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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0:21:28

존 에드거 후버


파일:연방수사국 마크.svg
미합중국 연방수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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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존 에드거 후버 클래런스 M. 켈리 윌리엄 H. 웹스터 윌리엄 S. 세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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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프리 로버트 뮬러 제임스 코미 크리스토퍼 A.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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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IFE_LOGO.pn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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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 라이트 형제뿐이다.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조지 발란신
<안무가>
존 바딘
<물리학자>
어빙 벌린
<작곡가>
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말론 브란도
<배우>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데일 카네기
<작가>
월리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존 듀이
<철학자>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W. E. B. 듀보이스
< NAACP 설립자>
앨런 덜레스
< CIA 국장>
밥 딜런
<포크 뮤지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헨리 포드
<기업가>
존 포드
<영화감독>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
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조이스 홀
<사업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존 에드거 후버
< FBI 초대 국장>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잭 케루악
<시인, 작가>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마틴 루터 킹
<목사, 인권 운동가>
알프레드 킨제이
<성과학자, 생물학자>
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레이 크록
< 맥도날드 창업자>
에드윈 랜드
<과학자, 발명가>
윌리엄 레빗
<부동산 개발업자>
존 L. 루이스
<노동당 지도자>
찰스 린드버그
<비행기 조종사>
레이먼드 로이
<산업 디자이너>
헨리 루스
<편집자>
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정치인>
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로버트 모세
<공무원>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잭슨 폴록
<화가>
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리처드 로저스
(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윌 로저스
<배우, 작가>
엘리너 루스벨트
<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조너스 소크
<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빌 윌슨
< AA 창립자>
앤디 워홀
<화가>
얼 워런
<대법원장>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월터 윈첼
<신문기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출처 }}}}}}}}}

<colbgcolor=#004990><colcolor=#fff> 미합중국 초대 연방수사국장
존 에드거 후버
John Edgar Hoover
파일:Hoover-JEdgar-LOC.jpg
출생 1895년 1월 1일
미국 워싱턴 D.C.
사망 1972년 5월 2일 (향년 77세)
미국 워싱턴 D.C.
재임 초대 연방수사국장
1924년 5월 10일 ~ 1972년 5월 2일
학력 조지 워싱턴 대학교 (법학사 · 법학박사)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종교 개신교
서명 파일:J_Edgar_Hoover_Signature.svg

1. 개요2. 행적과 영향력3. 대중매체4.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미국 연방수사국의 초대 국장. 1924년부터 1972년 까지 총 48년간에 걸쳐 FBI 국장을 지냈으며 그가 FBI 국장으로 지낸 48년동안 총 8명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리처드 닉슨)이 백악관을 거쳐갔다. 존 에드거 후버는 미국 내 유명인과 정치인에 대한 약점을 죄다 조사하고 다녔고 정치적 파워가 극에 달해서 그 막강한 권력의 미국 대통령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할리우드에서도 직접 출연해서 홍보하고 다닌 탓에 할리우드 자체 내에서도 두려워했다. 사실상 현대 미국 FBI의 위상은 그가 거의 만들었을 정도라고 평가받는다.

2. 행적과 영향력

가난한 형편 탓에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 국회도서관에서 보조 사서로 일하다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법무부에 들어가 후에 FBI의 전신이 되는 법무부 산하의 수사국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나키스트였던 엠마 골드만을 국외로 추방시키는 데 공헌한 후버는 그 공으로 1924년 20대 후반 나이에 수사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미 법무부 산하 수사국이 그다지 크고 중요한 부서가 아니었던 탓도 있지만 갓 들어선 쿨리지 행정부가 전임 대통령 하딩의 안 좋은 유산을 청산하려한 측면도 있다. 실제로 후버의 전임 국장은 온갖 지저분한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다.

