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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근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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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제갈규(諸葛珪)
생몰연도 174년 ~ 241년(향년 68세)
고향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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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

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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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오나라의 중재자2.2. ·의 외교관2.3. 강릉 전투2.4. 말년의 군사 활동
3. 가족 관계4. 외모5. 평가6. 말말말7.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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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대신. 낭야군 양현 출신. 는 자유(子瑜). 제갈량 제갈균의 형, 제갈각, 제갈교, 제갈융의 친아버지. 출신은 서주 낭야국 양도현.

2. 생애

2.1. 오나라의 중재자

제갈근은 어릴 적 낙양에서 유학했고 어려서 친어머니를 잃고도 계모를 효성으로 모셨다. 전란을 피해 장강 이남 양주로 피난을 갔는데 마침 그 때 손책이 죽었다고 한다
효행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게 되어 손권의 매형에게 천거되어 출사했다. 손권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노숙과 동급의 빈객으로 대우받았다.

손권은 그의 막료들 중 제갈근을 각별히 신임했다고 한다. 장소처럼 꼬장꼬장하게 나오거나, 고옹처럼 마음에 안 드는 사안에는 입을 다물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과는 달리, 언제나 듣는 이의 기분을 해치지 않게끔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조로써 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항상 당당한 풍격을 지녔으면서도 온후한 성격을 갖고 있어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원만함을 유지했다.

손권이 오군태수 주치에게 원망을 품은 것을 풀어 주었으며,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손권이 교위 은모(殷模)에게 죄를 내리려던 것도 용서하게 만들었다. 훗날 우번이 직선적인 성격으로 쫓겨났을 때에도 제갈근만은 우번을 위해 손권을 달랬었다.

2.2. ·의 외교관

삼국지연의의 창작 서술이 있는데, 제갈량이 적벽대전 전에 손권을 설득하기 위해 노숙과 함께 오나라에 왔는데, 이때 손권이 공명을 맞이하기 전에 그를 맞이한 사람이 바로 제갈근이었다. 제갈근이 왜 먼저 날 보러 오지 않았냐 묻자 공명은 "지금은 공무 중"이라고 답했고, 제갈근은 이에 수긍하였고, 일이 끝나면 자신을 보러오라며, 다른 나라의 신하를 대하는 예를 올리고 돌아갔다. 이 일화는 연의의 창작이지만 바로 다음의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듯하다.

215년에 손권이 제갈근을 촉에 사신으로 보내 유비와 호의적인 관계를 맺게 했는데, 제갈근은 공사구분을 엄격히 해서 유비에게 출사한 동생 제갈량과 만나게 되었는데 공무의 예로 응대할 뿐 사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유비가 서천을 차지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는 사자가 되어 찾아갔는데, 유비가 '서량의 땅까지 손에 넣으면 돌려주겠다'며 핑계를 대었고, 때문에 양국의 사이가 험악해졌으나, 노숙의 중재로 이와 같은 불화는 수습되었다. 뒤이어 조조가 한중으로 밀고 내려와 정세가 불안해지자, 다시 동맹을 공고하게 다지는 사자로서 촉으로 다녀왔다.

이후 관우를 목표로 토벌에 종군했으며, 여몽이 죽은 뒤에는 대신하여 남군태수의 자리를 맡았다. 관우의 죽음 이후 유비가 손오를 향해 진군하자, 강화를 위해 오나라에서는 손권이 화친을 구하여 촉에게 사적인 원수인 우리보다 더 큰 원수인 위를 치는 것이 옳으니까 화해하자는 내용의 서신을 제갈근을 통해 전했다.
문득 들으니, 깃발과 북소리가 백제(百帝)성에까지 이르렀다 하니, 혹자는 신과 의논하길 오왕이 이 주(州)를 침입하여 취하여 관우를 위해하여서, 그 원한이 깊고도 커서 화친에 의당 답하지 않을 것이라 걱정하니, 이것은 작은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이지 큰 것에 뜻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폐하를 위해 그 경중(輕重) 및 대소를 논해보자면, 만약 폐하께서 위세를 굽히고 분노를 버리시고, 이 제갈근의 말을 잠시 살피신다면 계책을 세워 결정할 수 있으니, 다시 후왕들에게 묻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관우와 친한 것이 선제(先帝)와 비교해서 어떻다고 보십니까? 형주와 천하 중 어느 것이 크고 작습니까? 모두 다 원수삼아 미워한다면, 어떤 것이 먼저고 어떤 것이 나중이 되겠습니까? 만약 이 수를 살피신다면,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1]

