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18:46:56

지복영

<col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aaa
가네코 후미코 강원신 강혜원 공백순 권기옥
권애라 김경화 김덕세 김도연 김마리아¹
김마리아² 김란사 김순애 김알렉산드라 김자혜
김점순 김정숙 김조이 김향화 김효숙
남자현 동풍신 민영주 박계남 박신애
박원희 박자혜 박차정 박현숙 방원희
부덕량 부춘화 신마실라 신순호 신의경
신정숙 심영신 안경신 안영희 양방매
어윤희 연미당 오건해 오광심 오희영
오희옥 유관순 유순희 윤용자 윤희순
이병희 이신애 이의순 이혜련 이효정
이희경 장매성 장선희 전수산 전월순
정정화 조마리아 조순옥 조신성 조화벽
주세죽 지복영 차경신 차미리사 차보석
최선화 최용신 최정숙 홍애시덕 황마리아
황애시덕 천소악
}}}}}}}}} ||
파일:건국훈장애국장약장.jpg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0 -10px;"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파일:건국훈장애국장.jpg
가네코 후미코 강경근 강계선 강관수 강귀손 강근호 강기찬
강길환 강달주 강덕보 강동렬 강두필 강만식 강만형
강명선 강명희 강문진 강문영 강병관 강병근 강병욱
강병일 강봉우 강봉학 강봉환 강사문 강상봉 강상호
강서희 강석대 강석봉 강석진 강석훈 강성리 강수오
강수원 강순성 강순희 강승경 강승덕 강시만 강신경
강양성 강양오 강연상 강영갑 강영삼 강영수 강영승
강영식 강우범 강운학 강원호 강윤국 강이진 강인수
강일봉 강재천 강정하 강제억 강제희 강종근 강준익
강준학 강진구 강진남 강진석 강진선 강진여 강찬중
강창규 강창보 강철규 강춘근 강춘삼 강태동 강태성
강태영 강태일 강택진 강필주 강학서 강한수 강한용
강혜원 강화순 강흥문 강희경 강희옥 견관덕 경권중
경현수 계동화 계석노 계성근 계영기 계용순 고강산
고광채 고광훈 고대선 고덕린 고덕수 고두일 고득수
고병희 고봉준 고사훈 고석진 고성한 고승득 고시복
고앙주 고영신 고예진 고용진 고용환 고웅주 고원직
고윤한 고융건 고응남 고응칠 고익규 고인식 고인재
고정식 고제남 고제신 고진홍 고창희 고채주 고치범
고판홍 고형림 고희순 공덕흡 공사겸 공사일 공석두
공성찬 공심연 공영팔 공예수 공재형 공준서 공창준
곽경렬 곽낙삼 곽낙원 곽무 구찬회 권득수 김광섭
김규식 김도연 김동식 김동진 김백선 김알렉산드라 김윤경
김응삼 김이원 김재헌 김정익 김준연 김준엽 김양수
나경서 나봉산 나사진 나상원 나상필 나선도 나성화
나수범 나순익 나순호 나승렬 나신택 나영관 나용균
나운규 나의집 나장헌 나정련 나정문 나정화 나종헌
나창운 나희규 남경숙 남계병 남광원 남궁욱 남궁현
남규천 남기동 남기영 남도경 남복이 남상규 남석순
남석술 남세극 남승하 남영진 남왈성 남용순 남원수
남위 남정 남지학 남진두 남태영 노간선 노공일
노광엽 노기영 노내화 노덕세 노도원 노동식 노명이
노병한 노병희 노봉돌 노봉우 노봉현 노석정 노석중
노섭 노성삼 노성원 노성환 노식삼 노영재 노영화
노우선 노재철 노진룡 노치흠 노태연 노하순 노한문
노형규 노환 노희태 도대원 도무환 도병철 도복렬
도중삼 독고무 동민수 동증손 동풍신 루이 마랭 마남룡
마만봉 마용필 마정덕 마정삼 마춘걸 마하도 맹군삼
맹기정 맹달선 맹달섭 맹철호 명도석 모신영 모원규
모원봉 모인화 모충이 목자상 문경록 문남규 문덕길
문덕홍 문동길 문명국 문명주 문무술 문봉래 문봉의
문석조 문석준 문석환 문성각 문성초 문승수 문신영
문영박 문영삼 문용기 문응국 문장호 문재교 문종희
문창선 문치룡 문치백 문학도 문학신 문한범 문홍순
문홍의 문화순 민가현 민동식 민백형 민병길 민병숙
민병태 민수현 민영수 민영숙 민영완 민영주 민영학
민용운 민제호 민찬호 민철훈 민충기 민충식 민치도
민치영 민한식 박갑쇠 박건 박건두 박경락 박경석
박경철 박계락 박관준 박광 박광선 박광천 박구진
박권세 박권영 박귀성 박규명 박규상 박규채 박규호
박근이 박금룡 박기국 박기범 박기수 박기양 박기영
박기운 박기원 박기춘 박길양 박내병 박내원 박내준
박노삼 박노영 박달천 박대인 박대일 박대중 박덕삼
박덕언 박덕여 박도집 박도현 박동규 박동원 박동의
박동주 박동진 박동환 박래봉 박래승 박만선 박만옥
박만화 박맹두 박명규 박명서 박명화 박무 박문거
박문도 박문서 박문섭 박문술 박문용 박문호 박문화
박민홍 박반문 박발술 박병강 박병규 박병익 박병하
박병한 박병호 박병훈 박보국 박복인 박봉관 박봉길
박봉래 박사문 박사범 박사손 박상규 박상기 박상도
박상엽 박상진 박상하 박석용 박현숙 방정환 방한민
배치문 배헌 백남훈 백초월 사문성 서광도 서기준
서기환 서단파 서달선 서동성 서두성 서병순 서병철
서병호 서봉화 서삼진 서상경 서상기 서상락 서상렬
서성군 서성실 서성일 서성학 서소용 서여선 서영백
서영연 서영해 서왈보 서용하 서운선 서윤봉 서윤호
서윤화 서인봉 서장관 서장환 서재기 서재승 서재현
