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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해군참모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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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64><colcolor=#fff> 미합중국 제10대 해군참모총장
체스터 니미츠 Chester Nimitz |
|||
본명 |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Chester William Nim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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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5년 2월 24일 | ||
텍사스 프레더릭스버그 | |||
사망 | 1966년 2월 20일 (향년 80세) | ||
캘리포니아 예르바부에나 섬[1] | |||
묘소 | 골든 게이트 국립묘지 | ||
재임기간 | 제31대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 ||
1941년 12월 31일 ~ 1945년 11월 24일 | |||
제10대 해군참모총장 | |||
1945년 12월 15일 ~ 1947년 12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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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64><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체스터 베른하르트 니미츠 어머니 안나 조세핀 니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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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캐서린 밴스 프리먼 (1913년 4월 9일 결혼) | ||
자녀 |
장녀 캐서린 밴스 레이[2] 장남 체스터 니미츠 주니어[3] 차녀 안나 엘리자베스 니미츠[4] 삼녀 메리 맨슨 니미츠[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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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미국해군사관학교 ( 졸업) | ||
군사경력 | |||
복무 | 미합중국 해군 | ||
1905년 ~ 1966년 | |||
최종 계급 | 원수 (미합중국 해군) | ||
주요 참전 |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오키나와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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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해군 공로 훈장 4회 육군 공로 훈장 인명 구조장 은장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장 국가 방위 공로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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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원수의 동 정복을 착용한 모습을 그린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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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God grant me the courage not to give up what I think is right even though I think it is hopeless.
하나님은 비록 내가 희망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내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신다.
하나님은 비록 내가 희망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내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신다.
A ship is always referred to as "she" because it costs so much to keep her in paint and powder.
배를 왜 "그녀"[6]라고 부르냐면 도색하고 분칠하는 데 돈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이다.[7][8]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맹활약한
미합중국 해군의
제독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태평양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끄는 데 엄청난 공헌을 한
명장이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 가운데 하나로서 미국인에게는 거의 이견없이 영웅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전쟁 후에도 거품 논란[9][10] 등 뒷말이 많은
홀시 제독과는 다르게 온화하고 부하들을 신뢰하는 리더십을 펼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철저한 능력주의를 지향해 인맥이나 친분은 통하지 않았다. 이에 더해 스스로 돌아가는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고자 적극 힘을 쏟으며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 사람이었다.[11][12] 대단히 불리한 전황에서도 일본을 무찌르는데 성공했다.
윌리엄 리히,
어니스트 킹,
윌리엄 홀시와 더불어 미 해군에서 단 4명만 배출된 해군 원수[13]의 일원이다.배를 왜 "그녀"[6]라고 부르냐면 도색하고 분칠하는 데 돈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이다.[7][8]
2. 생애
1885년 2월 24일 텍사스 프레더릭스버그에서[14]태어났다. 니미츠 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계 미국인이다.[15] 부친은 니미츠가 태어난 지 5달 만에 류머티스성 심장병으로 사망하여 니미츠는 모친이 재혼하기 전까지 친척의 도움을 받아 양육되었다. 8세 때부터 방과 후에 정육점 일을 하는 등 힘든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니미츠의 조부인 찰스 H 니미츠(Charles H. Nimitz)는 독일 상선의 선원 출신이었는데 니미츠에게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줌으로써 니미츠가 해군에 관심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니미츠는 처음엔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여 미 육군 장교가 되고 싶어했는데, 학창 시절에 자신의 가게에 들른 육군 장교들의 매너 있는 모습에 반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시 추천권이 있던 텍사스 주 미국 상원 의원이 자신에게 할당된 육사 추천 인원이 다 찼다며, 대신 인원이 남은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추천했다. 니미츠는 그땐 육군 장교가 될 길이 막혔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어서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수락해 입학하였으나, 입학 후부턴 열정적으로 해군 생활을 시작했다.[16] 조부가 그의 어릴적에 바다와 상선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것이 이때 다시 큰 영향을 준 듯하다.
1905년 졸업할 당시에는 114명 중 7등으로 졸업하는 등 생도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2.1. 장교 시절
니미츠 본인은 독서, 산책과 운동 등을 즐겨해 언뜻 보면 조용히 혼자 지낼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상당히 사교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집에 해군 관련 인물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환영했다고 한다. 기억력이 좋고 배려심이 많아 조직 관리에 아주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유머가 뛰어났다고 한다.[17] 오만하고 극단적인 성격 탓에 적들이 많았던 더글러스 맥아더와 달리 인성 문제가 아무것도 없다보니 전 국민에게 사랑받은 제독이었다. 비록 정치에 관심이 없는 참군인이라 해군참모총장의 지위에서 멈췄지만 말이다.[18]2차 대전 해군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제독이며 그 당시 주력함 전함보단 잠수함에 더 관심이 많은 제독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2차 대전까지(그리고 그 이후로도) 전함과 인연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 해군 최연소 구축함 함장(21살!)[19]을 맡은 적이 있고 뛰어난 기술자+행정가여서 민간 기업으로 스카웃 제의도 자주 받은 진정한 제독.
