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고인재(高麟在) |
이명 | 고흥남(高興男) |
생몰 | 1895년 2월 29일 ~ 1970년 2월 15일 |
출생지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산정리 |
사망지 | 경기도 안성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고인재는 1895년 2월 29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산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일 저녁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 등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양성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이희봉(李熙鳳)· 손정봉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인솔하여 오후 9시경 동항리에 있는 경찰주재소에 도착했다. 그는 이 곳에서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귀가하던 중 원곡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횃불을 들고 행진해 오던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다시 주재소로 행진했다.오후 10시경 주재소에 도착한 그는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 건물과 숙직실 파괴·방화했다. 또한 부엌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던 솔잎을 모아 불을 질렀으며, 양성 우편소로 가서 그 곳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 토자 토요테(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타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파괴했다. 이후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방화하고, 시위군중들과 인근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안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0년 2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고인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