얼핏 보면 조운이 유비를 말릴 때와 비슷한 논리이나 배송지는 '(오나라의 이런 행동은) 글자가 아깝다'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오나라가 유비와 촉의 신경을 대놓고 긁는 오만함이 느껴진다며 신랄하게 씹었다. 익양대치에서 그동안 평행선을 유지하던 형주 영토 소유권 문제를 매듭지을 때 촉이 남군, 영릉, 무릉을 갖고, 오는 장사, 계양, 강하를 갖기로 합의했다. 즉, 서로 감정은 남아있더라도 공적으로는 타협하고 끝냈으니 더는 형주 영유권 분쟁을 놓고 왈가왈부해서는 안 됐다. 그럼에도 오는 동맹을 깨고서는 촉을 계속 도발했으니 그냥 넘어가면 오히려 유비는 한심한 호구 소리를 들어도 싸다. 물론 이 자체는 제갈근의 책임은 아니다. 이미 이 상황에선 제갈근, 아니 오나라는 어떤 외교적 노력으로도 더 이상은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유비가 손오를 향해 진군하여 제갈근이 사신으로 보내졌을 때 당시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하고 있다는 참언이 돌았으나, 손권은 그를 신임하여 다음과 같이 논설했다.
"자유가 나를 등지지 않는 것은 곧 내가 자유를 저버리지 않음과 같다. 일찍이 내가 제갈량의 재주를 눈여겨보아 자유더러 그를 설득해 보라 했을 때, 자유는 자신이 나를 저버리지 않음같이 제갈량도 유비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즉 내가 어찌 자유를 의심하겠는가?"
이와 같은 인간적인 면모로써 손권은 제갈근을 깊게 신뢰한 것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손오의 정권은 토착 호족 세력의 입김이 강해서 외지 출신인 제갈근을 더 미덥지 않게 여긴 게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으로는 동생 제갈량도 비슷한 입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갈량이 손오 토벌에 나서서 반대했다면 제 형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불리한 위치의 제갈량이었던 만큼 조운만큼 적극적으로 간언하지 못하고 '법정이 살아 있었더라면 주상을 막거나 패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라고 한탄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 2010년에 제작된 드라마 삼국에서도 제갈량이 제갈근 때문에 손오 정벌을 반대하는 거라고 몰아가는 장비의 대사가 꽤 자주 등장한다.

2.3. 강릉 전투

이릉대전 이후 222년 좌장군과 공안독 그리고 가절에 임명되었으며, 공격해 오자, 제갈근은 반장, 양찬과 함께 남군을 구원했다. 이때 제갈근과 양찬은 하후상이 이끄는 위군을 보고 속수무책이었으나 부하인 반장이 싸우지 말고 기다릴 것을 진언하자, 이를 일임하여 전력을 온존했다. 강릉에서 공격받는 주연이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손권이 그를 원망할 정도였으나, 결국 상황이 불리해진 위군이 먼저 퇴각했다.
조진과 하후상 등이 강릉에서 주연을 포위하고, 주중(州中)을 나누어 점거하니, 제갈근이 대병을 이끌고 구원했다. 제갈근이 성품이 넒고 급하지 않아, 도리를 미루어 보고 계획을 맡기니, 끝내 기복 화복(禍福)이 생길한만한 술책은 내지 않고, 병사들이 오랫동안 해이해지지 않으니, 손권이 이것을 존경하였다. 봄물이 날 때쯤에 반장 등이 상류 물가에 성을 쌓고 제갈근은 부교를 띄워 진공하니, 조진 등은 퇴각해 패주하였다. 비록 큰 공훈은 없었지만, 또한 군대와 경내를 보전한 것을 공으로 삼았다. - 오록
위나라 장수 하후상 등이 남군을 포위하고, 선봉 부대 3만 명을 나누어 부교를 만들고 백리주를 건너왔다. 제갈근과 양찬이 함께 병사를 모아 구원하러 달려갔지만, 그 사태에 대처할 바를 몰랐고, 위나라 병사들은 날마다 끊임없이 건너고 있었다. 반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나라의 기세는 방금 흥성하기 시작했고, 강물은 또 얕으므로 그들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위로부터 상류로 50리 되는 곳까지 가서 갈대를 수백만 개 베어 커다란 떼를 만들어 물의 흐름을 따라 불을 놓아 부교를 전소시키려 했다. 떼 만드는 작업이 막 끝나 강물이 가득 찬 것을 보고 띄우려고 할 때에 하후상이 이것을 알고 병사를 인솔하여 물러났다. 반장은 말에 올라 육구까지 내려가서 막았다. - 반장전
강릉 전투에 대한 기록은 대개 제갈근을 그 주체로 하고 있으나 제갈근전 주석의 오록과 반장전을 살펴보면 이 전투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것은 반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제갈근은 위군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였고, 전면전을 피해 전력을 보존하고 계책으로 하후상을 물러나게 한 것은 모두 반장에게서 나온 것이다.

