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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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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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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
장소
조선 경상도 울산왜성
시기 1598년 1월 29일 (음력 1597년 12월 23일)
장소 조선 경상도 울산왜성
제1차 1598년 1월 29일 ~ 2월 9일
(음력 1597년 12월 23일 ~ 1598년 1월 4일)
제2차 1598년 10월 21일 (음력 9월 22일)
장소 조선 경상도 울산왜성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원인 명량 해전 이후, 조명연합군의 반격.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400px-Left-facing_dragon_pattern_on_Wanli_Emperor's_imperial_robe.svg.png
명나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도요토미 정권
제1차
지휘관
조선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yanome_%28No_background_and_Black_color_drawing%29.svg.png 가토 기요마사
파일:600px-Japanese_crest_Hana_Kurusu.svg.png 고니시 유키나가
쵸소카베 모토치카
모리 히데모토
아사노 요시나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1]
다치바나 무네시게
모리 가쓰노부
오타 카즈요시
하치스카 이에마사
하라다 노부타네†[2]
아소누마 모토히데†
레이제 모토미쓰†
츠노시 이에요리†
킷카와 히로이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3]
권율
정기룡
한명련
김귀희
장운익
명(明)군
양호
마귀
천만리
제2차
지휘관
조선군 가토 기요마사
김응서
김충선
선거이
명(明)군
마귀
제1차
병력
조선군 주둔군 16,000명
구원병 13,000명[4]
11,500명
명(明)군
36,000명
제2차
병력
조선군 병력 규모 불명
5,514~15,000명
명(明)군
24,000명
제1차
전투 피해
전사자 2,000명[5], 3,000~4,000명[6] 전사자 불명
제2차
전투 피해
피해 규모 불명 불명
결과 일본군의 1차 방어 성공, 2차 후퇴.[7]

1. 개요2. 배경3. 제1차 울산성 전투
3.1. 전투 준비3.2. 공방전3.3. 일본군의 구원 시도와 연합군 퇴각
4. 결과5. 제2차 울산성 전투6. 여담7. 창작물에서8.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iusm.co.kr/304778_121543_423.jpg
임진왜란 후반기, 정유재란 중에 발생한 조선& 명나라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 총 2차례에 걸쳐 벌어져서 1차, 2차로 구분되며 그 중 유명한 것이 제1차 울산성 전투이다. 제1차 울산성 전투는 전투에 참여한 장수와 군 병력 규모, 양측의 전략적 목표 면에서 임진왜란 최대의 전투라 볼법도 하지만[8][9] 몇개월 후 펼쳐진 전쟁을 끝냈다는 상징성이 있는 노량해전 등에 밀려[10] 한국에선 대중적으로 크게 인식되고 있는 전투는 아니다.

2. 배경

임진왜란 최후의 승부처 울산성 전투
재침 이후 전면적인 총공세와 수륙양공책을 펼치던 일본의 계획이 이순신 에 의해 좌절되자 더 이상 진군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일본군은 전면적으로 후퇴, 해안가에 여러 채의 왜성을 쌓고 농성에 돌입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일본군 지휘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싶어했으나,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철수 불가와 재북상을 계속 독촉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연유로 일본군 상당수가 여전히 조선 남부에 남아 있었고, 이들이 남아 있는 이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조·명 연합군은 이들을 모조리 격파하여 전쟁을 끝내겠다고 결의했다.

특히 많은 왜성들 중 최우선적으로 울산 왜성, 당시 도산성이 지목되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도산성은 일본의 조선 침략 본거지가 되어버린 부산에 매우 가까워 함락만 시킨다면 부산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었고, 일본의 조선 침략을 사실상 좌절시킬 수 있었다. 단, 이를 반대로 적용하면 부산의 일본 증원군이 빠른 시일 내에 쏟아져 쇄도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에 이들을 저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둘째, 도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장군은 가토 기요마사였다. 전쟁 첫 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군의 선봉에 서서 조선 조정에 악몽같이 기억된 인물로, 그나마 대명 협상을 주도하여 유화적으로 보인 고니시와 달리, 가토는 임해군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조선 입장에선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준 장본인이어서 가토를 잡아서 설욕하자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실제 조선 조정은 고니시가 웅거한 순천성과 가토 기요마사가 웅거한 도산성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다 최종적으로 울산 도산성을 결정했다.

