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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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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1f20><colcolor=#fff> 양주동
梁柱東
파일:무애_양주동.jpg
출생 1903년 8월 16일[1]
경기도 개성부
(現 개성시)
사망 1977년 2월 4일 (향년 73세)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인제대학교 백병원
무애(无涯)
학력 중동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영문학 / 학사)
연세대학교 (문학 / 명예박사)
경력 숭실전문학교 교수
경신학교 교사
연세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교수

1. 개요2. 생애3. 일화4. 교과서 수록5. 함께 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시인이자 국문학자 겸 영문학자로 ‘양주동 박사’ 혹은 천재로도 유명했으며 일화도 많이 남아있다. 호는 무애(无涯).

2. 생애

1903년 경기도 개성군에서 태어나 중동학교를 마치고 1921년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 영문과로 전과하여 1928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본래 영문학 전공이었으나 시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문학 동인지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국문학계에 발을 들였다. 카프가 등장하여 계급 문학론과 민족 문학론으로 문단이 나뉘었을 때, 염상섭과 더불어 절충론적 입장을 취했다. 1930년에 시집 '조선의 맥박'을 내놓았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문인으로서보다 향가를 연구하는 문학자로서 더 큰 명성을 떨쳤다. 그에 앞서 향가를 해독, 연구한 것은 1929년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뿐이었는데[2], 194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를 해독한 '조선고가연구'를 펴냈다. 이후 김완진, 황패강, 서재극, 김동욱, 유창균 등이 향가 연구를 이어갔으나, 현재 국어 및 문학 교과서에 실린 향가 해독문의 대부분은 여전히 양주동의 것일 정도로 그의 그늘이 크다.[3][4]

1947년에는 고려가요를 연구한 '여요전주'를 저술한 바 있다. 전해진 여요가 모두 수록되어 있으며 한 글자씩 그에 맞는 해석과 주석을 붙인 여요마스터본이다. 그만큼 내용도 많은데다가, 세로쓰기로 기술되어 있고, 온통 한자라는 점에서 읽기에는 어렵기 그지 없으나 국문학도라면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2탄으로 향가를 다룬 '사뇌가전주'[5]도 있는데,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작품들이 모두 들어가 있다.

1947년 동국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김구가 세운 건국실천원양성소 강사로도 활동했다. 1954년 대한민국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이후 학계와 방송계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벌이다 1977년 2월 4일 오후 5시 경, 한일은행 청계지점[6]에 들렀다가 뇌졸중으로 졸도하여 인근 백병원으로 이송되던 도중 숨을 거두었다. 향년 74세.

아들 양인환은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사망했다.

6촌 동생이 영화감독 양주남인데, 양주남 역시 은퇴 후 타이완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는 것 말고는 근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3. 일화

젊은 시절 여성 소설가 강경애[7]의 연인이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년이 못 미치는 짧은 시간이지만 동거하며 뜨겁게 연애하고 문학도 가르쳤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양주동은 이미 유부남이었고, 강경애는 여고생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양주동도 당시 20대 초반의 청년으로서 둘의 나이차도 불과 3살밖에 안 나기는 했다. 단지 조혼 풍습으로 인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유부남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엔 본처는 본처대로 두고 내연녀는 내연녀대로 자유연애를 하는 젊은 남성들이 많았다.[8]

그런데, 양주동의 경우는 고백을 하는 방식이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참신했다. 강경애는 기독교 계통 여학교에 재학 중이어서 당연히 연애 편지는 검열을 뚫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묘안이, 성경에서 사랑 고백에 알맞은 문구를 따로 발췌해 짜깁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구를 그대로 발췌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서 4:7', '로마서 12:9', '마가 복음 10:7-8' 이런 식으로 문구의 출처만 적었다. 당연히 학교에서는 성경을 읽으라 권장하는 건전한 편지인 줄 알고 통과시켜 주었다. 링크 이처럼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사랑을 고백하자, 강경애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강경애의 사상이 점점 좌경화 하여, 양주동의 중도주의를 두고 "양 군의 평론엔 발전이 없소"라고 말하며 결국 결별하게 된다.[9]

