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길주군 일대의 독립운동가, 박봉길
성명 | 박봉길(朴鳳吉) |
생몰 | 1884년 ~ 1920년 9월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함경북도 길주군 웅평면 남양동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박봉길은 1920년 음력 7월부터 2개월 동안 함경북도 길주군 일대였던 야단대 의연대장이었던 김원식(金元植)의 부하로서 군자금 모집과 대원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길주군 남일동에 독립단지부를 설치하여 하종(金河鍾)을 지부장으로 하고 기타 10여 명을 단원으로 임명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1920년 9월경 의연대원 남학(南鶴)· 허경래와 함께 길주군 웅평면 남양동의 여관에서 묵던 중 일본 사복 경관의 단속을 받았다. 그는 이에 불응하여 경관과 교전했지만 끝내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박봉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양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봉길
성명 | 박봉길(朴奉吉) |
이명 | 박한경(朴漢卿) |
생몰 | 1902년 4월 22일 ~ 1960년 2월 2일 |
출생지 |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오빈리 |
사망지 | 경기도 양평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박봉길은 1902년 4월 22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오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했으며, 1920년대에 경성출판노동조합(京城出版勞動組合) 집행위원 및 중앙청년동맹(中央靑年同盟)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1021년 9월 9일 야단회원(野團會員)의 군자금모집활동에 연루되어 허경래(許炅淶)‧박룡삼(朴龍三)‧김원식(金元植)‧남홍윤(南弘允) 등과 함께 징역형을 받고 항소했지만 1921년 10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8년 신간회 결성지회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 7월 경성지회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운동에도 힘을 쏟았고 고려공산청년회 후계간부 조직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930년 소위 조공재조직준비위원회 검거사건(朝共再組織準備委員會 檢擧事件)’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는 양평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0년 2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박봉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