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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2-04 15:50:26

창사 폭동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리리싼 노선의 고조화3.2. 폭동 준비3.3. 창사의 함락과 리리싼 노선의 절정3.4. 폭동의 실패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6.2.1. 1차 국공내전6.2.2. 반장전쟁6.2.3. 초공작전

1. 개요

1930년 7월 중국 공산당 호남성의 성도 창사를 점령하고 호남성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봉기. 당시 중국 공산당의 실권자인 리리싼이 주도한 리리싼 노선의 결과였고 난창, 주장 등 인근 도시들에 대한 공격도 동시에 진행되었으나 점령에 성공한 도시는 창사 뿐이었으며 나머지 공격은 실패했다 창사 역시 열흘만에 국민혁명군의 반격으로 도로 빼앗기면서 중국 공산당은 큰 타격을 입었고 리리싼은 실각한다.

창사 기의, 창사 봉기라고도 한다.

2. 배경

현재 당의 정치노선은 투쟁을 총집결시켜 군벌전쟁으로부터 국내의 계급전쟁으로 나아감으로써 국민당의 통치를 전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다.
1930년 2월 26일 70호 공고문

1928년 6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6차 당대회는 취추바이가 영도하던 기존의 취추바이 노선이 좌경모험주의, 맹동주의 오류라고 비판하며 취추바이를 총서기에서 실각시키고 샹중파를 새로운 총서기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샹중파는 특색없는 인물로 중국 공산당은 저우언라이 리리싼이 실질적으로 영도하게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의 역량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설정했으나 리리싼은 1929년 중동로 사건 이후로 좌경화되어 국민정부의 도시를 상대로 하는 총폭동 노선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것을 리리싼 노선이라고 한다.

리리싼은 경제대공황과 반장전쟁, 농촌혁명근거지의 확대[1]와 도시 노동운동의 부분적 회복현상을 미루어 새로운 혁명 고조기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1930년 1월 11일, 중공중앙 정치국은 '1929년 10월 26일에 국제공산당이 보낸 지시서한의 견해를 받아들일 것에 관한 결의'를 채택, 2월 26일 <현재 정치 형세와 당의 중심책략>이라 불리는 70호 공고문을 발부하여 "현재 위기는 날로 심화되고 있고 혁명의 새 물결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면서 도시와 농촌의 노농운동이 부분적 회복을 이루어 '균형적으로 발전', 다시 혁명의 고조기가 왔다고 판단, 소비에트를 수립하기 위한 폭동을 준비하게 된다. 1930년 3월에 저우언라이가 보고서 전달을 위해 소련으로 떠나면서 리리싼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 전개

3.1. 리리싼 노선의 고조화

1930년 4~5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는 정치파적 파업과 지방봉기, 내부반란을 계획하기 위한 회의에 돌입했고 리리싼은 <홍기>, <볼셰비키> 등의 당 기관지에 <새로운 혁명고조 앞에서의 제반 문제> 등 여러 글을 발표하였다. 1930년 옌시산이 봉기하여 중원대전이 일어나자 리리싼은 마침내 혁명정세가 성숙되었다고 판단, 1930년 5월 말에 상하이에서 중앙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2] 6월 11일 "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은 성숙되고 광범위한 노동대중의 혁명투쟁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혁명의 고조와 한개의 성, 또는 수개의 성에서의 우선적 승리>라는 테제를 통과시켰다. 리리싼은 정치국 결의를 통해 농촌에서 유격전을 벌이던 홍군을 집중, 장사나 우한같은 대도시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고 대도시 노동자들에게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전국적으로 중국의 경제, 정치의 근본적 위기는 계속 첨예화되고 있으며 전반적 정세는 모두 중국에서 새로운 혁명고조가 당도했음을 알리고 있고 따라서 혁명이 전국적인 승리를 거둘 확률이 크다. (...) 전례가 없는 세계 대격변 및 세계 대혁명의 시기가 우리 앞에 다가 왔고 중국 혁명이 일단 폭발하면 전 세계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중국 혁명이 이 최후의 결전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새로운 혁명의 고조와 한개의 성, 또는 수개의 성에서의 우선적 승리>

