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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3:23:08

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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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발 역사
2.1. 초기 다발화전의 시대2.2. 한반도의 비대면 수비에 의한 변화2.3. 화차라는 명칭의 원조 논쟁2.4. 중국식과 조선식의 차이점
3. 종류
3.1. 기본적인 화차의 분류와 실전성3.2. 최무선 화차3.3. 태종화차3.4. 문종화차
3.4.1. 문종 신기전 화차3.4.2. 문종 총통기 화차
3.5. 류성룡 화차3.6. 변이중 화차
3.6.1. 복원 예시 13.6.2. 복원 예시 2
3.7. 융원필비 화차3.8. 목화수거3.9. 신경준 화차3.10. 귀차(초대형 화차)3.11. 조총부착화차
4. 미디어
4.1. 영화4.2. 드라마4.3. 게임
5. 기타6. 관련 문서

1. 개요

화차() 또는 화거[1]는 이름 그대로 '화약(무기)을 실은 수레'로, 하나 또는 다수의 화약무기를 설치하여 적에게 발사할 수 있게끔 만든 장비를 말한다. 역사 기록상 9세기의 당나라 때 처음으로 화약이 개발되어 군사적 용도로 이용되면서 자연스럽게 등장하였으며, 11세기 송나라의 무경총요에서 화약 재조법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 문종 시기 제작된, 신기전 다연장로켓 형태로 배치한 문종화차(文宗火車)가 제일 유명하며, 이 버전이 외국에서도 'Hwacha'라는 고유명사로 잘 알려져 있다. 로켓 화살인 신기전 그 자체를 '화차'라는 이름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파일:/image/020/2008/09/04/200809040390.jpg
문종화차의 모습
Mythbusters에서 신기전과 함께 문종화차를 재현한 영상[2]

문종화차와 같이 신기전을 대량으로 발사하는 화차는 조선시대 중기부터 이미 쇠퇴했으며, 후기에 등장하는 화차들은 이동식 오르간 건을 수십여기 탑재하여 일종의 장갑차처럼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총이 등장하면서 쓸모가 없어진 승자총통류를 40여발 장착한 변이중화차다. 즉, 조총이 등장한 이후로는 일종의 전차로서 선회했다가 후대로 가면 훨씬 발달한 유럽식 화포( 홍이포)가 일반화되면서 사라진 무기라고 볼 수 있다.

운반시에는 말도 끌 수 있도록 손잡이가 길고 넓었다. 하지만 전투 중에는 무조건 인력으로 밀도록 되어 있었다. 지향성 화약무기를 동물에게 싣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2. 개발 역사

2.1. 초기 다발화전의 시대

히스토리 채널에서 중국의 다발화전과 한국식 화차를 비교하는 영상[3] Ancient Hwacha-From Lock n'Load with R. Lee Ermey
화약무기의 원조라고 볼 수 있었던 중국에서 다발화전과 함께 전투수레를 사용하는 무기 체계를 만들었다. 중국제 화약전차들은 전투 마차를 이용하여 방벽을 쌓아둔 다음 그 위에 다발화전을 쌓는 방식으로 전면전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본래부터 가벼웠던 전투수레에서 방어를 담당하는 방패판을 더욱 축소해버리고, 화약무기와 전투수레를 일체화시켜서, 보다 규격화 되고 근대적인 사격제어를 위한 포탑 기능에 많은 신경을 쏟는 화차라고 부르는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양쪽 국가에서 거의 비슷한 다발화전 무기라는 원형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발전 양식이 점차 미묘한 차이가 생겨난 이유는 지형에 따른 차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광활한 중국 대륙에서는 기병들의 기동력이 중시되었는데, 한국식의 화차는 전술적으로는 민첩하지만 장거리 이동용 수레로는 불편하고 근접전에 대한 방어력도 허약하므로 전투수레의 기본적인 사용 장소였던 평지에서는 약간 비효율적인 발전형태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다발화전을 원조로서 운용한 중국에서는 운반성이 높은 다발화전과 수레를 따로 만들어서, 대규모 야전에서 '효율적인 저지력을 갖춘 방어선 건설' 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충족하는 수레의 효율성이 장착되는 화포의 신뢰성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극단적인 화포 중심으로 전투수레는 화포를 보조하기 위하여 기계적인 설계를 중시한 형태가 나타난 것은 양 국가의 방어 철학에서 그 원인이 있었다. 한반도의 국가들은 적과 아예 근접하지 않고 원거리에서 최대한 이득을 보겠다는 전투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한반도의 군대가 산성 바깥에서는 잘 싸우지 않는 수비적인 군대였기에, 저격수와 곡사포 같은 초장거리 무기를 더욱 발전시켜서 적들과는 아예 얼굴을 보지도 않는 '비대면 원거리 살상무기'의 발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평지에서의 적 진로 방해 및 차단이라는 전투수레의 본래 목적을 한반도의 지형 그 자체에 맡겨버리고 화약수레는 철저한 화포 관리용 포탑으로서의 기능만을 더욱 발전시키는 방향성이 나타나면서 한반도의 화차라는 개념이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4]

2.2. 한반도의 비대면 수비에 의한 변화

한반도에서는 각종 지형지물(산, 바다, 강)과 산성에 의존하여 되도록이면 적군과 정면에서 칼을 맞대면서 피해를 보지 않는 상황에서 수비 전략을 세웠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기마민족을 평지에서 막아낼 수 있도록 대규모 배치에 유리한 병기를 대량 생산해야 했던 중국과는 안보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평지에서 쓰이는 바리케이드로서의 성능보다는, 검차 같은 가벼운 전투수레에서도 중세 전차가 지녀야할 기본적인 밸런스를 더욱 무시해버리고, 순수한 화포 통제용 포탑 기능이 강조되는 화차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비록 전투수레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성능은 점차 배제되었지만, 한국의 화차들은 기계적인 부분에서 더욱 발전하여 다양한 발달 형태가 나타날 수 있었다.[5] 이것은 화차의 장점들을 한반도 지형 특유의 원거리 산악 전투 환경에서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첫째, 처음부터 사용자들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환경에서 이동식 포탑처럼 사용할 것이므로, 탁트인 평원지대에서의 방어력 혹은 장거리 기동력에 관해서 발생하는 단점은 무시하고 화차를 설계할 수 있었다.[6]
둘째, 가벼우면서도 조작이 쉬운 수레 덕분에 다수의 화차를 동원할 경우 다발화전보다 일정 각도의 대규모 탄착군을 정확한 형성할 수 있어서 집단적인 곡사에 유리하다.[7]
셋째, 다양한 화포, 방패, 수레를 장착하며 각 지형에 최적화할 수 있고 전술적으로는 높은 민첩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넷째, 다발화전과 일부 핸드캐논을 한정된 수납공간에 장착하는 이전의 전투수레와는 달리, 2차 폭발이 가능한 다수의 중신기전 혹은 대규모 오르간 건에 추가적인 연발 장치까지 넣은 모듈 방식으로 다양하게 제작하여 장거리 살상력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기계적인 발전에 더욱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위의 특징들은 한국 지형에서 대단한 강점이었고 한국식 화차의 특성으로서 세밀하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즉, 중국에서는 넓디넓은 안보 환경에서 평지에서의 대규모 바리케이드 건설과 대량 배치를 통한 방어선 건설에서 효율적인 형태가 가장 먼저 고려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적을 정면에서 마주칠 상황을 제한적으로 고려하여 평지에서의 운용을 다소 포기했고, 심지어는 전투수레를 화약무기에 짜맞추어 설계하는 복잡하고 비싼 방식을 채택하면서까지, 산악 지형에 적합하면서도 순수한 사격만으로 큰 피해를 입히는 곡사포(Artillery)로서의 특징에 더욱 투자를 하면서 화약 포탑(Turret)의 개념이 더욱 분화되고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이후에는 방어선을 넓게 펼때의 가성비를 포기할 정도로 많은 화포를 장착한 오르간 건 화차, 또한 수비형 벙커로서 방어력이 튼튼한 개념의 전차들도 만들어졌는데, 이런 조선시대 화차들의 공통점은 결국 평지의 바리케이드라는 본래의 기능은 쇠퇴하고 포탑 부분에 많은 투자를 했다는 부분이다.

