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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오카다 에이가쿠(岡田泳學)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916년[2] 5월 8일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신흥리 | |
사망 | 1945년[3] 1월 5일 (향년 28세) |
일본령 동인도 자바 섬 세마랑 주 암바라와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2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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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영학은 1916년 5월 8일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신흥리에서 아버지 민풍호(閔豐鎬, 1881 ~ 1966)와 어머니 창녕 성씨(1884 ~ 1969)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42년 5월 3천 여명의 한인 청년들과 함께 강제 징용되어 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陸軍釜山西面臨時軍屬敎育隊)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고 1942년 8월 동남아시아로 출발했다. 이후 9월 14일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딴중 쁘리옥(tanjon priok) 항구에 도착한 그는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자바섬에서 1,400명의 한인 포로감시원들과 함께 포로 감시 임무를 수행했고 1944년 6월 2년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한인들을 조국에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에 한인들은 1944년 12월 24일 지도적 역할을 하던 이활(李活)을 중심으로 자바 섬 세마랑 주 스모워노 고원지대에서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했다. 그는 노병한 (盧秉漢), 손양섭(孫亮燮), 조규홍(曺奎洪)과 함께 여기에 참여했다. 이들은 자바 섬 중부 암바라와(Ambarawa)에서 고려독립청년당원으로서 지하 공작을 수행했다.
그러던 1945년 1월 3일, 그를 비롯한 여섯 명의 동지들은 일본군으로부터 말레이 포로수용소로 전속 명령을 받았다. 손양섭은 갑작스런 전출 명령에 고려독립청년당 조직의 정보가 일본군들에게 누설된 것으로 판단하고 노병한, 민영학과 사후책을 강구했지만 별다른 방안을 찾지 못하고 1월 4일 세마랑분소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이후 세마랑으로 가던 중 이대로 갔다간 차후에 모든 것이 밝혀져서 처형을 면치 못할 것으로 판단한 세 사람은 차량을 탈취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자동차를 탈취한 뒤 암바라와의 분견소로 가서 무기고에 들어갔다. 손양섭은 부켄기관총을 들고, 노병한과 민영학은 탄환 3천발을 가지고 사무실 앞에 세워진 차를 타고 소장 관사로 가서 억류소장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이후 일본군 어용상인을 사살하고 형무소에 이르러 형무소장을 사살했다. 이후 숲에 숨은 그들은 암바라와 억류소장이 긴급히 요청하여 급파된 일본군 수십 명을 상대로 총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도중에 하복부와 좌대퇴부에 총탄을 맞은 민영학은 자신이 치명상을 입었음을 직감하고 수수밭에 들어가 소총의 방아쇠를 구두끈에 매어 가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
이후 노병한과 손양섭은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위생재료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창고가 완전히 포위되어 빠져나올 곳이 없게 되자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했다. 그후 고려독립청년당은 의거를 계획했지만 조직이 발각되어 관련자 10명이 일본군 사령부에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아야 했다.
8.15 광복 후 동지였던 이상문(李相汶, 1920. 3. 13 ~ 2016. 5. 12) 애국지사가 홀로 암바라와로 돌아가 민영학, 노병한, 손양섭의 유해 3구를 수습하였고, 당시 먼저 귀국하려던 동명통신 남명우 기자 편으로 유해를 맡겨 두었기에 유해가 일찍이 국내에 봉환될 수 있었다. #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민영학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7월 21일 본래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