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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전투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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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전투
東萊城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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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래부순절도 2.jpg

동래부순절도, 1658년 작.[1]
시기 1592년 (선조 25년) 5월 25일
(1592년 음력 4월 14일)
장소

조선 경상도 부산 동래성
(現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원인 일본의 내륙 침공 교두보 확보
교전국 <rowcolor=black> 일본
(공세)
조선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니시 가몬.svg 고니시 유키나가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소 요시토시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마쓰라 시게노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아리마 하루노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오무라 요시아키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고토 스미하루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송상현
파일:조선 어기.svg 조영규
파일:조선 어기.svg 홍윤관 †
파일:조선 어기.svg 이각
파일:조선 어기.svg 박홍
파일:조선 어기.svg 이언성 (울산군수)
병력 일본군: 약 30,000명[2] 조선군: 약 3,500명
피해 사상자: 500명
- 전사자: 100명
- 부상자: 400명
투항: 500명
조선군 궤멸
결과 일본의 승리
영향 * 동래성 함락 및 대규모 양민 학살
* 일본군의 경상도 및 충청도 진공


1. 개요2. 전개
2.1. 4월 14일, 역부족의 제승방략2.2. 4월 15일 오전, 죽음을 각오한 필담2.3. 4월 15일 오후, 성이 함락되다2.4. 4월 15일 저녁, 군민이 학살되다
3. 여담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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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동래성을 함락시킨 전투.

2. 전개

2.1. 4월 14일, 역부족의 제승방략

동래부사 송상현 왜관 일본인들이 모두 떠나는 등 이상징후를 느끼고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방비를 했다. 성 주변에 나무가 많으면 공격 측 입장에서 기병 운용이 힘들며 대규모 공격과 성벽을 넘기 위한 사다리를 비롯한 공성 무기의 사용, 그리고 진열의 정비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병력이 너무 많았던 탓에 이런 준비들은 생각보다 효과가 적었다. 송상현은 성벽 위에도 목책을 쌓았으며 일본군 역시 조선군의 활 공격 때문에 생기는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궁수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1592년 4월 13~14일, 부산진 전투 다대포진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배했다. 그동안 동래부사 송상현은 긴급히 주변 일대의 병력을 불러모았다.

2.2. 4월 15일 오전, 죽음을 각오한 필담

1592년 4월 15일 오전 10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동래성에 도착했다. 한 부대는 동래성 동쪽 황령산 기슭에, 한 부대는 동래성 서쪽에, 한 부대는 동래성 남쪽에, 3면 포위하였다.

전투에 앞서 양측 지휘관은 필담을 주고받았다. 고니시는 동래성 앞에 이런 내용이 담긴 나무편을 내보였다.
무모한 전투는 피하라. 나는 협상을 위해 조선의 도성으로 가야 한다.
그대가 굳이 싸우겠다면 할 수 없지만,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5]

이에 송상현은 다음과 같이 쓴 팻말을 밖으로 던졌다.
싸우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戰死易 假道難)[6]

이를 본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동래성에서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아녀자들까지 병사들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동래성의 취약점인 동래성 동문(인생문)을[7] 집중 공격해서 결국 돌파하고 동래성으로 진입했다.

밀양부사 박진, 경주판관 박의장이 뒤늦게나마 근처까지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동래성이 포위되어서 합류하지 못했다.

2.3. 4월 15일 오후, 성이 함락되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동문으로 들이닥치는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나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시 한수를 썼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列鎭高枕 여러 진들은 고침[8]하네[9]
君臣義重 군신의 의는 무겁고
父子恩輕 부자의 은은 가볍도다

이후 송상현은 다시 무장하고 몰려든 일본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일본군의 칼에 찔려 전사했는데 송상현과 면식이 있던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이름의 일본인이[10] 피신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송상현의 애첩과 동래성의 아낙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와를 던지며 일본군에 맞서다가 역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조영규도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동래 백성인 김상은과 그의 처와 딸이 기와를 깨뜨려주면 이를 던져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송상현의 소실 금섬은 송상현이 관복을 가지고 죽기를 각오하고 전장에 나가자 담을 넘어서 까지 그를 따라 갔다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혔고 사흘간 일본군을 꾸짖으며 욕을 하다가 살해당했으며[11] 또다른 소실 이씨는 일본에 끌려갔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끝내 절개를 지켰다.