서정기 서정만 서종락 서진구 서창무 서태석 서학이
서한종 석근영 석기만 석기호 석대운 석만금 석오석
석창륜 석창문 석환옥 선경화 선규환 선도명 선백중
선우기 선우섭 선우진 선우택범 설성삼 설진창 성경삼
성경호 성낙붕 성낙중 성낙희 성만리 성만석 성선조
성재평 성재한 성정모 성주경 성진갑 성진호 소갑호
소윤명 소진형 소후옥 소휘천 손건주 손계묵 손계조
손덕화 손두원 손명선 손명조 손몽상 손무경 손병선
손복산 손봉선 손성 손성우 손성원 손성한 손수용
손수조 손승관 손양섭 손영학 손용준 손일민 손일봉
손재순 송몽규 송상도 신하균 안경순 안경준 안관순
안광선 안교봉 안구현 안국길 안군명 안내성 안동식
안두식 안명순 안무순 안병기 안병석 안병준 안병찬
안봉생 안봉선 안봉순 안상용 안상의 안선국 안세진
안숙 안순구 안순서 안순원 안영희 안용국 안용석
안용택 안유순 안윤재 안이현 안인택 안일룡 안장길
안정길 안정명 안정옥 안종각 안종구 안종락 안종린
안종식 안종엽 안종운 안종환 안종후 안중석 안진순
안찬재 안창남 안창렬 안창률 안창제 안최언 안치삼
안택환 안필순 안학룡 안항식 안혁중 안홍 안효준
안후덕 양경삼 양계갑 양도명 양도준 양도헌 양동훈
양병칠 양봉규 우기주 유우석 유자명 유진동 유종환
이경채 이남규 이만집 이범진 이병기(1876) 이병기(1891) 이석영
이성구 이영환 이용태 이운강 이육사 이원순 이은상
이재천 이정호 이탁 임규 장경춘 장경탁 장계진
장관청 장광옥 장국호 장군선 장규섭 장규현 장규황
장금송 장기덕 장기석 장기영(1890) 장기영(1903) 장낙수 장남수
장덕기 장덕로 장덕유 장덕익 장도정 장두언 장명언
장명운 장병구 장병준 장복규 장복흥 장본래 장봉규
장봉래 장봉의 장봉주 장봉학 장봉현 장부암 장붕
장빈삼 장사천 장석천 장석함 장선군 장성순 장성원
장성오 장세용 장세전 장세정 장세파 장세현 장수봉
장순영 장승열 장신국 장여좌 장영준 장응규 장의선
장의찬 장의천 장이호 장익부 장익수 장익염 장익준
장인국 장인서 장준하 정광호 정일형 조봉호 조신성
조응삼 조희제 지복영 차경수 차경신 차경현 차금봉
차도순 차도연 차동석 차병곤 차병규 차병률 차병선
차병한 차봉엽 차연욱 차영철 차영필 차왈보 차용목
차운흥 차원몽 차은표 차인범 차일빈 차재문 차정룡
차정섭 차정집 차진규 차진하 차치명 차학구 채경묵
채경옥 채규대 채남섭 채덕만 채덕승 채동집 채동환
채복만 채봉선 채봉준 채수반 채영서 채영찬 채용환
채운걸 채이석 채정옥 채중보 채창헌 채태묵 채한석
천경도 천보락 천성십 천순호 천홍태 최갑룡 최능익
최윤동 최효일 탁성룡 탁영조 탁일청 탁창국 탁한종
패트릭 도슨 편군선 편덕렬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하덕근 하돌임 하상태
하승현 하영옥 하운택 하찬린 하한서 한갑복 한경서
한경석 한경천 한경희 한계석 한국언 한국원 한규량
한규순 한금원 한기석 한기악 한기안 한대홍 한덕용
한도원 한동진 한득주 한락산 한면각 한명만 한명순
한문기 한문백 한성수 허석 홍원유 홍원표 황직연
}}}}}}}}}}}}}}}
파일:지복영.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지보경(池寶慶)
본관 충주 지씨[1]
출생 1920년 4월 11일
경기도 경성부 삼청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사망 2007년 4월 18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고려대학교 안산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56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독립운동2.3. 이후의 경력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독립유공자 지청천의 차녀이자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의 모친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지복영은 1920년 4월 11일 경기도 경성부 삼청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아버지 지청천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용자[2] 사이의 2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그녀에게 붙여진 '복영(復榮)'이라는 이름은 모친이 남편을 만나기를 소망한다는 뜻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지청천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지청천의 가족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갈수록 심해지자, 그녀는 어머니와 3남매와 함께 1924년 만주로 이주했다.

