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한계석(韓桂錫) |
이명 | 한주석(韓柱錫) |
자 | 자선(子善) |
본관 | 청주 한씨[1] |
생몰 | 1888년 6월 18일 ~ 1939년 1월 26일 |
출생지 |
전라도 임실현 신안면 신안리 (현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2] |
사망지 | 전라북도 임실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계석은 1888년 6월 18일 전라도 임실현 신안면 신안리(현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에서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을 지낸 한명교(韓明敎)와 어머니 도강 김씨 김영권(金永權)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1906년 5월 홍주군에서 민종식 의병이 일어나자 그 휘하에 들어가 홍주성 수비에 전력했지만 일본군이 홍주성을 공략했을 때 겨우 빠져나왔다. 이후 다시 의병을 일으킬 길을 모색하던 그는 1907년 음력 8월 3일 이석용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해 그해 9월 20일까지 임실, 장수, 진안 등지에서 활약했다.그러나 1909년 동지 수명과 함께 임실 갈담에 있는 일본 수비대 숙사의 건물을 파괴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방화 혐의로 헌병대에게 체포되었고, 1909년 11월 24일 폭도, 강도 및 방화 혐의로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임실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9년 1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한계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