송상현과 함께 싸운 관군인 송봉수, 김희수, 향리인 대송백, 소송백, 관노인 철수, 매동 중에서 김희수, 대송백은 전사했으며 이 전투에서 송상현의 측근으로 알려진 사람은 신여로, 김섬, 노개방, 문덕겸 등이 있다.

이 때 참전한 사람들 중에는 각지의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일본군에게 항전한 경우도 있었으며 훗날 임명된 선무 원종 공신 중에서 이 지역 출신인 인물이 66명이 되었다. 이들 중 뛰어난 24명을 선정한 명단으로 별전 공신 또는 24 공신이라고 했는데 김정서, 정승헌, 문세휘, 정순, 김일개, 김일덕, 송창문, 김근우, 강개련, 김흘, 이언홍, 김대의, 오홍, 박인수, 김달, 송남생, 김기, 황보상, 이응필, 송계남, 이복, 오춘수, 김복, 송의남, 철수, 만동 등이 있다.

2.4. 4월 15일 저녁, 군민이 학살되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이 무너지자 예복으로 갈아입고 남문 성루에 올라 임금이 계신 쪽으로 절을 한 후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썼다. 왜군이 들이닥쳐 잡으려하자 걷어차며 "이웃의 법도가 이런 것이더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느냐?" 리고 꾸짖다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와, 활을 들어 왜적 하나를 쏜 후 검을 집어들고 왜적들에게 뛰어들어 둘을 베고 자신도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조경남, 《 난중잡록
일본군 장군 고니시는 송상현의 충절을 높이 사서 그의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미는 있는 결말인 것 같지만...

전투 당시 동래성의 병사와 백성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전투 중에도 일본군의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동래성의 백성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일본군에게 참혹하게 처형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 일본군의 이런 습성은 직전의 전국시대로부터 이어진 것인데 당시 일본의 공성전에선 전투 개시 전에 항복하면 성주 이하 전원의 생명을 살려주고 전투 중에 항복하면 성주 및 가신 급만 처형했으며 끝까지 저항하면 성주와 가신들, 병사들과 민간인을 포함한 성 안의 모든 사람을 죽였다.[12] 그래서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가망이 없는 상황이면 끝까지 저항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물론 자기들끼리 싸우는 내전과 국가간 전쟁은 차원이 다르다.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없던 을묘왜변 당시 항복한 병마절도사와 군사들, 백성들이 학살 당한지라 조선인들이 더 처절히 저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17년 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은 동래맹하유감이라는 시에서 전투 당일이던 4월 15일 새벽만 되면 집집마다 곡소리가 들려왔다고 기록하였다. 동래 주민 중 생존자는 천 명 중 한두 명 정도였다고 한다.[13]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전해주는 기록은 숱하게 많이 있다.
총성이 울리고 그 검광은 대낮을 무색하게 했으며, 적군이 성중에 들어와 사람으로 메우다시피 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민정중, 〈임진동래유사〉
송상현의 애첩 김섬은 함흥의 기녀였는데 송상현이 순절할 즈음에 적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사흘 동안이나 적을 꾸짖고 욕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적도 이를 의롭게 여겨 관구를 갖추어 송상현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