강경애에 대한 내용은 1960년에 그가 펴낸 수필집 <문주반생기>에 나와 있다. 여기서 그는 강경애를 문학소녀 K라 언급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제 새삼 익명을 해 무엇하리.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된 것을! 뒤에 바로 여류 소설가로 단편 '소금', 장편 '인간문제' 등을 발표하여 영명을 날린 姜敬愛 여사...라고 밝힌다. 링크[10]

생전 조선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칭송받았던 만큼 그 스스로도 상당한 나르시시스트였던 모양으로, 자신을 조선 국보 1호로 자칭하기도 했다. 일화로 서울에서 택시를 잡았을 때는 기사한테 "국보가 탔으니 조심히 운전하시오" 라고 말했다거나, 빙판에 미끄러져서 넘어질 때 "국보 넘어진다!"고 비명을 질렸다고도 한다. 물론 학문적 성과만 보면 국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건 사실이다.

서울대에서 그에게 명예박사를 준다고 하자, 서울대에는 자신의 논문과 업적을 심사할 만한 실력의 교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며 거절했다. 하지만 1957년에 연세대학교에서 주는 명예박사학위는 받았는데, 국문학, 국학 분야에서 자신보다 높은 업적을 가지고 있는 최현배 부총장과 백낙준 총장이 직접 명예박사를 수여한다고 하자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오대산에서 탄허 스님에게 장자 강의를 들었다. 10살 연상인 양 박사에게 탄허는 먼저 절을 올렸었다.

애주가로도 소문났는데, 한번은 벗과 부산 여행을 가서 숙소에서 짐을 풀자마자 맥주 한 상자를 그자리에서 비우고, 또 밤바다 경치를 보면서 그 자리에서 맥주를 계속 마셨다고 한다.

1964년 동아방송의 인기 프로그램 이던 유쾌한 응접실의 첫 방송부터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당대 지식인들과 연예인들을 초청해서 주제에 맞는 대화를 나누고 노래도 듣는 교양 예능 프로그램 이었는데, 양주동은 특유의 언변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어려운 화제를 쉽고 즐겁게 풀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양주동이 작고한 다음 날, 유쾌한 응접실 제작진은 생전 그의 활약상을 묶은 추모 특집을 방송했다.

지금도 동아일보 사이트의 데이터 베이스에는 당시 방송분의 오디오 파일이 저장되어 있다. 몇몇 젊은 연예인들을 제외하면 같이 출연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고인이 되었다.

이름 때문에 제자들은 그를 양주둥이 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정작 양주동은 이 별명을 방송에서도 언급할 정도로 맘에 들어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대학가 유머로 퍼져 있는 '선풍기 채점' 설화의 주인공이다. 답안지를 쌓아놓고 그 앞에 선풍기를 틀어놓아 더 많이 날아갈수록 점수를 깎았다고 하는데, 이유는 종이의 무게는 똑같으니 많이 적을수록 잉크가 많이 묻어있어 더 무거우니 덜 날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학사관리가 허술했고 대학만 나와도[11] 취업이 쉽게 이뤄지던[12] 1960년대여서 가능했던 이야기이다. [13]

어려서 부모를 모두 여의었다. 이는 그의 수필 '질화로'[14]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5세 때 아버지를,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가 어머니의 마음[15]이라는 노래를 작사한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참고로 '어머니의 마음'은 1941년 '조선가곡 현상모집' 당시 서울 경신중학교 재직 중에 음악주임 이흥렬 선생과 함께 응모하여 당선된 가곡이다.

일제강점기 현대문학 초창기 인물로는 유일하게 그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하는게 남아있다. 개그맨 엄영수가 라디오스타에서 그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했는데 양주동이 누군지 모르고 싱크로율이 얼마나 맞는지 몰라도 충분히 웃기다. 1950~70년대 서울 사투리와 옛날 경기 북부 지역 사투리가 섞인 특유의 예스러운 말투를 잘 살려서, 듣고 있으면 정말 그때 사람들의 말이 연상될 정도다.

4. 교과서 수록

2009 교육과정 문학 교과서(천재교육, 정재찬[16], 류수열[17], 유성호[18], 김외곤[19] 외)에 그의 '몇 어찌' 일화와 수필 '면학의 서'가 실렸다.

