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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c224,#db9e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토머스 제퍼슨 | 에드먼드 제닝스 랜돌프 | 티모시 피커링 | 존 마셜 | |
<rowcolor=#ffc224,#db9e00>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제임스 매디슨 | 로버트 스미스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
<rowcolor=#ffc224,#db9e00>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헨리 클레이 | 마틴 밴 뷰런 | 에드워드 리빙스턴 | 루이스 맥래인 | |
<rowcolor=#ffc224,#db9e00>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존 포시스 | 대니얼 웹스터 | 에이벌 P. 업셔 | 존 C. 칼훈 | |
<rowcolor=#ffc224,#db9e00>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제임스 뷰캐넌 | 존 M. 클레이턴 | 대니얼 웹스터 | 에드워드 에버렛 | |
<rowcolor=#ffc224,#db9e00>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윌리엄 L. 마시 | 루이스 카스 | 제레미아 S. 블랙 | 윌리엄 H. 수어드 | |
<rowcolor=#ffc224,#db9e00>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엘리후 B. 워시번 | 해밀턴 피시 | 윌리엄 M. 에버트 | 제임스 G. 블레인 | |
<rowcolor=#ffc224,#db9e00>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프레드릭 T. 프레링후이슨 | 토머스 F. 바야드 | 제임스 G. 블레인 | 존 W. 포스터 | |
<rowcolor=#ffc224,#db9e00>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월터 Q. 그레셤 | 리차드 올니 | 존 셔먼 | 윌리엄 R. 데이 | |
<rowcolor=#ffc224,#db9e00>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존 헤이 | 엘리후 루트 | 로버트 베이컨 | 필랜더 C. 녹스 | |
<rowcolor=#ffc224,#db9e00>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윌리엄 J. 브라이언 | 로버트 랜싱 | 베인브리지 콜비 | 찰스 에번스 휴스 | |
<rowcolor=#ffc224,#db9e00>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
프랭크 B. 켈로그 | 헨리 L. 스팀슨 | 코델 헐 |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주니어 | |
<rowcolor=#ffc224,#db9e00> 제49대 | 제50대 | 제51대 | 제52대 | |
제임스 F. 번즈 | 조지 C. 마셜 | 딘 애치슨 | 존 포스터 덜레스 | |
<rowcolor=#ffc224,#db9e00>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제56대 | |
크리스찬 허터 | 딘 러스크 | 윌리엄 P. 로저스 | 헨리 키신저 | |
<rowcolor=#ffc224,#db9e00> 제57대 | 제58대 | 제59대 | 제60대 | |
사이러스 밴스 | 에드먼드 머스키 | 알렉산더 헤이그 | 조지 P. 슐츠 | |
<rowcolor=#ffc224,#db9e00> 제61대 | 제62대 | 제63대 | 제64대 | |
제임스 베이커 | 로렌스 이글버거 | 워런 크리스토퍼 | 매들린 올브라이트 | |
<rowcolor=#ffc224,#db9e00> 제65대 | 제66대 | 제67대 | 제68대 | |
콜린 파월 | 콘돌리자 라이스 | 힐러리 클린턴 | 존 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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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 틸러슨 | 마이크 폼페이오 | 토니 블링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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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지 클린턴 |
제2대 존 제이 |
초대2 조지 클린턴 |
제3대 모건 루이스 |
제4대 대니얼 D. 톰킨스 |
제5대 존 테일러 |
제6대 드윗 클린턴 |
제7대 조셉 C. 예이츠 |
제6대2 드윗 클린턴 |
제8대 너새니얼 피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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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마틴 밴 뷰런 |
제10대 에노스 T. 스루프 |
제11대 윌리엄 L. 마시 |
제12대2 윌리엄 H. 수어드 |
제13대 윌리엄 C. 바우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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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사일러스 라이트 |
제15대 존 영 |
제16대 해밀턴 피시 |
제17대 워싱턴 헌트 |
제18대 호레이쇼 시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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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마이런 H. 클라크 |
제20대 존 A. 킹 |
제21대 애드윈 D. 모건 |
제18대2 호레이쇼 시모어 |
제22대 루번 펜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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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존 T. 호프먼 |
제24대 존 애덤스 딕스 |
