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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애시덕 |
<colbgcolor=#0047a0> 출생 | 1909년 8월 12일 |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 (현 원산시 용천리)[1] |
|
사망 | 1935년 1월 23일 (향년 25세) |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마을 | |
본관 | 경주 최씨 |
매장지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최용신기념관 |
종교 | 개신교 ( 감리교) |
학력 |
루씨여자보통학교 협성여자신학교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소설가 심훈의 대표작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909년 8월 12일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최창희(崔昌熙)의 2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위로 큰오빠 최시풍(崔時豊)과 작은오빠 최시창(崔時恒)이 있었고, 아래로 여동생 최용경(崔容璟) 등이 있었다. 어머니의 성과 외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두남리는 원산시에서 10리 쯤 떨어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일찍부터 기독교 전래와 함께 교회, 학교를 운영하는 등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그녀의 조부와 부친도 사립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사로서 활동하는 등 교육운동에 종사했다. 특히 부친 최창희는 1920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 의원 한국 방문단에게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하려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고, 이후 신간회 덕원지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최용신은 이러한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민족의식이 강했다.
최용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얼굴은 물론이고 정강이에도 선명한 상처 자국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그녀를 위로하거나 동정하기는커녕 곧장 놀리거나 면박을 주는 등 심하게 구박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외톨이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고, 홀로 깊은 사색에 빠지곤 했다. 마을 교회가 운영하는 주일학교는 그녀의 유일한 위안처로, 그녀는 이곳에 자주 다니면서 기독교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1916년, 최용신은 8살의 나이에 마을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2년간 그곳을 다니던 그녀는 1918년 함경남도 원산부의 루씨여자보통학교[2]로 전학했다. 그녀에 대해 다룬 논문들은 대개 그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도서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했다고 언급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부친은 원산 일대에서 명망 높은 사회 인사였고, 큰아버지는 상당한 경제력을 갖추었던 인물이었고, 최용신의 고모 최직순은 최용신보다 2살 위로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재학하고 있었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명망 높고 재산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집안의 자제였던 그녀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가능성은 낮다.
최용신은 농촌계몽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1928년 4월 1일 <조선일보>에 '교문에서 농촌으로'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 요구한다 (중략) 여기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 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 중등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각각 자기의 이상을 향하여 각자의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엇보다도 농촌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 나는 농촌에서 자라난 고로 현 농촌의 상황을 막연하나마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절실히 느끼는 바는, 농촌의 발전도 구경(究竟)은 여성의 분투에 있다는 점이다. 오늘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북데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크게 유감된 바이다. 문화의 눈이 구(舊)여성만 모인 농촌으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게 못한다면 이 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그러므로 내가 절실히 느끼는 바는, 농촌의 발전도 구경(究竟)은 여성의 분투에 있다는 점이다. 오늘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북데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크게 유감된 바이다. 문화의 눈이 구(舊)여성만 모인 농촌으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게 못한다면 이 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루씨여자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최용신은 학우인 전희균(田羲均)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서울에 있는 협성여자신학교[3]로 진학했다. 이후 학교가 남녀공학으로 변경되면서, 그녀는 남학생 15명과 여학생 5명과 함께 학업과 신앙생활에 몰두했다. 특히 그녀는 농촌사회지도교육과 교수인 황애시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황 교수는 "이론을 익히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현장에서 직접 체험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최용신은 황 교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귀담아 들었다.
2.2. 샘골마을
최용신은 1929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에서 첫 봉사활동에 나섰다. 그녀는 동료 김로득(金路得) 등과 함께 현장실습을 해 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듬해에는 경상북도 영일군 옥마동에서 실습 겸 계몽활동을 병행했다. 하지만 그는 농촌에서 가난에 찌들고 무지한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신학 공부에 매달리지 못했고, 학교 운영을 둘러싸고 교장과 대립했다. 결국 그녀는 학업을 중단하고 1931년 10월 10일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마을[4]에 한국 YWCA '농촌지도원'으로서 파견되었다.최용신은 샘골마을에 발을 들인 직후 종래부터 운영하던 교회 부속 야학인 천곡강습소를 인가받고 교사를 신축했다. 동시에 생활개선, 농가부업 장려를 위한 부녀회, 청년회 조직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주민들 상호간 신뢰감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1932년 7월 21일에는 서울에서 개최된 한국 YWCA 정기대회에 참석하여 현지 상황과 현장 경험 등을 가감없이 보고했다. 참석자들은 그녀의 헌신적인 활동에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최용신의 이같은 활동이 처음부터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샘골마을에 처음 들어섰을 때, 주민들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어서 그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신간회 수원지회장을 역임한 염석주(廉錫柱)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와서 "이 지방 농촌을 위하여 전력하고자 하니 후원해주길 바란다"고 하자 겉으로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날고 기는 놈들도 농촌에서 실적을 못 내는데, 네가 무엇을 한다고'라고 경멸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최용신이 "위생 생활, 생활개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제기! 파리 안 잡아도 파리에 물려 죽은 놈은 하나도 없었다네. 책상물림의 젊은 처녀가 무엇을 안다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가."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녀는 강습생들을 상대로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그녀에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차츰 변해가는 마을을 보며 그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가 교육시설 증축을 위한 모금활동을 전개하자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기부했고, 근처 솔밭의 소유주였던 박용덕(朴容德)은 인근 토지 1,500평을 기증했다. 이리하여 천곡강습소 증축 공사가 완료되어 '천곡학원'이라는 정식 교육기관으로 발전했고 이곳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110여 명에 달했다. 현재의 안산시 상록수공원 최용신 기념관 자리이다. 샘골교회는 지금도 있으며, 현재는 아파트와 상가로 둘러싸인 도시이다.