리리싼은 농촌에서 홍군을 조직하자는 마오쩌둥, 주더의 주장에 대해서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주요 도시의 무장폭동과 협력해 정권을 탈취하고 전국 혁명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설정하여 기존의 유격전술에 대해 뿌리채 고쳐야 한다고 교시, 홍군을 집중적으로 조직하여 대규모 공격을 개시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폭동이 성공한다면 열강의 자본으로 건설된 은행, 기업, 공장은 물론 중국의 자산계급의 재산도 모조리 몰수하여 노농독재를 실시하여 프롤레타리아 전정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리싼의 6월 11일자 정치국 서한에 대해 코민테른은 7월 23일 서한을 보내 승인하였다.
중국혁명 운동에 있어서 새로운 밀물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되었다. (...) 초창기에는 이를테면 대중의 투쟁이 시작부터 공업중심지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등의 취약점은 있기 마련이다. (...) 장차 정치적, 군사적 상황에 따라 한개 또는 몇개의 정치 산업중심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코민테른의 7월 23일자 서한

3.2. 폭동 준비

6월 11일의 정치국 회의는 또한 홍군의 각 군단 수를 감축하여 4개 군단으로 통합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에 따라 마오쩌둥과 주더는 6월 13일 강서와 복건의 부대 전체를 통합시켜 2만명 규모의 1로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로군은 6월 19일 1군단으로 개칭되었다. 그 외에 린뱌오의 4군과 6군, 12군도 모두 1군단에 통합되었다. 마오쩌둥의 경우, 지난 1년간 강서, 복건, 강소로의 확장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마오쩌둥의 이러한 제안은 중앙위원회의 반대로 부결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2월 초에 중앙의 노선과 별개로 강서성의 길안을 공격할 것을 결정한 상태였으며 중앙위원회가 강경해지는 것을 보고 상당히 흡족해했다.
"중국은 온 나라가 마른 나무로 뒤덮여 있으니 곧 세찬 불길이 타오를 것이다. (...) 한점의 불꽃이 온 들판을 테울 수 있다는 중국의 옛말이 맞다. (...) 현재 상황은 해안가에 서서 멀리 바다를 바라볼 때 수평선 너머 돛대가 보이는 배와 같고, 높은 산마루에 서서 멀리 동녘 하늘을 바라볼 때 사방을 환히 비추면서 막 솟아오르려는 아침해와 같으며, 또한 그것은 어머니 배속에서 꿈틀거리며 이제 곧 태어나려는 갓난아기와 같다."
마오쩌둥이 린뱌오에게 보낸 서신.

하지만 마오쩌둥은 농촌에서의 역량 확대와 유격전을 경시하는 리리싼의 관점에 반대하여 농촌을 가지고 도시를 포위한다거나 도시를 탈취하는데 홍군에 의지한다는가 하는 말은 터무니없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리리싼은 마오쩌둥의 마오쩌둥의 주장을 '복싱 전술'이라고 비웃으며 묵살했다.

리리싼은 7월 13일 난징 폭동계획을 수립하고 우한, 상하이, 항저우의 폭동을 위해 준비사업을 실시하였다. 7월 16일 리리싼은 코민테른 주석단에 서한을 보내 "군벌 전쟁의 혁명전쟁으로의 전환", "난징, 우한에서의 폭동", "상하이에서 총동맹파업의 실행과 우한폭동의 우선적 승리를 통한 전국 소비에트 정권의 건립"이란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요청하는 한편 같은날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 당조직을 통해 군중을 동원한 파업과 시위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7월 18일부터 23일까지 전국 조직공작 회의를 개최, 당 조직의 군사화를 결정하고 행동위원회를 성립하였다.

