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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1년 9월 20일 |
평안남도 강서군 종산면 | |
사망 | 1942년 6월 3일 (향년 40세) |
경기도 경성부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61호 |
본관 | 진주 강씨 |
가족 |
아버지 강영동, 어머니 박형옥 형 3명 배우자 윤희성 |
학력 |
배재학당 (졸업) 협성신학교 (졸업) |
종교 | 개신교 ( 감리회)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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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목사.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1년 9월 20일 평안남도 강서군 종산면에서 부친 강영동과 모친 박형옥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2살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따라 감리회에 입교했다. 1910년경에 만주 봉천의 유하현으로 이주하여 삼광학교와 철영 육영학교에서 공부하며 민족교육을 받았으며, 이동교회를 다니면서 최학기(崔學基) 전도사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전수받았다. 이후 최학기의 추천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졸업 후인 1925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했고 재학 중이던 1926년에 윤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1933년 경성지방 창동구역에 파송받아 목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1937년에는 철원 지방 연천구역에 파송되어 목회 활동을 전개했고, 1938년에는 창도교회, 1939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고 철원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는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함양시키는 설교를 했고 출애굽기를 인용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민족도 해방의 때가 올 것이다"라며 이겨낼 것을 호소했다. 또한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고 신도들에게 신앙을 끝까지 지킬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1940년 9월 30일, 그는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1년 10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병세가 악화되자 세브란스 병원으로 보내졌지만 1942년 6월 3일에 사망했다. 이때 그는 아내 윤희성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기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강종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06년 11월 3일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