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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6년 4월 27일 |
전주부
전주군 남일면 주현리 (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주현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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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5년 3월 3일 (향년 58세) |
전라북도
익산군 (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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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56호 |
상훈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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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변절 논란이 있다.2. 생애
1896년 4월 27일 전주부 전주군 남일면 주현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주현동)에서 태어났다.1913년 만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성취를 목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같은 해 졸업했다. 1924년에 국내로 들어왔고, 전라북도 익산군 익산면 이리(現 익산시 갈산동) 244번지로 주소지를 옮겼다. 1924년 2월 익산군에 동아일보사 이리지국이 창설되자 총무 겸 기자에 선임되었다.
이후 전북기자대회 및 신간회 운동에 참여해 신간회의 주의 강령을 고취하는 선전문서를 인쇄해 여러 사람들에게 배포할 것을 기획하고 선전문서를 작성하던 중 체포되어 1927년 8월 31일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구류 통산 30일)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1928년 2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다소 감형된 벌금형 50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벌금을 납부하지 않아 50일간 노역장에 유치되었다.
출옥 후 수년간 상업에 종사했으며, 8.15 광복 후에는 전라북도상공회의소 부회장, 이리부청 정치 고문, 이리중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전라북도 이리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6월 2일 국회법 기초위원에 선출되며 국회법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같은 해 8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에 선임되며 훗날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이리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춘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3월 3일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사망했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4년 11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3. 친일파 의혹?
2016년 8월 11일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배헌은 1931년부터 1942년까지 익산읍 읍회 회원을 지냈다고 한다. '익산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황성근의 증언에 따르면, 익산은 일본인들이 세운 도시로 그곳에서 익산읍 읍회 회원[2]을 맡는 조선인은 친일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또한, 배헌은 1939년 이리 소학교에서 열린 친일 집회인 배영동지회 이리 지역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배영동지회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귀축영미[3]와 징병을 주창한 친일 단체다. 아래 이미지는 1939년 3월 18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황성근씨의 증언에 따르면, 후에 건국준비위원회 익산지부가 해방절 행사를 열 때 배헌이 참석했다가 익산 시민들로부터 친일파로 지목되어 쫓겨났다고 한다. #
그러나 배헌은 이리시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한다. 그의 행적으로 보아 기회주의 성향을 보인다. 황성근씨가 언급했던 말 중에 건국준비위원회 행사당시 시민들의 비난이 있었다는 근거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4] 시민들이 친일파로 지목하여 배척했다면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을지 의문스럽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2016년 7월 15일 국가보훈처에 공문을 보내 건국훈장 심사에서 친일 의심 행적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해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배헌의 건국훈장 서훈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지만, 배헌은 현재까지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자로 기록(1991년 추서)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아직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전북 이리[5]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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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78표 (41.97%) | 당선 (1위) | 초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대한국민당(1949년)| 대한국민당 ]]
|
5,541표 (21.85%) | 낙선 (2위) |
5. 둘러보기
전라북도 제헌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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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 | 윤석구 | 배헌 | 나용균 | 김종문 | |
고창 갑 | 고창 을 | 부안 | 익산 을 | ||
김영동 | 백관수 | 조재면 | 백형남 | 공석 | |
김제 갑 | 김제 을 | 완주 을 | |||
조한백 | 홍희종 | 이요한 | 유준상 | 이석주 | |
진안 | 금산 | 무주 | 장수 | 남원 | |
오기열 | 정해준 | 김교중 | 김봉두 | 이정기 | |
임실 | 순창 | ||||
진직현 | 공석 | ||||
* 무주
신현돈 사퇴 (1948.10.19.) * 전주 신성균 자격상실 * 익산 을 이문원 자격상실 * 순창 노일환 자격상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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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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