즉, 한국의 화차들은 전투수레를 기반으로 만든 무기인데, 수레로서의 성능은 쇠퇴하고 다양한 화약무기를 통제하는 관리용 포탑이라는, 본래라면 부차적이었어야할 기능이 더욱 발전한 무기 체계로 바뀌었다. 이는, 전투수레가 본래 갖추어야할 특성이었던 평지의 방어선 형성에 대한 관념은 수비적인 조선 지형과 산성에 맡겨버리고 원거리 포격과 저격을 중시하는 안보 환경과 전쟁철학에서 기인한 특징으로 보인다. 중세시대의 전차임에도 수레 부분보다는 포탑의 기계적 발전이 특이하게 강조되었던 한반도의 화차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8]

2.3. 화차라는 명칭의 원조 논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0px-%E6%9E%B6%E7%81%AB%E6%88%B0%E8%BB%8A.jpg

중국에서는 기록에 남아있는 가화전차를 근거로, 한국이 이를 베껴다 만든 것이 화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화전차는 다발화전과 백자총통을 수레에 싣고 정면에서 싸우는 야전용 전차였다. 따라서 다연장 폭발 로켓의 대규모 발사를 제어하는 곡사포 시스템으로서 발전한 조선의 화거류 병기와는 기초개념이 살짝 다르다.[9]

사료에서 가화전차의 등장은 1403년 발간된 《화룡경》이라는 책에 나오지만, 문제는 이게 위서라는 것이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가정제 말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본문 내용에서도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판단되는 내용들이 나와 신용할 수 없다. 관련 링크, 관련 네이버캐스트 더욱이 화룡경에는 가화전차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가화전차의 모습이 나오는 중국 문헌은 <무비지>인데, 무비지는 1621년 만들어진 책이고, 여기 나오는 가화전차와 화룡경에 나오는 가화전차가 같다는 증거는 없다. 한국의 화차와의 연관성은 더욱 더 입증할 수가 없다.[10]
파일:external/www.grandhistorian.com/rocketlauncher.png
파일:external/64756e7d5a9f0ea0c2f22c27c45db302a245620d6d5e47daea0032930d14d489.jpg

무비지에 실린 신화전병(위)와 화궤공적차(아래). 둘다 화차보다 문헌에 등장시기가 늦으며, 인지도도 낮아 한때 구글에서조차 자료를 찾기 힘들었지만 한국 영화 신기전으로 한국, 중국 간 논란이 붙으면서부터는 검색이 좀 낫다.

더욱이 단순히 문헌에 나오는 화기로서의 추측이 가능한 언급만을 따져도 이것도 한국의 화차가 앞선다. 왜냐하면 고려 말 권근이 쓴 최무선을 찬양하는 시에 화차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찬양하는 진포대첩은 1380년 벌어진 전투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님의 계략이 때맞추어 태어나니
삼십 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어도다
바람 실은 전선은 새들도 못 따라가고
화차(火車)는 우레소리를 울리며 진을 독촉하네.
주유가 갈대숲에 불 놓은 것이야 우스갯거리일 뿐이고
한신이 배다리 만들어 건넜다는 이야기야 자랑거리나 될까보냐
이제 공의 업적은 만세에 전해지고
능연각에 초상화 걸려 공경 가운데 으뜸일세
공의 화약무기 제조는 하늘의 도움이니
한 번 바다 싸움에 흉포한 무리 쓸어버리네
하늘에 뻗치던 도적의 기세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세상을 덮은 공과 이름은 해와 더불어 영원하리
긴 맹세가 어찌 긴 세월 후에까지 기다릴까
응당 군사의 대권을 맡게 되어도다
종묘사직은 경사롭고 나라는 안정을 찾았으니
억만 백성의 목숨이 다시 소생하는도다.[11]

다만 위의 사료에서도 한국식 화차가 발사화기로서 확실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후 최무선의 아들이 개발한 조선 태종 시대의 화차는 문종화차와 흡사한 사격과 기동성을 중시한 성향이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설계도와 기록이 분명하게 전해 내려오는 이동식 + 다연장 + 곡사포 형식의 로켓은 문종화차가 최초다.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에 명나라 영락제의 화차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건 성종실록에만 한 번 나오며 그 이전이나 이후의 실록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은 아래와 같다.
성종 54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4월 18일(병신) 1번째기사 신숙주가 양계의 여러 진의 방비책 등에 관해서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영사(領事) 홍윤성(洪允成)이 아뢰기를,“건주위(建州衛)의 적이 두 번씩 침입하였으나 이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또 침입해 올 형세이며, 따라서 금년의 방비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진년5120) 에 신숙주(申叔舟)를 원수(元帥)로 삼아 야인(野人)을 토벌하였는데, 오랑캐들이 이에 보복하고자 근년에 노략질이 잦고, 기어이 이득을 얻으려고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하였다. 영사(領事) 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기를,“세종께서 명나라 영락 황제(永樂皇帝)가 야인(野人)을 정벌하다가 포위되었으나 화차(火車)로써 포위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을 듣고서 마침내 화차를 만들어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었는데, 지금은 폐기되고 정비되지 않아 유사시(有事時)에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기시(軍器寺)로 하여금 제조하게 하여 양계(兩界)의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고 항상 훈련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역대 병가(兵家)들의 공격용 무기와 수비용 무기에 각각 그 방략이 있습니다. 예문관(藝文館)의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사전(史傳)을 널리 고증하여 아뢰게 하고, 무사(武士)로 하여금 각 진(陣)의 공격하고 수비하고 전투하고 행군하는 방책을 채택하여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세종실록에는 영락제의 화차에 관한 기록이 없고, 위의 기사는 중국의 화차를 들여왔다는 기록이 아니라 화차의 유용함이 전해졌다는 기록이다. 즉, 중국제의 영향이라기보다는 화차라는 대륙의 개념에 관한 논설에 가깝다.

가장 먼저 등장한 화차(火車)의 기록은 중국에 있다. 송나라 때 기록에도 화차는 나온다. 근데 이런 물건이다.

파일:external/www.militaryreview.com/cha_10.jpg

보다시피 우리나라처럼 포탑의 기능을 강조한 전차가 아니라, 기름 가마와 간이 부뚜막을 수레에 장착해 적 성문을 파괴하는 데 쓰는 공성병기다. 이 화차는 수호전의 108 호걸 중에서 한명이자 지살성의 신화장군 위정국이 자주 쓰는 무기다.

