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폰 노이만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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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존 폰 노이만 John von Neuman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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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너이먼 야노시 러요시 Neumann János Lajos[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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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3년 12월 28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2] | |||
사망 | 1957년 2월 18일 (향년 53세) | ||
미국 워싱턴 D.C. 월터리드 육군 의료병원 | |||
직업 | 경제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컴퓨터과학자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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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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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분야 | 수학, 물리학, 화학, 컴퓨터과학, 통계학, 경제학 | |
학력 |
퍼쇼리 김나지움 (졸업) 파즈마니 페터 대학교[3] ( 수학 / 박사)[4]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 화학 / 박사)[5]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 하빌리타치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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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베를린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로스 앨러모스 국립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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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업적 |
폭축렌즈 게임 이론 기대효용이론 국소 볼록 공간 미니 맥스 원리 에르고딕 정리 폰 노이만 구조 폰 노이만 대수 폰 노이만 보편 구축자 폰 노이만 세포 자동자 폰 노이만 엔트로피 폰 노이만 전체 폰 노이만 정칙환 폰 노이만-베르나이스-괴델 집합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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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마리에트 쾨베시 (1929년 ~ 1937년, 이혼) 클라라 댄 (1938년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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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딸 1명 (마리나 폰 노이만 휘트만) | ||
종교 | 무종교( 불가지론)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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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출신 미국의 수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컴퓨터과학자, 경제학자.폰 노이만은 경제학, 양자역학, 함수해석학, 집합론, 위상수학, 컴퓨터과학, 기하학, 수치해석, 통계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연산자 이론을 양자역학에 접목시킨 최초의 선구자 중 하나였다. 맨해튼 계획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참여하였고 게임 이론과 셀룰러 오토마타의 개념을 공동 개발하였다. 또한 디지털 컴퓨터의 발달에 관여하였다.
일생 동안, 폰 노이만은 150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순수 수학 60편, 물리학 20편, 응용 수학 60편이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컴퓨터와 뇌(The Computer and the Brain)》는 사망 직전 병원에서 집필되었는데, 집필 도중 그가 사망하면서 미완성의 원고로 남게 되었고 훗날 책 형태로 출판되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헝가리어식 이름은 성씨가 이름 앞에 오는 너이먼[6][ˈnɒjmɒn\](너이먼)으로 발음한다.] 야노시 러요시(Neumann János Lajos)이며, 독일어식으로 쓰면 요한 루트비히 폰 노이만(Johann Ludwig von Neumann)이다. 1913년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의 아버지였던 너이먼 믹셔(Neumann Miksa) (1873년 ~ 1928년)[7]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하면서 이름에 귀족임을 뜻하는 폰(von)이 들어가게 되었다.그의 아버지 너이먼 믹셔는 자녀교육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 노이만과 형제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개인 가정교사를 들였는데, 수학과 더불어 자식들이 헝가리어 외에도 다른 언어들을 배워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가르쳤고 많은 양의 학문을 조기교육 시켰다. 8세의 나이에 폰 노이만은 미분과 적분에 대해 잘 아는 상태가 되었고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도 능해졌다. 특히 역사학에도 흥미를 가져 빌헬름 옹켄(Wilhelm Oncken) (1838년 ~ 1905년)의 세계사 시리즈를 많이 읽었다. 아버지는 이런 폰 노이만을 기특하게 여겨 방 하나를 개조해 개인 도서관으로 만들어줄 정도였다.
폰노이만은 유년시절 박치불러바드(Vaczi Boulevard) 62번지에 에 있는 아파트 꼭대기층에 살았는데, 방이 무려 18개나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현재도 남아있는 이 건물에는 보험회사가 입주해있는데, 건물 현관에 폰노이만을 기리는 현판이 장식되어있다.
어렸을 때부터 산수, 언어, 암기의 분야에서 강한 능력을 보였다. 7살 때 여덟 자리 수의 나눗셈을 하였으며, 12살 때 13살의 유진 위그너에게 정수론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독해력은 매우 빨랐고 무언가를 암기하고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폰 노이만의 부모는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폰 노이만의 암산 능력을 보여 주며 즐겁게 해 주기도 하였다. 그의 동생이자, 후에 물리학자가 된 너이먼 미하이(Neumann Mihály) (1907년 ~ 1989년)는 형이 당시 인기 있었던 빌헬름 옹켄의 44권짜리 세계사 시리즈에서 그가 읽은 부분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십 년 후 폰 노이만의 동료 한 사람은 폰 노이만이 옹켄의 책 중 한 챕터 전체를 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의 가족들, 폰 노이만 본인,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관심 없는 영역에 대한 기억력은 일반인들보다도 좋지 않아 수십년간 거주한 집에서 접시가 담긴 찬장이 어딘지도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고 한다.