소위 때 구축함 함장을 하다가 한번 좌초한 경험이 있었으나 평소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고 과실이 거의 없었다 보니 상당히 관대히 넘어갔다.[20]
근무 중 수병 한 명이 바다에 빠지자 직접 뛰어들어 구조한 적이 있는데, 이 덕에 미합중국 해안경비대로부터 인명구조장 은장(Silver Lifesaving Medal)을 받기도 했다. 이 훈장은 약장을 잔뜩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싫어했던 니미츠 제독이 잠수함 장교 휘장 및 해군 공로장과 함께 항상 달고 다니는 몇 안 되는 훈장이었다.
그후 독일로 유학 가서 배워 온 디젤 엔진 기술을 이용해 해군 조선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로부터 니미츠는 디젤 엔진에 관한 한 해군 제일의 권위자라 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이 때문에 민간 기업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으나[21] 해군에 남기 위해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잠수함에 디젤 엔진을 적용시키기도 하고 잠수함 승조원으로 근무하기도 하면서 니미츠는 다른 연합군 장성들과는 달리 2차 대전 발발 직전에도 잠수함에 대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생각을 가졌으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취임식 역시 잠수함인 USS 그레일링함 갑판에서 이루어졌다. 니미츠 본인이 잠수함 부대 출신이라 원하기도 했지만, 니미츠의 잠수함대 애호와는 별개로 취임식을 거행할 만한 대형 수상함정이 전무했다는 사정도 있고, 무엇보다도 취임식을 치른 진주만의 잠수함 도크는 연료 저장 시설과 함께 진주만에서 타격을 입지 않은, 한 손에 꼽히는 해군 시설 중 하나였다. 참고로 취임식을 치렀던 진주만 잠수함 도크는 니미츠가 초급 장교 시절에 건설 감독을 맡았던 시설이다.[22]
항공모함의 경우는 오늘날 주류가 된 항공모함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싸는 원형진을 고안한 연구 멤버 중 한명이었다. 참고로 이 진형은 유틀란트 해전의 사후 연구 과정에서 영국 해군이 자랑했던 복잡하고 예술적인 기동이 '그저 복잡하다'는 미 해군 지휘관들의 문제 의식 하에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연구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직사각형의 함대 배치를 했기 때문에, 함대가 방향을 선회하는 경우 개별 함정의 기동이 매우 복잡하다는 문제가 있었고, 그리하여 니미츠가 참가한 연구에서는 유틀란트 해전 역시 혼란을 우려해 두 함대가 선회를 하지 못한 채 조우하고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니미츠는 해군 대학에서 이 연구를 가지고 학위를 땄는데, 딸이 유틀란트 해전의 의의를 '요약'하는 것에 대해서 대학 리포트를 쓰기 위해 질문을 하자 이쑤시개와 후추통을 가지고 2시간 동안 식탁 위에서 개별 함정의 기동을 일일이 설명했던 일화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점까지 니미츠가 해군에서 했던 일들 중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외에는 퇴역 함정의 항공기 공습의 위력을 시험하는 실험에도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비주류였기 때문에 떠맡은 일이었던 것 같다. 이 실험에서 항공기의 뇌격은 퇴역한 순양함을 일격에 두 동강 내는 위력을 과시했고, 당시 실험에 참여했던 니미츠는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니미츠가 항공기나 항공모함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일은 없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진주만 공습 직후 태평양함대사령관을 맡았다.[23] 최초 부임 시에는 패전 처리가 임무였던 것 같다. 유명한 일화로 부인에게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에 부임하게 되었소."고 말하자, 부인이 "축하해요. 당신은 항상 그런 직책에 부임하길 원했잖아요."라고 축하의 말을 하니 "그런데, 그 함대는 이미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게다가 해군 본부는 비밀리에 니미츠를 부임시키길 원했기 때문에, 니미츠는 전속부관 라마 대위와 함께 사복 차림으로 기차를 타고 서해안까지 이동해서 비행기를 타고 현지에 도착해서 잠수함 위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니미츠는 자신의 정체를 기자들이 알아챌까 조마조마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24]그리고 니미츠는 그 당시에 소장이었기 때문에 해군 사령부 지휘관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당연히 수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한 승진이기 때문에 니미츠는 현지에 부임해서도 '현지 지휘관들의 깔보는 시선'에 상당히 곤란해했으며, 그런 예하 제독들의 태도를 아니꼽게 여긴 윌리엄 홀시 제독의 도움으로 간신히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었다.[25] 니미츠 본인마저 '잘리지 않고 6개월만 버텨도 성공'이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그러한 상황 하에서 그나마 유효한 전력인 항공모함 및 잠수함대로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일본 해군 연합함대를 맞아 전선을 유지했고,[26] 해군 장관에게서 위임받은 태평양함대 사령부 인선을 위한 무제한의 인사권(!)