3. 제1차 울산성 전투

3.1. 전투 준비

울산성 공략을 위해 조명 연합군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12월 20일에는 여여문을 도산성에 잠입시켜 일본군의 배치를 기록하였다.

직접적인 공성에 투입되는 병력만 해도, 부총병 양호가 이끄는 명군이 기록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는 있으나 최소 30,000명에서 최대 44,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전쟁 첫 해를 제외하면 대규모 지상군을 동원하지 못한 조선군도 도원수 권율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여 약 10,000여 명을 투입했다. 조·명 연합군이 단일 전투에 50,000명에서 60,000명 대군 정도로 병력을 집중 투입한 것은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의 제4차 평양성 전투 이후 처음이었다.

연합군 본영은 경주에 설치되었으며, 예상되는 일본군의 원병을 차단할 길목들이 선정되었고, 정예 병력과 군량, 화포 등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동시에 명군은 호남 지방으로 별동을 보내어 순천성 등 호남 지방 왜성들을 공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일본군을 낚기 위한 작전이었다.

가토 기요마사도 바보는 아니어서 성을 증축하고 주변 성과의 연계를 강화하며 조·명 연합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특히 도산성은 명량해전 패배와 그 이후의 후퇴 직후 급히 축조에 들어간 가토의 새 본거지로 방어력이 높았으며 전투를 얼마 남기지 않고 완공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목표가 정확히 자신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당시 각 성에 틀어박힌 일본군 장수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목표가 될까 두려워 연계에 소극적이었다. 덕분에 가토는 전투 초기 자신의 휘하 병력 16,000여 명만을 지휘할 수 있었다.

3.2. 공방전

파일:external/www.topicsinkoreanhistory.com/Screenshot_2014-02-18-20-01-02.png

음력 12월 23일, 마침내 조명연합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마귀, 이여매, 파새가 지휘하는 명군은 울산성 서북쪽으로 진군하여 일본군을 성내로 퇴각시켰고 경리 양호의 군대는 울산성의 외성 목책을 점령하였다.

공세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산성 바깥의 병영성, 언양성이 함락되었으며 가장 가까운 왜성인 서생포왜성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11] 이후 도산성은 조·명 연합군에게 그물같은 포위를 당했다. 이에 성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갔으나 일본군의 조총에 명나라군 사상자가 속출하자 양호는 퇴각명령을 내렸다

본격적인 공성전에서 조·명 연합군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왜성 공성이라는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기존의 공성전은 일본군이 점령한 조선의 성에 대한 탈환전이었다면, 이 전투는 일본군이 축성한 왜성에 대한 공성전이었다. 일본의 축성술은 센코쿠 시대에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성의 다른 기능은 모조리 포기하다시피하고 오로지 난공불락 하나에만 올인한 형태로 발전해 있었다. 성벽 위에 높게 축조된 목재 구조물에서의 조총 사격 등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왜성의 방어력에 고전한 조·명 연합군은 일단 공세를 중지했다. 물론 일본군도 화포 사격이라는, 센코쿠 시대에는 경험하지 못한 연합군의 공격에 목재 구조물 속에서 수십, 수백병이 사이좋게 불타죽기도 했지만[12] 이 시대의 화포는 화력이 뛰어나더라도 포가가 개발되지 않아 명중률이 낮고 한번에 방열하고 지속적으로 화력을 투사하기엔 화약수급 문제가 발목을 잡는데다 화포로 방어는 해봤는데 성을 공격한 경험은 부족해서[13] 화포만으론 공략하긴 힘들었다.

생각치 못한 고전과 피해에, 연합군 총사령관 양호는 전략을 변경하여 일반적인 공성법이었던 고사 작전을 개시했다. 연합군은 성 주변의 우물을 모조리 묻어버리고 태화강의 물줄기를 빈틈없이 봉쇄했다.