8세에 루터회 학교인 퍼쇼리 에벙겔리쿠시 김나지움(Budapest-Fasori Evangélikus Gimnázium)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부다페스트에서 제일 교육수준이 높은 엘리트 학교 중 하나였다. 수업 내용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 예습 없이 수업에 참여해 다른 급우들을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으며 여기서 훗날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되는 유진 위그너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당시 김나지움의 선생이었던 라츠 라슬로(Rátz László) (1863년 ~ 1930년)는 노이만의 수학적 재능에 대해 주목하여 일반적인 교육 수준에서는 노이만이 자신의 날개를 완전히 펴지 못한 채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그의 아버지였던 너이먼 믹셔와 상담을 가졌다. 그의 아버지는 폰 노이만이 정규교육과정을 생략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으나 뛰어난 학자를 들이는 데에는 찬성하였고 당대에 유명했던 헝가리의 수학자인 세괴 가보르(Szegő Gábor) (1895년 ~ 1985년)를 교육자로 선택해 고등 미적분학을 접하게 하였다. 세괴와 폰 노이만의 첫 만남 이후 세괴의 아내는 그가 집에 돌아온 뒤 노이만의 수학적 재능에 대해 감명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김나지움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체육 과목 성적은 저조하였고 김나지움 졸업[8] 이후 19세에는 서수(ordinal number)에 대하여 논문을 냈다. 20세에 힐베르트의 23가지 문제 중 5번 문제의 compact group에 관해 풀었다.[9] 22세에 부다페스트 대학교 수학 주전공에 물리, 화학 부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수학자보다 공학자가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아버지의 생각으로 박사 학위와 동시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에서 화학 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2. 미국 망명 전
독일의 교수자격 시험인 하빌리타치온을 최연소(25세)로 통과하였다. 20대에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10]나 《집합론의 공리화》, 《에르고드 이론의 연구》, 《실내 게임의 이론》 등을 저술해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이 되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창립 교수 4명 중 1명(당시 유일하게 20대였다.)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최초로 힐베르트 공간을 양자역학에 도입한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아직까지 판매되고 있다. 이 네 저작들은 현대 기준으로 모두 별개의 학문으로 분류된다. 청년기에 혼자서 학문의 큰 가지를 세운 것이다.1928년부터 베를린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Privatdozent)로 근무하였다. 1927년 한 해 동안 폰 노이만은 수학에 관한 주요 논문 12편을, 29년 말까지 주요 논문 36편을 발표했다. 1930년에 그는 미국 뉴저지의 프린스턴 대학교에 가게 된다.
1930년, 27세의 폰 노이만은 마리에트 쾨베시(Mariette Kövesi)[11]와 결혼하였다. 결혼하기 전 그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는데, 이 시기는 아버지인 믹셔가 사망한 지 몇 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들은 슬하에 1명의 딸을 두었고 이름을 마리나라고 지었다[12]. 7년 뒤 두 사람은 성격차이로 인해 이혼했고 폰 노이만은 부다페스트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직전에 만난 여성인 클라라 댄[13]과 재혼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정권을 잡고 독재 정부인 나치 독일이 탄생하자, 폰 노이만과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당시 폰 노이만은 이름을 미국식 이름인 존(John)으로 개명했으며 독일식 귀족이름인 Von Neumann을 택하게 되었다. 다만 귀족적인 색채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은 각각 Neumann, vonneumann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2.3. 미국 망명 후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있던 중 1943년부터 맨해튼 계획에 참가해서 고폭발성 렌즈를 발명했다. 폭축 렌즈라고도 하는데, 이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팻 맨의 발명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수학자 G. I. 테일러와 함께 폭발파(Blast wave)에 대해 최초로 연구했다. 이후 다른 수학·물리학자들과 함께 이를 출판했으며 아직도 판매 중이다. 또한 유체 역학에 관련해 최초로 인공 점성(artificial viscosity)을 정의했다.1944년 《 게임 이론과 경제 행동》을 경제학자 오스카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저술했다. 이 역시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는 서적. 이후로 게임 이론의 연구를 통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물이 여러 번 나왔다.
DNA, RNA의 구조를 최초로 예견하였으나 세부 사항을 완성하기 전에 사망하여 빛을 보지 못했다. 컴퓨터 연구에 뛰어든 이후로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 디지털, 이진법이라는 기본적인 골격을 만들었으며 순서도와 서브루틴, 몬테카를로법을 최초로 사용했다. 전산학과 학생이라면 배울 병합 정렬(merge sort)을 1945년에 만들었고, 최초로 컴퓨터 기반의 pseudorandom process를 연구했으며 그 결과로 Middle-square method를 창시했다. 또한 Randomness extractor를 최초로 연구해 Bernoulli sequence를 이용한 Von Neumann extractor를 남겼다. 그리고 기상학과 관련해, 수학을 사용해서 일기 예보를 하려던 노력은 이전부터 있었으나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해 기상 예측을 시작한 사람은 폰 노이만이다. 이산 구조 등에서 배우는 ALU(arithmetic logic unit)도 폰 노이만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말년에는 인공 지능과 인공 생명에 관한 초기 연구를 남겼다. 그는 간단한 원칙만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복잡한 프로그램을 구상했고 이를 오토마톤이라고 칭했다. 1949년에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에서 오토마톤에 대해 처음으로 강의를 했으며 나중에 Theory of self-reproducing automata를 발표했다. 폰 노이만이 만든 이 자기 복제 컴퓨터 프로그램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라고 평가받는다.
2.3.1. 핵무기 개발
1937년, 미국 귀화 시민이 되고 나서 그는 당시의 제2차 세계 대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중위 시험인 미국 육군의 장교 준비 제도 이사회(USAR)의 간부시험에 지원하였다. 그는 쉽게 시험을 통과하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나이로 인해 거부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노이만은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나치 독일과의 전쟁은 수치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육군에 자청하지만, 위에 말했다시피 불채용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폰 노이만은 폭발물 분야에서 수학적 연구의 전문가가 되고, 미국 해군에 대한 컨설팅 작업을 했다. 이 분야에서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큰 폭탄에 의한 피해는 폭탄이 지상에 떨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때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폭탄에 이용되었다.
원자 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나가사키에 투하 된 플루토늄형 원자 폭탄 팻 맨을 위한 폭축렌즈의 개발을 담당했다. 1940년대에 폭발의 파면 구조에 대한 ZND 이론을 확립하였으며 이 이론을 바탕으로 10개월에 걸친 수치 해석을 통해 폭약을 32면체에 배치함으로써 원자 폭탄이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폰 노이만은 미국과의 교전국이던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지점을 선정할 때 문화재가 많은 도시였던 교토에 대해 "일본 국민들에게 교토가 문화적 가치가 많다면 더더욱 그곳을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폰 노이만이 만든 계획은 폭격기에 원자폭탄을 실은 뒤 교토 상공에 직접 투하해 도쿄 대공습과 같이 도시를 완전히 말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교토에 신혼여행을 갔다왔었던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이 반대해 대신 히로시마로 정해졌다.
