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고구훈(高龜訓) |
이명 | 고승천(高承天) |
자 / 호 | 경지(景志) / 초광(樵㹰) |
본관 | 제주 고씨 |
출생 | 1871년 11월 29일 |
전라도
제주목 중면 이도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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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9년 2월 13일 |
전라남도
대정군 우면 안성리 대정읍성 동문밖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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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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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고사훈은 1871년 11월 29일 전라도 제주목 중면 이도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에서 아버지 고영길(高永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07년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정미 7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제주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1908년 김석윤(金錫允), 노상옥(盧尙玉)과 함께 장성군 출신 의병장 기우만, 기삼연 등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제주 및 광양에서 의병 운동을 벌이기 위해 무기를 은밀히 제조하여 공급했다. 한편 의병을 모집하여 황사평(黃蛇坪)에서 훈련시킨 후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고사훈은 처음에는 서당 숙장(塾長)이었던 김석익(金錫翼)과 고성모(高聖模)를 의병장에 추대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1909년 2월 25일 조인관(趙仁官)의 집에서 김석윤, 노상옥, 이중심(李中心), 양남석(梁南錫), 한영근(韓永根), 김만석(金萬石) 등과 함께 모여 기병할 것을 결의하고 김석윤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參謀) 및 모병책(募兵責)을 맡았다. 이후 그들은 3월 3일에 관덕정에서 거사하기로 결정했고, 고사훈 등 6명은 대정군 영락리와 신평리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했으며 이중심을 비롯한 4명은 제주도 중면을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했다. 고사훈이 각지에 격문과 통고서를 돌리자 대정의 영락리와 신평리에서만 각각 100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거사 이틀 전인 3월 1일, 고사훈 일행은 대정군 중면 광천리에서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 당시 제대로 된 무장조차 하지 못한 의병대는 급습을 피해 산산히 흩어졌고, 고사훈과 김만석은 체포되었다. 경찰은 고사훈과 김만석을 회유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이들이 흔들리지 않자 3월 4일 우면 안성리 외곽에서 두 사람을 총살했다. 이후 뜻을 함께 했던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제주의병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심재(心齋) 김석익은 고사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억고초광경지(億高樵㹰景志)>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오직 공의 굳은 성품은 이 세상에 비할 자 없어,
추풍에 말 달려 저 강 건너고자 몇 번이던가.
몸은 죽었으나 장한 뜻만은 아직도 죽지 않아,
우리천 아래 물을 서로 맞부딪치게 하오.
추풍에 말 달려 저 강 건너고자 몇 번이던가.
몸은 죽었으나 장한 뜻만은 아직도 죽지 않아,
우리천 아래 물을 서로 맞부딪치게 하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고사훈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