사실 이때 가토와 일본군에게는 악조건이었던 것은 도산성이 완공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성 안에 군수 물자의 비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성 안에 2만에 가까운 일본군이 먹을 식량과 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우물이 성내에 한 곳도 없다는 것은 도산성 최대의 약점이었다. 더군다나 공사가 끝난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건설에 참여한 인부들까지 상당수 남아 있어서 그들도 먹여 살려야 했고, 이들은 전투에도 투입할수가 없기에 밥만 축내고 있었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군은 식량과 물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을 죽여 말 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그나마 초반의 일이고, 시간이 지나면 아예 피와 오줌을 먹었다는 말까지 있었다. 심지어 총사령관인 가토 본인마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천에 고인 물을 짜내어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리 막강한 군대라 해도 배고프고 갈증나면 못싸우는게 당연지사. 가토도 이를 알고 결사적으로 반격하여 태화강으로 식수 조달에 나섰으나 조·명 연합군은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결사대는 출격하는 족족 개발살나서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한 번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기병 중심의 부대를 내보냈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당했다. 이러다보니 가토는 포위망 돌파를 포기하고 죽기살기 농성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일본군의 식량 사정은 최악을 달려서, 농성전의 핵심인 조총수에 한정하여 하루에 생쌀 한 홉을 지급했다. 그나마도 물이 없어서 생쌀을 먹어야 했다.

한편, 조·명 연합군은 포위망 유지와는 별개로 공세를 강화했다. 가까운 일본군이 언제든지 구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세월아 네월아 포위만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결국 28일을 기점으로 연합군은 도산성 외성을 함락시키며 가토군을 몰아붙였고, 가토의 일본군은 좁은 내성으로 몰리며 최후의 결사 항전을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가토 기요마사는 결국 할복을 준비하는 사태까지 맞이한다.

3.3. 일본군의 구원 시도와 연합군 퇴각

사람을 시켜 중국 장수가 주둔한 곳을 바라보게 하였더니, (중략) 그제서야 비로소 중국 장수가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먼저 보병을 내보내고 스스로 기병을 거느리고 뒤를 막으면서 후퇴한 것을 알았습니다. 전탄을 지키던 절강(浙江)의 보병 기병도 장수가 이미 후퇴한 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당황하여 도망치자, 산위에 있던 적들이 줄을 지어 내려와 한꺼번에 시살하였는데 보병 중에 살아서 돌아온 자가 많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기마병으로서 죽음을 당한 자도 그 얼마인지 모르며 혹은 갑옷과 투구를 내버리고 맨몸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는데 아군의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당했던 대세가 순식간에 꺾이고 다 죽어가던 적이 도리어 흉독한 기세를 멋대로 부렸으니 진실로 통곡할 일입니다.
<선조실록>

일본군의 제1차 구원 시도는 비교적 초기에 이루어졌으나 병력 수도 적었고 이를 예견한 연합군에 의해 태화강과 양산 방면에서[14] 압도적인 적의 군세에 패배해 구원에 실패했다. 특히 서생포왜성에서 출발한 일본 지원군은 숫자가 적어 압도적인 숫자의 조명연합군에게 태화강에서 연거푸 패배했으나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명 연합군의 목표가 단 하나, 도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라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자신의 성에서 짱박혀 있던 일본군 장수들이 일제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1만이 넘는 병력을 이끈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필두로, 모리 카츠노부, 아사노 나가마사와 요시나가 부자, 다치바나 무네시게, 하치스카 이에마사, 여기에 거리도 가장 멀고 가토와 사이가 나쁜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까지 출병하였고, 총사령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가신 야마구치 무네나가가 지휘하는 병력을 급파하여 최종적으로 6만 ~ 8만에 달하는 대군이 도산성으로 몰려갔다. 사실 이때 일본군 장수들은 이대로 가다간 연합군에게 개별 성들 단위로 각개격파당하는거 아니냐는 공포가 엄습했기에 다들 결사적으로 가토를 구원하려 했다.

한편, 구원군 본대와는 별개로 일부 저돌적인 일본군 장수들이 태화강을 도하하고 포위망 외부에서 공격을 시작하는 등 전세는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이에 조·명 연합군도 공성군을 줄이고 주력 상당수를 일본 구원군과 맞서게 하였으나 역으로 일본군에게 개박살났다. 이에 연합군 지휘부는 공성 포기와 퇴각을 결정하여, 22일에 걸친 전투는 최종적으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다.