2.4. 사망
1955년 방사선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골수에 전이된 치명적인 췌장암에 걸려서 1957년에 사망했다. 이때 그는 인공 지능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고 《컴퓨터와 뇌》를 저술하고 있었지만 이른 죽음으로 인해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특히 이 책에서 메모리 계층 구조가 필요해질 거라는 예측을 남겼다. 폰 노이만 구조의 컴퓨터 알고리즘은 병목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를 막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이 고안되었는데, 메모리 계층 구조도 그 방법 중의 하나이다.암에 걸린 이후 폰 노이만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는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엄청난 통증으로 고통받으며 가톨릭을 믿게 되었다. 그는 가톨릭에 귀의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파스칼의 내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하였다.[14] 다만 그의 고해성사를 들었던 신부에 의하면 노이만은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어 종교로부터 그다지 큰 위안은 얻지 못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미국의 군사 기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병원에서 면회할 수 있었던 인물은 소수였다고 한다.
3. 사생활과 사상
3.1. 신앙(종교)
- 폰 노이만의 친구인 헤르만 모르겐슈테른과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그가 평소 완전한 불가지론자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기했듯 병에 걸린 후 파스칼의 내기 영향으로 예수[15]를 믿게 되었는데, 이에 모르겐슈테른은 그가 건강했다면 계속해서 종교에 회의적이었을 것이었다고 말했다.
3.2. 금전적 여유
- 젊은 시절부터 폰 노이만은 IBM, 스탠다드 오일[16], 랜드 연구소(RAND Corp.), 제너럴 일렉트릭과 같은 초거대 집단의 컨설턴트 일을 했고 심지어는 미군과 CIA도 그를 원했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미국 귀화 후에도 금전적으로 굉장히 부유했으며 그의 집은 프린스턴 시에서도 유명한 큰 집 중 하나였다. 자가용으로 레이싱카인 페라리 500 몬디알[17], 페라리 625/250 TRC, 포르쉐 550을 타고 다녔다.
3.3. 정치적 성향
- 정치적으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나 좌익으로 몰린 지인들을 보호하려는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그의 동료였던 오펜하이머가 매카시즘으로 인해 억울하게 공산주의자로 몰렸을 때 폰 노이만이 변호해준 것이 대표적이다. 웃픈 건 맨해튼 계획 당시 폰 노이만과 일했던 클라우스 푹스라는 과학자가 있었는데 당시 상관 자리에 있던 노이만은 잘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상당히 똑똑했던 푹스의 지성과 능력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해줬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그는 소련 스파이였다. 실제 푹스가 빼돌린 자료들이 소련의 핵개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말도 있다.
3.4. 성격
- 보통 뛰어난 수학자의 성격하면 내성적이면서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는 반대로 매우 사교적이었다고 한다. 파티를 자주 즐겨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도 남들과 다르게 자주 파티를 열었다고. 또한 상호 확증 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개념을 제안했는데 이 용어의 약자가 절묘하게 MAD(미친)가 된 이유 역시 그의 유머러스한 성격이 한몫했다. 그가 만든 컴퓨터의 이름에서도 그의 센스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Mathematical Analyzer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 이른바 MANIAC이다.
3.5. 취미
- 폰 노이만 본인은 자기 자신의 패션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 고가의 투버튼 정장만 입고 다녔고 이러한 스타일은 박사 시험 당시 감독관이었던 다비트 힐베르트에게서 재단사가 누구냐는 질문을 듣는 등 주변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한편 그의 아내였던 클라라는 식습관과 관련해, 노이만이 칼로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세고 다니는 남자라고 말했다. 그는 조용한 공간보다는 무질서한 소음 속에서 일하는 것을 즐겼으며 축음기로 엄청나게 크게 음악을 틀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이웃주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희한한 행보에도 불구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인해 이웃들에게 명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자동차 애호가로써 스포츠카 수집 및 운전에 취미가 있었다. 특히 페라리를 좋아했다. 폰 노이만이 소유했었다고 언론에 공개된 차량은 페라리 500 몬디알, 페라리 625/250 TRC, 포르쉐 550가 있다. 현재 이 차종들은 경매에서 한화로 최소 50억원이 넘는 가격으로 낙찰된다. 스포츠카를 자가용으로써 운전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폰 노이만 본인이 딜러쉽를 차려서 여러 사람들에게 차를 빌려주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딘이 그의 포르쉐 550을 빌려서 캘리포니아 내 자동차 경주에 출전하기도 했다. 또한 포르쉐-폭스바겐 브랜드를 캘리포니아 지역에 중개하기도 했다.
3.6. 수학
- 20세기 중반 부르바키 등의 주도로 순수 수학이 점점 현실과 멀어지며 추상화되고 형식화되는 경향을 비판했다.
4. 일화
폰 노이만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비범한 지성인 중 한명이며, 그의 학문적 성취가 뛰어나다는 사실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이렇게 다방면으로 여러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 때문에 사실보다 과장된 일화나 창작된 허구의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처럼 알려진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과거 이 문단에 서술된 " 트리니티 실험 당시 폰 노이만이 폭발 에너지를 암산으로 가장 근접하게 맞혀 엔리코 페르미가 칭찬했다."라는 일화는 사실과 정반대로, 오히려 엔리코 페르미가 가장 근접하게 맞혔다.[18] 그리고 《 두 도시 이야기》를 암송해 보라고 하니까 멈추라고 할 때까지 30분 가량 외웠다는 일화는 책 원문이 아니라 요약본을 암송한 것이다. 이처럼 본 내용은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올바르다.
- 어릴 때, 부유했던 집에서 파티를 하면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외워서 읽어주는 묘기를 하였다. 또, 파티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이름, 주소, 전화 번호를 물어보고 집에 갈 때 문 앞에서 한 명씩 인사하면서 저 정보를 다 읊어줬다고 한다.
- 7개의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발음도 원어민과 흡사하였다.[19] 어릴 때 영어를 배웠지만 미국에 오면서 좀 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우기도 했다.
