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1-30 17:13:33

최갑룡

파일:최갑룡.jpg
성명 최갑룡(崔甲龍)
이명 최우진(崔又震)
생몰 1904년 5월 29일 ~ 1998년 1월 14일
출생지 경상도 부산부 좌천동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사망지 서울특별시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아나키즘 활동2.3. 해방 후 경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최갑룡은 1904년 5월 29일 부산부 좌천동에서 부친 최덕홍과 모친 김생려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궁한 살림을 만회하기 위해 제철소에서 소년 직공으로 일했다. 그러나 1922년 10월 회사에서 제강 작업을 중단하면서 퇴직을 권고하자, 그렇지 않아도 회사의 비인간적인 혹사에 염증이 났던 그는 기꺼이 그만두고 2개월분의 퇴직금을 가산하여 받은 뒤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으로 향한 그는 자전거 점포를 하는 부친의 지인 지주선을 찾아갔다. 그는 평양에서 지주선이 운영하는 칠성 양조회사에 노동자로 재직했고, 공장장 김원택의 조카인 노원우의 소개로 최의순을 알게 되었다.

1924년 11월 최의순을 찾아가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에서 최의순과 만났고, 최의순의 도움으로 천도교 종리원 동경지부에 여장을 풀고 이곳에서 평북 성천 출신의 한원열과 중화 출신의 이홍근(李洪根) 등을 만났다. 이홍근은 일찍이 국내에서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으로 건너간 후에는 흑색운동사와 불령사에서 활동하고 있엇다. 최갑룡은 그로부터 아나키즘 사상을 전수받는 한편 정칙 영어학교에 입학해 학업에 전념했다.

1926년 2월 21일, 최갑룡은 신전 송본정에서 개최된 동경인쇄공조합대회에 이홍근과 함께 참여했고, 1926년 5월 1일 이홍근과 함께 메이데이 투쟁에 참여하기로 하고 화물차에 무작정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화물차는 경찰의 예비 검속차량이었고, 결국 두 사람은 경찰서로 끌려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메이데이 시위대가 해산된 후 석방되었다. 얼마 후 여동생 최호분이 폐병을 앓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급히 국내로 돌아왔다. 그는 한두 달 뒤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머니의 만류로 평양에 머물었다.

2.2. 아나키즘 활동

최갑룡은 국내에서 아나키즘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이주성, 승도경, 이효묵, 최복선 등을 포섭하고 평양에서 아나키즘 단체를 결성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1927년 12월 22일, 이들은 평양의 창전에 위치한 천도교 강당에서 관서동우회(關西同友會)를 조직했다가 1년 후에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로 개칭했다. 관서흑우회의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현하 조선의 노동 운동은 일대 위기에 함(陷)하여 있다. 그것은 소위 단일적 미명 하에서 전 무산대중의 전투의식을 마비하야 노동 운동의 근본정신을 말살하려 하는 적색 개량주의 일파의 소위 방향전환 운동이 곧 그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우리는 더욱 명확한 계급적 기치 하에서 그들에게 농락을 당하는 대중을 바른 길로 구출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을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이에 우리는 최후의 역량을 다하여서 일체 중앙집권적 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자유연합적 행동으로 일관하야 모든 노동계급의 해방을 기한다.

최갑룡은 관서흑우회 창립 때부터 대중 조직에 관심을 기울였고, 사회생리학 연구회, 농촌운동사, 소년회, 일반 노동조합 등 여러 조직에 참여하면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운동을 지향했다. 또한 그는 관서흑우회를 통해 아나키즘 동지들을 규합하고 일본에서 간행되는 아나키즘 계통의 잡지나 신문들을 국내로 반입하는 활동도 전개했다. 특히 그가 주목한 단체는 양화직공조합이었다. 이 조합은 1925년 3월 1일 평양의 각 양화공장 노동자들이 현재의 고통을 박차고 나가자는 취지하에 조직된 것이었다. 최갑룡은 관서흑우회 동지 이효목이 평양 양화직공조합의 회원인 점을 주목하고 그 조합을 아나키즘 계통으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평양경찰서 고등계가 이를 눈치채고 이주성, 승도경, 김찬엽 등을 연행해 양화직공조합에 노동연맹 참여를 권유한 적이 있느냐고 취조하는 등 당국의 견제가 심해서 여의치 않았다.