2.4. 말년의 군사 활동

226년 조비가 사망하자 손권의 명을 받고 양양의 사마의 서황을 공격했으나 패한다.

손권이 칭제하자 대장군과 좌도호 그리고 예주목에 동시에 올랐으며[2], 234년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여 육손과 더불어 강하로 나아갔다. 이때 육손은 손권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그 서신을 전하는 사자가 위군에게 붙잡혔다. 위군은 군사 기밀을 얻었기 때문에 첩보전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고, 이를 파악한 손권은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때 제갈근은 최전방에 있었는데, 유독 육손만이 군대를 물리지 않았고, 제갈근과 더불어 전방을 사수했다. 제갈근은 육손에게 퇴각할 것을 권하였지만, 육손은 제갈근의 다급한 서신을 받고도 아무런 추가 명령을 내리지 않고 도리어 여유로워 하였다. 이에 답답해진 제갈근이 직접 육손의 막사에 방문했을 때, 육손은 군을 바로 퇴각시키면 적의 공세에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고, 이를 깨달은 제갈근은 육손의 명을 따라 마찬가지로 여유를 부리며 퇴각 준비를 하여 피해없이 군을 퇴각시켰다.

241년에 전종이 작피로 북벌을 감행했을 때, 번성을 공격한 주연과 함께 양동으로 조중지역을 약탈했다. 하지만 위나라의 호질이 불리한 전력임에도 번성을 잘 지켜냈고, 작피에서 전종이 패하면서 전황이 악화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마의가 원군을 이끌고 오자 조중 방면의 오군은 그대로 퇴각했다.

번성 전투 이후 241년을 넘기지 못하고 병사했다.

3. 가족 관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여동생과, 남동생 제갈량 제갈균[3]이 있다. 공적인 자리에선 제갈량을 사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집안끼리 연락을 터놓고 살았고, 나중에는 자식을 일찍 보지 못한 제갈량에게 둘째 아들인 제갈교를 양자로 보내기도 했다. 제갈근은 동생 제갈량보다 7살 연상이었는데, 234년에 사망한 제갈량보다 7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4]

제갈근은 아들 제갈각이 지나치게 재주를 드러내는 것을 두고 '저대로 두면 장차 집안을 망치고 말 것이다' 라 염려했는데 이는 훗날 그대로 맞아 떨어져 한당, 보즐처럼 호부견자 케이스를 타고 말았다. 그나마 제갈각은 능력이라도 있어서 저 둘보다는 낫긴 하다만.

제갈근 사후 제갈각은 손권이 죽은 후에 정권을 장악했지만 잦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고 손준에게 주살되었다. 그리고 제갈각의 삼족이 멸족되고,[5] 제갈근의 막내 아들 제갈융은 약을 먹고 자살했으며, 그 세 아들도 주살되자 제갈근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전에 자식이 없던 제갈량이 제갈근의 차남 제갈교를 양자로 데리고 갔는데 제갈교는 요절했지만 외아들 제갈반을 남겼다.[6] 결국 손준이 병사하고 뒤를 이은 손침이 주살되자 오나라로 돌아와서 제갈근의 대를 이었다. 제갈량의 후사는 늦둥이 적자인 제갈첨이 이었다.

보통 제갈각에 대한 우려가 단지 성격만 보고 판단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제갈각의 행보를 가까이에서 본 제갈근의 통찰력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제갈각의 행보를 보면 제갈근의 우려대로 정확히 진행되고 맞아떨어졌음을 보아 괜히 제갈량의 형이 아님을 파악가능하다.

다만 그런 통찰력이 무색한 면은 있는 것이, 제갈근이 맏아들 제갈각을 항상 근심하여 "가문을 지키지 못할 가주다."라고 말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멀리는 조사 부부와 인상여가 함께 조사의 아들 조괄의 임용을 반대한 일이나 가까이는 같은 시대의 왕경의 어머니가 왕경에게 군수에서 멈출 수 있어야 한다며 말린 일처럼 제갈각을 말리거나 손권에게 제갈각을 쓰지 말라고 진언했다는 기록은 없다. 조괄과 조효성왕이 그랬고 왕경이 그랬듯, 본인이 안 들으면, 군주가 안 들으면 어쩔 수 없다는 한계는 있지만, 제갈근은 그런 시도조차도 안 했던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제갈근은 부인이 죽은 다음에 새 부인을 들이지 않았고 첩의 아들을 관직에 추천하지 않았다고 한다.