을 휘둘러서 미 해군 본부의 인사부처에서 일할 때 눈여겨 본 '인정받지 못했던 인재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가 대표 주자)'을 하나씩 긁어모아 자신만의 사령부를 건설하게 되며, 이 시기에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윌리엄 홀시, 마크 미처, 커티스 르메이 등의 태평양 전쟁의 주요 지휘관들이 사령부에 합류하게 되고(르메이는 해군 장관의 요청),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큰 실적을 남긴 태평양함대의 정보부 역시 질적 및 양적으로 크게 확대되게 된다. 니미츠 제독은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도와준 윌리엄 홀시 제독의 은혜를 잊지 않고 중부 태평양 진격 작전 이후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루손 섬 상륙 작전중 태풍이 제3 함대를 직격해서 많은 손실을 입어 사문회에 불려나갔던 윌리엄 홀시 제독을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과 두 명이 함께 적극 비호해 준 일은 그 한 가지 사례. [27]
니미츠는 자신이 뽑은 인물들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이 선택한 지휘관들이 전투에 돌입하면 전투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위임한 스타일로도 유명하다. 혼자서 함대를 통제하려 들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나 작전 입안 전에 참모진들의 난상 토론으로 계획을 만들면 실전에서는 본인의 허락 없이는 작전 변경을 할 수 없었다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스타일과도 종종 비교되었다.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전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다'고 홀시 제독에게 전문을 보낸 일화는 이런 불간섭 원칙을 깼던 예외 중의 예외로서 당사자였던 홀시 제독마저 격노하며 당혹한 해프닝이다. [28]
사실 "전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다." 사건은 의도치 않게 일이 확대돼 버린 경우다. 원래 "34기동부대는 어디 있는가?"가 전문의 본 내용이고 그 뒤의 "전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다."는 전문의 끝을 알리는 삽입구였다. 이 경우 뒤의 삽입구는 해당 전문을 다른 전문과 문장길이를 동일하게 맞춰서 도청을 당하더라도 전문의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당일이 크림 전쟁 당시 발라클라바 전투가 벌어진 날과 같은 날이라 전문 담당하는 소위가 더미 문자로 발라클라바 전투를 기리는 테니슨의 '경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의 한 소절[29]을 삽입구로 쓴 것. 그런데 당시 홀시가 이끌던 3함대는 일본 해군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의 미끼 전술에 낚이는 바람에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완전히 비워 버려서 니미츠는 물론이고 7함대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으로부터도 후딱 돌아오란 전문을 수시로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홀시가 해당 전문을 전 세계가 궁금해하는데 너 어디서 삽질하고 있냐? 빨리 안 와?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고 당연히 격분했으며 니미츠는 당황했고 담당 소위는 전출당했다.
여하튼 제독들을 포함해 도크, 보급, 정보, 해병대 등의 병과 역시 니미츠의 기대에 충족하는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니미츠가 뽑지 않은 동시에 실적도 좋지 않았던 이들은 니미츠가 말없이 지켜보다가 인내심이 바닥나는 순간 태평양 사령부에서 전출시켰다. 하지만 이때도 징계형식보다 그저 근무지 변경이나 진급을 위한 순환 근무 등으로 처리하여 원성을 들을 일이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 [30]
니미츠의 인선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함대 운영의 중심을 항공모함으로 변경하는 기본 지침이 결정된 이후 미 해군 태평양 함대는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에게 첫 패배를 안겨 줬고,[31]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을 모조리 인공어초로 만든 뒤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반격을 펼쳐서 일본군을 압박했다. 이 승리를 일궈낸 것은 니미츠가 완성한 '알아서 완벽하게 돌아가는 자신만의 사령부'였고, 니미츠 본인은 위에서의 압박에 실드를 쳐 주거나 부하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는 것 외에는 권총 사격(군인다운 취미라고 생각해서 취미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수전증 치료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과 산책으로 시간을 때웠다고. 이는 사령관이 권총 사격을 즐길 정도로 여유가 있음을 부하들에게 보여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소소한 에피소드로 제임스 포레스탈 앞에서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방문한 포레스탈과 니미츠가 보트를 타고 진주만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마침 상륙함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니미츠는 상륙 작전 때 상륙함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그리고 상륙함의 가치가 어떠한지에 대해 포레스탈에게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니미츠의 말이 끝난 직후 상륙함 위에 나타난 것은 수영복 차림의 해군 간호사들(...).
