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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2-04 16:10:28

청첸


파일:정잠.jpg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5대 참모총장
정체 程潛
간체 程潜
한국식 독음 정잠
영문 Cheng Qian
송운(頌雲)
출생 1882년 3월 31일 청나라 호남성 예릉현
사망 1968년 4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이력2.2. 호국전쟁에서 호법전쟁2.3. 국민당 합류2.4. 국민혁명2.5. 중일전쟁 국공내전2.6. 중화인민공화국 합류와 말년
3. 참고문헌4.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군인. 상계군벌의 유력자였다가 중국 국민당에 합류했다. 국공내전 이후 중국 공산당에 투항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 되었다.

2. 생애

2.1. 초기이력

1882년 호남성 예릉(醴陵)에서 태어났다. 1903년 호남무비학당을 거쳐 1907년 일본육군사관학교 17기, 보병과 6기로 졸업했고[1] 리례쥔, 황싱, 쑹자오런 등과 인연을 맺어 1905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1909년 동맹회 회원 주칭란을 따라 사천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신건육군에 들어가 호남성 제25혼성협에 소속되어 호남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무창봉기에 참여했고 황싱과 협력하여 우한 방위전에 참가했으나 실패했지만 위안스카이와 혁명세력의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1912년 선통제가 퇴위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이후 호남성은 탄옌카이가 성장으로 취임하여 대대적인 재병정책으로 5만명 이상으로 폭증했던 호남군의 감축에 들어갔다. 청쳰은 호남도독부참모방, 군무부부장에 임명되었고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의 독재 행위를 벌이자 1913년 계축전쟁에 참여했으나 실패 후 쑨원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2.2. 호국전쟁에서 호법전쟁

1915년 위안스카이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에 즉위하여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1915년 말에 귀국하여 운남, 귀주와 동맹하여 군사독립의 기반을 만들 것을 주장하여 탕지야오, 리례쥔 등 호국군 지도자들과 접촉하여 재정, 군사 지원을 받아 호남에서 토원 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호국군호남무사로 참여했고 호남성 대부분 현의 독립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어 4월 26일 호국군 호남인민토원대회를 개최하여 전성의 독립과 토원을 결의하고 호국군호남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루룽팅과 합세하여 1916년 7월 5일 호남독군 탕향명을 쫓아내면서 호남성의 북양군벌을 완전히 축출했다. 이후 호남도독 겸 성장으로 유인희가 추대되었다가 곧 탄옌카이가 도독으로 복직했다.

탄옌카이는 자신에게 위협적인 세력인 청쳰을 견제하기 위해 호남군을 4개 사단으로 편성하여 청쳰을 4사단장으로 임명했지만 곧 4사단을 없애고 자오헝티 등의 2개 사단으로 통합하면서 청쳰은 호남성 정치무대에서 숙청당했다. 하지만 돤치루이가 1917년 8월에 호남출신인 측근 푸량쭤를 파견하면서 탄옌카이도 쫓겨났다. 1917년 9월 호법정부가 수립되면서 호법전쟁이 일어나자 영릉 진수사 유건번 형양 주둔 호남군 여장 임수매 등이 돤치루이에 반대하여 청쳰을 호법군 호남군사령관으로 추대하면서 호법전쟁에 참여했다. 이후 군정부는 청쳰을 호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1월에 청쳰은 자오헝티, 임수매 등과 함께 장사를 점령했고 호남성장에 추대되었으나 호법전쟁이 종결되면서 악주 지역의 북양군과 호남군이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다. 청쳰은 악주의 북양군을 완전히 축출할 것을 주장하여 1918년 1월 19일 악주 공격이 시작되어 북양군을 호남에서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에 대총통 펑궈장 쉬수정 등의 주전파의 압력 속에 차오쿤 직예군벌의 정예부대를 보내 호남을 공격하게 하면서 호남군은 16만에 달하는 북양군에게 패배하여 악주와 장사를 잃고 남으로 퇴각해야 했다. 3월 27일 돤치루이가 안휘파 장경요를 호남독군 겸 성장에 임명하면서 다시 호남은 북양군의 손에 들어갔다. 청쳰은 4월 초 자오헝티, 임수매, 유건번 등과 연합하여 우페이푸를 비롯한 북양군 주력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장경요 타격에 주력하며 남은 기반을 지키고자 했으나 우페이푸의 남진으로 패배하여 퇴각해야 했다. 하지만 돤치루이의 논공행상에 불만이 많던 우페이푸가 진격을 멈추면서 상대해야 할 적군이 니쓰충의 안휘군벌만으로 한정된 덕에 완전히 소탕되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우페이푸는 탄옌카이와 협상하여 전투를 멈추었다.