2.4. 중국식과 조선식의 차이점

조선의 화차는 대규모 발사제어에 중점을 둔 병기이다. 대체로 조선식 화차의 특징이나 상징성이라면 대규모 발사제어 장치를 다연장 로켓에 처음으로 도입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nopad>파일:external/cp.culturecontent.com/CP0230001770_L0002.jpg
조선 중기 이후에는 한국에서도 중국식 전차 형태의 화차를 자주 만들었는데, 조선중기 이후 전차운용을 보여주는 마병배차도를 보면, 일종의 이동식 벙커 역할을 하여 불랑기포 조총 등을 구멍으로 쏠 수 있다. 하지만 화포를 대동할 수 있는 이동식 '파이어베이스'에 가까운 물건으로서, 발사제어를 위한 병기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

화차는 각국에서 전투용 수레의 운용법 만큼 유효한 차이가 있다. 중국식 화차는 화약 시대 이전부터 사용한 전투수레에 가깝다. 또, 야전에서 사용하는 돌격형 전차로서의 특징이 강하다. 전투 마차에 다발화전을 비롯한 화약무기들을 싣어서, 되도록이면 야전에서 사용하는 전투마차와 큰 차이가 없이 사용했던 것이 중국의 화차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한국의 화차는 처음부터 화약무기와 수레를 일체화시키고 조금 더 근대적인 운용이념을 가진 병기로서 발달했다. 덕분에 문종화차처럼 각도제어와 화력을 중시하는 순수한 발사제어 도구, 혹은 사방을 막는 튼튼한 벽을 세워서 군인들이 들락거리며 거점에서 성채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동식 벙커 로서 조금 더 좁은 지형에 알맞게 형태가 세분화 되는 화차들이 발달했던 것이다.
중국식 '화차'의 특징
1. 중국에서 기마민족들을 상대할 때 대규모로 운용했던 대륙식 전차에 화약무기를 싣은 것이 원조다.(사실상 전투마차와 같다.)
2. 화약무기와 수레를 분리하여 각각의 생산, 운반성, 대응력을 중시했다.
3. 단순히 전투마차에 화약류를 싣는 것을 중시했기에, 각도제어가 매우 어렵거나 불편하다.
4. 화약과 수레를 결합한 화차들은 주로 성벽, 성문 공격용으로서 돌격적인 기능을 중시했다.
5. 대규모로 수송, 조립하여 넓은 평지에서 쌓아두고 적을 몰아내는 바리케이드 로서의 기능이 발달했다.
조선식 '화차'/'화거'의 특징
1. 한반도 지형에서 적들의 진입을 틀어막는 수레가 원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검차 등)
2. 화기와 수레의 규격을 돌격하는 전투수레보다는 기관총/미사일 발사용 '포탑'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보다 섬세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3. 발사기형 화차들은 각도제어 및 대규모 곡사에 유리했다.[12]
4. 발사기형 화차들은 중국식 화차와는 달리 1~2명이면 조종할 수 있는 크기였다.[13]
5. 대형 화차들은 육중한 장갑을 두르고 조선 지형에서 병사들이 들락거리며 수비에 유리한 이동식 벙커 포탑으로서 발전했다. 역시나 '수레'라는 본래의 목적보다는 '포탑'의 기능이 발달한 것은 그것이 한반도 지형에서 유용하다고 생각한 화차의 특징이었다.
화차는 화약무기를 싣은 수레를 뜻하는 단어로서, 이러한 개념 자체가 중국에서 먼저 탄생했다는 주장은 매우 상식적인 판단에 가깝다. 하지만 조선시기의 화차는 독자적인 규격을 지녔으며, 중국식 돌격 전차보다는 2가지 계통으로 발달했다. 즉, 문종화차와 그 설계를 이어받은 한국식 화차들이 지니는 특성까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말은 비약이 강하다.

한국과 중국의 화차는 각국의 지형에서 차이가 생겨난 아이디어와 유래는 같지만 각국의 구체적인 사용법에 따라서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설계되었던 전차+화포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3. 종류

3.1. 기본적인 화차의 분류와 실전성

한반도의 화차/화거는 다양한 화약무기를 전차에 싣은 형태의 병기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또한, 현대의 무기체계와 비교하자면, 중세시대의 기술력으로 장갑차 소형포가 분리되지 않아서 양쪽의 장단점을 골고루 섞어 최대한 효율적으로 조합한 무기라고 볼 수 있었다.

화포를 싣는 차체의 형태에 따라서 구분하면 경량 발사대 형태, 장갑판을 장착하여 탱크처럼 사용하는 형태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은 산악 지형이 많았으므로 무거운 장갑판은 필요에 따라서 분리하고 장착하는 모듈 형식이 많았으며, 처음부터 중세시대의 탱크를 목적으로 설계한 특수한 화차가 아니라면 같은 화차라도 실전에서는 방패판을 제거해야 조선의 산악지형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14] 이는 화약 전차를 평야 지형에서 바리케이드로서 사용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었던 중국과는 달리, 산악지형 때문에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조선에서는 화약 전차들이 순수한 기계식 야전포로서 주로 발전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화차의 무기에 따라서 분류하면 신기전을 사용하는 미사일 전차, 원시적인 기관총이라고 볼수있는 다연발 총포류 전차가 있었다. 대중매체에는 신기전 화차, 즉 다연발 미사일 전차가 화차의 주력 형태인 것처럼 유명해졌지만, 조선의 신기전이라는 무기는 오늘날의 전술 미사일에 해당하는 특별한 중장거리 타격 무기였으므로 일반적인 전투보다는 전략적인 상황에서 편성되었다. 자세한 것은 신기전 항목을 참조하자.[15] 실전에서는, 주로 근접전에서 적군의 보병 방진을 격파하면서 싸우는 중세시대의 원시적인 기관총이라고 볼 수 있는 오르간 건 화차들이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16]

3.2. 최무선 화차

권근의 시에 등장하는 화차이다. 최무선이 화통도감 설립 후 만들었다. 화기 목록에는 없고 권근의 시에 그 존재만 등장하기 때문에 상세한 정보는 아직 불명이다. 하지만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는 중국식 다발화전도 널리 사용되었던 기록이 있으므로 한국식 화차의 특징이 나타난 증거사료는 이후부터 라고 보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3.3. 태종화차

화차의 제도는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구리통[銅桶]에 넣어서 작은 수레에 싣고 화약으로 발사하면 그 위력이 맹렬하여 능히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 태종 9년 태종실록 18권

문헌기록에 나오는 화차 중 두 번째로 오래된 화차이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개발하였다. 철로 만든 날개를 단 화살 수십여발을 화약을 통해 동시에 발사하였다고 하며 그 외 형태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고 다만 태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만 나온다. 문종화차와 비슷하다고 여겨지기에 한국식 화차의 특성을 나타내는 사료 중에서는 이쪽을 더 중요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3.4. 문종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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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감(軍器監)에 명하여 화포(火砲)를 쏘게 하고 추인(芻人)[17] 을 만들어 갑옷을 입히고 방패를 가지게 하여 그것을 7, 80보(步) 밖에 세워 두고, 화차(火車)의 화살을 쏘아서 추인과 방패를 모두 관통하였다. 임금이 내금위(內禁衛)의 활을 잘 쏘는 자 5인에게도 또한 편전(片箭)을 가지고 이를 쏘게 하여 그 우열(優劣)을 비교하니, 화차(火車) 때와 같지 아니하였다. -문종실록 5권, 문종 1년 1월 16일 병진 1번째기사