- 유진 위그너[20][21]는 노벨상을 받을 때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폰 노이만이란 말을 했다.[22] 기자가 위그너에게 “왜 헝가리에는 그렇게 뛰어난 천재가 많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위그너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 천재가 많다니요? 천재는 오직 폰 노이만 한 사람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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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위그너는 폰 노이만과
아인슈타인 중 누가 더 천재냐는 질문[24]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플랑크, 폰 라우에, 하이젠베르크를 알았고, 폴 디랙은 제 매제였습니다. 실라르드 레오와 에드워드 텔러는 저와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폰 노이만만큼 두뇌회전이 빠르고 날카로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는 종종 그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었고 아무도 나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해력은 폰 노이만의 이해력보다 더 깊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폰 노이만보다 더 핵심을 관통했고 더 독창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에 특별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두 가지는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입니다. 반면에 폰 노이만은 그런 영민함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독창적인 것을 거의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폰 노이만이 기존의 것을 활용하는 응용력 측면에서는 최고였지만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창의력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비교 대상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인 만큼 절대적인 기준에서의 창의력 부족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천재들 사이에서의 상대적인 개념임을 감안해야한다.
- 김나지움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어느 연구 기관이든 동료들은 그의 압도적인 천재성을 인정했다. 신기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계산력과 암기력이 좋아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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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수학자였던 포여 죄르지는
취리히 대학에 다닐 적 폰 노이만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예전에 그가 있던 클래스에서 강의할 때, 어떤 정리를 소개하고 아직 증명되지 않았으며 아마 꽤 어려울 거라고 이야기했다. 폰 노이만은 5분 후 가만히 손을 들더니 칠판에 나와 증명을 바로 써 내려갔다. 그때부터 나는 폰 노이만을 두려워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비슷한 일화로, 한 교수가 증명되지 않은 정리를 수업에 설명했는데 수업이 끝나고 폰 노이만이 증명한 종이를 들고 찾아왔다는 기록도 있다.
- 동료가 어릴 때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읽은 《 두 도시 이야기》를 암송해보라고 하니까 멈추라고 할 때까지 30분 가량 외웠다.
- 동료 물리학자인 에이브러햄 파이스[25]는 맨해튼 계획 후 오펜하이머 사건 때, 존 폰 노이만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26] 안 좋은 사이를 보며 오펜하이머가 폰 노이만의 재능에 대해 질투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고 서술했다. 냉정하게 보자면, 오펜하이머와 폰 노이만의 갈등은 오펜하이머의 일방적인 질투가 아니라 원자폭탄의 실전 투입에 대한 두 사람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오펜하이머는 원폭의 실전 투입을 반대했고 오히려 폰 노이만이 실전 투입을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과학자 및 수학자들은 모두 반강제로 감금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유일하게 폰 노이만만이 너무나 일이 많아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가 외출을 했다 돌아오는 때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막힌 부분을 들고 찾아갔고, 그러면 폰 노이만은 마치 볼링핀을 쳐 넘어뜨리듯 문제를 해결하거나 실마리를 찾았다고 한다.
- 또, 위의 물리학자가 쓴 일화로, 또 다른 뛰어난 수학자 친구가 며칠 동안 밤을 새서 푼 문제를 갖고 폰 노이만에게 장난을 치려고 문제를 풀었다는 것을 숨긴 채 같이 문제를 풀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폰 노이만이 문제를 순식간에 술술 풀어나가고 동료 수학자가 밤을 새워서 풀었던 가장 어려운 부분만 남겨놓자 화난 수학자가 답을 말하고 나가 버렸다. 1분 후 폰 노이만은 그가 말한 답이 옳다고 말한 뒤 30분 동안 어떻게 자신보다 빨리 풀었는지 고민하다가 물리학자가 사실을 이야기해 주자 그제야 웃으면서 밥 먹으러 갔다는 일화도 있다.
- 괴팅겐에서 다비트 힐베르트의 초청으로 강의를 하게 된다. 양자역학의 형식주의에 힐베르트 공간을 도입한 인물은 힐베르트가 아니라 폰 노이만이다. 폰 노이만은 수학을 논리학으로 귀속시키려는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시도를 냉소했고, 한 이론의 무모순성을 증명 체계 속에서 증명하려는 힐베르트의 시도에 역시 회의적이었다.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시도는 다수의 수학자들에게 별 관심을 끌지 못했고, 쿠르트 괴델의 등장으로 애초에 이러한 시도가 불가능함이 밝혀졌다. 실은 폰 노이만 역시 괴델의 아이디어를 이미 생각해 본 적이 있었으나 힐베르트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이쪽의 시도를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이해한 사람도 노이만 한 사람뿐이었다. 정리 직후 노이만이 한 말은 "다 끝장났군요!"였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표현.
-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폰 노이만보다 위대한 인물은 만나 봤지만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이는 그의 동료들도 동의했다. 참고로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천재들의 시대에서 유명한 천재란 천재는 다 만나 본 사람이다.
-
폰 노이만이 자문을 해주었던 군사 협력 업체에서 복잡한 계산을 위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고민하다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이에 그는 ''컴퓨터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더니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잠시 쳐다본 후 종이에 몇 줄의 식으로 완벽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리고는 경악한 관계자들에게 "이제 밥 먹으러 갑시다"라고 말했다는
훈훈한일화가 전해진다.