4. 외모

정사에는 풍채가 당당했다고 적혀 있으나 세설신어에는 얼굴이 길쭉해 당나귀 노새와 닮았다[7]말상 미남?는 묘사가 있는데, 그 때문인지 이에 얽힌 맏아들 제갈각의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한번은 손권이 제갈근의 얼굴이 긴 것을 보고 놀려먹으려고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와서는 머리에 "제갈자유"(諸葛子瑜)라고 쓴 종이를 붙였는데, 자유가 제갈근의 자이니 얼굴이 나귀만큼 길다는 뜻이었다. 이에 사방에서 폭소가 터졌고, 제갈근도 황제의 장난이라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어린 제갈각이 나서 "두 글자만 더 쓸 수 있도록 제게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자 손권이 흔쾌히 허락했고, 제갈각은 그 4자 밑에 "지려(之驢)"라고 두 글자를 더 썼다. 따라서 종이에 적힌 내용은 "제갈자유지려(諸葛子瑜之驢, 즉 제갈자유"의 나귀")"[8]로 고쳐졌고, 이에 사람들이 감탄했으며 손권 또한 제갈각의 기지를 영특하게 여겨 그 나귀를 정말로 제갈근에게 하사했다. 그러나 제갈근은 제갈각이 어려서부터 이렇게 나대는 것을 근심하여 집안을 망칠까 걱정했다고 한다.

5. 평가

손오의 최고 인재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능력을 자랑하는 실력자이지만, 삼국지연의의 묘사가 워낙 널리 퍼져 제갈량의 형 외에는 실속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연의에서는 촉과 오 사이에서 외교관 노릇을 하며 동분서주하지만 정작 제대로 거두는 성과가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형주를 찾으러 가서는 유비와 제갈량의 연극에 놀아나고 관우에게는 대뜸 "내가 당신 동생(제갈량)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더라면 즉시 너의 머리를 베어서 개에게 먹였을 것이다!"라고 폭언부터 듣고 그 아들 관평에게는 목까지 달아날 뻔 하는 등 험한 꼴을 몇 번이나 겪은 것에 비하면 받아든 결과는 대부분 협상 결렬 내지 일방적 파기, '당신이 제갈량의 형만 아니였다면 여기서 죽었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손오의 네임드들 중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이 더 빠르겠지만, 제갈근 또한 삼국지연의의 피해자.

하지만 소설이 아닌 실제 상황에서는 제갈근이 나섰을 때 이미 관우의 죽음과 형주 문제로 촉, 오 두 나라의 외교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아 수습이 힘든 상태였다. 촉과 오가 갈등하게 된 근본적 문제라고 할 수 있는 형주 반환 문제는 양쪽 모두 근거가 충분히 있었고 과실 또한 있었기 때문에 3자 입장에서 보면 어느 한쪽이 옳다 하기 힘든 문제였다. 조조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제갈근은 물론 노숙조차도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은 없었다.[9] 또한 이릉대전 때는 그 제갈량의 간언을 무시할 정도로 이미 오나라에 대한 유비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였으니, 애시당초 제갈근이 아니라 누구라도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도리어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뽑은 오나라 입장에선 최후의 외교 카드였다.[10]

즉 제갈근은 한 국가의 외교관으로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하는 외교 전문가이며, 그 동시에 정무에도 뛰어난 문관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적을 만들지 않고 모두에게 온후하게 대하는 훌륭한 정치인이기까지 했다.[11] 비록 동생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제갈근도 엄청난 인물인 것은 확실하며 대장군과 동시에 중요한 요직인 예주목과 좌도호를 겸임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다만 군사 분야에서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강릉 전투는 승리했고 공을 인정받았으나 사실상 반장의 공이나 다름이 없었고, 제갈근 본인은 그야말로 두 손 놓은 상태였다. 양양에서는 패전했고, 육손과 함께 퇴각할 때도 매우 두려워했다고 전해질 정도.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고 뛰어난 부하, 동료들과 의견을 조율해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모습에서는 당대의 문사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 실력의 한계를 인정하여 보다 나은 부하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그러면서도 조직이 와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12] 따라서 제갈근 본인의 군사적 역량은 부족했지만 군주, 동료, 부하들의 의견을 조율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줄 아는 훌륭한 사령관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반장은 군무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인격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어 사령관직을 맡길 만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에,[13] 이를 감안하면 손권의 인선도 괜찮았고 제갈근의 처신도 괜찮았다고 할 수 있다.