기록상 전해지는 화차 중 세번째의 화차이며, 일반적으로는 가장 유명한 화차이다. 1474년(성종 5년)에 만들어진 국조오례의서례 병기도설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문종이 직접 설계해서 어명을 내려 동생인 임영대군이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화차의 운용법도 문종이 직접 고안했다. 평지에서는 2명, 오르막 길에서는 4명이 운영하고, 장전에서 발사 과정 그리고 불발탄 처리 방법까지 완벽하게 매뉴얼이 구성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무섭게도 양산 및 전국 실전배치 하는데까지 1년도 안 걸렸다. 문종화차는 수백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전성기에는 전국적으로 700기씩 양산 및 운용되었다.

현대인들이 보더라도, 시대적으로도 앞선 깔끔한 디자인으로서 꼭 필요한 기계적 구조를 중심으로, 적은 인원수로도 강력한 화력을 뿜어낼 수 있으며 발사 도중에도 약간의 조준이 가능했을 정도였다. 형태 또한 굉장히 효율적인데, 위의 설계도를 조금만 다듬고 지지대를 늘리거나 신기전 발사대의 크기를 늘리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었던 견인식 다연장로켓 체계( 네벨베르퍼, 매트리스)와 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

심지어 장착하는 무기를 모듈화하여, 같은 차대를 쓰면서도 로켓 자주포(신기전)와 근접전 기관총(연발총포)까지 2종으로 목적에 따라 모듈을 바꿀 수도 있는 매우 실용적인 특성까지 존재했다. 각각의 2종 무기 장착 형태는 아래를 참조하자.

3.4.1. 문종 신기전 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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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집궁시박물관에서 복원한 문종 신기전 화차

문종화차에 다연장 신기전 로켓을 탑재한 형태로서,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진 화차이다. 택티컬하면서도 실용적인 외형, 발사시에는 무척 화려하면서도 깔끔하고 효율적인 디자인 때문에 현대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문종화차는 후기 성종임금 시기에 "나라에서 화차를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으니 잘 쓰도록 하라"는 말이 나올만큼 이시애의 난 진압, 여진족 토벌에 큰 활약을 했다. 기사를 찾아서 읽어보면, 설령 맞추지 못한다고 해도 그 소리와 화력 때문에 맞은 적들이 혼비백산해 도망가기 급급했다.

다만, 돌격하면서 인명을 살상하는 주력 화포라기보다는, 당시에 사거리가 매우 짧았던 총포류의 사거리 밖에서 적의 화포, 화약저장고, 방어시설을 폭파하고 화포 싸움에서 승산을 높이는 일종의 로켓 자주포 같은 특수한 사용법에 유리했다.

본래는 문헌과 설계도만 남아있던 것을 채연석 박사가 사료를 연구하여 다시 제작한 것이 현재 전해지는 복원품이다.[18] 특이점으론 직사모드와 장거리 사격을 위한 고각모드 두가지로 발사각을 고정해서 탄도학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운용편의를 봐준 점이다.(고각으로 설치하면 최적의 사거리가 나온다는 40~45도를 정확하게 맞추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때 아래의 융원필비 화차나 위 영화 신기전의 화차처럼 좌우에 방패판을 달아 방호력을 높이고 신기전 발사구멍에 철을 씌워 내화성을 높이자는 건의가 올라와 실행되었으나, 조작의 불편함을 이유로 방패판은 제거되었다.

참고로, 신기전 화차는 일반적인 화포가 아니라, 당시의 총포류가 닿지 않는 먼 사거리에서 사격하는, 한마디로 전술적 타격 임무까지 수행하는 로켓 자주포 같은 화차였다. 총포류를 장착하는 화차들이 주로 보병을 상대하는 근접전 화포였다면, 신기전 화차는 중거리에서 적의 전략 플랫폼을 다연장 로켓 폭탄으로 폭파하는 현대 MLRS의 가장 유사했던 조상님으로서, 조선왕조 초기까지 매우 선진적이었던 다연장 자주포 같은 화차였다.[19]

3.4.2. 문종 총통기 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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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기념관에 전시된 문종 총통 화차의 복원 모형

문종화차의 총통기에 4전총통 50개틀 대신 주자총통(宙字銃筒) 50개틀을 설치한 것이다. 원시적인 다연장로켓이라 볼수 있다성종 21년인 1490년에 개발되었으며 주자총통은 세종대왕 때 개발된 삼총통(三銃筒)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아래에 나오는 문종화차들은 성종대에 새로 개발된 주자총통부착화차를 의미한다.

성종 9년 8월 10일(기해) 3번째기사에서는 홍귀달에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물어보는데서 화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시애의 반군이 화차를 보자마자 도망쳤다고 하고 있으며, 성종 23년 5월 25일(갑오) 2번째기사에서도 이극균이 “본도(本道)에서는 철(鐵)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화차(火車)가 겨우 4백여 대뿐입니다. 만약 제진(諸鎭)에다가 각각 1백 대씩 설치한다면 어찌 유익(有益)함이 없겠습니까? 화차가 한 번 출동하면 적(賊)이 모두 피해서 도망하니, 그것을 믿고서 적을 방어하고자 할 뿐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방법으로 견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주장해 화차의 위력을 실감할 수가 있다.

문종화차의 개발 덕분에 4군6진에서 힘들게 보초생활하던 병사들의 수도 줄일 수 있었다. 이 화차 하나만 있으면, 최전방의 험지에서 고생하는 총통수 여러명을 대체할 수 있었으므로 병사들에게 들어가는 인건비도 줄이고 최전방 인구수의 사망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총통기의 위력은 대충 400년 일찍 등장한 클레이모어이다.

유사 체계로는 백년전쟁에서 첫선을 보인 리볼데 퀸이 있다. 다만 기관총 직전까지 간 볼리 건 수준은 도달 못한 한계 역시 존재한다. 또한, 서양에서도 리볼데 퀸이나 볼리건이 쓰이긴 쓰였지만 주력이 아니었던게 포도탄을 사용하는 야포에 비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었는데, 이에 반해 조선군은 중형화포를 운용 가능한 포거가 없어 조선 후기까지 주력으로 사용한 면도 있다.

3.5. 류성룡 화차

임진왜란의 전시재상 류성룡이 민간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전쟁 도중에 설계도를 보급하면서 탄생했던 화차로서, 강력한 산탄을 발사하는 승자총통을 장비했다.

민간에서 쓰이던 수레를 그대로 이용할 수 있어 대량생산에 용이하며, 강력한 승자총통으로 무장이 바뀌어 위력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10~15정 정도만 장착하여 무게를 가볍게 하여 운영의 편의성을 높였다고 한다. 즉, 현대의 자동 산탄총보다 강력한 탄을 15번 연사하는 물건이다.