2.3. 국민당 합류

이후 1919년 쉬스창이 대총통에 선출되고 호법전쟁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연성자치론을 주장하던 탄옌카이와 달리 청쳰은 남방의 쑨원에게 호의적이라 호남성 바깥의 문제에 적극 개입을 주장하여 탄옌카이와 충돌했다. 그러던 중 1919년, 청쳰은 북양정부와 문서를 주고 받은 일이 탄로나면서 자오헝티 등에게 북양군과 결탁했다는 비난을 받고 호남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청쳰은 광저우로 가서 중국 국민당에 합류했고 청쳰의 잔여부대는 1사단장 자오헝티가 장악했다. 청쳰의 잔여 세력은 1920년 11월 평강정변을 일으켜 탄옌카이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탄옌카이를 하야시켰으나 자오헝티가 12월 청쳰 계 장령들을 대거 처형하고 호남성을 장악하여 호남의 청쳰 계열은 완전히 숙청되었다.

청쳰은 1920년 쑨원의 2차 호법운동에 참여, 군정부 육군부차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 쑨원이 비상대총통에 선출되자 육군총장이 되었다. 영풍함 사건으로 2차 군정부가 무너지고 3차 군정부가 수립되자 1923년 대원수대본영군정부부장에 임명되었고 1925년 국민당의 1차 동정 국민당의 2차 동정에 참여하여 군벌 천중밍을 토벌했다.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출범되자 왕징웨이, 후한민, 탄옌카이, 쉬충즈, 린썬, 랴오중카이, 구잉펀, 주페이더, 쑨커 등과 함께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2.4. 국민혁명

1926년 국민혁명군 6군 군장으로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여했다. 북벌 과정에서는 옛 경쟁자인 2군 군장 탄옌카이와 8군 군장 탕성즈와 호남에서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다. 이후 호남을 장악한 탕성즈가 세력을 무분별하게 확장하자 이에 그와 충돌하였다. 1927년 1월 1일부터 1월 7일까지 열린 군무선후회의에 장제스, 리쭝런, 탄옌카이, 주페이더, 바이충시, 탕성즈, 바실리 블류헤르 등과 참여하여 참여, 군대 편제와 점검, 경리 군수 체계 정비, 법규 정비 등에 대해 논의했다.

1927년 2월, 허잉친과 함께 중앙군에 소속, 강우군으로 편제되어 강소, 강서 공격에 참여하여 3월에 난징을 점령했는데 그의 휘하 부대들이 난징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2방면군 총사령관, 난징 위수사령관, 국민당상악임시정무위원회 주석 등을 역임했고 장제스와 불화를 빚어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다. 난징 함락 직후 강소정무위원회 주석에 임명되면서 확고하게 우한 정부의 편에 서게 되었다. 장제스는 청쳰의 적대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청쳰을 회유하기 위해 꾸준히 군비를 지급하며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1927년 3월 말 장제스가 거사를 제안하자 탕성즈가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중론을 제기하며 확실하게 태도를 정하지 않다가 4월 1일 우한으로 가서 4월 4일에 장제스가 정변을 일으키려 한다고 우한 국민정부에 보고했으나 우한 국민정부는 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1927년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에 주둔한 청쳰의 부대를 무장해제시켰다. 이에 큰 타격을 입은 청첸은 호남성에서 모병을 하여 세력을 보충하고자 했으나 이 때문에 양호 지역을 장악한 탕성즈가 크게 충돌을 벌였다.

