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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9:55:52

어유소



1. 개요2. 생애
2.1. 무과에 합격하다2.2. 이시애의 난 진압과 건주위 정벌에서의 활약2.3. 그 이후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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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윗첨자의 경우에는 독립적인 열전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의 열전 속에서 함께 설명되는 인물들이다. }}}}}}}}}

어유소
漁有沼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1434년
사망 1489년 (향년 55세)
자유(子游)
시호 정장(貞莊)
본관 충주 어씨

1. 개요

어유소는 조선의 문신이다.

여진족의 토벌과 이시애의 난 진압 등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무과에 합격하다

1456년 무과에 장원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1460년 여진족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운다.

2.2. 이시애의 난 진압과 건주위 정벌에서의 활약

‘강순의 정장(呈狀)에 의하면 「비직(卑職)이 임명을 받아 어유소와 남이 등과 더불어 함께 성화(成化) 3년 9월 25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길을 나누어 진격하였고, 이달 29일에 건주(建州)의 동북쪽 발저강(潑猪江)의 이만주(李滿住) 등이 사는 모든 산채(山寨)를 공격하였고, 30일에는 올미부(兀彌府)의 모든 산채(山寨)를 공격하여 죽이고 이만주와 그 아들 이고납합(李古納哈)·이타비랄(李打肥刺) 등 2백 86급(級)을 참(斬)하고, 이만주와 이고납합의 처 등 남녀 아울러 23명의 인구를 사로잡았고, 말 17필(匹)과 소 10두(頭)를 얻었고, 우마(牛馬) 2백 29마리를 죽였고, 여사(廬舍) 1백 95좌와 그 2백 17개의 적취(積聚)한 곳을 불태워버리고 그 가산(家産)을 몰수하였으며, 아울러 일찍이 피로(被虜)되었던 요동(遼東) 동녕위(東寧衛)의 남자 1명과 부녀(婦女) 6구(口)를 얻어서 본년(本年) 10월 초4일에 돌아왔습니다.

세조실록 44권, 세조 13년 10월 21일 계축 2번째기사
정충 출기 포의 적개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정헌 대부(正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예성군(蘂城君) 어유소(魚有沼)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왕은 이르노라. 적개(敵愾)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은 오직 신자(臣子)의 위대한 공적(功績)이요, 공(功)에 보답하여 상(賞)을 행하는 것은 곧 국가의 아름다운 법규이로다. 경은 기품이 영호(英豪)하고 조행(操行)은 청렴(淸廉)하고 삼가도다. 호방(虎牓)에 첫째로 뽑혔고 재주가 우림(羽林)의 우두머리였도다. 나가서 변영(邊營)을 진압하니, 사람들이 장성(長城)의 기국(器局)에 비기고, 들어와서 병무(兵務)를 맡으니, 뭇사람들이 큰 나무의 재목에 복종하는도다. 무릇 역임(歷任)한 바가 자못 성적(聲績)이 있었도다. 지난번에 역신(逆臣) 이시애(李施愛)가 감히 불궤(不軌)를 도모하여 마음대로 적살(賊殺)을 행하였도다. 드디어 군중(群衆)을 모으고 거병(擧兵)하여 크게 조량(跳梁)을 자행(恣行)하였도다. 내가 이에 혁연(赫然)히 노(怒)하여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토벌(討伐)하게 하니, 경이 곧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고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썼도다. 정예(精銳)를 다하여 나아가 치니, 드디어 전도(前徒)로 하여금 창을 거꾸로 잡게 하여 원흉(元兇)의 머리를 바치게 하였도다. 불일(不日) 사이에 감정(戡定)하고 개선(凱旋)하는데, 영웅(英雄)의 응양(鷹揚)에 힘입지 않는다면 어찌 신속(神速)한 탕평(盪平)을 이루었겠는가? (후략)

세조실록 44권, 세조 13년 11월 2일 갑자 1번째 기사
1467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예성군에 봉해졌다. 1467년에는 건주여진의 대장 이만주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

2.3. 그 이후의 행적

그 뒤에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1489년 성종을 호종하는 임무를 맡게된다. 이 시기에 포천의 영평현에서 사망하였으며, 55세가 되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