전쟁 당시에는 놀랍게도 의병들이 화차를 사용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존재하는데, 대부분 류성룡이 제작법을 보급했던 이런 단순한 화차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승자총통이 몇년 사이에 화승총으로 대대적으로 바뀌었는데, 그렇게 남아도는 승자총통을 수레에 붙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는 화차였다.

이후, 류성룡화차의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화차에서 방어력과 화력을 강화하면, 아래의 변이중화차 같은 육중한 중세 탱크 같은 형태가 만들어진다.

3.6. 변이중 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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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일종의 원시적인 기관총을 장착한 중세시대의 장갑차, 혹은 튼튼한 방호벽을 지니고 일본 보병들의 돌격을 차단하면서 싸우는 특수한 화차이다. 위는 변이중 화차의 생김새로서 가장 기본적이라고 생각되는 복원 디자인이다. 류성룡 화차와 같은 기존의 조선군의 화차일 것이라고 만든 상상도인데, 전쟁 도중이었는데도 수백대를 생산했고 의병들의 기록에서도 종종 목격담이 등장했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화차들과는 모양이 이질적인데, 이런 육중한 전차의 필요성과 활용법의 측면에서는, 거북선 해골선처럼 조선군한테 가장 위협적이었던 일본군의 보병 돌격을 차단 혹은 제압하기 위한 화차였다고 추측되고 있다.

변이중의 문집인 망암집에 실린 설계도 도면과 관련 설명내용 링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베테랑 군인 겸 화포 연구자로서 활동했던 학자 변이중(邊以中)이 의병들을 징집하는 소모사라는 관직으로 일하면서 문종화차를 개량하여 무려 300대를 생산했던 화차이다. 강력한 승자총통 40문을 장착하고 도화선에 연결되어 일제히 발사된다고 한다.

변이중화차는 구체적인 설계도가 남아있는 화차 중에서는 가장 큰 전쟁에서 실제로 엄청난 승리를 역사에 남긴 화차 기록물 중의 하나이면서, 조선의 중세 장갑차 형식과 원시적인 기관총이 결합되어 동아시아의 백병전 화포 운용법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이다. 하지만, 당시의 동아시아의 근접전투에서 전차에 싣은 화포를 어떻게 운용했는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디자인과 기록물이 몇몇 남아있음에도, 인지도가 낮고 목격담의 디테일이 엇갈려서 연구가 덜 이루어진 화차이다.

3.6.1. 복원 예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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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망암집의 그림과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모습 관련뉴스 관련사이트
사단법인 봉암서원에서 변이중 화차의 복원을 추진했다. 그 형태는 일반적인 수레의 4방향에 외부를 살필 수 있는 관측구멍이 하나씩 뚫린 방호판을 장착하고, 그 중에서 양 옆과 뒤쪽 총 3방향에 총통을 탑재한 모습이다. 화차 뒤쪽에는 출입문이 있으며, 안에서 닫을 수 있는 형태이다.

변이중 화차가 중요한 이유는, 직접적인 설계도면이 남아있으며 권율 행주대첩에서 사용했던 화차였다는 실전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너무나 중요한 기록물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있다. 게다가, 직접적인 방어벽이 부족했던 구릉 지형에서 목책을 치고 싸워야했던 행주대첩의 중요한 전장터를 생각한다면, 변이중 화차의 형태는 일본 지상군이 사용했던 각종 무기들을 앞에서 정면으로 받아치면서 싸우는 육상전술에서 매우 어울리는 화포로서 현실성이 있는 디자인이다. 즉, 유명하진 않지만 문종화차와 함께 큰 전쟁의 실전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승리에도 기여했던 화차였다.[20]

하지만, 복원품의 형태가 어떻게 되어야하는지 대해서는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다. 현재로서는 이런 모습이 가장 타당한 복원품이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선 아직 제대로 복원되었다고 보기에는 부정확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중세시대의 화포 운용개념으로 본다면, 외형적으로는 못 생겼지만 꽤 현실적인 전술에 부합하는 디자인이다. 당대의 총포류는 사거리보다는 근접 관통력을 중시했는데, 이 복원품은 근접전 능력이 매우 우수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복원품은 같은 시대 이순신 거북선과도 유사한 병기라고 볼 수 있다. 거북선의 경우에는 전함 대다수를 압도하는 전투력을 지녔음에도, 돌격선이니만큼 사상자가 많아서 주력으로 쓰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렇게 근접전 방식의 화포들이 많이 필요했다면, 임진왜란에서 왜 이렇게 육중한 방호벽으로 무장한 화포들의 기록물이 많은지를 간접적으로 추측해볼 수는 있다.[22]

다만, 기록에는 40문이 일제히 발사된다고 나와있는데, 언뜻보면 저렇게 양옆과 앞면 동시에 쏘면 자칫 아군까지 피해를 볼 수가 있다. 그래도, 위의 형태는 최전방에서 공격을 막아내고 회전하기 편리한 형태이므로, 40여문을 동시에 좌우까지 발사를 하더라도 중세시대의 화포 전술 상식으로 보자면 큰 방해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23] 그보다는, 차라리 오폭이 일어날 경우에는 내부에 탑승한 사수들의 안전성이 약간 위험해질 수 있는 형태이다. 또한, 명중률 문제 때문에 일반적인 화포라기보다는, 이동식 토치카 혹은 탱크에 가깝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변이중 화차가 활약했던 행주대첩이 사실상 3만명의 일본군 보병들의 육탄돌격을 정면에서 막아내는 전투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저런 방식으로 튼튼한 방벽을 만들고 3방향으로 오르간 건을 장착해놓은 전차는 행주대첩을 비롯하여 당시 일본군 특유의 대포를 쓰지 않는 육상 전법을 상대할때 피해를 입지않고 근접전에서 산탄을 발사하면서 상대방의 돌격을 역습하기 위해서는 가장 최적화 된 전술이다. 당시의 조선에는 이런 원시적인 탱크 같은 전차들이 많이 존재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보면 멍청해보일수도 있는 이미지와 달리 시대상에 비추면 현실성은 높다.

참고로, 변이중 화차의 등장시점은 전쟁 도중이었으므로, 현장에 따라서는 총포류를 조금만 싣어 민첩성을 중시하는 상황이 있었을 수 있고, 그런 변수를 생각해본다면 위에서 논란이 되는 대부분의 모순점이 설명될 수 있다. 애초에 중세 전쟁터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승자총통과 방호벽으로 만든 중무장 전차라는 기본적인 개념 이외에는, 설계도의 카탈로그 스펙이 항상 유지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기록상으로 전해지는 확실한 개념은 존재하는 무기이지만, 아직 불완전한 복원품과 사용법은 유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점에서도 변이중 화차는 당대의 현실적인 전쟁 방식을 알아내는 기록물로서도 의미가 매우 크다.

3.6.2. 복원 예시 2


2010년 김평원 교수가 마포고등학교 재직 당시 마포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복원한 변이중 화차의 또 다른 모습. 영상에 나오듯이 해당 복원품은 총통기를 탈착식으로 해석해서, 이동 중에는 수레에 싣고 가다가 교전시에는 화차로서 조립하여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형태는 날듯이 움직였다는 기록과 어느 정도 일치되며, 기록상으로 원형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문종화차와 닮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문종화차와 현대적인 기관총에 대한 클리셰를 기반으로 조립한 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설계도를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서는 이러한 형태의 조립 방법도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형태는 중세시대의 화포 운용 교리에서는 나오기 힘든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문종화차를 기반으로 현대의 견인식 기관총 포대를 섞은 아이디어를 가미한 현대적인 창작품 형태에 가깝다. 이 형태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다만, 변이중 화차는 문종의 화차를 개량했고 다양히 쓰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정확히는 이런 구조가 아닐지라도 김평원 교수의 복원안처럼 당대의 화차들은 총통기 방식의 모듈을 탈착하는 방식으로 재장전 혹은 빨리 이동할때의 조립 개념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높다.