- 누군가[27] “200마일 길이의 철로의 양쪽 끝에 서 있는 두 대의 기차가 시속 50마일의 속도로 서로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부터 두 기차가 서로 충돌할 때까지 파리가 시속 75마일의 속도로 두 기차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파리가 이동한 거리는 모두 몇 마일일까요?”라는 질문[28]을 폰 노이만에게 했다. 폰 노이만은 잠시 생각한뒤 150마일이라고 대답했다. 질문을 한 사람은 실망하면서 “역시 당신은 속임수에 걸리지 않는군요. 대개 사람들은 이 문제를 무한급수를 이용해서 풀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간단한 논리를 이용해서 파리가 2시간 동안 움직인 거리를 알아내면 금방 풀리죠. 당신은 그렇게 풀어낸 거죠?”[29] 폰 노이만: “아뇨. 무한급수로 풀었는데요.”[30] 이 문제는 고등학교 이과 수학의 등비수열 수준의 문제이나 폰 노이만이 무한급수를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머릿속에서 초항부터 계산해서 전부 더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에 리처드 파인만도 동일한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파인만은 이미 폰 노이만의 일화를 알고 있었기에 쉬운 풀이로 답을 구해놓고 "무한급수로 풀었는데요?"를 시전하는 능청을 부렸다. 파인만도 직관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대단한 천재였지만 폰 노이만과 같이 살아있는 컴퓨터처럼 암산을 하는 타입의 천재는 아니었다. 교과서에도 실리곤 해서 일반인들도 흔히들 아는 그의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
- 자신이 개발한 컴퓨터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천의 자리가 7인 최초의 2n[31]을 찾는 계산 대결을 했는데, 노이만이 이겼다. 그리고서는 "제대로 잘 만들었구나"하며 흡족해 했다고 한다.
-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의 초창기
- 개발자들은 완전히 맨땅에서 시작했기에 탄도 미사일이라는 것이 어떤 물건이 될지 개발 과정이 맞는지조차 혼란스러워했다. 이 와중에 누군가 '노이만에게 물어보자'고 제안했고 개발자들은 몇 개월간 연구한 수천 페이지의 문서를 들고 그에게 찾아갔다. 노이만은 그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개발자들이 "그럼 얼마 후에 방문하면 될까요?"하고 물어보자 "아, 거기 잠깐만 앉아 보세요."하고 말하며 2시간 동안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종이와 펜을 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은 완벽했다고 한다.
- 개발 도중, 한 학자가 수백 장의 보고서를 들고 폰 노이만에게 찾아갔다. 폰 노이만은 보고서를 앞 장을 빠른 속도로 읽고 갑자기 뒤에서부터 대충 몇 장 넘기더니 "이 구상은 너무 허무맹랑한데요, 사람 손으로는 불가능하고, 신이라도 쉽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곧바로 그 이유에 대해 완벽히 설명해 주었으나, 그 학자는 납득하지 못하고 노이만을 이겨보겠다는 욕심에 2달이나 더 매진하고는 그제서야 진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말년에 폰 노이만은 “현대 수학은 매우 복잡합니다. 당신은 과연 현대 수학을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미래 수학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노이만은 이 질문에는 그답지 않게 한참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했다가 “28퍼센트.”라고 대답했다.[32]
- 이렇게 너무나 놀라운 재능을 가진 그를 두고 주변 사람은 혹시 그가 악마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 했다. 이에 대해 동료 수학자는 단 한 마디로 반박했다. “악마가 인간을 연기한 것이라면 그렇게 연기를 못 할 리가 없다.”[33]
- 엔리코 페르미의 부인은 “요니(폰 노이만의 애칭; Johnny)는 뒤에서 험담을 듣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사교적, 재능적 면에서 흠을 잡기는커녕 완전무결했기 때문이다.
- 홀로 생각에 깊이 빠지면 한곳에 눈을 고정한 것처럼 굳어서 가만히 있곤 했다. 때론 가림막이 없는 책상에서 일하던 비서의 다리가 있는 자리에 시선이 가있곤 했다. 비서는 폰 노이만이 자신을 성희롱하는 줄 오해했다가 곧 그의 눈에 초점이 없으며 습관인 걸 알게 되었다.
- 아내와 영화를 볼 때면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뉴스는 정말 집중해서 봤으나 막상 영화가 시작하면 자 버렸다고 한다.[34] 그 후 나와서 아내가 영화에 대해 물어보면 봤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즉석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한다. 영화의 서두만 보고 추출한 매우 흥미로운 스토리였지만, 아쉽게도 영화 내용과는 거리가 멀어서 매번 걸렸다고 한다.
- 폰 노이만의 운전 실력은 좋지 않았다. 그가 차로 나무를 들이받은 뒤 경찰이 오자 "길가의 나무들이 일정한 속도로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가 내 앞에 나타났다."라고 진술했다. 다만 스포츠카를 매우 사랑했던 사람이다 보니 형편없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 인생의 대부분을 불가지론자 혹은 냉담자로 살았지만, 죽기 직전 암으로 투병 중에 가톨릭에 귀의하여 가톨릭 신자로서 생을 마감했다. 주변 인물들에 따르면 이러한 개종은 평소 건강할 때의 발언이나 태도와는 사뭇 동떨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병자성사를 집전한 신부에 따르면, 그 자신은 개종으로 그다지 큰 위안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폰 노이만은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파스칼의 내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 그가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동생이 파우스트 독일어 원문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생이 읽다가 잠시 멈췄을 때, 폰 노이만이 다음 구절들을 읊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기억력에 관련된 마지막 일화이다.
- 기술적 특이점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사람도 폰 노이만이다. 정확히는 동료였던 스타니스와프 울람(Stanisław Marcin Ulam)이 1958년 폰 노이만의 사후에 그에 대해 회고하며 쓴 글에서 언급되었는데 "(그와 나눈) 한 대화는 언제까지고 계속되지는 않을 현 인류의 양상을 넘어서게 할, 점점 다가오고 있는 어떤 필연적인 인류사의 특이점을 출현시킬 항구적으로 가속되고 있는 기술진보 및 그에 따른 인류의 생활상의 변화에 대한 것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35]라고 하였다 한다.
