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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02년 |
미상 | |
사망 | 1938년 1월 |
러시아 연해주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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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마춘걸은 1902년생이며 연해주 칼리닌그라드 이만(Iman)의 한인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그가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전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921년 9월 15일 학생들과 함께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에 가담한 그는 한운용이 이끄는 2중대의 소대장으로 활동했다.1921년 12월 5일, 마춘걸은 이만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 1,500명을 상대로 50명의 대원들과 함께 저항했다. 이날 전투에서 대원 50명 중 47명이 전사했고, 그 역시 칼에 18곳을 찔린 채 시체 더미 속에 누워 있다가 야밤을 틈타 한인 농가들 중 한 곳으로 숨어 들어서 응급처치를 받은 뒤 이만을 탈출했다. 이후 러시아 적군이 이만을 탈환했을 때, 그는 다른 생존자 2명과 함께 이만 전투의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이후 연해주에서 창설된 대한의용군사회에 가담해 모연원 및 군사위원을 맡아 무기를 구입하고 군자금을 모금해 일제에 맞섰지만, 일제와 타협하고자 했던 소련 당국의 압력으로 배일 단체들이 대거 해체되자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1938년 1월, 소련 당국이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에 반발하다가 일제의 간첩으로 간주된 당국에 의해 긴급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소련 정부는 1957년에 그의 간첩 혐의를 취소하고 복권했다.
마춘걸의 독립운동 경력은 오랜 세월 잊혀졌다가 2010년 유스베틀라나 이고레브나씨가 취업 비자를 받고 한국에 와서 자신이 마춘걸의 증손녀라고 주장하며 증조부의 독립운동 경력을 밝히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대한고려인협회 역시 마춘걸의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국가보훈처는 2019년 2월에 마춘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유스베틀라나 이고레브나씨가 마춘걸의 증손녀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그녀를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지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마춘걸이 처형되고 그의 아내 마신헌이 굴라크로 이송된 뒤,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호적이나 출생 등록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기존 가족관계를 증명할 자료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마춘걸의 증손녀라는 사실을 입증할 증빙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유스베틀라나씨는 2019년 4월에 러시아에서 재판을 진행, 러시아 사법부로부터 마춘걸 선생과 후손들의 관계를 인정받았고, 지난 6월 러시아 행정당국에 판결문을 근거로 정식 출생기록 등록을 완료했다고 반박했지만, 국가보훈처 공훈관리과 관계자는 "러시아 관련 기관 확인 결과, 뒤늦게 복구된 출생기록은 출생 당시의 입증자료 없이 소급 작성된 것"이라며 "마춘걸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될 때 출생기록이 없어 후손이라고 명확히 판단할 수 없다"며 후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
유스베틀라나씨는 <경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보훈처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일방적인 통보에 모욕감을 느꼈다면서, 출생기록 등이 제대로 보전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고려인의 역사와 특징 등을 설명하고, 후손임을 인정할 수 있도록 다른 방법을 찾아 제시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국가보훈처는 '알아서 입증하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