 파조로 한다. 조광익의 호(號)가 취원당(聚遠堂)이다. [17] 고려 후기 종3품 태복경(太僕卿)을 역임한 조흥(曺興)을 파조로 한다. 항렬에서 1세로 삼는 갱시조 삼송 형제(송무松茂, 송군松君, 송학松鶴) 중 송군(松君)의 후손으로는 태복경공파가 유일하다. 과거합격자 수십명을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이인좌의 난에 가담해 일부 계대의 후손들이 몰락했다. [18] 조선 태조 때 판희천군사(判熙川郡事)를 지낸 조신충(曺信忠)을 파조로 하며, 주로 경상북도 영천시 일원에 세거한다. [19] 경상북도 김천출신으로 매계 조위의 동생 효강공 적암 조신(曺伸)을 파조로 한다. [20] 1세대를 30년으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2020년 현재 창녕 조씨는 24~28세까지 생존해 있다. 24×30=720이므로, 2020-720=1300, 즉 고려 말기가 된다. 중시조 조겸으로부터 계산해도 같은 결과를 얻는다. [21] 이들 3형제는 중시조 조겸의 12대손(=13세손)이다. 조겸으로부터 이들 3형제까지의 계보는 태복경공파보(1990) 등에 나와 있다. [22] 일부 분파에선 27~32세가 현재 활동 중인 경우도 있다. [23] 성리학자 봉강 조상, 4선 국회의원 조일환이 이 마을 출신이다.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창녕조씨 태복경공파 집성촌, 우리 집안이 이인좌의 난 때문에 몰락함 [24] 작사·작곡가인 고려성·나화랑 형제의 출신 지역이자 형제그룹 조트리오의 본적지다. [25] 사기꾼 조희팔이 이 마을 출신이다. [26] 희천공파(熙川公派)-사의공계(司議公系) 후손들이 주로 세거하는 마을로, 독립유공자 조병화· 조재만, 조규설· 조규창 전 국회의원, 정치인 조병환이 이 마을 출신이다. [27] 독립유공자 조병진· 조재복이 이 마을 출신이다. [28] 남명 조식의 묘소가 이 마을에 있다. [29] 독립유공자 조재학이 이 마을 출신이다. [30] 독립유공자 조윤호 조희순이 이 마을 출신이다. [31] 독립유공자 조문환이 이 마을 출신이다. [32] 트로트가수 송가인이 이 마을 출신이다. [33] 조국현 전 국회의원이 이 마을 출신이다. [34] 독립유공자 조병의가 이 마을 출신이다. [35] 국가등록문화재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 (靈光 昌寧曺氏 觀海公 家屋)이 있다. [36] 조암부락, 금자부락에 창녕 조씨 선영이 있다. [37] 독립운동가 조만식이 이 마을 출신이다. [38] 법적인 본명이자 실제로 사용하는 이름은 조국이지만, 창녕 조씨 태복경공파보(1990)에는 항렬자를 맞추어 조국현으로 기재되어 있다. [39]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40] 매계 조위의 15대손이다. [41] 집현전의 수장은 대제학이지만, 대제학은 겸직이라 부제학이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42]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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