그 활약상으로 종종 남서태평양해역군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와 비교되는데, 전체적인 평가는 니미츠 제독과 태평양해역군이 가치 있는 승리를 더 많이 일궈냈다는 평이다. 그러나 일본 항복 조인식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명예가 맥아더 원수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장면에서 묻히는 감이 없지 않다. 니미츠도 맥아더가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공식 항복문서 조인식에 서명을 하게 된 것을 알고 짜증을 냈지만[32][33] 포레스털 해군장관의 제안[34]으로 니미츠는 미국 대표로써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본국으로 귀국한 뒤 어니스트 킹의 뒤를 이어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의 고유 권한[35]을 상당히 포기하면서까지[36] 그 자리에 올랐던 걸 보면 일생일대의 꿈이었나 보다. 포레스탈은 직설적으로 그 자리를 원한다는 니미츠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결국 니미츠는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는데 그러자 포레스털은 관례보다 촉박한 인수인계 시간을 주면서 뒤끝을 부렸다. 해군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라 그런 건지도.[37]
해군참모총장의 임기가 끝난 후엔 캘리포니아에서 지내다가 그 당시 분쟁이 벌어졌던(그리고 현재에도 진행 중인) 인도-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 조정 위원회의 유엔 판문관을 지내기도 했다. 허나 이 위원회는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이 조정을 거부함에 따라 결국 해산되고 그 뒤론 해군장관의 고문역을 하다가 그만둔 후엔 인기가 많다 보니 각지를 돌면서 연설 혹은 행사에 참여하거나 했고 1960년대에 출판된《해양력:해군의 역사》편찬에 참가했다.[38]
2.3. 종전, 해군참모총장 퇴임 이후
2차 대전 이후 미 육군 항공대에서 공군으로 바뀐 미 공군과 미 해군의 싸움[39]이 슬슬 시작할 때 니미츠의 해군참모총장 퇴임 연설은 해군에 힘을 실어 줬고[40] 후에 있었던 제독들의 반란 사건에 도움을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말년에는 폐렴으로 인한 뇌졸중을 앓았고, 1966년 2월 20일 샌프란시스코 예바 부아나 섬에 있는 자택[41] 에서 병사했다. 장례식은 인접한 트래저 아일랜드(Treasure Island)의 예배당에서 치렀고, 산 브루노의 골든 게이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니미츠 자신은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42] 때문에 구술사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부하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담긴 편지도 전부 부인이 소각해 버렸다. 니미츠 사후 미 해군사관학교 교수인 E. B. 포터 박사가 쓴 전기가 니미츠에 대한 고전이 되었다. 한국에도 2권으로 번역이 되었고 나중에 양장 합본이 나왔다.[43] 그러나 지금 그의 이름은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니미츠급 항공모함에 붙여졌으니 그 노고는 충분히 보상받은 셈이다. 항공모함 함대를 앞세워서 승리를 일궈낸 사람을 기리는데 이보다 더 알맞은 명명법은 없을 것이다.
3. 기타
- 1912년, 고위 관료들에게 정박하지 않고도 연료를 주유할 수 있는 카나와급 급유함 AO-2 모미에서 디젤 엔진을 소개하다 왼손 약지가 끼어 일부가 절단됐다.
-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독일 해군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카를 되니츠 제독의 익수자 구조 금지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연합군 검사단의 의견 요청에 되니츠의 행위는 이해 가능하다라며 손을 들어주었다.
- 미드웨이 영화에서는 1976년 작에서는 배우 헨리 폰다가, 2019년 작에서는 배우 우디 해럴슨이 연기했다. 특히 2019년 작의 우디 해럴슨은 딱 보기만 해도 '아 이 사람이 니미츠 역할이구나'라고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선 평범한 백인 남성으로 나오긴 하는데 미드웨이 해전을 앞둔 미 해군 전력의 상황에 낙담해 "이런 니미! 움직일 수 있는 항모는 2척밖에 없는데."라고 한마디 해줘서 굽시니스트 특유의 언어유희를 보여줬다. 물론 그후로 다들 알다시피 파손된 항모 요크타운을 3일 동안 미친 듯이 수리해 합류시킨다.
- 1980년 영화 최후의 카운트다운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니미츠급 항공모함 1번함 니미츠가 F-14를 가득 실은 채로 아직 니미츠가 소장이었던 진주만 공습 전날로 타임슬립한다. 니미츠 함에 탑승한 한 상원의원은 소리의 속도를 넘나드는 제트 전투기와 헬리콥터(...)의 위용에 넋이 나간 채로 루스벨트랑 니미츠가 나도 모르게 뭔 수작을 부린 거냐며 비명을 질렀다.
- 아들인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주니어(1915~2002)도 대를 이어 해군에서 복무하였는데, 진주만 공습 때 잠수함 USS 스터전(Sturgeon)의 함장으로 근무했으며, 소장까지 진급했다. 니미츠 2세도 2차 대전에서 해군 십자장 1개와 은성 훈장 4개를 받았을 만큼 많은 공훈을 세웠고 부친의 후광에 힘입어 4성 제독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지만 전쟁 후 변화된 해군 장교로서의 가치관[44]에 의문을 품었고 결국 전역을 결심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종신 원수였으므로 아버지보다 빨리 퇴역했다. 하지만 아들은 2002년에 아내와 함께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했다. 아내가 말년에 시력을 잃었고, 자신도 위장염과 울혈성 심부전으로 고생하였다고. 그래도 생몰년을 보면 알겠지만, 86세까지 장수한 편이다. 그 나이대에 건강 악화와 우울증 등으로 자살하는 고령자들이 꽤 있으며, 체스터 주니어의 유서에도 '심사숙고 후 내린 결정이다' 라는 이야기와 함께 심한 고생으로 삶을 지속하지 않기로 했다고 담담히 기술하고 있었다. 부인과의 사이에 딸만 셋 두었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미국 대통령이던 당시 소위후보생이었던 니미츠는 미국 해군력과 열강의 강대함을 전세계의 자랑하기 위해 조직된 대백색함대 중 캔자스함에 속해 일본을 방문한적 있는데 이 때 당시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의 주역이자 일본제국 해군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를 축하연에서 만나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 때의 정 때문이지 도고의 기함이었던 미카사가 클럽으로 전용되는걸 막고, 복원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당시의 사고 장소로 알려진 괌의 니미츠 힐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 약장을 많이 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해, 많이 달아도 6개, 보통은 해군 공로 훈장과 해안경비대 인명 구조장 은장[47] 2개만 잠수함 장교 휘장과 함께 패용하는 편이었다. 위의 초상화 사진을 보면 약장이 간소하게 달린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미군 규정상 받은 약장은 모두 달고 다녀야 하나 해군의 경우 평소에는 개인 선택으로 1줄로 줄여 달 수 있는 예외가 있고 육군에는 이 예외 규정이 없다.