이후 퇴각하는 연합군과 추격하는 일본 구원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하는데, 조선과 명의 기록에서는 추격을 예상하고 퇴로에 복병을 설치, 추격군을 섬멸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반대로 일본에서는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조·명 연합군을 무참히 개박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명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투에서 조선군과 명군은 1,621명의 사망자와 2,90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전투 전 울산성 안의 1만명 중 1천명 이하만 살아남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명 연합군을 몰아낸 후 가토는 울산성의 수성을 포기하고 잠시 서생포로 퇴각했다가 1월 22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울산성에 다시 방어진을 꾸렸다.

4. 결과

비록 이겼지만 일본군이 느낀 위협은 매우 심각했다. 당장 표적이 된 가토 기요마사는 기껏 축조한 도산성을 포기하고 서생포로 후퇴해 종전시까지 서생포에서 웅거한다. 가토만이 아니라 다른 일본군 장수들도 보다 더 안전한 성으로 옮기려고 난리를 치고 기존 성의 방호력을 약간이라도 강화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15] 따라서 구로다 나가마사,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은 본국에 공동으로 서한을 보내어 철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화를 내며 오히려 전면 공세를 지시했다. 결국 일본군이 철수하기 시작한건 도요토미 사후의 일이었다. 이때 히데요시의 명령을 따르자고 주장한 카키미 카즈나오, 쿠마가이 나오모리 등과 갈등을 빚어 일본군 내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조·명 연합군도 실로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공세를 펼쳤으나 결국 패배했다. 이후 연합군 수뇌부는 새로운 전쟁 전략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울산성 전투처럼 특정 진영부터 붕괴시키려는 시도가 아닌, 대군을 4개로 나누어 전 전선에서 일제히 총공세를 펼치는 사로병진책을 내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 전략을 쓰고도 조명연합군은 끝내 목숨 걸고 방어하는 일본군이 후퇴할 때까지 제대로 진영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5. 제2차 울산성 전투

1차 공격에 실패한 조명연합군은 병력을 경상좌도·경상우도·전라도에 배치하였다. 또 진린이 거느린 명의 수군을 보내 조선 수군과 협력하여 일본 수군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울산·사천·순천 지역의 일본군을 동시에 공격할 태세를 갖추는 등 사로병진 작전을 계획하였다.

1598년 9월 11일에는 부총병 해생이 남하하여 울산성에 접근하여 1천명의 일본군을 격파하고 울산성 주변에 있는 학산성(鶴山城)을 점령하였다. 한편 김응서가 지휘한 조선군은 동래 지역의 일본군을 물리치고 부산과 울산을 연결하는 통로를 점령하는 등 울산성 공격을 재차 준비하였다.

조/명 연합군은 제1차 울산성 전투 당시 공성전이 장기전으로 흘러가자, 각지에서 일본의 구원부대가 파견된 것을 교훈으로 삼아 이번엔 사로로 군대를 나눠 남해안 일본군 진지들을 차례로 공략하고자 했다. 동로군 총병관 마귀는 경주에서 김응서의 조선군과 합류하여 도합 4만 대군을 이끌고 울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제1차 울산성 전투 당시 호된 맛을 본 가토 기요마사는 이번엔 제대로 된 수성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했으나 오히려 일본군의 철저한 방어에 조선측 지휘관 선거이가 전사하는 등 피해가 점차 늘어났다. 설상가상 중로군의 동일원이 시도한 사천성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말았고, 서로군과 수로군의 연합 작전이었던 왜교성 전투도 실패로 이어졌다. 하다못해 부산왜성을 급습한 명의 대군조차 다치바나 무네시게에게 가로막히면서 사로병진책 자체가 실패로 마무리된다.

그러던 와중 일본군도 후퇴할 각만 재고 있었기에, 조/명 연합군이 물러선 틈을 타 성에 불을 지르고 배를 타고 도망가면서 울산성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된다.

6. 여담

한편 이때 울산성에서 굶어죽을 뻔한 가토 기요마사는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면서 성 내에 우물 수백 개를 파고 다다미를 만들 때 된장에 졸여 말린 토란 줄기를 넣고 짜서 유사시 비상 식량으로 쓰게끔 하는 등 울산성의 뼈저린 전훈을 반영했다.[17] 정작 가토 가문이 이를 이용한 건 반세기도 안 되지만 구마모토 성을 쌓는 데는 조선인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18]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는 울산정역( 울산마치역)이 있다.

