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프랜시스 퍼킨스 Frances Perki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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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0년 4월 10일 |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 | |
사망 | 1965년 5월 14일 (향년 85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NNNcm, NNkg, 혈액형 |
가족 | 이름 (관계) |
학력 |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
종교 | 성공회 |
직업 | 정치인 |
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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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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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시기의 제 4대 노동장관[2]이자 미국 최초의 여성 장관. 뉴딜 정책에서 노동권이 주요 의제로 다루어지도록 노력했다.2. 생애
패니 코랄리 퍼킨스는 1880년 4월 10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프레드릭 퍼킨스와 수전 퍼킨스에게서 태어났다. 집안의 여성들은 교육 분야에서 일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퍼킨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 문학을 좋아했다.퍼킨스는 우스터(Worchester)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고, 1902년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생 때 퍼킨스는 진보 정치와 참정권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퍼킨스는 1904년부터 1906년까지 일리노이주 레이크 포레스트에 있는 페리 홀 학교(현재의 레이크 포레스트 아카데미)에서 화학을 가르쳤다. 또한 1905년 성공회에 입회하면서 이름을 패니에서 프랜시스로 개명한 이후 1907년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와튼 스쿨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배우고 2년 동안 필라델피아에서 사회 복지사로 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 다녔고 1910년에 경제학 및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가 정치적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는 1911년의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사고[3]가 있었다. 희생된 146명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고 이유는 출입구가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퍼킨스는 화재의 가장 큰 원인이 느슨한 법 체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퍼킨스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추천으로 화재 등 재해로부터의 노동자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뉴욕시 안전 위원회의 간사가 되었다. 위원으로서 퍼킨스는 63명이 사망한 뉴욕 빙엄턴의 프리먼 공장에서 발생한 또 다른 화재를 조사하였다. 1913년, 그녀는 뉴욕 주정부에서 "54시간"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퍼킨스는 당시 주의원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포함한 우호적인 정치인들과 함께 여성과 아동에 대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54시간'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워싱턴 D.C.로 이주하기 전에 퍼킨스는 뉴욕 주 정부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1919년 알 스미스 뉴욕주지사에 의해 뉴욕주 산업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인사는 제조업자들과 노동계 양쪽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스미스 주지사는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퍼킨스를 지지했다. 일부는 퍼킨스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반대의 근거로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2월 18일 퍼킨스는 뉴욕주에서 최초의 여성 산업위원 중 한 명이 되었고, 뉴욕 시 밖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29년 새로 선출된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퍼킨스를 산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다양한 정치 분파들의 협력을 얻은 퍼킨스는 뉴욕을 진보적 개혁의 선두에 놓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공장 조사를 확대하고, 노동시간을 48시간으로 줄였으며 최저임금 제도와 실업보험법을 지지했다. 또한 아동 노동을 종식시키고 여성 노동자에 대한 보호를 강화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퍼킨스에게 장관직을 권했다. 미국여성유권자연맹과 전국여성당의 지지를 받았으나 미국노동총연맹에서는 퍼킨스가 노동과 관련이 있는 인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호의적이지 않았으나, 최초의 여성 장관+대통령 직속 경제보장위원회 의장으로서 FDR 정부 12년 내내 재직했던 퍼킨스는 1935년 사회보장법 제정 등으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 정책을 주도했다.
1939년 공산주의자임을 밝히기도 한 노조 지도자 해리 브리지스를 반체제 활동 혐의로 추방하는 것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FDR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해리 S. 트루먼은 노동장관에 루이스 B. 슈웰렌바흐를 임명하면서 노동장관으로서의 임기는 1945년 6월 30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 노동부 건물을 '프랜시스 퍼킨스 빌딩'이라고 이름붙였다.
3. 여담
1913년 퍼킨스는 경제학자 폴 콜드웰 윌슨과 결혼했다. 1916년 딸 수잔나가 태어났다. 하지만 2년 정도 후부터 윌슨은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고, 퍼킨스가 가족을 부양했다.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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