지복영은 6살 때 검성중학교 부속 소학교에 다니며 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동안 거주지를 여러번 변경했기에, 그녀는 만주에서 1~2년 마다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학업을 꿋꿋이 이어갔다. 만주사변 후 가족과 함께 낙양군관학교 입학생들과 함께 중국 관내로 이주한 그녀는 중국어를 잘해 중국인 행세를 하며 살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중국인 귀화 권유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내 나라가 주권이 없어 지금 중국에서 유랑생활을 하지만 조선은 반드시 독립된다고 믿는다. 그러면 내가 떳떳이 한국 사람으로 살 수 있는데 무엇이 답답해서 중국인으로 살겠느냐.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진강,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기강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이동했다. 지복영은 난징의 중국 학교에서 재학하다가 임시정부를 따라 피난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피난 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했다.

2.2. 독립운동

이후 18살이 된 그녀는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1937년 8월 중국 남경에서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및 미주의 몇 단체들이 연합하여 조직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의 후신이었다. 청년공작대원은 34명이었는데, 이 중 여성대원은 지복영을 포함해 11명이었다. 그들은 주로 한국과 중국인들의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선전활동은 거리 선전, 연예와 항일 연극, 대규모 공연, 합창 등을 통해 이뤄졌다.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을 때, 지복영은 오광심, 김정숙, 조순욱, 민영주, 신순호 등과 함께 여성 광복군으로 참여했다. 이들을 주로 사령부의 비서 사무 및 선전 사업 분양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서안총사령부에 가담해 오광심, 조순옥과 함께 선전조를 맡았다. 그녀는 적 후방에 있는 교포들을 모집하고 독립 운동을 알리기 위해 1941년 2월 잡지 <광복>을 발간했다. <광복>은 한국어본과 중국어본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한국어판 창간호 필자들은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지청천, 황학수, 김학교, 이복원, 김광, 지복영, 오광심 등이었다. 그녀는 <광복>에 '대시대는 왔다. 한국 동지들아 활약하자'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해 한국 여성들의 광복군 입대를 종용했다.
한국 이천 삼백만 민족의 반수를 차지한 여성 동포들이 조국을 광복하고 신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한 역군이라는 것을 범 한국 사람은 다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중 삼중의 압박에 눌리어 신음하던 자매들! 어서 빨리 일어나서 이 민족해방 운동의 뜨거운 용로 속으로 뛰어오라. 과거의 비인간적 생활은 여기서 불살라 버리고 앞날의 참된 삶을 맞이하자. 흑암 중에 서광 - 한국광복군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봉화는 붉고 맑게 빛난다. 이에 모인 혁명 동지들은 뜨거운 손길을 내어 밀고 열정에 넘쳐 속히 속히 달려옴을 기다리고 있다. 오라! 와서 힘을 뭉치여 적을 부시고 새집을 세우고 새로운 삶을 찾자!

또한 그녀는 김구의 글과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 전문' 등을 번역하여 <광복>에 실었다. 그리고 1942년에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초모위원 겸 비서로서 안휘성 부양에서 활동했으나 도중에 결핵에 걸려 후방에 배치되었다. 이후 1944년에 임시정부 선전부 자료과와 선전과에 복무하면서 대적방송 담당 요원으로서 선전방송을 하고 원고를 작성했으며, 소령으로 진급했다. 1945년 4월엔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및 조리원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2.3. 이후의 경력

지복영은 1946년 5월 귀국 후 서울대학교 도서관 사서를 맡았고, 1950년 6.25 전쟁 중에 결혼하여 첫 딸을 출산하고 부산 화교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이후 한국광복군 동지회 이사,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상무이사를 맡았으며, 저서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를 출간했고 사후에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이 출간되었다. 2007년 4월 18일, 지복영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고려대학교 안산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그녀의 유해는 2007년 4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지복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1] 경력공파 33세 수(洙)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큰오빠인 지달수(池達洙)가 항렬자를 썼다. [2] 윤기희(尹基喜)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