제25대 새뮤얼 J. 틸던 |
제26대 루시어스 로빈슨 |
제27대 알론조 B. 코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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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대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29대 데이비드 H. 힐 |
제30대 로스웰 P. 플라워 |
제31대 리바이 P. 모턴 |
제32대 프랭크 S. 블랙 |
|
제33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
제34대 벤저민 오델 |
제35대 프랭크 W. 히긴스 |
제36대 찰스 에번스 휴스 |
제37대 호레이스 화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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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대 존 앨든 딕스 |
제39대 윌리엄 슐저 |
제40대 마틴 H. 글린 |
제41대 찰스 S. 휘트먼 |
제42대 앨 스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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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대 네이선 L. 밀러 |
제42대2 앨 스미스 |
제44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제45대 허버트 리먼 |
제46대 찰스 폴레티 |
|
제47대 토머스 E. 듀이 |
제48대 W. 애버럴 해리먼 |
제49대 넬슨 록펠러 |
제50대 맬컴 윌슨 |
제51대 휴 캐리 |
|
제52대 마리오 쿠오모 |
제53대 조지 퍼타키 |
제54대 엘리엇 스피처 |
제55대 데이비드 패터슨 |
제56대 앤드루 쿠오모 |
|
제57대 캐시 호컬 |
}}}}}}}}} |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해밀턴 피시 Hamilton Fish |
|
출생 | 1808년 8월 3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사망 | 1893년 9월 7일 (향년 85세) |
미국 뉴욕주 개리슨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NNNcm, NNkg, 혈액형 |
가족 |
해밀턴 피시 주니어 (아들) 해밀턴 피시 3세 (손자) |
학력 |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
종교 | 종교 |
직업 | 정치인 |
소속 |
|
서명 |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유능하고 청렴한 국무장관으로서 율리시스 S. 그랜트 행정부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한국과는 신미양요로 악연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뉴욕시에 뿌리내린 명문가였던 피시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좋은 교육을 받아 컬럼비아 대학교를 다니고 변호사가 되었다. 뉴욕주의 연방하원의원, 뉴욕주지사, 뉴욕주 연방상원의원 등 뉴욕주의 정계 요직을 대부분 맡았다. 내전 시대의 남북갈등에서 노예제 확대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반대하고 북부 휘그당-공화당의 입장에 섰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을 지지하였고 남북 전쟁 기간동안 연방군을 위한 모금 활동을 벌였다.1868년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당시 피시는 60세로서 거의 은퇴한 인사로 여겨졌지만 국무장관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미국 외교의 가장 큰 현안은 남북전쟁 당시 영국 조선소에서 건조된 남부연합 사략선(CSS 앨라배마 등)이 연방측 상선에 입힌 피해 배상에 대한 것이었다. 피시는 협상을 통해 영국이 1,55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두 나라가 우호를 다지는 워싱턴 조약을 이끌어냈다. 이는 국제법의 중요한 선례가 되었고, 19세기 중반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미영관계 개선의 한 이정표가 되었다.
1873년 쿠바 반란을 진압하던 스페인이 쿠바인들을 지원하던 미국인 소유의 배 버지니우스 호를 파괴하고 수십 명의 미국인, 영국인 선원들을 처형하는 사건이 터졌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당장 스페인과 전쟁을 선언하라는 여론이 많았지만 피시는 스페인과의 협상을 통해 버지니우스 호와 미국인 생존자들을 반환받고 배상금을 지불받으며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과의 통상을 위해 해군 원정대를 파견했고, 그랜트 대통령의 산토도밍고(현 도미니카 공화국) 병합 계획에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도미니카를 미국의 주로 받아들이고 사마나 만을 조차하는 실무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신미양요 발발로, 도미니카의 경우에는 찰스 섬너 상원의원 등 정치권 대부분의 반대로 인해 둘 다 실패로 돌아갔다. 1875년에는 하와이 왕국과 조약을 맺어 하와이 병합의 기반을 닦았고, 1876년에는 해군 함선을 보내 라이베리아를 안정시키는 것을 돕기도 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운하 건설에 관심을 가져 콜롬비아, 니카라과 등 주변국들과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76년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에서 제임스 G. 블레인과 로스코 콩클링의 파벌이 다툼을 벌이자 그랜트 대통령은 피시에게 알리지 않고 공화당 전당대회에 피시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편지는 전당대회에서 읽혀지지 않았고, 피시는 68세의 고령이었고 은퇴할 준비가 되어 있어서 어차피 대통령이 될 생각은 별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