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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년 4월 23일 |
캐나다 자치령 토론토 | |
사망 | 1972년 12월 27일 (향년 75세) |
캐나다 자치령 오타와 | |
국적 | 캐나다 자치령 |
학력 | 토론토 대학교 빅토리아 칼리지 (BA) |
직업 | 외교관, 정치인 |
배우자 | 메리언 페어슨(Maryon Pearson)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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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clearfix]
1. 개요
캐나다의 정치인. 1963~1968년 동안 재임한 제14대 총리이다. 후술되어있듯 노벨평화상 수상자기도 하다.2. 생애
레스터 피어슨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요크 뉴턴브룩[1]에서 감리교 목사 에드윈 아서 피어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스터 피어슨의 아버지는 가족을 토론토로 옮겨 온타리오주 오로라로 이주시켰고, 그곳에서 오로라 감리교회의 목사로 있었다. 레스터 피어슨은 터론토 오로라에서 자랐고 처치 스트리트에 있는 공립학교에 다녔다. 그의 가족은 토론토 스프루스와 캐서린 가의 모퉁이에 있는 감리교 교단에 살았다.피어슨은 1913년 16세의 나이로 온타리오주 해밀턴에 있는 해밀턴 대학원을 졸업했다. 같은 해 말, 호주에 있는 삼촌의 에뮤 농장에서 3개월을 보낸 후, 그는 토론토 대학교의 빅토리아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1927년, 그는 캐나다 외무부 임용 시험을 치르고 1위를 한 후,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35년 캐나다 고등위원회(High Commission of Canada)에 임명되어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캐나다 하우스에서 2인자로 근무했으며, 빈센트 매시(Vincent Massey) 고등판무관 밑에서 군사 공급과 난민 문제를 조정했다.
1942년 6월 워싱턴 D.C.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에 공사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945년 1월 1일 두 번째 주미 캐나다 대사가 되었다. 특히 피어슨은 유엔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설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피어슨은 1946년 유엔의 첫 사무총장이 될 뻔했으나 소련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는 1953년 영국인들이 그를 대신해서 활발한 캠페인을 벌였을 때 사무총장의 유력한 후보이기도 했다.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11표 중 10표로 1위를 차지했지만, 유엔안보리는 대신 스웨덴의 다그 함마르셸드를 내정했다.
1956년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수에즈 전쟁을 유엔을 통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한 공로[2]로 195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노벨평화상 선정위원회는 피어슨이 "세계를 구했다"고 설명했지만, 일부에선 캐나다와 영국과의 관계를 배신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한편 피어슨은 1948년 외무장관으로 입각한 후 매켄지 킹 내각과 루이 생로랑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했고, 1948년 보궐선거에서 Algoma East 선거구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캐나다 의회에 입성했다.
2.1. 총리 재임기와 이후
1957년 선거에서 패배한 루이 생로랑이 이듬해 당수직을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자유당 당수가 된 피어슨은 1963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캐나다 총리에 취임한다.피어슨은 미국, 영국과의 관계 개선에 집중했지만,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일으키고 북베트남과 전쟁에 들어가자 1965년 미국의 한 대학교 강연에서 이를 비난하면서 미국 정부와 사이가 서먹해진다. 이때 빡친 존슨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 피어슨 총리를 불러 파병을 요청하며 "우리집 거실에 와서 카펫 위에 오줌 갈기지 마라!(Don't you come into my living room and piss on my rug)" 등 한시간 넘게 격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허나 이런 외교적 무례에도 피어슨은 명분이 부족한 베트남 전쟁 참전을 거부한다.[3]
그의 집권기 캐나다는 경제적으로 호황기였지만, 영국계 캐나다인과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갈등이 고조되며 퀘벡주에선 1967년,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이 '자유 퀘벡 만세'라는 돌발 발언을 터뜨려 퀘벡 독립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1968년 4월 21일 총리직을 후임인 피에르 트뤼도에게 넘겨주고 사임한 후, 동년 8월에 세계은행 총재로 선출되었다.
1972년 오타와의 자택에서 암으로 사망하였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캐나다 연방 하원의원 보궐선거 | 알고마 이스트 |
|
4,685 (56.4%) | 당선(1위) | 초선 |
1949 | 캐나다 연방 하원의원 선거 | 6,184 (54.8%) | 재선 | |||
1953 | 7,494 (65.9%) | 3선 | ||||
1957 | 8,574 (52.0%) | 4선 | ||||
1958 | 11,240 (51.7%) | 5선 | ||||
1962 | 11,934 (57.6%) | 6선 | ||||
1963 | 10,817 (52.2%) | 7선 | ||||
1965 | 9,268 (54.2%) | 8선 |
4. 여담
토론토의 피어슨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기린 것이다.캐나다 외교부 청사도 '피어슨 빌딩'이라고 불린다.
내셔널 하키 리그 선수협 선정 정규시즌 최고 선수[4]에게 매해 주어지는 ' 레스터 B. 피어슨 상(Lester B. Pearson Award)'도 토론토 대학교 대표 하키 선수 및 코치로 활약했던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지만, 2010년에 테드 린지 상으로 개칭되었다.
토론토 대학교도 매해 가장 우수한 국제학생들에게 '레스터 B. 피어슨 국제 학생 장학금(Lester B. Pearson International Student Scholarship)'을 수여한다. 대학교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장학 프로그램이며 수상자들은 학비, 기숙사비, 식비, 책 값등을 4년간 전액 지원받는다. 현재까지 4명의 한국인이 받은 바 있다.
[1]
여담으로 현재 이 지역은 상당 부분이
코리아타운화과 된지 오래고 (특히 영 스트리트와 핀치 애비뉴 지역), 당연히
토론토 내에서 한국 이민자들 수가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이다.
[2]
유엔 총회 의장으로서
수에즈 운하 사건 때 UN비상군을 조직했다. 피어슨과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는 '평화 유지' 개념의 선구자로 그들은 함께
1956년 비행훈련을 통해 유엔 비상군을 조직할 수 있었다.
[3]
캐나다는 이후 베트남 전쟁의 징병을 피하려는
미국인들이
망명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반대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려고 미군으로 입대한
캐나다인들이 꽤 있는데 규모로는 3만명 가량 참전(엄밀히 말하면 비공식적이지만)하였다.
[4]
리그 차원에서 수여하는 정규시즌 최우수 선수상은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