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장기석(張基錫) |
자 / 호 | 진여(震汝 또는 進汝) / 자하(紫下) |
본관 | 인동 장씨[1] |
출생 | 1860년 11월 22일 |
경상도
성주목 명암방 봉계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3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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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1년 1월 5일 |
대구형무소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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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기석은 1860년( 철종 11) 11월 22일 경상도 성주목 명암방 봉계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3리)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개옹(㝏翁) 장봉한(張鳳翰)의 9대손인 아버지 장세헌(張世憲)과 어머니 성산 배씨 배만기(裵萬紀)의 딸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성주군수와 경찰서장으로부터 메이지 덴노의 천장절 경축식에 참석할 것을 요구받자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일제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목침으로 경찰을 때려 중상을 입히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손톱과 발톱을 다 뽑히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내 목은 베어도 내 뜻을 꺾을 수 없다."며 끝까지 저항 의지를 잃지 않았고,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하다가 단식 27일만인 1911년 1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기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7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