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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37:52

차병곤

성명 차병곤(車炳坤)
생몰 1928년 5월 15일 ~ 1945년 9월 9일
출생지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
사망지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차병곤은 1928년 5월 15일에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산진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동북 지방으로 갔다가 1943년 귀국하여 조선청년독립당을 결성한 이관수(李觀洙)와 교류하며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1943년 봄 부산실천상업학교에 재학하던 중 동창생인 신정호(辛正浩), 박정오(朴禎五), 정오연(鄭五然)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했다. 그는 독서회에서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의 비교와 그 앞날'이란 주제 발표와 토론을 통해 일제의 패망과 조국 독립에 대해 확실히 인식하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독서회원들은 동지를 포섭해 조직을 확대하고 보다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44년 5월 1일 순국당(殉國黨)으로 개편했다. 순국당의 강령은 ‘민족독립,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다’였으며, 행동 목표로 총독 처단, 군사시설 파괴, 일인 집단거주지 방화 등을 정했다.차병곤은 순국당의 당수로 활동하며 박정오, 신정호 등과 함께 부산 시내 영도다리에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여기엔 공작창에서 같이 근무하던 일본인 노동자 아사모토(朝本)도 함께 했다.

그러나 총독 처단, 군사시설 파괴 등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자, 그들은 중국으로 넘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대한광복군에 참가하기로 결의하고 해외 망명을 추진했다. 1944년 7월 1차 선발대로 차병곤 등이 국경을 넘어 중국 길림에 무사히 도착했고, 뒤이어 2진이 출발했다. 그러나 2진 멤버들은 함경남도 영흥에서 덜미를 잡히고 말았고, 차병곤 등 역시 1944년 7월 28일에 체포되었다.

체포 후 국내로 압송된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그러나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인해 출옥한 지 한달도 못된 1945년 9월 9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는 차병곤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결정하고 부산진교회 주관으로 진행했다. 그의 유해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지만, 현재 건물들이 들어서서 공동묘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에 차병곤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섷썌고, 1995년에 건국후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