5. 함께 보기


[1] 음력 1903년 6월 24일. [2] 이뿐만 아니라 국어사의 현대적 연구의 시초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이외에 경성제국대학 교수 시절 이희승, 이숭녕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죽어서도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의 떡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3] 향가의 예를 들면, 현재 전해지는 향가의 70%를 양주동 박사가 해석하였다! 양주동 박사의 해석 이후 추가로 더 해석된 것은 기껏해야 전체 향가의 1~20% 정도라고... 향가 해석의 방법을 제시한 것도 양주동 박사였다. [4] 양주동의 해석은 중세 한국어의 문법을 많이 의식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구결의 연구성과가 아직 많이 축적되지 못했을 때 연구라 현대의 통설과 다른 부분들도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김완진이나 남풍현의 해석도 자주 실리고 있는 편이다. [5] 사뇌가는 향가의 다른 말인데, 향가라는 표현이 사대주의적 성격이 짙기 때문에 양주동이 사뇌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지금도 사뇌가가 맞는지 향가가 맞는지는 국문학계의 화두. [6] 한국씨티은행 본점이 있던 자리. 현재는 리모델링을 하느라 본점을 서소문쪽으로 옮겼다. [7] 이전 버전에는 카프 소속이라고 서술되었지만, 강경애는 평생 철저히 비주류 문인으로 살았으므로 카프 소속이었던 적이 없다. 다만 노동자의 권리를 일깨우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평생 추구했던 것은 사실이라, 종종 카프 문인으로 오인되었던 듯하다. 강경애가 양주동과 결별한 이유는 결국 문학 성향의 차이였다. 강경애가 먼저 양주동의 문학관을 비판하는 비평을 공개하면서 결별 선언을 했다. [8] 윤심덕의 남자로 유명한 김우진도 사실 유부남이었다. 그러나 가문에서 맺어준 결혼이다보니 윤심덕과 따로 자유연애를 한 것. 그외에도 이 시절에는 가문에서 조혼으로 맺어주는 관습이 남아 있었어서 이런 사례가 무수히 많았다. [9] 다시 말하지만 사회 연령을 고려하여도 현대로 치면 고등학생과 대학 새내기 나이의 짧은 사랑이다. [10] 강경애는 해방 이전에 요절하여 북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좌파 성향인 데다가, 일각에서는 김좌진 장군 암살범으로 지목된 김봉환의 내연녀라는 의혹을 보냈기 때문에( 월간조선이 강경애가 김봉환의 동거녀라면서 강경애를 비난하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었다. #), 한동안 잊힌 인물이었다. 다만 김봉환의 연인은 이름만 같고 성은 다른 고려공산당 소속 김경애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김좌진 장군 암살 배후 자체가 워낙 오리무중이라 강경애도 의혹을 쉽게 벗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주동이 옛 연인을 긍정적으로 언급한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양주동이 이념에 구애받지 않는 절충주의자라서 가능했을 터이다. 참고로 양주동은 젊은 시절 벗들이 월북하여 연락이 끊어진 것을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11] 1960년대 당시까지는 초등학교만 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고등학교는 커녕 중학교 진학률도 50%선을 간당간당하게 넘었을 정도로 중등교육이 보편적이지 않았으니 자연히 대졸은 희귀했던 시절이었다. 대졸자가 넘쳐들어서 대졸실업이 문제가 되는 21세기의 대한민국과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12] 이 때는 학사경고를 받아도 웃어넘기던 시절이다. 이것보다도 더 오래전이지만 김영삼 같은 경우는 평균학점이 4점만점에서 1.07점을 받을 정도였다. 다만 이건 김영삼이 놀기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대학 시절부터 정치인들을 수행하며 일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공부에 신경쓰기 어려웠기 때문이 더 컸다. [13] 이 설화를 당연히 몰랐겠지만 훗날 이걸 역으로 이용해 멀리 날아갈수록 승진시킨 회사도 등장했다. [14]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수필 기출 지문이다. [15]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라는 첫 소절로 유명한 바로 그 노래이다. [16]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전 청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시를 잊은 그대에게로 유명한 그분 맞다. [17]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전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18]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19] 상명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201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