1930년대에 미국은 금주법 등을 기회로 삼아 각지에서 일어나는 마피아와 거리 갱들의 범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각 카운티나 시, 주정부의 힘만으로는 마피아와 갱들을 잡기가 어렵다."라고 판단한 미국 정부는 연방 정부 차원에서 이들에 대항할 만한 조직을 만들게 되는데 이리하여 1935년 수사국을 연방수사국으로 확대개편했다. 중앙집권적인 법 체계를 가진 한국으로서는 낯설겠지만 당시만 해도 연방정부에서 범죄자를 잡는 것에 대해서 주정부에 대한 권리 침해라는 말이 많았다.

이후 후버가 이끄는 FBI는 새로 인력을 보강한다. 후버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기준으로 사람을 뽑았고 수사관들에게는 되도록 깔끔하게 옷을 입고 다니도록 하였다. 그리고 신출귀몰한 갱스터 존 딜린저를 당시로서는 최첨단 수사기법을 동원하여 검거, 사살했다. 후버는 딜린저에게 공공의 적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요란한 언론플레이를 이용해 악당에 맞서 미국을 지키는 영웅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두운 부분이 있었으니 후버는 FBI의 첩보 능력을 이용해 유명인이나 유력 정치인의 뒤를 캐고 다녔다. 그리고 그들을 감시하여 치부를 고스란히 기록한 비밀 파일들을 만들어 두었다. 후버는 도서관에서 보조 사서로 일했던 경험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지 조직을 운영하면서 각종 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데에 상당히 집착하였다. 후버가 활동한 시기는 공기관들의 기록 관리 시스템이 체계화되어 있지 않아 기록물들의 소실이 상당했는데, 후버는 일찍이 기록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사 기록을 체계적으로 수집, 관리, 공유해서 기관 업무의 효율성을 높였다. 후버의 이런 기록 관리에 대한 관심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J. 에드가》에서도 나타난다.

혹여 정치권에서 퇴진 요구가 있으면 조용히 정계 인물들 관련 비밀 파일을 빌미로 협박을 일삼았다고 한다. 이 경우는 실제 그 인사가 그런 추문에 휘말린 경우도 있지만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혹이 있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식으로 후버는 죽을 때까지 거의 50여 년 동안 FBI 국장직에 있을 수 있었고, 후버는 새로운 대통령들이 자신의 FBI 국장 지위와 권력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대통령의 정적들 비리 불륜 증거를 주기적으로 넘겨주었다. 그러다가 리처드 닉슨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권력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그가 죽지 않았더라도 닉슨의 손에 의해 숙청당했을거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FBI는 해외 정보수집까지도 관장할 정도로 권한과 위상이 강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후버는 스파이를 색출한다면서 광범위한 도청과 감시를 통해 많은 고급 정보들을 쌓아나갔다. 그러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FBI가 너무 커졌다."라고 판단하여 해외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기관을 창설했으니 그게 바로 CIA이다. 이로 인해 해외 정보수집까지 장악해서 명실상부 모든 정보를 틀어쥐려 했던 후버의 야심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후버는 계속 국내 정보 수집을 통해 지위를 유지해나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은 후버에게도, 케네디 형제에게도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었는데 " 마피아를 소탕하겠다고 선언한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때문에 후버가 마피아의 협박을 받았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후버의 권력을 줄이려던 케네디 형제에게 후버가 마릴린 먼로와의 스캔들을 들이대자 케네디 형제도 할말을 잃었다."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케네디가 정실 인사라는 비판까지 감수하면서 동생을 법무장관에 임명했던 것도, 후버의 상관 자리에 믿을만한 인물을 앉혀 그를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더 나아가 로버트 F. 케네디가 마지못해 후버의 마틴 루터 킹 도청을 허가한 것이 사실 후버가 마릴린 먼로와 케네디가 정사를 나누는 것을 도청한 테이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처음엔 후버를 내쫓으려다가 "그 인간이 텐트 밖에서 텐트 안으로 오줌을 싸게 하느니 텐트 안에서 텐트 밖으로 오줌을 싸게 하는 것이 낫겠지."라는 말을 남기면서, 후버를 종신 FBI 국장으로 임명해줬다. "내쫓아서 정치인들 비리를 동네방네 폭로하고 다니는 워싱턴의 골칫거리가 되게 할 바에야 그냥 놔둬서 안에서 날뛰게 내버려 두자."라는 의미. 그리하여 후버는 죽을 때까지 FBI 국장에 앉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오죽하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저 영감은 100살까지도 국장짓 해먹을 양반"이라고 할 정도. 그러나 닉슨의 예언이 빗나가서 결국 닉슨 1차 재임기인 1972년 5월 2일 사망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후버는 페미니즘 운동에 스파이를 심었고 이는 사망 후 5년만에 폭로되었다.