또한 리리싼은 펑더화이, 덩샤오핑의 홍군 3군단이 5군과 8군을 동원하여 우한-창사 철도를 차단하여 우한으로 진군하고 주더, 마오쩌둥의 홍군 1군단이 난창, 주장에 진입하여 장강을 차단하여 우한의 승리를 엄호, 허룽, 윈다이잉의 홍군 2군단과 장궈타오, 쉬샹첸의 홍군 제4군단이 협동하여 우한을 공격하고 홍군 제7군이 류저우, 구이린, 광저우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리리싼의 지시를 받게 된 전국 각지의 홍군은 즉각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6월 21일에 리리싼의 <새로운 혁명의 고조와 한개의 성, 또는 수개의 성에서의 우선적 승리>가 마오쩌둥에게 전달되었고 이에 따라 마오쩌둥은 바로 다음날인 6월 22일 난창과 주장 공격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3.3. 창사의 함락과 리리싼 노선의 절정

6월 말부터 홍군은 공세에 돌입했지만 7월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군사적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호남성의 성도 창사의 방위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창사는 6월 리쭝런 장파쿠이의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가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이 탈환했으나 허젠이 광서파 공격에 주력하기 위해 다시 창사를 비웠기 때문에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다. 이 기회를 틈타 펑더화이가 이끄는 3만의 홍군이 7월 27일 창사를 점령,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호응하여 창사는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갔고 7월 28일 리리싼을 주석으로 하는 장사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었다. 펑더화이는 창사에서 10일간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하여 대량의 군수품과 식량을 입수하였다. 리리싼은 크게 고무되어 8월 6일의 중앙행동위원회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했다.
"6월 11일 전국정치임무에 관한 중앙정치국의 결의안 중, 중국혁명 중의 하나의 특징은 중국혁명의 고조가 도래한 후, 필연적으로 전국적인 무장폭동의 형세가 잇따를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점은 이미 오늘날 보다 명백하게 되었다. 6월 11일 정치결의안은 불과 2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실제 투쟁 생활은 그것의 정확함을 완전히 증명하였다."

또한 8월 10일 장강국에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교시했다.
"신속하게 우한당의 영도역량을 발전시켜 적극적인 폭동을 조직하고 장강의 항로를 차단하여 우한 폭동을 원조하라. (...) 우한에서 부대가 합류하고 장강에서 말에 물먹이며 나아가면 전국적 승리를 거두는 목표가 곧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8월 14일 <현재의 시국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선언>을 발표, 29개조 저이강령을 제출하여 혁명적 국내전쟁의 시작과 제국주의 통치를 뒤엎을 직접적 행동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선포했다. 또한 중앙행동위원회를 지휘기관으로 삼아 각지의 무장폭동을 지휘하기로 결정, 공산당, 공청단, 공회 등을 각급 행동위원회로 합병하여 모든 하급기관의 행동을 중지시키고 우한, 난징, 상하이에서 폭동과 총동맹파업을 실시하며 우한에서 중앙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고 소련으로 하여금 만주와 몽골로 출병하여 중국 북방의 '반동파'를 공격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코민테른 역시 창사의 점령에 굉장히 환호하며 이를 칭송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1930년 7월 31일자 < 프라우다>는 <중국혁명의 중대한 성취>라는 사설을 통해 "중국 인민혁명 투쟁의 거대한 고조를 나타내는 아주 특별한 의의"라고 평가하며 "소비에트 정부를 건립하는 것은 이미 의사일정에서 중요 임무가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1930년 8월 7일자 <Inprecorr>지는 <창사의 점령>이라는 기사를 내보내 "중국혁명사에 있어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1927년 12월 광동 소비에트 이래 처음으로 대공업 도시가 혁명적 노동자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소도시와 소비에트 농촌들의 한가운데에 이제 그들의 중심기지로서 대도시가 우뚝 솟게 된 것이다. 이 승리로 인해 전체 혁명운동 전반에 있어서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지도역량은 크게 강화되었다."라고 보도했다. 1930년 8월 10일자 <Kommunisticheskii Internatsional>지도 "소비에트 운동은 스스로의 투쟁논리에 따라서 공업과 행정의 중심 도시를 공략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만, 프롤레타리아 당에 의해서 수백만 농민에 대한 지도력을 확보하는, 노동자와 농민운동의 완전하고 조직적인 결합을 성취할 수 있다."고 창사의 점령을 칭송했다.

