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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광섭(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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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창씨명 | 카네보시 코우쇼(金星珖燮) |
호 | 이산(怡山) |
본관 | 전주 김씨[1] |
출생 | 1904년 9월 22일[2] |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송신동 (현 함경북도 어랑군 어대진노동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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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7년 5월 23일 (향년 72세)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삼부아파트 자택 | |
학력 |
경성공립보통학교 (졸업) 중앙고등보통학교 (중퇴) 중동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 영문학 / 학사)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1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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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시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4년 9월 22일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송신동(현 어랑군 어대진노동자구)에서 김인준(金寅濬)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운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거주하였으며,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하고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진학하여 1932년 3월 졸업했다.귀국 후 1933년 4월부터 모교인 중동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에 채용되어 교사 재직 중에 꾸준히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는데, 1939년 3월 3학년 을조 교실 학생들에게 " 일본인과 조선인은 모두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에 차별이 있었고, 일본인이 조선에 도항하는 것은 자유롭지만 조선인은 허가 없이는 일본에 도항할 수 없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조선인에게 자유를 주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조선인을 용인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몰래 조선의 독립을 기도해야한다"며 학생들이 일제의 민족차별정책에 대해 자각하도록 동기를 심어주었고, 1940년 6월에는 4학년 갑조 학생들에게 "중동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의 폐지는 조선어의 근절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다. 하지만 조선민족이 존속하는 한 조선어는 절멸해서는 안된다"며 조선어말살정책을 비판하였다.
또한 1940년 9월에는 같은 교실에서 이광수와 이태준을 들어 '조선에서의 민족주의자'로 소개하고는, "조선인으로서 위 두 인물을 알고 그들의 작품을 접할 필요가 있다"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같은 달 "이번에 한글신문인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가 조선총독의 탄압에 의해 폐간당했는데, 두 신문의 폐간이 조선 문학의 근절을 목표로 한 것이라 본다면 이는 조선인을 문맹화하려는 첫걸음인 것을 알 수 있다"며 일제의 언론탄압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
결국 그는 1941년 2월 21일, 이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고 1942년 5월 31일에서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에 회부되었다. # 결국 그해 9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그해 11월 30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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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월 1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44년 11월 30일 만기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후 미군정청 공보국장으로 근무했으며,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결성되자 창립총회에서 출판부장에 선출되었다. #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첫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1951년 사퇴 후 대전에서 대전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58년 10월에는 세계일보[3] 발행인에 취임하였다. #
한편, 1952년부터 1970년까지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작품활동을 이어나가던 중 1977년 5월 23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삼부아파트 자택에서 지병인 뇌졸중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
김광섭 시인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0년 11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그가 지은 시로는 1966년 지은 ' 성북동 비둘기'가 대표작이다. 현대 문명의 삭막함을 노래한 시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김광섭 개인의 경험과도 관련이 있는데 시를 쓰기 전인 1961년부터 김광섭은 성북동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당시에는 성북동에 채석장이 있었다. 성북동이 현대의 부촌으로 바뀐 것은 1970년대 후반 이후이다.
그의 시 '저녁에'는 1970년 김환기 화백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1980년 유심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곡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