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고일명(高一鳴) |
출생 | 1911년 4월 18일 |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매화동 (현 황해남도 은천군 매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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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3년 5월 8일 |
강원도 원주군 자택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20호 |
상훈 |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
군사 경력 | |
임관 |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 육군사관학교 (2기) |
복무 | 중국군 |
1936년 ~ 1939년 | |
광복군 | |
1939년 ~ 1946년 | |
대한민국 육군 | |
1946년 ~ 1953년 | |
최종 계급 | 준장 (대한민국 육군) |
참전 |
중일전쟁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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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1977년 건국포장)2. 생애
1911년 4월 18일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1927년 일본 중경상업학교에 들어가 1931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들어가 1936년 제10기로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였다. 중국군 9사단에서 복무하며 중일전쟁에 참전하였고,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원으로 서안에 파견해 사병모집, 훈련, 정보수집, 선전, 정찰, 유격전 등의 활동을 하였다.1940년 광복군 창설 이후에는 제2지대에서 활동하였고, 1942년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원 및 내무부 총무과장, 1944년에는 민정과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5월 심리작전연구실 주임을 맡아 일본어 관계 업무를 전담하여, 전단 작성, 방송, 원고 작성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방 후 1946년 2월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2기를 졸업하고, 육사 행정부장을 역임했고, 1949년 7월 7연대 연대장으로 오대산 일대에서 공비를 소탕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제6보병사단 참모장으로 춘천-홍천 전투에서 활약했다. 제9보병사단 창설 직후에는 30연대 초대 연대장을 맡아 경북 상주, 문경, 영주의 인민군 패잔병 소탕 및 지역 평정을 수행했다. 1953년 4월 27일에는 서울지구병사구사령관(현 서울지방병무청장)에 임명되었으나 5월 8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1] 사후 동년 5월 24일 준장으로 추서했다.
3. 가족관계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붕준의 사위이다. 아내인 김정숙도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43년 백범 김구의 중매로 결혼했으며, 심리작전연구실에서 한국어 관계 업무를 전담하며 같이 활동하였다. 장모이자 김붕준의 아내인 노영재는 1990년 96세의 나이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아 당시 최고령 건국훈장 수여자가 되었다.4. 참고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독립운동사 6권, 206쪽, 368쪽.
조선일보, 고려 망국노 설움 속 독립 꿈 키웠지요, 1989년 8월 13일자, 9면
조선일보, 서울병사사령관 고시복 대령 영면, 1953년 5월 11일자, 2면
[1]
국립묘지 묘비명에는 전사로 표기되었으나 전쟁기념관 전사자명부에는 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