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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09:39

장규섭

성명 장규섭(張奎燮)
산음(山陰)
송헌(松軒)
세례명 바오로
생몰 1884년 3월 24일 ~ 1944년 1월 12일
출생지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본관 인동 장씨
사망지 황해도 해주시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가톨릭 신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규섭은 1884년 3월 24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외곽 마을에서 장완식(張完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경감학교(敬監學校)를 졸업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연안에서 유생 이윤룡(李潤龍) 윤철모(尹哲模)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최익현에게 사람을 보내 구국의 길을 의논했다. 최익현은 그들의 우국충정을 칭찬하며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장했다. 그러나 장규섭은 곧 생각을 달리먹고 교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이후 그는 황해도 교원양생강습회를 수료하고 장연 일대의 여러 학교에서 교사를 맡았다. 그러다가 1908년 장연군 선산의 우신학교(又新學校)에서 재직하던 중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친 사실이 문제되어 사임하고 장연본당 부설 경애학교(敬愛學校)로 옮겼다. 이 때 그는 가톨릭에 감화되어 성세성사를 받고 입교하고 신앙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해 읍민들에게 나눠줬으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가담해 그해 10월 황해도 지방위원 겸 적십자사 황해도지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20년, 장규섭은 적십자사 황해도지부를 의용단(義勇團)으로 개편해 사령관을 맡고 송화, 옹진, 해주 일대 주민들에게 독립신문을 배달하고 임시정부의 독립공채를 부호들에게 배포해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했으며, 아울러 일제 밀정, 부역배, 경찰을 처단하고 임시주비단 단칙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도 병행했다. 또한 해서국민회(海西國民會)를 1919년 11월에 조직하여 오두현(吳斗鉉)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서무를 맡았다.

그러나 1921년 3월 장연군 낙도의 낙흥학교(樂興學校) 교장에 재직 중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친 사실이 탄로나 체포되었는데, 이 때 적십자회원의 명부와 회비를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한 것이 발각되어 기소되었다. 그는 1921년 5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에 가출옥한 장규섭은 장연 경애보통학교 교장대리, 장연본당 회장을 역임했고, 이해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교구 청년연합회 총회에 장연본당 대표로 참석했다. 이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朝鮮中央)>, <만선일보(滿鮮日報)>등의 장연지국장을 역임했으며, 해주시로 이주해 그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44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규섭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