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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0년 12월 29일 |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 |
사망 | 미상[1] |
본관 | 신천 강씨 |
가족 | 아버지 강돈욱, 어머니 위돈신, 여동생 강반석[2] 남동생 강용석, 조카 김일성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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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본관은 신천이고 그의 외조카는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잘 알려진 김일성이다.2. 생애
1890년 12월 29일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에서 장로교 목사 강돈욱과 위돈신의 맏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1 운동 발발 당시 아버지 강돈욱과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1월, 김용배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청년회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8월 용산면 하리에서 4월에 국내로 잠입한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이춘성과 함께 독립운동 활동을 하였으며,대동군 고평면에서 박봉욱과 홍치룡을 방문하여 각각 150원과 50원[4]을 수령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린장현 일대에 정착하여 독립운동 활동을 했다. 이곳에서 백산무사단[5]에 가입하여 이명을 사용하면서 활동했다.
이준삼과 함께 국내로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명령을 받고, 1921년 3월 22일 사령서와 권총 1정, 탄환 25발, 경고문 50매, 군자금 영수증 100매, 여비 30원을 들고 출발하였다. 다음 날 평안북도 자성군에서 신훤(독립운동가)을 만나 군자금 모집에 대해 상의하였다.같은 해 4월 홀로 자성군 열연면에서 양기조로부터 군자금 100원을 모금했다. 그러고는 14일 평양에서 염점리에서 여관을 하는 김준모의 집에서 투숙하는 중 독립운동 행적이 일제 경찰한테 발각되어 4월 24일 오후 6시 반경 신훤 등 독립투사 6명과 함께 평양경찰서 경찰들과 격투를 벌인 끝에 체포되었다.
1921년 8월 9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위반으로 징역 13년 형을 선고받았다. 평양형무소와 경성형무소에서 7년 11개월 동안 옥고를 겪은 뒤, 1928년 3월 28일 경성형무소에서 가출옥으로 출소하였다. 그 이후로는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면 조용히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일성의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선 1942년에 사망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긴 하지만 진위여부는 불명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강진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여담
- 외조카를 잘 못 둔 탓에 사돈인 김형권과 같이 건국훈장 애국장 박탈 논란에 휩싸인 안타까운 인물이라 볼 수 있다.
- 6.25 전쟁과 공산주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거기다 김일성 회고록 기준으로는 광복 이전인 1942년에 죽었기에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