즉, 이 복원 예시는 현실성은 낮은 편이지만, 변이중 화차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화차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동하고 장전했는가를 생각해본다는 측면에서는 과감하고 개성적인 복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중세화포에 넣어서는 안되는 현대인들의 잘못된 디자인이 너무나 많아서, 오히려 중세화포와 현대화포의 개념이 얼마나 다른지 기초적인 군사상식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만한 반면교사로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아볼만한 개성있고 대담한 창작품이다.

다만, 변이중 본인의 기록물부터 이런 형태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현대의 개인이 만든 창작품이다. 변이중 화차는 4방향으로 방호벽과 승자총통을 두른 이유를 사수들이 보호받고 불발탄이 나오더라도 다른 방향이라도 사격할 수 있도록 고려했다고, 변이중 본인의 의도가 전해지며 현실의 중세 화포 사용방식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변이중이라는 인물은 이 화차 이전에는 소가 끌고다니는 우마차를 개조하여 중세적인 전차를 만들어서 사용했던 기록물도 있고 당시의 다른 조선 전차들도 1번과 유사한 모습이었으므로, 이런 현대적인 상상이 가미된 형태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기본적으로, 변이중 화차는 위 항목의 류성룡 화차처럼 전쟁 도중에도 양산할 수 있도록 간단한 수레에 승자총통 오르간 건 형식으로 배치한 단순하고 튼튼한 형태의 화차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전차는 기동력, 화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 워낙에 많으므로, 연구자들마다 복원 디자인들의 예상이 달리 존재하는 것이다.

3.7. 융원필비 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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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원필비>에 실린 모습, 저 구멍이 전부 조총 승자총통이라고 생각해보면 무섭다.

숙종1년 윤휴의 제안에 따라 훈련도감에서 제작했다. 융원필비에도 따로 기재되어 있으나 둘다 설계가 똑같으므로 이름은 기록된 문서의 이름을 따른다. 기본적으로 5개의 조총이 여러 층으로 장비되어 있다. 정확히는 조총이라고는 해도 묶음단위의 조총인 오연자포, 십연자포가 장착된 형태로, 장갑화된 볼리 건에 가깝다. 방어를 위하여 좌우에는 소가죽을 씌운 나무 방패를, 위에는 기름먹인 소가죽을 씌웠다.

3.8. 목화수거

목화수거 완성도이다. 중국식답게 매우 이채롭다.

날개를 단 호랑이 모양의 목각을 수레위에 얹은 화차. 아랫 부분엔 조총 5개씩 3개의 배열로 총 15정의 조총을 탑재하고 있다. 호랑이 목각의 입에서는 여러가지 재료를 섞은 화염을 방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한국식 화차들과는 굉장히 차이점이 큰 편인데, 무비지(武備志)의 화룡권지비차(火龍捲地飛車)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주요한 차이점은 하부 차체에 날붙이 대신 조총을 달았다는 점이다. 용도는 적이 일정 거리마다 접근시 알리는 역할이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읍성에 목화수거 복원품이 있다. 꽤 유명하지만 아무런 무장이 없이 수레에 호랑이를 달랑 태운 수준이라 전시용 목조상에 가깝다.

3.9. 신경준 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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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의 신경준 화차 설계도

실학자이자 제주목사를 지낸 신경준이 여암전서의 거제책에 설계, 기록한 화차이다. 무서운 점은 이 물건의 운용 개념이 현대의 전차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수레의 사방과 뚜껑을 철판과 나무판으로 보호하고 접히는 칼을 달아 근접전에 대비하였으며 위에는 복토라 불리는 포탑을 설치하여 불랑기포나 황자총통을 장비했고 게다가 안에는 포탄과 화약을 실어놔서 재장전도 가능했다.

사람이나 말이 끌 수 있도록 튀어나온 손잡이 부분이 길어서 언뜻 보면 대포를 싣어놓은 수레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체는 4면이 철판으로 보강되어 있어서 내부에 들어간 사람을 보호하는 상자 구조이다. 손잡이가 지나치게 길어진 이유는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3.10. 귀차(초대형 화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처
龜車. 귀차. 귀거. 구거. 효종 3년 박산남이라는 자의 제안에 따라 효종이 전남병사(全南兵使) 구인기(具仁旣)에게 제작할 것을 명한 화차. 수십 문의 화포와 조총으로 덕지덕지 무장되어 있는 초대형 화차로, 너무 크고 무거워 무려 70여 명의 장정이 끌어야만 기동할 수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기본적인 조종에만 70여명의 인력이 필요한 소형 함선 수준의 거대 화차라는, 설명만 들어도 중세시대판 육상전함 혹은 초중전차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스케일 때문에어떻게 만들었는지부터나 의문이다그야말로 조선시대에 구현된 남자의 로망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역사기록으로 남아있는 귀거에 대한 내용은 관리들이 백성들을 시켜서 이런 쓸데없는 물건를 만드는데 세금을 낭비했으므로 제작을 중지해야 한다고 왕에게 직접 고발하는 매우 현실적인 내용의 상소문이다(...) 실제로 기술력이 훨씬 발달한 20세기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가 결국 아무 힘도 못쓰고 쪽당한 나라도 있으니, 당시 변변한 엔진은 커녕 증기기관조차 없던 시대에 이런 거대병기를 제대로 운용할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나마 현대인들 입장에선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드는 과거의 재미있는 해프닝 기록 정도로 남았지, 제작자들의 취미 혹은 국고낭비로 여겨지는 물건이기 때문에 지방의 수령들이 이런 쓸데없는 무기를 만드는데 사사로이 권력을 남용하여 국가 조병창을 사용했다면 확실히 장난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3.11. 조총부착화차

19세기 초에 사용된 화차, 승자총통 대신에 조총 50개를 설치한 것이다. 초대형 오르간 건에 가깝다.

4. 미디어

문종화차의 경우, 불꽃과 연기를 뿜으며 대량의 화살을 뿌려대는 박력 넘치는 모습 덕분인지 거북선과 더불어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한국의 전통 무기다. 특히 서양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중세 한국의 다연장로켓 취급받는다. 사실 서양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화약을 사용하는 무기인 화포가 원시적 로켓 병기는 널리 쓰였지만, 불꽃을 내뿜는 많은 화살이 현대의 로켓과도 같이 날아가 포격을 퍼붓는 모습이 묘하게 서양인들에게는 중세 동양 판타지 로망을 자극하는 모양.