동래부민 김상(金祥)은 동네 아낙 두 사람이 깨 준 기와로 적병을 내리쳤다. 적이 떠난 뒤 김상의 어머니가 보니 김상과 두 아낙이, 적병 세 사람과 함께 죽어 있었다.
민정중, 《노봉집》 中 〈임진유문〉
양산군수 조영규의 아들 조정로가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동래성에 갔는데, 성 안이 온통 시체로 덮여 있어 유골을 수습하지 못했다.
엄린, 〈조공유사기〉
四月十五日 平明家家哭 / 4월 15일 이른 아침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울리니
天地變蕭瑟 凄風振林木 / 천지가 쓸쓸하게 변하여 처량한 바람이 숲을 흔드네
驚怪問老吏 哭聲何慘怛 / 놀라서 늙은 아전에게 묻기를 곡소리가 어찌 이리 참담한가
壬辰海賊至 是日城陷沒 / 임진년에 해적이 이르러 그날 성이 함락되었소이다
惟時宋使君 堅壁守忠節 / 그때 송 부사만이 성벽을 닫고 충절을 지키니
闔境驅入城 同時化爲血 / 경내 백성들이 성 안으로 몰려 일시에 피바다가 되었고
投身積屍底 千百遺一二 / 주검 더미에 몸이 던져져 천백 명 중 한둘만 살았나이다
所以逢是日 設尊哭其死 / 이런고로 이날이 되면 술잔을 차려 죽은 이들을 곡하나이다
父或哭其子 子或哭其父 / 아비는 아들을 곡하고, 아들은 아비를 곡하며
祖或哭其孫 孫或哭其祖 / 할아비는 손주를, 손주는 할아비를 곡하고
亦有母哭女 亦有女哭母 / 또 어미는 딸을 곡하고 딸은 어미를 곡하며
亦有婦哭夫 亦有夫哭婦 / 지어미는 지아비를, 지아비는 지어미를 곡하고
兄弟與姉妹 有生皆哭之 / 형제와 자매 등 살아남은 자는 모두 곡을 하오이다
蹙額聽未終 涕泗忽交頤 / 찡그린 채 차마 다 못 듣고 눈물이 문득 뺨에 가득차는데
吏乃前致詞 有哭猶未悲 / 아전이 나서서 말하길 곡해줄 이가 있으면 그래도 슬프지 않소이다
幾多白刃下 擧族無哭者 / 얼마나 많으오리까, 서슬퍼런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할 이조차 없는 집이
이안눌, 〈맹하유감사〉, 1608년경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정언섭, 〈임진망전유해지총〉, 1731년[14]
동래부사 송상현은 굽히지 않다가 살해당했으며 부산의 군사와 백성들도 도륙되어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만약 부산이 그들의 땅이 었다면 도륙과 참살을 어찌 이처럼 참혹하게 했겠는가?
신흠, 《상촌집》
조선군 장수를 비롯하여 조선인 5,000명이 죽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참수된 조선인이 3,000명이었고 5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종군승 덴케이(天行), 《 서정일기

3. 여담

가설/독자연구/평가/여담 등은 목차를 접었다. 눌러서 펼 수 있다.

===# 조선의 제승방략 체제 #===
조선군은 초기 3대 전투(부산진성, 다대포진성, 동래성)의 결과로 약 3,000여 명의 정예군을 잃어버렸다. 더 큰 문제는 일본군의 공격을 오래 버티지 못해 경상 좌,우도의 조선군과 중앙군이 합류할 시간이 부족해졌다.

경상감사 김수는 제승방략에 의거해 동래성 함락 다음 날인 16일에 도내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상주를 비롯한 경상도 북부 일대 병력들은 대구로 집결하여 1만명의 병력이 모였으며, 18일에는 경상 좌병영성이 있던 울산으로 13개 고을 병력이, 경상 우병영이 있던 창원으로 경상우도 병력이 집결했다. 그러나 대구에 집결한 병력은 이들을 지휘할 순변사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이 밀양 부사 박진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밀양을 점령하고 대구로 북상하자 20일에 흩어지고 말았다. 이일은 별 수 없이 상주에서 수백명을 급히 징발해 훈련시켰으나 이 병력으론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을 막긴 역부족이었다.

울산에 집결한 13개 고을 병력은 이들을 지휘해야 할 경상 좌병사 이각이 좌병영성 내부가 아닌 외곽에 주둔하면서 성내에 집결한 병력의 사기가 떨어지고 결국 22일에 울산이 함락되고 말았다. 경상 우병영에 집결한 경상우도 병력은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김성일이 전임자였던 조대곤에게 인수인계를 받고 지휘해야 했지만, 조정에서 김성일이 조선 통신사로 갔다 오고 한 보고를 문제삼아 김성일을 잡아가서 제대로 된 지휘가 어려워 23일 창원이 함락되었다.

이후 추풍령, 조령, 죽령을 중심으로 조방장 변기가 조령을, 좌방어사 성응길이 죽령을, 우방어사 조경이 전라방어사 곽영과 합류해 추풍령을 맡아 병력을 모아 방어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방장 변기는 신립이 탄금대 남쪽 달천 평야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하면서 조령에서 물러나 신립에게 합류하고 탄금대 전투에서 참패해버렸다.

