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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12:30:19

고덕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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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고덕린 (高德麟)
출생 1886년 8월 7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
사망 미상 (향년 불명)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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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덕린은 1886년 8월 7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일 심응무(沈應武)가 기미독립선언서를 원장리 예수교회당에 전달하자, 그걸 본 그는 임이걸(林利杰) 등과 함께 3월 4일 원장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협의했다. 이후 3월 4일 오전 10시경, 고덕린 등은 예수교회당 앞에 모여 군중 수천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향해 행진했다. 시위 행렬이 시장 입구에 도착하자,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들은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분노한 군중이 돌을 던지며 거세게 저항하자, 사천 헌병주재소장 사토와 헌병보조원들은 달아났다. 이때 고덕린 등은 달아나는 사토를 추격하여 붙잡아 처단하는 한편, 헌병보조원들도 찾아내 처단했다. 또한 이들은 전날 사천시장 시위로 갇혀있던 동지들을 전원 구출했다. 그러나 이날 시위 도중 헌병대의 총격으로 14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후 평양헌병대가 출동하여 그를 비롯한 400여 명을 체포했고, 고덕린은 1919년 8월 13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살인, 소요, 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1년간 평양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0년 3월 6일 가출옥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고덕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