4.1. 영화

4.2. 드라마

4.3.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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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집궁시박물관에서 복원한 화차를 모델로 한 듯하다.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신기전처럼 트레뷰셋을 대체하는 유닛인데 위력은 트레뷰셋을 능가하는 초월적 위력인 26, 다음다음 테크 유닛인 야포와 맞먹는 괴물같은 위력이지만 대신 도시 공격에서는 패널티가 들어간다.
의외로 잉여스러운데 성능이 안 좋아서 잉여가 아니라 한국 종특이 과학 보너스라 활약 해보기도 전에 고테크 유닛이 나와서 묻힌다. 그래도 테크가 컴퓨터에 비해 점점 느려지는 고난이도로 갈수록 더욱 활약하는 오버스펙 유닛이다. 화차의 강력함은 문명 5 한국 DLC에서 추가된 시나리오에서 느낄 수 있다. 제 아무리 사무라이들이 쳐들어 온다 할지라도 언덕과 성에서 화차로 몇 번 공격해주면 간단하게 방어가 가능하다. 연기를 뿜어내며 시원하게 날아가는 로켓화살이 상당히 멋지다는 것도 나름 장점.
* 문명 6
어김없이 한국의 고유 유닛으로 개근했다. 문명 5와는 달리 문명 6에서는 전장포와 기관총사이의 테크 거리가 늘어난 데다가 화차를 르네상스 시대부터 뽑을 수 있게 되었기에 짧아도 산업시대까지는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투력도 60으로 동시대 유닛들 중 꽤나 상위권에 속하는 편이다. 다만 이동력 문제때문에 장군등의 위인 수급이 제때 되지 않는다면 전장에서 불리할 수도 있다. 전투력이 워낙 높아 고대성벽까지는 화차가 공성 능력을 수행할 수 있다. 다만 패치 이후 AI들의 성벽 수요가 올라가며 이전같은 공성역할은 하기 힘들것으로 보인다.그냥 AI가 중세성벽을 짓기 전에 압도적인 과학력으로 찍어누르면 된다. 또한 여기서는 로켓화살 모션이 전작같지 않고 갑자기 화살이 뭉텅이로 날아가 적이 있는 곳에 꽂히는 모습이라 영 밋밋해졌다.

5. 기타

유튜브 등지에서 중국이 원조라며 키배를 유발하는 중국인들이 종종 보인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자면 화차는 중국 무기의 복사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해외에서도 별로 인정받지는 못하며, 특히 동양무기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양덕후들은 "낡아빠진 중화사상 좀 집어치워!"라면서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일부 중국인들이 중국 문헌의 출처가 위서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는 중국인들이 화차가 다연장/곡사형 발사제어장치로서 인정받는다는 점을 모르고 단순한 전차로서 생각하는 듯 하다.