- 온화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무른 사람(무골호인)은 아니었다. 함장[48] 시절을 예로 들면 부하 장교들에게 "너희도 미래의 함장이다"며 차상급자의 역할수행 기회를 부여해[49] 조직발전에 전념하게 했고, 승조원들이 정박한 중국 지역에 대한 문화적 이해를 높이도록 지원하는 등 노력했다. 그 결과 고만고만하던 오거스타함은 니미츠 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함대 내 전비태세나 포술 등에서 1등을 휩쓸었다. 반면 니미츠는 능력이나 열의가 자기 기준에 못 미친다 싶으면 몇 번의 기회를 주고, 그 기회도 못 잡으면 조직에서 쳐냈다. 정확히는 "무난하게 자기 역할을 다 하는 장교다"라는 근무평정을 써 주었으나, 니미츠 스타일을 아는 사람은 이를 보고 그 사람이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할 것"이라는 의미를 캐치한 것. 그는 어느 날 예고 없이 부하 승조원을 호출해 상급자나 함장 역할을 맡기거나, 니미츠 본인의 조함 실수를 놓고 그가 어떤 점에서 잘못했는지 짚어보게 했다. 이런 식으로 부하들의 자질을 평가하고 자신의 역할을 떠나서 조직을 위해 고민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래서 니미츠 휘하 장교들은 평균 제독 진급률을 훨씬 웃도는 무려 40퍼센트의 장교가 제독 이상 계급까지 진급했다. #
- 중령 시절인 잠수함 전대장 때에는 출입항 중 추돌 사고를 일으킨 모 함장에게[50] 이런 말도 했다. "함수 한 두번, 함미 한 두번은 괜찮아. 그러나 그 이후로도 사고가 발생하면 그 때는 책임을 물을 걸세. 자네는 이미 함수 한 번의 기회를 사용했으니 한 번 남은 기회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게."
- 철저하게 능력주의 인사 원칙을 고집한 탓에 윌리엄 홀시나 마크 미처처럼 인맥·친분으로 어떻게 비벼볼 수도 없었다.[51] 니미츠가 홀시, 스프루언스, 터너, 스미스 같은 개성 강한 장성들을 하나의 사령부 밑에서 원활하게 다룰 수 있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 그는 온화함을 잃지 않고 부하들의 실수 몇 번은 책임지고 보호하는 등 관용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을 펼쳤다. 그러나 이런 니미츠도 평정심을 잃은 사례가 있다. 일본에 입항하며 일장기 대신 중국 국기를 계양한 하급 장교와 수병에게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너희들을 죽여버렸을거다"고 분노한 뒤 다시는 함교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본인은 물론 동승한 대사까지 일본 측에 사죄해야 했던 대형 참사라 함장인 본인이 보호해줄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섰고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기에 저렇게 분노할 만하다.
- 대부분 내용의 출처는 한국에도 정식 출간된 니미츠 전기이다.
3.1. 이순신 관련 일화
-
한국인들에게는 재미있게도 니미츠 제독이 1944년 한 브리핑에서
이순신을 언급한 적이 있다.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타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다는 일본 측의 선전을 위트있게 반박하면서 나온 내용이다. 전투의 날짜, 교전의 내용과 전과 수치 등을 볼 때
부산포 해전을 언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 독서에 관심이 많던 니미츠 제독인 데다 일본과 바다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적국과 관련된 역사를 많이 공부했을 것이고, 그 중
임진왜란의 사례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강력한 연합군 함대[52]가 한국 동남부에 위치한 부산항 입구에 정박한 일부 일본 함대를 공격하여 적함 80여 척 중 27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전투함과 수송선을 포함한 70여 척의 일본 함선이 이 연합국 함대에게 포착되어 섬멸되었다. 일본군 함대에 가해진 이 강력한 타격들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 육군을 고립시키고 본토 기지에서 차단시켰다.(잠시 뜸을 들이고) 며칠간 진행된 이 해군 작전은 1592년 여름에 수행되었으며, 연합군 함대를 이끈 지휘관은 한국의 이순신 제독(the Korean Admiral Yi Sun-Sin)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도 일본 해군은 이미 큰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 1944년 10월 9일, 진주만 미 해군 기지에서 시행한 브리핑 중에서[53]
4. 진급 내역
- 1907.01.07: 소위(Ensign)[54]
- 1910.01.31: 중위(Lieutenant Junior Grade)
- 1910.01.31: 대위(Lieutenant)
- 1916.08.29: 소령(Lieutenant Commander)[55]
- 1918.03.08: 중령(Commander)
- 1927.06.02: 대령(Captain)
- 1938.06.23: 소장(Rear Admiral)
- 1941.12.31: 대장(Admiral)[56]
- 1944.12.19: 원수(Fleet Admiral)
5. 주요 서훈 내역
- 해군 공로 훈장 4회
- 육군 공로 훈장
- 인명 구조장 은장
- 미 국가 방위 훈장
- 아시아-태평양 전역 복무 공로장
-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장
- 국가 방위 공로 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 (2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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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아놀드의 원수 진급 당시 공군은 육군 항공대였다. | }}}}}}}}} |
[1]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의 정확하게 중간에 있다.