울산성 전투의 처절함은 전투 당시 성내에 고립되어 있던 군종 승려 케이넨이 일기에 기록하면서 아주 생생히 전해진다. 자기 좋은 것만 기록하는 무사나 다이묘들이나 조선 명나라측과 달리 케이넨은 승려였기 때문에 일본군이 왕창 불리했던 울산성의 처절함이 고스란히 기록될 수 있었다. 이와 반대되는 구원군의 시각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구원 과정을 보여주는 울산성 전투도가 나베시마 가문에서 전해내려오고 있다.

역덕후들 사이에서는 울산의 가토 대신 순천의 고니시를 먼저 노렸으면 이겼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울산성 전투 패전의 이유는 결국 외부 구원군 때문인데, 순천성은 육로로 외부 구원군이 오기 힘들어 구원군이 오자면 바다로 오는 건데 이는 이순신이 막고 있었다.[19]

가토 기요마사는 성 안의 식수 부재로 인한 성 안의 암울한 상황으로 인해 2회나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만약 가토 기요마사가 이 때 자결에 성공했다면 당시 후계자가 될 법한 친족이 없었던 관계로 그대로 가토 가문의 대가 끊어졌을 것이다.

7. 창작물에서

정유재란 시기의 치열한 공성전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울산성 전투만 다룬 창작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KBS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98화에 약 10분 ~ 15분에 걸쳐 다루었다. 비록, 전투 장면은 후반 촬영에서 겪는 가장 큰 문제인 예산 부족으로 이전 전투씬을 재탕하고[20] 막사에서 고심하는 류성룡 씬이 더 많이 나왔지만 갈증에 지친 일본군과 역시 갈증으로 말의 피를 마시는 가토의 모습에서 울산성 전투가 가토와 일본군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전투였는지를 보여주었다. 특히나 겨우 살아남은 가토가 피와 먼지로 뒤덮인 채 팽개쳐진 장군기[21]를 바라보다 망연자실해하고, 혼자 방에서 술을 들이키다 갑자기 밥상을 뒤엎고, 수치심에 어쩔 줄을 모르다가 결국 단검을 뽑아 자결하려다 고니시에게 저지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1597년 정유년 12월 22일부터 시작된 울산성 공략전.
조·명 연합군이 4배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승기를 잡을 수 없는 난전 중의 난전이었다.
그리하여 조명 연합군 측에서는 특단의 조처를 취하게 되니,
그것은 바로 수맥을 끊어 적의 식수원을 차단해버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정유년 12월 27일, 왜군은 식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성문을 열었으며
조·명 연합군은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원병을 청하는 가토의 전언이 부산 인근에 주둔해 있던 왜군 진중으로 급히 전달되자
왜군들은 울산성 근처로 속속 결진하기 시작했고, 전황은 다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난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울산성을 점령하지 못한 채, 1598년 무술년 1월 4일, 포위를 풀었다.


분전했으나 끝내 성을 점령치 못함으로 인해, 일부 기록은 이 울산성 전투를 패전이라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은 당시 울산성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를 비롯, 왜군 6천여 명을 섬멸했으며,
1월 5일,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1군은 결국 울산성을 포기하고 서생포로 퇴각하기에 이르니,
울산성 전투, 그 혈전을 승전이라 이름한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22]
무엇보다 명량과 울산성 전투의 연이은 패전은 일본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기록은 울산성 전투를 진두지휘한 가토 기요마사가 그 패전의 치욕을 이기지 못해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내레이션

징비록의 오프닝 시퀀스 중 일부는 이 항목의 서두에도 있는 '울산성 전투도 제3도'를 재현하는 데 할당되어 나올 것처럼 낚시를 했다. 그러나 드라마에 나온 분량은 정확히 3분 30초밖에 안된다. 전투씬도 이전의 전투 장면을 대부분 재활용했고 새로 찍은 장면은 얼마 안된다. 그래도 가토가 말피를 마시는 장면은 나온다.[23]

