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15년 6월 18일 |
강원도
울진군
삼화면 명도리 621번지 (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명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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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년 6월 11일[1] (향년 29세) |
경상북도 대구부 대구형무소 | |
본관 | 광주 노씨[2] |
창씨명 | 미쓰야마 카쥰(光山夏淳) |
자 | 몽룡(夢龍) |
호 | 창유(暢幽) |
묘소 |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명도리 아산마을 |
상훈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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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915년 6월 18일 강원도 울진군 삼화면(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명도리 621번지에서 아버지 만송(晩松) 노종만(盧鍾萬, 1874.4.16. ~ 1937.1.25.)[3]과 어머니 영양 남씨(1870.2.8. ~ 1964.7.20.)[4]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3년간 한학을 수학했고, 이후로는 농업에 종사했다.1938년 4월 12일 울진군 울진면 죽변리[5]에 거주하는 사덕수(史德洙)의 집에서 임시헌, 남원수, 전찬문(田燦文), 장세전, 최효대 등 울진군 출신 인사들과 모여 준향계(準香契)를 조직했다. 이후 일본 제국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하여 소규모 조직 형태로 운영되었고, 반일 선전활동 및 조직의 내부 결속 강화에 주력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 제국이 반드시 불리한 처지에 놓일 것으로 예상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 조선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또한 6차례 모임을 가진 뒤 이두연, 주영석, 주예득(朱禮得) 등을 동지로 포섭했다.
한편, 1939년 10월 28일 준향계와는 별도로 임시헌, 남원수, 주영석, 남정성, 전원강 등 울진군 출신 인사들과 함께 준향계와 유사하게 소규모 조직 형태의 창유계(暢幽稧)를 조직했다. 그러나 1943년 3월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동지 101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준향계와 창유계 모두 와해되었다. 이후 22명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16명이 그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1944년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 1944년 7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6]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던 1945년 6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