[2]
1914년 2월 22일 출생 2015년 1월 14일 사망.
UC 버클리를 졸업한
워싱턴 D.C. 공립 도서관의 음악 사서로, 미 해군 사령관인 제임스 토마스 레이와 결혼했다.
[3]
1915년 2월 17일 출생 2002년 1월 2일 사망.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 당시의 미 해군의 잠수함 사령관이었다. 이후
해군십자장와 세 개의
은성훈장을 받았다.
[4]
1919년 출생 2003년 사망.
소련 경제 전문가였다.
[5]
1931년 출생 2006년 2월 27일 사망. 캘리포니아 도미니카 대학교의 생물학 교수였다.
[6]
영어권 국가에서는 전통적으로
배나 전차 등의 무기류나 자동차, 항공기 등의 교통수단을
여성 명사로 취급한다.
[7]
Powder는 여성들이 치장할 때 쓰는 파우더와, 화기들이 쓰는 화약을 동시에 칭하기도 한다. 또 화장실을 'Powder Room'이라고도 부르는데 역시 같은 의미이다.
[8]
약간 긴 버전으로, 미 해군에서 자주 쓰이던 옛 관용구는 다음과 같다. "배가 여성형인 이유는, 주변이 늘 붐벼서 남자들 무리가 들끓고, waist(허리, 선체 중앙)와 stay(코르셋, 선박의 고정용 줄)가 있으며, 이쁘게 보이려면 페인트칠을 꽤나 해야 하고, 첫 비용보다 유지비가 더 비싸게 먹히며, 잘 빠졌고(decked out, 출항하다/쫙 빼입다), 제대로 다루러면 경험 많은 남자가 필요하고, 키를 잡는 남자가 없으면 완전 통제불능이기 때문이다. 위쪽은 노출하고 아래쪽은 가리며, 항구로 들어올 때는 부표 쪽을 향한다(부표는 남근 모양이므로 성관계를 의미한다)."
[9]
사실 홀시 제독의 능력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는 스스로 해군 조종사 자격을 딸 정도로 일본군 제독들이나 기타 미군 함대 사령관들에 비해서 항공모함 작전에 대한 이해와 열정이 높았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태평양 전쟁의 핵심 함대 사령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그는 자신과 관련된 변호를 하느라 과거 동료였던 사람 다수를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당시 행동을 해명하면서 애먼 동료들을 함부로 언급해 자신을 변호하는 등 무례한 점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홀시의 행동들은 정상참작이 되지만 당시 스스로를 변호하며 홀시가 소인배적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10]
홀시는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괜찮은 전투력을 보여줬으나 후반부에 태풍 사건, 즈이카쿠 추격 사건, 전보를 받고 하급자 앞에서 엉엉 울부짖고 쌍욕한 사건 등 명성에 걸맞지 않은 미흡한 모습들을 보였다. 특히 태풍 사건은 킹과 니미츠가 쉴드쳐주지 않았으면 퇴역할 수도 있었다. 5성 제독 임명도 국회의원 인맥이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전문가들은 홀시의 이미지는 언론 및 할리우드 등에서 부풀려진 점이 크다면서
스프루언스를 더 높이 쳐준다.
[11]
홀시가 전쟁 말기 여러 차례 초대형 실책을 저질렀지만 니미츠 제독은 그를 비호했다. 다만 홀시 문서에도 있듯 니미츠는 홀시가 '천황의 백마를 타고 도쿄 거리를 지나가겠다'고 말하자 보직 해임까지 언급하며 경고하는 등 항상 비호하진 않았다.
[12]
니미츠와 홀시의 관계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하술할 전보 사건도 그랬다. 홀시는 전보를 받자마자 쌍욕하며 울부짖었는데 뭔가 낌새를 챘을 수 있다. 만약 알려진 사실대로 명백한 실수였다면 홀시가 그렇게 분개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들이 같이 찍은 사진도 다소 석연챦다. 대체로 홀시는 거침없고 니미츠는 어색한 느낌이다. 물론 이걸로 이들 사이가 좋았을지 추정하긴 어렵다. 니미츠의 부인이 향후 논란이 될 문서를 모두 소각했기에 진실은 니미츠 본인만 알 것이다.
#
#
#
[13]
이외에
미국-스페인 전쟁의 영웅
조지 듀이 대원수도 있긴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듀이 역시 5성 계급을 단 적은 없다.
[14]
참고로 이동네는 한때 택사스 독일인 밀집 지역이었던 동네로, 개척민 대다수가 독일계였다. 독일어도 이때까지는 널리 쓰였는데, 택사스 독일어라는 방언이 생겨날 정도였다. 지금은 대다수가 노년층인 몇 천명의 사용자만이 남아있다. Fredericksburg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 자체도 독일인이 정착해세운 거다.
[15]
이제는 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에서 가장 많은 혈통을 차지하는 것은 영국계가 아니라 독일계이다.