위키백과에 보면 화차로 생성된 언어 페이지는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한국어, 러시아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카탈루냐어, 인도네시아어, 중국어 등이다. 영문 위키백과 링크.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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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화거'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2] 영상은 소신기전과 화차의 조합이며 실제와는 달리 신기전 내부에 착탄 후 터지는 폭약을 쓰지 않았다. 또 바람 때문에 보병을 한명도 못 맞췄지만(실제로 단 50기의 적을 상대로 화차를 운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탄착군이 생각보다 조밀한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제대로 맞춘 상황에서 폭약을 썼으면 표적의 파편만 간신히 남았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조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백기를 동시에 퍼붓거나 궁수, 조총수들을 보조하는 용도로서 사용했다. [3] 영상 섬네일 속 화차의 왼쪽 바퀴모양이 상당히 이상한데 저 화차는 Mythbusters에서 화차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했을 때 제작한 모델이다. 당시 바퀴 하나를 이전 프로그램에서 사용했던 바퀴를 그대로 재활용해서 썼는데 그 흔적이 남은 것. 이후 수많은 외국 프로그램에서 화차에 대한 영상을 만들 때 이 모델을 대여해주는것으로 추측된다. [4] 한반도의 발사무기는 대체로 방어력을 희생하는 대신에 그만큼 적과는 근접하지 않고 원거리에서 살상까지 끝낼 수 있는 산악 원거리 저격에서 최대한 이득을 보려는 비대면 방식의 전투철학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에 반해 중국의 무기철학은 엄청난 자원을 쏟아붓게 되더라도 적과 정면에서 마주치는 상황을 주로 고려하여 확실한 효과를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5] 이렇게 중국제를 수입해놓고 사거리를 위해서 본래 기능을 바꿔버린 경우로는 한국제 연노(추코누)가 존재한다. 중국의 원조 연노는 정면에서의 제압능력을 중시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연사무기인데,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연노의 가장 중요한 장점인 연사력을 줄이면서까지 사정거리를 약간 늘리는 형태로 바꾼 조선버전이 따로 개발되었다. 이렇듯 무기가 원래 개발되었던 목적을 잊어버릴 정도로, 한반도 국가들은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차단하는 원거리 저격 개념에 매우 집착했다. [6] 일례로, 2차 폭발 로켓을 다연장으로 쏠 수 있는 중신기전 화차는 탁트인 곳에서는 측면 방어력이 약하고, 벙커 형태의 한국 전차는 평원에서의 대규모 기동전이 벌어지면 포위를 당하기 쉽고 병력 배치를 수정하기가 어렵다. 반면에, 처음부터 각 무기가 전차로서 지닌 단점이 드러나지 않는 수비적인 지형에서 싸우는 경우에는, 각 한국 전차들은 오직 특수한 목적만을 위해서 설계해놓은 각자의 극단적인 장점을 더욱 크게 발휘할 수 있었다. [7] 단체 사격시에 직사일 때는 개인의 재량으로 반동제어가 가능한 다발화전, 곡사일 때는 일정한 지지대와 가벼운 수레를 통한 각도 제어를 비교적 조종하기 쉬운 가능한 신기전 화차가 유리해진다. [8] 현대에도 K1, K2, K3 같은 한국 주력전차들이 전면전에서의 돌격보다는 산악 유격전에서 뛰어난 포탑 관련 성능과 긴 사정거리 기반의 산악 저격전을 중시하는 전투철학으로 개발되고 있다. 이렇듯, 지형에 따른 전쟁철학의 차이는 그만큼 무기의 발전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 [9] 대체로 서구권에서 화차를 인정하는 것도 대규모 곡사/발사 제어를 근본에 두고 설계한 병기라는 특성 때문이다. [10] 무비지에는 특정 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링크 : 별무사(신재호)님 댓글 참조. [11] 출처: 청소년을 위한 한국과학사(정인홍 저) [12] 대체로, 설계 단계에서부터 곡사와 탄도학을 고려하는 기술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에, 중국식 화차들보다는 조금 더 근대적인 형태라는 평가를 받는다. [13] 덕분에 언덕이 많은 한국 지형에서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고, 사수들이 직접적인 조작을 통하여 화력을 제어하기에 편리했다. [14] 가장 대표적인 화차였던 문종 화차도 본래는 존재했던 방패판을 제거하고 사용했으며, 실전에서 방패판을 어느정도의 비중으로 탈부착했을지에 대해선 추측이 많다. 차체의 장갑차 형태, 야전포 형태가 설계 및 운용 방식에 따라서 아직은 구체적으로 잘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라서 어느정도 공존하기 때문이다. [15] 애초에, 신기전 자체가 인간을 살상하는 목적보다는 전략 구조물을 파괴하는 전술 타격 미사일이기 때문에, 중세시대의 기관총에 해당하는 다연발 총통식 화차 같은 총포류보다 적게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면 신기전도 많이 썼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신기전이 신호용으로 쓰였다고 하면서, 정작 큰 육상전투와 이순신 함대의 해상전투에는 신기전이 꼭 끼어있다. 그냥 평화시대에는 미사일이 비싸니까 배치하지 않고, 전쟁이 나면 비싼 미사일을 다시 만들었다고 보는게 적절하다. [1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4298&cid=59087&categoryId=59087 [17] 허수아비 [18] 채연석 박사의 저서 <로켓이야기>에 보면 당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설계도대로 부품을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조립시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남아도는 부품이 생겨, 참다못한 박사가 문종이 안장된 현릉에 가서, 관리인 몰래 왕릉을 붙들고 '당신이 만들었다면 제발 좀 알려달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근데 진짜 문종이 도왔는지 그날 꿈에 완성된 화차가 나타났고, 다음 날 조립해보니 완성에 성공했다고 한다. [19] 당장에 당대까지도 중국제 다발화전은 그냥 화살을 쏘는 소신기전이지만, 신기전 화차는 추가폭발 기능을 지닌 중신기전으로 장거리에서 다연장 폭탄 투척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중세시대에 등장했던 다연장 로켓포의 가장 현실적인 형태라고 불리는 것. [20] 특히, 기존까지 대중에게 잘 알려져있었던 문종화차의 임진왜란에서의 전투 활약은, 실제로는 변이중화차의 전투기록이다. 즉, 그만큼 조선과 일본의 화약전술과 전쟁 당시의 기술력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중요한 화차의 기록물이다. [21] 물론, 변이중 화차는 40문을 동시에 쏜다는 연발장치만 문종화차에서 가져오고, 실질적인 형태는 임진왜란 당시의 보병을 제압하기 위한 디자인을 더욱 중시했던 장갑차 형태라는 별개의 방식으로 개발 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때는 류승룡 화차처럼 수레에 총포류만 싣는 간단한 화차가 자주 등장했고, 당대 기록물에서는 방호벽을 중시하는 중세 장갑차들이 수두룩하게 발견된다. 게다가, 이후 조선후기에도 이런 형태와 유사한 전차들이 다수 존재하므로, 디자인 자체의 현실성은 높다. [22] 참고로, 거북선은 이후에는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위력은 압도적이지만 화약전투에서 탱크처럼 전진하는 돌격선이기 때문에, 해군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에는 사상자가 너무 나오면서 귀중한 인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다수의 임진왜란 기록물을 살펴보면, 강력한 백병전 능력을 지닌 일본 보병들을 상대할때 근접전에서도 화포를 사용하여 완벽히 살상하기 위해서는, 거북선과 변이중화차처럼 육중한 방호벽을 지닌 특수한 돌격 화포들의 필요성이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23] 애초에, 현대 이전의 기술 수준에서 화약무기를 운용할시에는, 포병들이 가장 최전방으로 나가서 싸워야했다. 평범한 화승총조차 아군 살해의 위험성이 컸던 시대였기 때문에, 아군의 피해를 막으려면 포병들은 최전방 혹은 측면에 배치되는 것이 정상이다. 현실에서도 각종 화포와 원거리 무기는 단순한 게임처럼 아군의 후방에서 머리 위로 쏘는 방식이 아니라, 최전방에서 발사해야 아군이 맞아죽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24] 다만, 같은 이유 때문에 아예 화포로서의 의미가 뒤떨어지는 1번 복원품도 여러모로 비슷한 단점이 있긴하다. 다만, 이 2번 복원품의 경우엔 중세적인 근접전에서의 사수 생존 수단이 불리한 형태이기 때문에, 원거리 전투를 강요받을 수 밖에 없는데도 원거리에서도 딱히 명중률이 높지 않다는 점이 문제이다. 1번 복원품은 3방향으로 아예 적진 근처까지 돌격 혹은 아군이 근접전과 냉병기에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보호하면서 싸울 수 있는 것과는 달리, 2번 복원품은 낮은 원거리 명중력을 지니면서 근접전에도 취약한 디자인이기에 당시의 연발식 총포들이 사실상 백병전을 카운터 하는 근접전 화포라는 점, 그리고 또 당시에는 돌격이 열악한 도로와 신발 같은 요소 때문에 돌격만 차단하면 근접 화포가 기관총처럼 창칼을 쉽게 무력화 할 수 있었던 근접 사격 방식의 중세 화포전술에 입각했을때는, 그냥 원거리에서도 근접전에서도 모두 장점이 없는 구조이다. [25] 심지어는, 현대전에서도 보병의 머릿수로 점령지를 늘리고 최종적으로 적을 보병들의 인력을 통해서 가두어놓고 짓밟아서 이긴다는 전쟁의 핵심적인 개념은 같다. [26] 사실은 지금도 보병을 제압하는 무기들은 보병을 보호하는 탱크, 장갑차, 방호벽들을 관통해야 보병을 무력화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중폭발탄과 자폭 드론 같은 신개념의 하이테크적인 기술력으로 명중력이 담보된 이후에도, 전쟁에서 쓰는 포들은 항상 근본적인 보병을 죽일 수 있는 방호수단 관통력을 몹시 중시한다. [27] 중세시대의 화포 기술자는 곧 전투인원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당시의 교육 수준으로는 개인 화기가 아닌 섬세한 종류의 화포는 정피 및 관리를 아무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귀중한 화차 운용 인력들의 목숨을 보호할 수 있는 장갑차의 디자인이 조선의 기록물에서 여러곳에 존재하는데도, 굳이 2번 복원품처럼 더 위험한 형태의 전차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또한, 인력 배치 측면에서도 1번 복원품의 경우에는 전차 제작에 사용되는 장갑판 같은 부분을 일반인 혹은 하청 공장들도 만들 수 있는 단순무식한 판떼기만 가져오면 생산이 가능한데, 2번 복원품은 굳이 기술자들의 관리감독이 필요한 정확한 규격이 필요한 화포 결합체 배분이 본체이기 때문에 그쪽 부품 생산 쪽에 더 많은 기술자 인력이 차출된다. [28] 물론, 현대시대였다면 사소한 기술 발전이 곧 더 좋은 제품의 비용으로 회수되고, 다음번 기술로도이어지므로 효율적이기만 하다면 이런 투자는 칭찬받을 수도 있으므로 이런 방식이 무조건 나쁘다는건 아니다. 하지만, 중세시대의 그것도 국토가 멸망해가는 전쟁 도중에 시급히 양산해야할 사실상의 근접전 연발식 총포류의 디자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내리는 판단으로 보기에는 이런 복잡한 추가공정이 필요한 디자인이 번잡하고 실전성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실상 2번 복원품에 들어간 아이디어 자체는 조선의 화차들 전반에 적용되어 있는 부분이지만,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라기 보다는 평화로울때 더 예쁘고 깔끔한 공업 양산제품(...)의 관점에서 무기를 접근할때 나오는 측면의 디자인 성향이 강하다. [29] 실제로 임진록1 데모 설치시 동봉된 텍스트 파일을 확인해 보면 '조선탱크'라고 나온다. [30] 사실 기본 게임에 있는 로켓 발사체가 사거리가 250이기 때문. [31] 이름은 대한민국이나 당시 조선에 대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