8. 같이 보기



[1] 이방자 비의 외가인 나베시마 가문의 시조 [2] 그가 김충선이라는 설도 있지만, 가능성은 없다. [3] 일본군 총대장. 가신 야마구치 무네나가 휘하 병력을 파견하였고, 일부 기록에서는 직접 참전하였다고 한다. [4] 전투 참여 병력. 전투 후에 도착한 구원병까지 합치면 60,000명에 달한다. [5] 명사. [6] 조선왕조실록. [7] 2차 전투 당시 일본군이 성을 불태우고 배를 타고 도망갔다. 결국 조명연합군도 자력으로 성을 차지하진 못했다. [8] 울산성 전투 이전 임진왜란 최대의 전투는 조선근왕군 5만이 투입되었던 용인 전투다. [9] 노량해전의 시발점이 된 순천에서 벌어진 왜교성 전투도 대규모 전투였으나, 울산성 전투보단 약간 모자랐다. [10] 엄밀히 따지면 이후에도 남해안에서 소규모 교전이 몇차례 더 있긴 했다. [11] 24일에는 서생포에서 왜군이 20~30여 척의 배로 울산성 근처에 접근해 태화강에서 조명연합군과 전투하였으나 패하고 염포(鹽浦)로 후퇴하였고 25일에도 일본 수군이 울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접근했으나 명나라 군대의 방어선에 막혀 좌절되었다. [12] 일본성의 축조 구조상 방어에는 확실하게 유리하지만 대완구 비격진천뢰를 잔뜩 집어 넣으면 지옥이 되기 딱 좋게 병력이 밀집되는 구조다. 천수각 같은 경우는 화포로 불태우기 딱 좋은 시설인데 도산성의 경우 천수각을 건설할 여유는 없었던 듯하다. [13] 공성포가 따로 개발된 것도 해본 놈이 뭘안다고 필요성을 느껴서 개발된 것이다. [14] 지금의 웅상지역이다. 지금의 회야강은 이때의 승전으로 인해 대승강 또는 일승강으로 불렸었다. [15] 사실 이는 당연하다. 울산성에 공격이 들어갈 정도로 조명연합군이 군세를 갖췄단 얘기는 곧 적군이 군세를 회복하였고 자신들에게도 언제든지 이런 공격이 가해질 수 있다는 뜻이므로(물론 당시 조선과 명나라 사정을 감안하면 과대평가이긴 했지만), 당연히 방비를 해놓긴 했지만, 만전에 만전을 기하여 방비에 조금이라도 틈이 있는지를 철저하게 확인하는 것은 군 지휘관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가토 쪽 일본군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조명 연합군은 포위를 시도했고, 증원을 차단하고 성을 말려죽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16] 참호와 해자를 새로 팠고, 요새를 보수했으며, 성채까지 튼튼히 보강한 것도 모자라 우물까지 여러 개 팠다. 그것도 부족하여 태화강 강줄기까지 성안으로 끌어들여 천혜의 요새를 구축, 사실상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황이었다. [17] 이때 겪은 트라우마가 굉장히 심했는지 구마모토 성을 난공불락으로 만드는 것 외에도 외출할 때마다 유사시 즉시 까서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을 챙겼다고도 한다. 도시락 이야기는 함경도에서 물러날 때 보급이 어려워져 식량 부족을 겪었던 일에 학을 뗐다는 설과 울산성 전투 설로 나뉘는데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포위 당시 말을 잡아먹었다가 이쪽은 입맛에 맞았는지 후일 말고기 육회, 즉 바사시미를 전파한 인물이 되기도 했다. 현재도 구마모토 지역은 말고기로 유명하다. [18] 정황상 울산 출신 조선인들로 추측되고 있다. [19] 사실 이래서 차후 순천 왜교성으로 목표가 바뀌어 왜교성 전투가 벌어졌지만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의 비협조와 수군 도독 진린의 독단적 행동으로 작전에 실패했다. [20] 이치 전투, 2차, 3차 평양성 전투 [21] 승전을 기원하며 히데요시가 친히 하사한 것으로 히데요시가 전국시대 때 사용하던 녀석이다. [22] 물론 울산성을 되찾는다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전투 자체의 결과는 본문에 상술되어있다시피 공성에 실패했기에 승전이라고 보기 어렵다. [23] 이때 두 드라마 모두 같은 배우가 가토를 연기한 덕분에 말피를 2번이나 마셨다. 특히 징비록에서는 이 과정도 가토 본인이 직접 자신의 말을 죽인 장면으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