- 별명 중에 반신(半神, Demigod)이 있다. 두뇌가 인간의 영역이 아니란 소리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떠도는 농담 중 "폰 노이만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하고 완벽히 모방할 수 있는 반신이다."가 있다고 한다. #
- 폰 노이만은 디지털 컴퓨터의 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컴퓨터는 늘 거대해서 강대국 정부만이 소유할 수 있을 것이며, 핵무기를 만들고, 기후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에 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던 건지 모든 곳에 컴퓨터가 내장될 미래는 예상하지 못했다.[36] 재미있게도 또다른 천재라고 할 수 있는 리처드 파인만은 폰 노이만 사후 2년이 지난 1959년, "There'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이라는 강의에서 노이만의 예상과는 반대로 50년 이내에 핀 머리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집어넣을 정도로 컴퓨터의 소형화가 가능할 것임을 예측하였다. 강의원문 한국어번역[37] 기후 통제의 경우에도 폰 노이만의 예측과 달리 슈퍼컴퓨터가 발달한 21세기 초를 기준으로도 기후 통제는커녕 날씨 예측 모델을 현실적으로 시뮬레이션하는 수준까지만 왔으며, 지구 온난화같은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원인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 이외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컴퓨터로 핵무기를 만들 것이라는 노이만의 예측은 정확했지만, 강대국뿐만 아니라 북한같이 낙후된 국가조차 컴퓨터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였다.
- 후덕한 몸매 때문에 그의 아내는 "이런 수학천재도 정작 자기 몸 칼로리는 계산하지 못 한다."라고 팩트폭행을 날렸다.
- 폰 노이만은 컴퓨터를 사용할 때 기계어로만 프로그래밍을 했다고 한다. 어셈블리어나 포트란이 나온 뒤에도. 물론 이때 기계어 코딩을 하던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연히 기계어만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한편 폰 노이만의 제자가 어셈블리어를 만들자 고작 그런 거로 컴퓨터의 성능을 낭비하려 한다고 폰 노이만이 노발대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 당시 컴퓨터의 위상은 요즘 기준 수십억원대 최고급 연산장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단위로 한두 개 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성능을 낭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폰 노이만 같이 기계어로 자유자재로 코딩이 가능한 효율이 높은 인력이 많이 필요한 시대였다는 점도 있다. 세월이 지나고 심하게 비효율적인 코드도 높은 성능의 하드웨어와 컴파일러의 효과로 준수한 성능을 내기 때문에, 컴퓨터 한 대가 프로그래머 한 달 월급보다 싸진 요즘은 예전과 반대로 프로그래밍의 효율이 훨씬 중요하게 취급된다.
- 후술할 내용은 폰 노이만과 함께 연구했던 존 브로노프스키라는 과학자의 회고이다. 원폭 투하 후 버섯구름이 생기는 걸 보고 존 브로노프스키란 과학자가 왜 버섯구름이 생기는지 궁금해했는데, 폰 노이만에게 왜냐고 묻자 2차 미분 결과라서 당연하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이해가 안 가서 밤을 새워서 계산을 해서 아침이 되어 폰 노이만의 이야기가 맞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그는 흥분해서 오전 10시에 노이만에게 당신의 말이 맞았다면서 전화를 걸았다. 하지만 폰 노이만은 그런 당연한 이야기로 아침잠을 깨우지 말라며 문전박대를 했다고 한다. 이후에 존 브로노프스키는 유명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데, 거기서 폰 노이만을 비판했다. 그의 게으름으로 인류문명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가 연구와 기술에 온 힘을 쏟았다면 인류문명이 수십 년은 앞서갔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신은 왜 그런 게으름뱅이에게 재능을 주었는가라면서 말이다.[38]
- 유명 수학자 에르되시 팔도 폰 노이만에 대해 회고한 적이 있었다. 에르되시는 "속도와 이해력에 대해서 폰 노이만은 확실히 경이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분야와 매우 떨어진 증명에 대해서도 매우 빨리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폰노이만을 평가했다. 언젠가 에르되시가 폰 노이만에게 에르되시가 연구했던 interpolation theory의 한 정리에 대해 증명한 것을 폰 노이만에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건 폰 노이만의 분야가 전혀 아니었고, 그는 그 정리에 대해 그리 관심있어 보이지 않았다. 폰 노이만은 "그 증명에 무언가 잘못된 게 있는 것 같군요."라고 말하였다. 폰 노이만이 나간 후, 에르되시는 그 증명을 다시 한 번 보았고, 그가 옳았다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비록 에르되시는 폰 노이만을 존중했지만, 둘의 분야는 너무 달라서 공동 작업을 할 수 없었다.
- 지금 이 순간을 포함해, 21세기에 만들어지는 거의 모든 컴퓨터는 폰 노이만이 창안한 폰노이만 구조를 따라 개발된다. 엄밀하게 봐서 SISD만 폰노이만 구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SIMD, MIMD 모두 폰노이만 구조의 확장으로 보는 것이 맞다. 즉, 사실상 모든 현대 컴퓨터가 이 사람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다만, 폰 노이만 구조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폰 노이만 구조는 폰 노이만이 이미 만들어진 컴퓨터를 보고서 사후 보고서를 작성했을 뿐이다. 에니악, 에드박의 창시자인 에커트와 모클리에게 공이 돌아가야 옳다.
- 2023년 맨해튼 프로젝트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중점적으로 다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하면서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추적인 과학자 중 한 명이었던 폰 노이만도 영화에 등장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쉽게도 영화에 노이만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로서는 거의 신출내기 수준이었던 리처드 파인만도 군데군데 존재감을 내비치는 장면이 있었는데 핵폭탄 문제를 두고 오펜하이머와 직접적으로 대립하기까지 하였던 존 폰 노이만[39]의 존재가 아예 삭제되어 버린건 좀 의아한 일이다. [40]
5. 어록
In mathematics you don't understand things. You just get used to them.[41]
수학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익숙해지는 것이다.
수학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익숙해지는 것이다.
6. 같이보기
[1]
[ˈnɒjmɒn ˈjaːnoʃ ˈlɒjoʃ\]. 독일어로는 요한 루트비히 폰 노이만(Johann Ludwig von Neumann).