# 2차 세계대전에서 육군을 대표하는 아이젠하워와, 해군을 대표하는 니미츠가 모두 독일계이다(...)
[16]
반대로 같은 시기에 육군 원수가 된
아이젠하워는 원래 해군으로 입대하려고 했지만 입학시험에서 떨어져서 대신 웨스트포인트에서 군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17]
니미츠는 화장실에 유머책을 상비해 놓고 보았고 니미츠의 유품 중에 여러 모로 공부한 흔적이 있는 너덜너덜한 유머책이 있었다고 한다.
[18]
스스로 정치에 소질이 없다 느꼈거나 정치인들의 이전투구가 싫은 탓에 그 정도로 만족했을 수 있다.
[19]
마찬가지로 쟁쟁한 제독들인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나
헬시가 30대 전후에 처음으로 구축함 함장을 맡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거다.비록 구식함이었지만
[20]
이 일은 본인에게 추억이 된 듯 훗날 원수가 되었을 때 "군법 회의에 회부되고도 장성으로 진급한 전례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웃음 짓기도 했다.
[21]
부슈-슐처 브라더스 디젤 엔진 컴퍼니(Busch - Sulzer Brothers Diesel Engine Compnay) 사에서 5년 계약 연봉 2만 5000달러짜리 일자리를 제의하였는데도 "고맙지만 해군을 떠날 생각은 없다" 며 거부했다. 당시 그의 연봉은 3,456달러였고 그 무렵 2만 5천 달러가 현재 가치로 따지만 50만 달러(!)를 휠씬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
[22]
원래 잠수함 도크는 건설 자재 배정 자체가 안 되어 있던 것을 니미츠가 부여받은 권한으로 본토에서 징발하여 끌고 온 거다. 즉 거의 니미츠가 다 한 것이다.
[23]
그 직전에는 워싱턴 해군 본부의 항해국장을 맡아 주로 인사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24]
단, 그와 면식이 있던 교수 하나는 그를 알아보고 니미츠 제독이 여기 탔다고 떠들고 다녔다고.
[25]
이건 전임자인
허즈번드 킴멜 제독도 마찬가지였다. 킴멜 역시 소장이었다가 태평양함대사령관이 되면서 대장으로 진급했고, 이후 경질되면서 소장으로 돌아갔다. 킴멜과 니미츠의 차이점이라면, 킴멜은 말 그대로 임시 대장이었기에 혹시라도 자리에서 물러나면 다시 소장이 되지만, 니미츠는 정식 대장으로 진급했다는 점이다.
[26]
이때 니미츠의 태평양 함대는 항모 기동함대를 앞세워 일본군의 태평양 점령지를 치고 빠지는 형식으로 괴롭혔고 이 전략은 일본군의 신경을 충분히 자극했다. 1942년 3월 초에 이르러서는 대본영에 니미츠의 기동함대를 처리해달라고 현장 지휘관들의 분노에 찬 보고가 올라왔다고 한다.
[27]
당시 홀시 제독의 실수는 당장 옷을 벗거나 사령관직에서 짤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으로 보인다. 그러나 홀시가 과거 베푼 은혜를 갚는 차원도 있거니와 스프루언스를 제외하면 홀시보다 유능한 제독이 사실상 없다고 봐야 했기에 그를 잔류시켰을 수 있다. 니미츠 제독의 성격상 무능자는 조용히 타 부처로 전출되는게 일상이었다.
[28]
미국에서는 이 일이 단순 실수가 아닌 니미츠 제독의 따끔한 질책성 경고가 아니냐는 소수 의견도 있다. 허나 홀시의 참모장이 어이없어하며 홀시에게 '시발 진정좀 하세요' 라는 투로 말했다는 사실 등으로 볼 때 신빙성은 적다.
[29]
TURKEY TROTS WATER(칠면조가 물가로 뛰어든다)와 THE WORLD WONDERS(세계가 궁금해한다). 이중 뒷 문구가 일을 냈다.
[30]
중령 때 맡은 잠수함 전대장 시절이나 대령 때 맡은 순양함 오거스타함의 함장시절 모두 니미츠는 부하 장교~수병까지 열심히 자기 업무에 몰두하게 유도했고 이는 태평양사령관 때도 이어졌다. 당시 니미츠 제독보다 이 일에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시다.
[31]
당시 미 태평양 함대는 항모 렉싱턴 호를 잃고 요크타운 호가 중파되는 대신 소형 항모 쇼호를 격침하고
즈이카쿠와
쇼카쿠를 중파시키는 전과를 거뒀다. 손실은 미군이 좀 더 컸지만 일본군이 포트 모르즈비 상륙을 포기하고 철수함으로써 전략적인 승리는 미군이 거둔 셈이 되었다.
[32]
해군과 해병대가 가장 힘든 전투를 수행하며 승리를 거두고 나면, 스포트라이트는 육군이 다 가져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다른 이가 챙겨간 격으로 생각될 수 있으니 그 짜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니미츠가 맥아더를 썩 좋아하진 않은 듯하다.
[33]
사실 맥아더는 워낙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과 사이가 좋기는 힘들었다.
