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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22 21:15:02

장이호

파일:장이호.jpg
성명 장이호(張利浩)
본관 인동 장씨
생몰 1916년 ~ 1950년 9월 25일
출생지 평안북도 신의주시
사망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이호는 1916년생이며,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이다. 그는 19살 때 중국으로 망명한 뒤 중국군관학교 한청반에서 4년간 간부훈련을 받았고, 1943년 3월 쉬저우지구에서 김병학(金炳學)·박상기(朴相基) 등과 의기투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1944년 김병학, 박상기와 함께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기밀 탐지와 지하공작 등을 전개했다. 1944년 광복군 제3지대 분대장이 되었으며, 그해 12월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 모집 활동을 전개해 김준엽, 장준하 등 일본군에게 강제로 징집되었던 조선인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해방 직전에는 쑤저우지구 일본군 부대에 배치된 조선인 학도병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한미합작 특수훈련을 받았지만 일제가 항복하면서 작전이 취소되었다.

장이호는 8.15 광복 후 쑤어주지구 군사특파원단으로 파견되어 한인 동포들이 국내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왔고, 1946년에 국내로 귀국해 1947년 서른 살에 열 살 아래인 송정숙과 결혼했다. 그는 김구 등이 결성한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가 대한민국 정부 출범 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감시 대상으로 낙인찍혀 형사들의 감찰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는 발표를 믿고 피난가지 않았다가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한 뒤 고초를 겪었다. 그러던 1950년 9월 25일, 그는 인민군에게 끌려가 성북경찰서 뒷편 돌산에서 총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이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