조경이 이끄는 5,400여명의 조선군은 추풍령 일대에서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과 싸웠고 초반에는 잘 버텼으나, 전라 감사 이광이 근왕병을 소집하면서 전라방어사 곽영이 휘하 병력을 이끌고 자기 임지로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병력이 크게 부족해졌다. 결국 5월 3일 일본군이 병력 우위를 살려 조선군 측면을 공격하면서 조경은 전사 직전까지 몰릴 정도로 크게 패해 추풍령을 일본군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성응길은 경상좌도 병력이 무너진 터라 방어전을 펼치기에는 휘하 병력이 부족했다. 이에 성응길이 이끄는 조선군은 교전을 최대한 피하고 대신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을 따라다니며 견제하여 지연전을 펼쳤다. 원래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은 의흥을 거쳐 안동을 지나 죽령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성응길의 견제와 안동으로 향한 일본군 분견대가 성응길이 풍천에 파견한 조선군의 방어에 못이겨 결국 안동 점령과 죽령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조령으로 가버렸다. 이후 성응길은 의주로 피난간 선조와 합류했고, 안동은 1592년 6월 22일 일본군이 진군할 때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결국 제승방략 자체는 정상 작동했으나 일본군의 너무 빠른 진격을 막지 못하고, 현장에서 엇박자가 나고, 주요 전투에서 패하면서 선조와 조정은 평양으로 파천할 수 밖에 없었다.

4. 대중매체



[1] 동래부사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동래성 전투 당시의 상황을 겪은 노인의 경험담을 토대로 그린 기록화다. [2]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 병력과 수군 지원군의 합세. [3] 송상현이 동래성에 함께 남아 지킬 것을 부탁했으나 이각은 소산역에 진을 치고 협공하겠다고 하고 군관 20명만을 남긴 후 그 길로 달아나 버리고 만다. 이후 전황의 불리함에 자포자기했는지 적전도주를 반복하다 결국 도원수 김명원에게 참형된다. [4] 해당 인물 항목에도 서술되었듯 이 행동으로 인해 도망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샀지만 어머니를 피난시키고 다시 돌아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5] 전즉전의 부전즉가아도 [6] 전사이 가도난 [7] 당시 동래성 인생문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뒷산(망월산)을 우회하여 성곽을 넘어 동래성에 진입했다. [8] 베개를 높이하여 편안히 잔다는 뜻으로 근심없이 편안히 지냄을 뜻한다. 앞의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다는 말을 먼저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군 태반이 죽었음을 암시하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다. [9] 실록의 기록은 大鎭不救(인근의 진에서 구원은 없도다)라 되어 있으나 청주 충렬사에 있는 혈선발에는 列鎭高枕이라 되어 있다. 사실 구원군이 곳곳에서 왔고, 경상좌수사 박홍까지 왔다는 점에서 실록의 기록이 오류다. 당시 기록된 작계에는 경상좌병사의 구원은 작성되어 있으나 경상좌수사는 없다. 따라서 박홍은 와야했던 이각(조선)과는 달리 남은 함대를 수습하여 다른 수영으로 철수한다는 선택지가 있는 상황이었다. 원균은 싸우지도 않고 부대를 해체하다시피하며 그렇게 했지만... [10] 전쟁 전부터 통신사로 조선을 자주 왕래하던 인물이다. 통신사로 오면 부산을 거쳐서 한양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동래부사였던 송상현과 안면이 있었다. 조선 지리를 잘 알아 일본군과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 전까지 조선과 일본은 교류가 활발해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과 조선으로 오는 일본인들도 많았고 통신사와 사절단 등이 명절날 한양으로 국왕에게 인사를 갔었는데 이 루트가 그대로 일본군 침략루트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인들의 상경은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11] 일본 적장이 그녀의 절개를 높이 사 송상현과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12] 물론 이것은 불문율 같은 지침이라 당연히 예외도 있어서 항복이고 뭐고 다 죽여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학살당하지 않으려고 피난가는 경우도 흔했다. [13] 비슷하게 제주도에서는 제주 4.3 사건의 여파로 4월경 제주도에 가 보면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 치러지는데 대부분 같은 날 학살당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제삿날이 겹친다. [14] 동래성을 보수하다 발굴한 유해를 묻은 후 당시 동래부사였던 정언섭이 지은 비문이다. [15] 사실은 고니시가 소수의 병력으로 탐색전을 벌인 것이다. 특히 이 탐색전에서 동래성의 조선군 병력이 일본군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