[34]
맥아더가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모든 전투부대를 대표하게 된다면, 니미츠가 미국을 대표해야 하고 항복문서 조인식은 해군 전투함 함상에서 치러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이에 따라
윌리엄 홀시가 기함으로 사용하던 USS 미주리 함상에서 행사가 진행되었다.
[35]
일단 임기부터 기존의 4년이 아닌 2년이었고, 대통령을 만나려면 해군 장관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36]
당시 해군 장관이었던 포레스털과 전쟁 중에 군정업무로 갈등이 좀 있어서[57] 포레스털이 니미츠의 참모총장 임명 추천을 주저했으나 전임총장이었던 킹 제독과 니미츠를 후원했던 여러 정치인들의 지지, 총장 권한 일부의 포기(이것은 전임자였던 킹 제독이 워낙 강력한 전시권한으로 해군장관을 유명무실하게 해서 그런 것 같다) 등으로 추천을 받는다.
[37]
해군 장관은 민간인 출신이 될 때도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할 일이 많은데 니미츠가 정치를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38]
이 책은 7개 국가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어째 국가마다 제목이 다르다.
[39]
다음 전쟁 때 각자의 전략적 역할을 정하기 위한 싸움+그를 위한 예산 다툼.
[40]
하지만 공군의 홍보가 워낙 뛰어나서 뒤에 이 힘을 상당수 까먹는다.
[41]
지금도 Nimitz House라고 보존되어 있다.
[42]
전후 작전 상의 문제 및 지휘권 다툼으로 많은 장군들과 제독들이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각자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주장을 다시 강조함으로서 논쟁을 야기시켰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사이판에서 지지부진한 진격으로 해병대사령관에게 해임당한 육군 장성 스미스 소장 등이 있다. 물론 그 육군 장군 스미스를 해임한 해병 장군 스미스 중장도 회고록을 내서 자신이 육군의 모든 분노를 떠안도록 니미츠 제독의 해군에게 버림받았다고 주장했다. 홀시 역시 회고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레이테에서의 지휘로 전후 새뮤얼 모리슨이 주도해 작성한 미 해군 공간사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는 곤욕을 치른다.
[43]
역자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소설가 허만 우크의 Winds of War가 이 전기를 대단히 많이 참조했다.
[44]
제독들이 정치가에게 과도하게 종속되었다고 생각했다.
[45]
과거에는 독일어에서의 z를 '쯔'라고도 썼기 때문에 '니미쯔'는 독일어 Nimitz의 번역으로 가능한 표기이다. 슈바르쯔→슈바르츠(Schwarz), 쯔바이→츠바이(Zwei) 등. '니미쓰' 또는 '니밋쓰'라고 쓴 경우는 일어 표기인 ニミッツ의 중역일 가능성이 높다.
하루제보단 낫지 뭘.
[46]
실제로
김홍래가 번역한 국내 니미츠 평전을 보면 니미츠가 해군 자원자를 불합격시킨 가정의 어머니가 "니미츠란 이름을 가진 외국놈이 우리 건강한 아들을 퇴짜보냈어요!"라고 항의편지를 쓴 일화가 나온다.
[47]
문서 상단 초상화에서 청백색의 무늬 없는 약장이 바로
해안경비대 인명 구조장 은장(Silver Lifesaving Medal)이다. 니미츠는 1912년 물에 빠진
수병 1명을 자진하여 뛰어들어 구함으로서 해당 훈장을 수훈하였다. 인명 구조장의 경우 수훈 기준이 명예훈장에 준할 정도로 까다로워서 1874년 훈장이 제정된 이래 금장의 경우 겨우 600여명, 은장의 경우 겨우 1,900여명이 수훈하였다. 니미츠가 평생의 자랑거리로 패용하고 다닐만한 훈장이다. 현재는 리본 디자인이 바뀌었다.
[48]
오거스타 함, 대령.
[49]
항상 군대는 하급자가 상급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터부시된다.
[50]
그 당시 잠수함은 조함이 까다로워 사고가 꽤 발생했다.
[51]
미국에서는 홀시가 능력보다 인맥, 언플, 자기관리, 이미지메이킹 등에 능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불패의 제독 스프루언스도 못 얻은 5성 제독을 어떻게 달았는지 모르겠다는 평이다. 다만 전쟁은 팀으로 일하는 것임을 고려해야 한다. 친화력도 좋고 레이테 만 해전 등에서 증명됐듯 전투력도 단단한 홀시가 5성 제독을 단 것은 당연하다. 유인책에 속아 즈이카쿠를 맹추격했던 점이나, 약 800명의 수병을 태풍에 돌격시켜 죽게 만든 점, 니미츠의 전보를 받고 울면서 악을 쓰는 등 다소 미숙한 모습도 그는 인맥관리와 친목으로 극복했다.
[52]
당시
조선과
명나라가 합세해 일본과 맞섰기에 "연합군 함대"라고 칭한 것이다. 정작 부산포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일본군과 전투했지만.
[53]
1944년 10월 10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인용.
#
[54]
1900년대 전후에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다가 소위 임관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실제 해군사관학교 졸업일은 1905년 1월 30일.
[55]
美해군의 소령은 사실상 정모 챙에 월계수를 부착하지 않는다. 즉, 사실상 위관급인 셈.
[56]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중장을 건너뛰고 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