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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 1888년 11월 3일 |
함경도
정평도호부 부춘사 조양리 (現 함경남도 정평군 조양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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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0년 2월 24일 (향년 71세) |
경상남도
부산시
영도구 (現 부산광역시 영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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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진주 강씨 |
부모 | 아버지 강형석, 어머니 신해운 |
배우자 | 이정희(1932~2016)[1] |
자녀 | 아들 강귀철, 딸 강정화 |
학력 | 신흥무관학교 (졸업)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61호 |
서훈 |
건국포장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8기)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1949년 ~ 1956년 | |
최종 계급 | 중령 (대한민국 육군) |
참전 |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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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해방 이전
1888년 11월 3일 함경도 정평도호부 부춘사 조양리에서 아버지 강형석(姜亨錫)과 어머니 신해운(申海雲)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함흥중학교에 진학했는데, 함흥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6년 배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자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길림성 연길현 육도구 용정촌[2]의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유하현(柳河縣) 제3구(第三區) 고산자가(孤山子街) 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大肚子)[3]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강근호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에 가담해 사관연성소 교관과 구대장을 지냈으며, 1920년 9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제1중대장으로 참전해 활약했다. 이 후 일제가 독립군의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해 간도 참변을 단행하자, 그는 대원들과 함께 러시아의 자유시로 후퇴했다. 그러나 1921년 6월에 벌어진 자유시 참변 이후 러시아 적군에 편입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이르쿠츠크에 있던 고려혁명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그는 1922년 공산주의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석방되자마자 중국으로 탈출해 길림성 일대에서 유랑 생활을 하다가 용정촌에 머물며 관내 영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는 연길현에 있던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소에서 교관으로 있으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2.2. 해방 이후
1947년 조국으로 귀국한 그는 경기도 수원군에 있던 대한민족청년단 중앙 훈련소의 교관으로 있다가 1949년 2월 육군사관학교에 8기로 입교했다. 그러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참전했고, 대한민국 육군 제103사단 113연대장을 맡았다.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이시영의 증손녀이자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이정희를 만났고, 1953년 연병장에서 그녀와 결혼해 아들 강귀철과 딸 강정화를 낳았다.1956년 중령으로 예편한 강근호는 경상남도 부산시 영도구에 정착했고, 1960년 2월 24일 사망했다. 향년 72세. 그는 생전에 "청산리 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고 한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강근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0년 12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4. 여담
그의 활동기록은 해운대 장산에 있는 모정원이라는 건물에 있다. 그의 아내인 이정희 여사가 강근호 선생 사후에 장산에서 장산개척단을 꾸리면서 산림녹화와 퇴역 군인 생활 지원을 했고, 이 과정에서 그의 유해를 장산에 이장하기도 했다. 이후 모정원은 이정희 여사가 2014년 사망하면서, 강근호 선생의 독립운동 기록물을 전시하는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참고로 해운대 장산에 위치한 군부대인 제126보병여단에선 강근호를 중요시하며 해마다 장병들이 모정원에 참배하러 가며 정신전력교육 기간에 그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