영한분열 이후 탕성즈와 함께 난징 국민정부를 군사적으로 전복하려는 동진에 참여하여 7월 장파쿠이, 주페이더와 함께 안휘성을 공격했으나 8월에 장제스가 하야하자 8월 22일 리쭝런의 주도로 열린 구강회의에 참여하여 영한합작을 논했다. 용담전역에서 리쭝런 쑨촨팡을 격파하자 난징 국민정부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였다. 탕성즈가 왕징웨이를 등에 업고 안휘성을 점령하여 안하무인으로 확장을 꾀하다가 리쭝런, 바이충시, 펑위샹, 주페이더, 리지선의 어그로를 동시에 끌어 10월 20일 토벌령이 발표, 당계전쟁이 터졌을 때 서정군 총지휘관에 임명되어 탕성즈 토벌에 나서 11월 13일 우한을 점령하고 탕성즈 정권을 붕괴시켰다. 1월 23일,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44군 군장 섭개흠이 허젠과 결탁하였다는 구실로 그를 무장해제시켰다. 이후 장제스가 공직에 복귀하자 1928년 5월 장제스에게 항복하였다. 서산회의파가 우한의 반장파를 규합하여 장제스에 대항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나 이때 청첸이 반대하여 서산회의파의 반장운동을 무산시켰다. 하지만 리쭝런과 양호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다가 5월 21일, 감금당하고 6군 군장에서 해임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차 장계전쟁으로 리쭝런이 호남에서 축출된 이후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35년 국방위원회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이 제출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 <민국 25년도 국방계획 초안>을 수정하여 1937년 1월 <민국 26년도 작전계획>을 심의하는 등 국방건설에 참여했다.

2.5. 중일전쟁 국공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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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급상장 시절의 청쳰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7년 하북성과 산동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되면서 우한 방위를 위해 뤄양, 카이펑, 정저우, 쉬저우를 연결하는 1전구 방어선이 설정되었는데 1937년 7월 청쳰은 1전구 사령장관 겸 하남성 정부주석, 천수 행영주임에 임명되어 뤄양에 사령부를 두고 2개 집단군 27개 사단, 30만 대군을 이끌고 5전구 사령관 리쭝런과 함께 일본군에 항전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격이 거세 타이얼좡, 쉬저우 회전에서 일본군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주고도 결국 쉬저우를 잃게 되었으며 이후 우한 방어전에서 리쭝런과 함께 최외곽 방어를 맡았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웨이리황에게 1전구 사령관 직을 내주었다. 1938년 1월 15일, 옌시산, 펑위샹, 리지선, 리쭝런, 천샤오콴과 함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39년 하남성 정부주석에서 물러났고 이후 충칭의 참모본부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이후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다.

중일전쟁 종전 이후, 1948년 4월 23일, 238명의 추천을 받아 쑨커, 리쭝런, 위유런, 막덕혜, 서부림과 함께 부총통 경선에 참여했다. 재난징호남성동향회 등 호남인들은 청쳰을 지지했고 4월 23일 오전의 투표에서 청쳰은 522표를 기록하여 3위에 이르렀으나 쑨커를 지지하는 광동인들의 견제를 받았다.[2] 4월 24일 결선투표에서 600표를 얻었으나 여전히 과반수 이상을 득표한 후보가 없었다. 결국 4월 28일의 2차 결선투표에서 리쭝런이 1156표, 쑨커가 1040표, 청쳰이 515표를 얻으면서 청쳰은 결선투표에서 탈락했다. 결국 4월 29일의 3차 결선투표에서 1438표를 얻은 리쭝런이 부총통에 당선되었다.

2.6. 중화인민공화국 합류와 말년

부총통 낙선 이후 호남성 정부주석 겸 장사 수정공서 주임에 임명되었고 1948년 12월, 하남성 주석 장진과 함께 호남, 호북, 하남, 광서 4개 성 참의회 의장을 규합하여 장제스의 은퇴와 공산당과의 협상을 주장하였다. 결국 장제스는 1949년 1월 1일 신년사를 발표하여 공산당과의 평화협상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자 1월 21일 하야했다.

1949년 7월, 제2야전군 4병단이 이창-사시 전투와 상간 전투에서 승리하여 호북과 호남에 이르자 8월 4일 청쳰은 1병단 사령관 천밍런과 함께 장사기의를 일으켜 공산당에 투항했다. 그 공으로 중앙인민정부위원, 국방위원회 부주석, 호남성 성장, 전국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중앙 부주석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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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9월 중난하이에서 마오쩌둥과 뱃놀이를 즐기는 청쳰

1952년부터 1967년까지 15년간 호남성 성장을 역임했으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당하는 것은 피했으나 정치적 실권을 모조리 상실했다. 이후 1968년, 베이징에서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1] 같이 유학했던 인물이 전계군벌 탕지야오다. [2] 난징의 구국일보는 청쳰을 옹호하며 쑨커를 비판했다가 광동인들의 습격을 받아 본사가 파괴되는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