[2]
現
헝가리
부다페스트
[3]
現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
[4]
1921~26.
[5]
~1926.
[6]
모음조화가 존재하는
헝가리어의 특성상
[7]
귀족 작위 획득 후 막스 폰 노이만
[8]
당시 나이로는 17세였다.
[9]
J. von Neumann, Die Einführung analytischer parameter in topologischen Gruppen, Annals of Mathematics. 34 (1): 170–190(1933).
[10]
괴팅겐 대학에 있던 다비트 힐베르트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며 양자역학에 대한 첫번째 논문을 작성함.
[11]
생몰년도: 1909년 ~ 1992년. 즉, 6세 연하다.
부다페스트 대학교에서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2]
마리나 폰 노이만 휘트만(Marina von Neumann Whitman, 1935~), GM부사장까지 지냈던 미국의 경제학자 및 교수
[13]
생몰년도: 1911년 ~ 1963년. 즉, 8세 연하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1931년, 1936년에 결혼을 했다 각각 이혼했고, 폰 노이만과 3번째 결혼을 했다.
[14]
파스칼의 내기는 쉽게 말해 하느님이 존재하든지 안하든지 간에 믿는다고 해서 딱히 손해볼 건 없지만 믿지 않으면 손해이므로 믿는 게 낫다는
그리스도교 변증론이다. 평생 무신론자, 합리주의자로 살다가 막상 죽을 때 되니까 쫄려서 파스칼의 내기와 같은 고전철학을 갖다붙여가며 자기변명해대는 모습이 추접스럽다고 비웃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당시부터 존재했다.
[15]
가톨릭
[16]
록펠러가 세운, 현재의
엑슨모빌을 비롯한 여러 거대 석유회사의 전신. 이 회사는
반독점법 위반으로 인해 수십 개 회사로 찢겨지기 전까지 미국 전체 석유 유통량의 95%를 쥐고 있었던 회사였다.
[17]
500 몬디알 시리즈는 2020년대인 지금 어마무시하게 비싸다. 2019년 소더비가 주최하는 villa erba 경매에서 1954년형 스파이더가 약 54억 원에 낙찰되었고,
# 1955년형의 가치는 한화로 72억~98억 원 사이를 호가한다.
# 만약에 폰노이만 소유였던 차량이 경매에 나온다면 이 금액을 훨씬 상회할 것이다.
[18]
실제 위력은 20 ~ 22킬로톤, 페르미는 10킬로톤, 폰 노이만은 5킬로톤.
페르미 추정 항목 참고.
[19]
폰 노이만의 육성 녹음을 들어보면 영어 발음이 완벽하지 않다.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
[20]
위그너는 13살 때, 자기보다 한 살 어린 폰 노이만에게서 정수론과 집합론을 배웠다. 둘 다 대단한데 위그너가 왠지 진 느낌(...)
[21]
위그너는 폰 노이만을 수학에서는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물리학으로 전공을 선택했다는 설이 있다. 스승 이기는 제자는 없다?
[22]
폰 노이만도 물리학에서 혁혁한 업적을 세웠지만, 노벨상을 타지는 못했다.
[23]
사실 기자의 질문은 나름대로 타당하다. 그 당시 유진 위그너, 에드워드 텔러, 레오 실라르드(실라드), 테오도어 폰 카르만, 에르되시 팔 등 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헝가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24]
사실 질문 자체가 모호하다. 천재라고 판단할 수 있는 엄밀한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5]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전기를 썼다.
[26]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로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중 한 명이자 8개 국어로 시와 소설을 쓰고 클래식 작곡도 상당한 수준인 무시무시한 천재다.
[27]
그 누군가가
막스 보른이라고 유진 위그너가 말한다.
https://youtu.be/gn3U9G0gfu4?t=1102
[28]
현재 열차와 파리 문제 일화는 조건이 매우 다양한 값들로 변형되어 널리 퍼져 있다.
[29]
두 기차가 만나는 데 두 시간이 걸리므로 두 시간 동안 파리가 간 거리는 75×2=150마일이다.
[30]
무한급수로 푸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파리와 같이 출발하는 전차를 A, 반대편 기차는 B라 할 때 파리는 기차보다 1.5배 빠르므로 파리와 B가 만나는 지점은 [math(\dfrac{200마일}{1+1.5}×1.5=120마일)]이며 걸린 시간은 [math(\dfrac{120}{75}=1.6)]시간 이므로, 1.6시간 동안 각 기차들은 [math(50×1.6=80)]마일을 움직였기에 두 기차 사이의 거리는 [math(200-(80×2)=40)]마일이다.
이때 시간이나 파리의 이동 거리 중에 어느 것을 초항으로 잡느냐에 따라 방법이 조금 달라진다. 남은 거리가 40마일이므로 처음 거리의 1/5의 상태가 되며 이를 통해 공비가 0.2가 됨을 알 수 있다. 무한급수의 공비의 절댓값이 1미만일 때 [math(\dfrac{초항}{(1-공비)}=무한급수)]의 합이라는 공식을 이용하면 [math(\dfrac{1.6시간}{(1-0.2)}=2시간)] 이 나오며 [math(75마일×2시간=150마일)] 또는 [math(\dfrac{120마일}{(1-0.2)}=150마일)]이다.
