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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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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표준영정.
설(薛)
이름 총(聰)
총지(聰智)
시호 홍유후(弘儒侯)
본관 경주 설씨
아버지 원효
어머니 요석공주
생몰연도 ?[1] ~ ?
1. 개요2. 범상치 않은 탄생3. 통일 신라의 대학자4. 기타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유학자, 언어학자이자 동국18현의 첫 현인. 시호(諡號)는 홍유후(弘儒侯).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談捺), 아버지는 원효대사 설서당(薛誓幢)이며 어머니는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이다. 자(字)는 총지(聰智)이며 경주 설씨 시조 호진(虎珍)의 후손으로, 설총은 경주 설씨의 중시조이다. 한글 이전 고대 한국어의 표기법인 이두(吏讀)를 집대성했으며 신라에 유교를 확립시킨 뛰어난 유학자로, 약간 앞 세대의 사람인 강수(強首), 후대의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삼현으로 추앙받았다.

아버지 원효대사가 승려 출신[2]인 것은 여러모로 유명하지만 설총은 아버지와 달리 유학자였다. 단, 약간 앞 세대의 또 다른 대표적 유학자 강수는 불교가 세속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하며 유교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것과 달리 설총은 아버지 원효의 영향을 받았다.

원효의 골품을 따라 설총 또한 6두품이다.

2. 범상치 않은 탄생

설총의 탄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고승 원효(본명 설서당)[3]라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 해골물을 먹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뒤에 노래를 지어 불법을 전했는데 갑자기 그가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지을 텐데"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아무도 원효가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던 중, 태종 무열왕이 이를 듣고서는 "원효가 자기한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게 하겠다라는 거로구나"라고 하고선 원효를 자신의 과부된 딸[4] 요석공주와 맺어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관리를 보내 원효를 데려오게 했는데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던 원효가 일부러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버렸다.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려가서 옷을 말리게 했는데,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다가 요석궁에 있던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보냈고 그래서 나온 아들이 바로 설총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설총은 무열왕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3. 통일 신라의 대학자

고승과 과부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출생 문제로 세상의 지탄을 받을수도 있었지만 설총은 이를 뛰어난 학문으로 극복한 듯하다. 원효가 승려가 되기 전의 신분이 6두품이었던 탓에 설총도 6두품이라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문장과 학식으로 세간의 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한다.

흔히 문자 이두를 만든 사람이 오랫동안 설총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쓰였던 문자 체계로 한자의 형태를 빌려서 썼다. 조선 초에 대체제인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민간의 사용빈도가 크게 줄었으나 관료층들 사이에서는 구한말까지 여전히 널리 사용되었다. 한글 전용이 보편화된 현대에는 그 존재감이 사라진 상태긴 하지만, 한민족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한 기간을 따져 보면 한글보다 훨씬 오래 썼던 것이 이두고 이런 점에서 설총의 업적을 마냥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국문학자들의 연구로는 이미 설총 이전부터 우리 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이두 향찰식의 표기가 있어왔다고 하며, 돌에 새긴 금석문을 통해 설총시대 이전에도 정통 중국식 한문이 아닌 이두식 문장을 쓴 정황이 발견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설총이 방언(한국어)으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했다라고 쓰고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우리말로 화이의 방속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과 문학을 풀이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설총은 그 전부터 존재하던 이두와 향찰의 표기를 집대성한 공로가 있다고 볼 수 있고, 이 점에 있어서는 문자를 직접 만든 세종대왕 유형이 아니라 현대 국어학의 기초를 닦아놓은 주시경과 비슷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세계사에서 보편적으로 세종처럼 문자를 아예 새로 만들어내는 사례보다는, 이렇게 기존에 중구난방이던 걸 다듬고 정리하는 경우가 더 많고 이 또한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 중에는 설총이 우리말( 한국어)로 유교 경전을 읽고 풀이하는 노력을 한 데에는 아버지 원효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원효가 난해한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어서 일반 대중에게 설파한 것처럼 설총도 어려운 한문으로 된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서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5][6]

안타깝게도 이런 설총의 노력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남아있는 것은 없다.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3대 명문장가로 꼽혔지만, 후삼국시대와 여요전쟁을 거치며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이미 고려 중엽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는 설총의 문장이나 저서의 대다수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고, 설총이 지은 비문은 고려 중기까지는 다수가 현존한 상태였지만, 이마저도 글씨가 훼손된게 대부분이라 제대로 읽을수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신문왕[7]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화왕계가 남아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

조각에도 나름 조예가 있었는지 원효가 죽은 후에 원효의 유골을 모아서 거기에 흙을 붙여 원효회고상이란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의 시에 의하면 원효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을 뵈었다라고 하는 걸 보면 대단히 생생한 조각상이었던 모양.

고려시대 현종 때 홍유후로 추증되고 동시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비교적 문인의 성향이 강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관련 일화까지 조작된 것으로 보이는 최치원과는 달리, 설총의 경우는 유학자적 권위를 인정해서 배향에 큰 무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시 보문동 423에 설총의 묘로 전해지는 '전 홍유후 설총묘'가 있다.

4. 기타



[1] 654년 ~ 660년 사이 출생 기록이 있다. [2] 아들을 가졌다는 데서 알 수 있듯 파계승이 되었다. [3] 아버지 원효가 불가였다면, 아들 설총은 유가 [4] 위서로 거의 확실시되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남편 김흠운과 후에 신목왕후가 되는 딸 하나를 두었으나 김흠운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5] 이두 표음문자가 아니고 한자를 빌려써서 표기하는 방법이라서, 이 당시의 한국어에 대해서 제대로 된 음가추정이 어려워서 그렇다. [6] 온양 방씨 집안에서는 시조인 방지가 중국에서 건너와 신라에 귀화했으며 설총이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풀이할 때 도움을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유교 경전의 본고장이 중국임을 생각하면 그럴듯한 전승이다. [7] 골품을 배제한 순수 혈연으로 보면 신문왕과 설총은 사촌 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