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창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동의
성명 | 박동의(朴東儀) |
생몰 | ? ~ 1896년 2월 6일 |
출생지 | 강원도 평창군 |
사망지 | 강원도 안변군 선평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박동의는 강원도 평창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 및 의병 가담 이전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그는 1896년 1월 민용호(閔龍鎬) 의병장이 일으킨 관동창의진에 가담해 군사(軍師)를 맡아 의병대의 활동 근거지를 강원도 강릉으로 삼을 것, 원산을 점령하고 양서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곳의 병사를 모을 것, 청나라와 연합작전을 펼칠 것 등의 전략을 수립하고 의병대의 투쟁방략 및 목표를 제시했다. 관동의진은 이에 따라 근거지를 강릉으로 옮기고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의진의 최고활동 목표를 원산 공략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1896년 2월 6일 안변군 선평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거두던 중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박동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산청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동의
성명 | 박동의(朴東儀) |
생몰 | 1867년 ~ 1908년 10월 17일 |
출생지 |
경상남도 단성현 도산면 진태마을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
본관 | 밀양 박씨 |
사망지 | 경상남도 산청군 덕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산청군 '을유식(乙酉式, 1885년) 단성호적대장'에 따르면, 박동의는 밀양 박씨로 단성현 도산면 진태마을 출신이며, 호적에 등재된 1885년 당시 나이가 19세였다고 한다. 부친은 박정식이며 당시 나이는 70세였으며, 어머니는 석씨로 1885년 당시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또한 부인은 성주 이씨로 1866년생이었다. 박동의는 1908년 산청군에서 의병을 일으켜 윤영수(尹永壽) 의병장의 휘하에서 대장 송가(宋哥)와 손우식(孫佑植) 등과 함께 일본군에게 항전했다.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소장이 2015년에 찾아낸 일본군 진중일기 기록에 따르면, 박동의가 이끄는 경남창의대가 설날 아침에 하동경찰서를 습격한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하동에 사는 일본인 수십명을 인근 진주로 대피시켰다고 한다. 또한 <폭도에 관한 편책>에 따르면, 박동의는 1908년 3월 12일 김모(金某)와 함께 덕산에서 일본인이 숙방하는 집을 불태웠으며, 3월 26일 밤 11시 산청주재소를 습격하고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또한 "단성군 신등면에 36명의 폭도가 총기를 휴대하고 나타났으며 수괴는 박모"라는 기록도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박모'는 박동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08년 4월 16일 단성읍내 순사주재소를 습격해 건물과 서류를 불태웠고, 산청군 두량곡과 대원사 부근 등 일본군 수색대와 수십 차례 교전해 큰 피해를 줬다고 한다.
박동의는 이후에도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했다. 6월 11일 그가 이끄는 의병 80명은 전북 운봉군 입석수비대를 공격했다. 그리고 8월 26일에 30명을 이끌고 지리산 남쪽 기슭에서 하동수비대 토벌대 11명과 교전했으며, 9월 13일에 일본군수비대와 한 차례 교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년 10월 17일 산청군 덕산에 주둔하고 있다가 진주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된 뒤 총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박동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