또한 짝수 번째 항이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고려하면 공비는 -0.2가 되는데 무한급수의 합은 총 이동거리가 아닌 파리의 현재 위치로 계산할 수 있다. [math(\dfrac{120마일}{1-(-0.2)}=100마일)]이 되며 정확히 중간 지점이 되므로 위의 과정이 맞음을 증명한다. [31] 답은 n = 21 (221 = 2,097,152) [32] 여기서 ‘고작 28%?’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자기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 학문의 길인데, 저렇게 구체적인 비율을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은 수학이라는 학문의 전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있다는 뜻이다. [33] 만약 인간을 초월한 한 존재, 악마가 자신을 숨기고 인간을 연기한다면, 인간미 넘치는 일반인을 완벽하게 연기했을 것이다. 폰노이만처럼 "나는 괴물같은 천재입니다"라고 광고는 안 했을 테니 말이다. [34] TV 보급 전까지 영화관에서 뉴스를 틀어주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야인시대에서 심영이 연극 전에 뉴스를 상영하겠다고 한 것이 그 예다. [35] One conversation centered on the ever accelerating progress of technology and changes in the mode of human life, which gives the appearance of approaching some essential singularity in the history of the race beyond which human affairs, as we know them, could not continue. [36] 모두 어디 있지? 50쪽. Stephen Webb 저. 한승 출판사. [37] 집적회로가 발명된 해가 1958년이었기 때문에, 1959년에 발언한 파인만은 트랜지스터와 컴퓨터의 소형화를 전망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폰 노이만은 1957년 초에 사망했기 때문에 집적회로의 가능성을 알 수 없었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집적회로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폰노이만 구조는 그가 모를 수 없는 개념이기에 단순히 집적회로 개발 이전이라 해서 폰 노이만이 컴퓨터의 소형화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고 보기만은 또 어렵다. ENIAC을 그대로 소형화할 수 없는 대표적인 2가지 이유가 하나는 진공관을 사용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폰노이만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38] 게으른 천재의 대명사는 데카르트가 있다. [39] 특히 그가 개발한 폭축 렌즈는 기폭 장치로서 핵폭탄의 핵심 중의 핵심인 부품이다. [40] 실제로 오펜하이머는반신 존 폰 노이만에게 감히 인간으로서 열등감을 가졌다는 설이 있다.
[41]
Felix T. Smith (1920년 ~ 2018)(물리학 박사, 과거 Stanford Research Institute 분자물리 연구과장)는 다른 물리학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Los Alamos에 일했던 Felix의 친구 물리학자)가 겪은 일화를 전해 들었고, 이를 작가인 Gray Zukav에게 이야기 해주었고, 이것을 Gray가《He Dancing Wu Li Masters: An Overview of the New Physics》라는 책에 그 이야기를 실었다. 원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물리학자(Felix의 친구)가 어려운 문제 해결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노이만을 찾아갔다고 한다. 노이만이 "간단하네, 이건 method of characteristics(특성곡선법)을 사용하면 해결된다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물리학자가 "제가 method of characteristics(특성곡선법)을 이해 못 할 까봐 두렵습니다."라고 말했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폰 노이만이 "수학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네, 익숙해지는 거라네."라고 답했다고 한다.
파리와 같이 출발하는 전차를 A, 반대편 기차는 B라 할 때 파리는 기차보다 1.5배 빠르므로 파리와 B가 만나는 지점은 [math(\dfrac{200마일}{1+1.5}×1.5=120마일)]이며 걸린 시간은 [math(\dfrac{120}{75}=1.6)]시간 이므로, 1.6시간 동안 각 기차들은 [math(50×1.6=80)]마일을 움직였기에 두 기차 사이의 거리는 [math(200-(80×2)=40)]마일이다.
이때 시간이나 파리의 이동 거리 중에 어느 것을 초항으로 잡느냐에 따라 방법이 조금 달라진다. 남은 거리가 40마일이므로 처음 거리의 1/5의 상태가 되며 이를 통해 공비가 0.2가 됨을 알 수 있다. 무한급수의 공비의 절댓값이 1미만일 때 [math(\dfrac{초항}{(1-공비)}=무한급수)]의 합이라는 공식을 이용하면 [math(\dfrac{1.6시간}{(1-0.2)}=2시간)] 이 나오며 [math(75마일×2시간=150마일)] 또는 [math(\dfrac{120마일}{(1-0.2)}=150마일)]이다.
또한 짝수 번째 항이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고려하면 공비는 -0.2가 되는데 무한급수의 합은 총 이동거리가 아닌 파리의 현재 위치로 계산할 수 있다. [math(\dfrac{120마일}{1-(-0.2)}=100마일)]이 되며 정확히 중간 지점이 되므로 위의 과정이 맞음을 증명한다. [31] 답은 n = 21 (221 = 2,097,152) [32] 여기서 ‘고작 28%?’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자기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 학문의 길인데, 저렇게 구체적인 비율을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은 수학이라는 학문의 전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있다는 뜻이다. [33] 만약 인간을 초월한 한 존재, 악마가 자신을 숨기고 인간을 연기한다면, 인간미 넘치는 일반인을 완벽하게 연기했을 것이다. 폰노이만처럼 "나는 괴물같은 천재입니다"라고 광고는 안 했을 테니 말이다. [34] TV 보급 전까지 영화관에서 뉴스를 틀어주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야인시대에서 심영이 연극 전에 뉴스를 상영하겠다고 한 것이 그 예다. [35] One conversation centered on the ever accelerating progress of technology and changes in the mode of human life, which gives the appearance of approaching some essential singularity in the history of the race beyond which human affairs, as we know them, could not continue. [36] 모두 어디 있지? 50쪽. Stephen Webb 저. 한승 출판사. [37] 집적회로가 발명된 해가 1958년이었기 때문에, 1959년에 발언한 파인만은 트랜지스터와 컴퓨터의 소형화를 전망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폰 노이만은 1957년 초에 사망했기 때문에 집적회로의 가능성을 알 수 없었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집적회로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폰노이만 구조는 그가 모를 수 없는 개념이기에 단순히 집적회로 개발 이전이라 해서 폰 노이만이 컴퓨터의 소형화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고 보기만은 또 어렵다. ENIAC을 그대로 소형화할 수 없는 대표적인 2가지 이유가 하나는 진공관을 사용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폰노이만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38] 게으른 천재의 대명사는 데카르트가 있다. [39] 특히 그가 개발한 폭축 렌즈는 기폭 장치로서 핵폭탄의 핵심 중의 핵심인 부품이다. [40] 실제로 오펜하이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