한편 평양 목공조합에서 일하던 최복선도 아나키즘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목공 선배인 이도성 형제에게 사상을 전파하고 평양 목공조합을 아나키즘의 논리에 따라 운영하면서 조합원들에게 아나키즘을 전파했다. 그리고 최갑룡은 이홍근과 함께 아나키즘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전조선 흑색사회운동자대회를 백선행기념관에서 개최했다. 그는 이 회의에 전국에 있는 아나키스트들이 참여할 경우 이들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경무국, 평남 경찰부, 대동군 경찰서 등이 이 대회를 예의주시하고 아나키스트들을 대거 잡아들이는 바람에 대회가 유야무야 끝나버리고 말았다. 한편 최갑룡은 만주, 일본 등지에도 조직을 마련하려 했다. 그는 우선 봉천에 거주하고 있는 유림과 긴밀히 연락했고, 일본 방면은 이홍근에게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국내에서 조선 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해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1929년 11월 11일, 그는 평양에 온 김정희에게 조선 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의 취지를 설명한 뒤 그를 함경남도 방면의 책임자로 임명해 원산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후 그는 일제의 전조선 흑색사회운동자대회에 대한 탄압과 감시가 어느정도 가라앉아 조직의 확대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30년 8월, 그는 박희춘, 이혁, 전창섭 등을 방문해 조직을 확대할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원산에서 활동하던 김정희가 체포된 뒤 고문에 못이겨 무정부주의 조직을 발설하면서 모든 계획이 탄로나고 말았다. 결국 1931년 4월 9일, 그는 조중복과 함게 원산경찰서 소속의 형사 2명에게 체포되어 평양경찰서로 끌려갔다.

이후 원산으로 압송당해 가혹한 고문을 받은 그는 1931년 7월 27일 원산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소속 와우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해 8월 4일 김정희, 이홍근, 조중복, 강창기, 임중학 등과 함께 기소되었다. 그러나 예심에 회부된 지 17개월이 지나도록 조사 한 번 없고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낭비하자, 최갑룡 등은 단식 투쟁에 나서 예심을 촉구했다. 이후 그들은 1932년 12월 22일 함흥 지방법원으로 회부되어 원산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33년 3월 17일 함흥에서 제1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공판 결과, 최갑룡은 유림, 조중복 등과 함께 5년형을 선고받았고, 이홍근은 6년형, 김정희는 4년형, 강창기는 3년형, 한용기는 2년형을 각각 언도받았다. 그후 최갑룡은 1933년 5월 11일부터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6년에 출옥했다.

2.3. 해방 후 경력

출옥 후 철공업 등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최갑룡은 8.15 해방 후 유림이 조직한 독립노농당에 가담하고 아나키즘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1972년 6월 22일 서울 근교의 진관사에서 정화암, 이정규 등과 함께 한국 자주인연맹을 창설하고 대표간사로 선임되었다. 그는 자주인연맹 발기취지문에서 한족(韓族)이 역사, 지리, 혈연, 문화적으로 공동운명체임을 주장했고 한국의 강토, 문화, 재부가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화 정통과 자주 독립을 유지하는 것은 민족 공동 의식과 사회 정의의 발로이며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생존본능이락 역설했다.

또한 그는 해방 후 사회는 정복, 강탈, 강권의 지배가 없는 자유, 평등, 보편적 사회 연대의 건설을 위해 분투하고 있지만, 실제의 현상은 전체 민중의 자유를 모독하고 공동의식과 사회정의를 파괴, 유린하는 마르크스식 계급독재주의자들이 전쟁을 도발했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 독선, 부정, 부패, 그리고 민주당의 권력 배분을오 인한 약체화, 쿠데타로 집권한 공화당의 소수재벌 이익을 봉사하는 시녀화 등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으며, 1998년 1월 14일 서울에서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