하지만 창사가 공산당의 지배 아래에 놓인 것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8월 3일 허젠이 장사 서쪽에서 해군과 협공하여 5일에 장사 전역을 탈환했고 펑더화이는 동북의 평강, 유양 일대로 퇴각했다. 국민정부는 8월 16일 강서와 호남의 공산군 소탕을 명령하였다.

3.4. 폭동의 실패

마오쩌둥은 주더와 함께 7월 31일 난창을 공격했지만 방어가 견고했던 난창은 홍군의 공격에 맞서 24시간이나 치열하게 저항했고 도시를 도저히 점령할 수 없어 8월 1일에 공격 중지를 결정하고 퇴각했다. 마오쩌둥은 잔존병력을 3종대로 재편하여 우한을 향해 퇴각, 8월 20일, 홍군 1군단은 문가시에서 국민당 3개 단을 전멸시키고 국민정부군 여단장 대두원(戴斗垣)을 사살했다. 또한 8월 23일 홍군 1군단은 호남성 유양현 영화시에서 창사에 대한 재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펑더화이와 합류했다. 이들의 병력을 합치면 2~3만에 달하는 병력이 있어 한번 해볼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홍군 1군단과 3군단은 홍1방면군으로 통합 개편되어 주더가 총사령관, 마오쩌둥이 총전선위원회 서기 겸 총정치위원을 맡았다.

마오쩌둥, 펑더화이, 주더는 8월 31일 창사를 다시 공격하였다. 하지만 창사의 노동자들은 홍군에 냉담하였으며 창사에는 국민혁명군의 중포, 비행기, 해군 함정들이 집결해 있어 고작 반 정도만이 소총으로 무장할 수 있던 홍군의 빈약한 공격을 손쉽게 격퇴했다. 마오쩌둥은 9월 2일 3차 공격에서도 실패하였고 9월 13일까지 2~3천에 달하는 많은 병력을 잃었다. 심지어 주더조차도 부상을 입었다. 마오쩌둥은 창사를 공격하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 호남, 강서의 성경에 따라 길안으로 철수하여 강서 남부의 근거지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원주까지 후퇴, 중공중앙 장강국 군사위원회 책임자 저우이리가 창사를 다시 공격하라는 당중앙의 지령을 전달하자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설득하여 창사나 난창에 대한 공격을 모두 거부하고 공략이 쉬운 강서성의 길안을 공격하기로 당중앙의 승인 없이 결정하였다.

그외에 전국적으로 혁명고조기가 왔다던 리리싼의 판단과 달리 노동자와 농민들은 대부분 공산당의 폭동에 냉담하여 전국적으로 1~2천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호응하였을 뿐이며 만주, 하남, 산서, 섬서, 한동, 호북, 복건, 절강, 광동, 호남 등의 10여개 성위원회 기관이 파괴되고 우한, 난징의 당 조직이 와해되어 중국 공산당의 주장에 따르면 지도자급 위원들을 포함하여 수백명의 당원이 체포, 처형되었다.[3]

4. 결과

홍1방면군은 강서성으로 퇴각, 10월 4일 길안을 점령하여 강서성 서남부에서 30여개 현에 달하는 근거지를 확보하고 강서 소비에트 정부의 성립을 선포했다. 한편 리리싼은 코민테른에게 좌경 모험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몰락하여 리리싼 노선은 종결되고 중국 공산당은 왕밍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한편 공산당의 도발에 국민정부는 1930년 11월 제1차 초공작전의 실시를 결정하면서 초공작전이 시작되었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6.2.1. 1차 국공내전

6.2.2. 반장전쟁

6.2.3. 초공작전


[1] 반장전쟁으로 국민당의 농촌 통제력이 약화되어 마오쩌둥의 강서 소비에트를 비롯, 중국 곳곳에서 15개 혁명근거지가 형성되었다. [2] 마오쩌둥과 주더도 참석을 부탁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오쩌둥과 주더는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명예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3] 난징시 위원회와 시행동위원회만 해도 6명의 위원이 체포되었으며 15개 지부가 파괴되고 100명이 체포, 100명이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