6. 말말말

촉한을 얻었고, 을 얻었으며, 를 얻었다. - 세설신어
子瑜神交如漆如膠(자유신교여칠여교): 자유(제갈근의 자)의 훌륭한 사귐은 옻이나 아교처럼 끈끈하고,
誠貫金石群議徒淆(성관금석군의도효): 진실함이 금석을 뚫을 만큼 강하니 뭇 의론이 헛되이 시끄럽구나.

- 《도상삼국지(图像三国志)》

7.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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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말인 즉슨 오나라 입장에서도 형주를 통수쳐서 빼앗고 관우를 습격해 죽인 것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것과 같다. 다만 유비에게 한실부흥의 대업을 상기시키며 오나라를 치는 것보다 위를 먼저 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 당시 제갈량이 승상, 상부의 위치였으므로 의심이 굉장했을텐데 대장군에 올랐는 것을 보면 손권의 신임이 대단했고, 본인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3] 손권이 제갈량은 제갈근의 동복형제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제갈근이 어려서 모친을 잃고 계모를 모셨다는 기록과 제갈량이 제갈근의 동복형제라고 특기한 점을 보면, 제갈균은 계모에게서 태어난 이복형제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제갈량과 제갈균의 모친이 '장씨'로 같은 사람으로 정리되어 있다. 연의와는 달리 실제로는 둘째 형인 제갈량을 따라 유비에게 사관하며 오늘날의 경찰총장이라 할 수 있는 장수교위가 된다. [4] 제갈량이 요절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제갈량은 과로로 사망한 인물치고는 54세까지 살았다. 오히려 제갈근이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편이라 하는게 맞다.특히 오나라 기준이면 더더욱 [5] 제갈각의 장남 제갈작은 손권의 후계 문제에 말려들어 질책을 받은 제갈각이 직접 독살했고, 차남 제갈송은 약을 먹고 자살했으며, 막내 아들 제갈건은 모친과 위나라로 달아나다가 잡혀 살해당했다. [6] 다만 제갈반은 오나라로 돌아온 이후 요절하고 말았다(...). 다행히 아들이 있어서 후손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7]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아예 곰돌이 푸의 친구 '이요르'로 그려줬다. 창천항로에선 대놓고 아주 사실적으로 말처럼 그려졌다(...) 이게 인간인지 말인지 헷갈릴 정도로(...) [8] 이문열 삼국지 등에서는 나귀를 노새로 오역해 놨는데, 노새는 생식능력이 없다. 아무리 주군이라도 면전에서 노새 드립을 치면 절대 장난으로 못 끝난다. 심지어 자식까지 있는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하면 아이 아버지는 고자, 아이는 뻐꾸기 새끼로 만드는 초절정 패드립이다! '나귀 려(驢)'자는 '노새 라(騾)'자와는 전혀 다른 글자인데 어째서 오역했는지 의문. [9] 여몽의 방법은 당장은 손오에 큰 이득이 되는 합리적인 방법이었지만 장기적으론 1강 2약 체제를 공고하게 만든 상처뿐인 승리에 가까웠다. 아마 삼국의 가운데에 있는 형주를 토대로 위와 촉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는 그림을 그렸던 것 같은데, 오(삼국시대)/요절 징크스 문서에 나오듯이 본인을 포함해 인재들이 요절하기도 했지만 손권부터가 내치를 중시했다 보니 팽창하지를 못했다. [10] 빈말이 아닌 게 제갈근은 제갈량의 형이다보니 아무리 유비가 빡쳐도 최소한 죽이지는 않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애초에 제갈근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갔다면 목이 날아가도 모자랄 만큼 양국의 상태는 파국으로 흘러가는 형편이었다. [11] 판본에 따라서는 제갈근이 하북에서 손오로 건너와 손권을 섬기기 시작할 무렵에 "그가 숭상받은 것은 지략도 있지만 그보다는 훌륭한 인품 때문이었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상술한 제갈근의 나귀 이야기도 장소처럼 '아무리 주군이라도 이건 좀 아니지'라고 언성을 높일 만했는데 본인이 부끄러워하는 선에서 넘어갔다. [12] 참고로 아들인 제갈각이 바로 이걸 못해서 패망했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말이다. [13] 손권은 반장의 능력은 아꼈지만 그 개차반 인성 때문에 일정 이상의 직위는 주지 않았고, 반장 사후 그의 아들을 행실 불량을 구실로 쫓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