최용신은 이외에도 농가부업, 위생 생활과 생활개선, 저축장려 등 지역 사회 발전에 필요한 운동들을 전개했다. 그녀는 학교 주변에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감나무 등 유실수도 마을주민에게 나누어주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 중 일부는 강습소 유지비나 농기구 구입으로 사용했다. 또한 그녀는 학생들에게 학용품 등을 주기 위해 수업시간 외에 밭에 나가 김을 매는 등 노동활동도 수행했다. 또한 오전, 오후반, 야학수업, 가정방문도 지속했고, 샘골마을에서 10리 떨어진 야목리로 가서 윤홍림(尹洪林)과 함께 농촌진흥운동에 관하여 토론을 정기적으로 열었다.
이렇듯 20대 여성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수행한 그녀는 자연히 병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좀 쉬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끝까지 수행했고, 주민들은 그런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한편 그녀는 신앙생활도 열심히 수행했다. 1929년 4월 2일, 그녀는 <새벽종소리에 따라 올리는 기도>를 기술했다.
전능하신
여호와의 능력이 아니면
어찌 이 아름다운 새벽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들
어찌 나로 하여금 이 기쁨의 동산을 보게 하였으리오.
(중략)
거룩하신 주여,
이 몸을 주를 위하여 바치나이다.
여호와여, 이 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여호와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소서.
여호와여, 이 몸을 주께 바치오니
이 아침 공기가 신선하고 깨끗함 같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오, 주여, 오늘 하루를 기쁘게 하여 주소서.
어찌 이 아름다운 새벽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들
어찌 나로 하여금 이 기쁨의 동산을 보게 하였으리오.
(중략)
거룩하신 주여,
이 몸을 주를 위하여 바치나이다.
여호와여, 이 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여호와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소서.
여호와여, 이 몸을 주께 바치오니
이 아침 공기가 신선하고 깨끗함 같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오, 주여, 오늘 하루를 기쁘게 하여 주소서.
그러던 1934년, 최용신은 돌연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3월 4일자 기사 '썩은 한개의 밀알, 브나로드의 선각자 고 최용신씨 일생'에 따르면, 그녀가 일본 유학을 가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이만큼 자리잡은 샘골을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새로운 농촌운동의 전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좁은 문견으로는 도저히 능력이 부족하다. 만일 이대로만 간다면 곧 침체되어 이 모양조차 유지해가기가 곤란할 것이다. 이곳을 이 땅의 농운동의 한 도화선으로 만들자면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
1934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간 최용신은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10년 전에 약혼했던 김학준과 재회하고 교내 잡지에 계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투고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갑자기 각기병에 걸린 그녀는 6개월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그해 9월에 샘골마을로 돌아갔다.
2.3. 최후
샘골마을로 돌아온 최용신은 스스로를 지탱하기조차 힘든 몸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부여된 과제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한국 YWCA가 샘골학원 보조금 지원 중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그녀는 1934년 10월 <여론(女論)>에 '농촌의 하소연'을 게재해 샘골을 살리기 위한 각계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사회의 반응은 냉담했고, 그녀는 피로와 각기병 및 정신적인 고통의 누적으로 인해 1935년 1월 경기도립 수원병원[5]에 입원했다.1935년 1월 23일, 최용신은 자신을 간호하던 제자 안홍팔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1.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십시오.
2. 김군과 약혼한 후 십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3.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4.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5. 어머님을 두고가매 몹시 죄송하다.
6.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 마라.
7.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2. 김군과 약혼한 후 십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3.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4.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5. 어머님을 두고가매 몹시 죄송하다.
6.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 마라.
7.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그 후 숨을 거두니 향년 25세였다. 그녀의 유해는 인근의 일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75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3동에 이장되었다. 훗날 농촌운동가이자 교육자 류달영이 <최용신추모비> 글을 짓고 서예가 민태식이 기술해 그녀를 기렸다.
일제하 처절하던 민족 수난기에
나라의 고아복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농촌계몽의 선구로 불사조 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생명을 바쳤네.
영원히 역사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처녀 싱그러운 상록수여.
민중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이 잡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
나라의 고아복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농촌계몽의 선구로 불사조 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생명을 바쳤네.
영원히 역사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처녀 싱그러운 상록수여.
민중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이 잡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용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