존슨은 후버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이용하려고 했다. 존슨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존 에드거 후버를 통해 동료 상원의원을 견제하기 위해 후버와 일부러 친분을 쌓았는데, 후버도 그런 존슨을 나쁘게 보지 않아서 강아지를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존슨은 후버의 약점인 동성애를 이용해 후버에게 정보를 요구했고, 후버도 존슨의 성스캔들을 들먹이며 존슨이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게 했다. 2022년 공개된 테이프는 존슨과 후버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였으며 상부상조하는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

닉슨은 의외로 후버를 좋아하지 않아 그를 제거하려고 했는데, 후버가 너무 늙은데다 FBI가 관료주의의 온상이 되어 신좌파를 충분히 때려잡기에는 수사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닉슨은 후버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를 FBI 국장에서 제거하는 것까지 고려할 정도로 후버를 극도로 혐오하였으나 후버가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후버 제거 작전을 계속 뒤로 미루었다. 대신 닉슨은 자신만의 비밀 공작팀을 만들었는데, 당연히 후버에 비해서 철저하지 못했고 (아이러니하게도 후버가 급사한지 한달여 후)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생전의 후버는 마피아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범죄조직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비호했다. 게다가 (당시 주적이던 소련을 농락하던 능력이 있긴했으나) 죽을 때까지 영구 집권했다는 점 등 모든 것이 드러난 지금 시점에서 좋게 말하면 냉전이라는 시기에 딱 맞는 사람, 나쁘게 말하면 반(反) 인권의 상징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죽은 후 FBI 국장의 재임 기간 상한이 10년으로 제한되었으며, 당연히 인권 운동가들의 대다수는 후버를 사탄 취급할 정도로 매우 싫어한다.

왜 후버가 마피아를 수사하자는 부하들의 간청을 뿌리쳐가면서까지 그들을 비호했는지에 대해 여러 가설이 있지만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대표적으로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제노비스 패밀리가 후버와 그의 부하 클리드 톨슨이 동성 성행위를 하고 있는 사진이나 후버의 여장 사진을 가지고 협박했다는 설, 후버가 도박 중독이었다는 설, 부하 수사관들이 마피아와 거래하면서 부패하는 걸 원치 않았다는 설, 마피아와 대적했을 때, FBI의 무능이 공공연히 드러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설, 마피아를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방파제로 봤다는 설, 프랭크 코스텔로, 카를로 감비노로 대표되는 당대 정상급 마피아 두목들과 상호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설 등 다양하다. 훗날 후버가 사망하고 10년이 지나서야 FBI는 마피아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를 개시한다.

후버가 사찰한 사람들은 엘리너 루스벨트, 헬렌 켈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존 스타인벡, 마틴 루터 킹, 찰리 채플린[1] 등이었다. FBI가 지겹게 감시하자 존 스타인벡 법무장관에게 "저 후버의 똘마니들 좀 처리해달라."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경우에는 후버 본인이 흑인을 안 좋아한 데다가 민권 운동을 한 탓에 킹 목사는 먼지 하나까지도 샅샅이 훑었다고 할 정도로 엄중하게 감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버의 조상 중 일부는 흑인 혈통이 흐른다. 꽤 오래 전 조상이긴 하지만 크리스천 후버가 흑인 노예 사이에 얻은 자식들이 후버의 조상이다. 이런 흑백혼혈의 후손들을 passing이라고 한다. 같이 살게 된 지 300년이 넘은 탓에 미국 백인들도 평균적으로 1% 정도의 흑인 혈통이 있다. 또 후버는 마틴 루터 킹의 미국 흑인 민권 운동 소련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 했고 냉전 종식 후 공개된 소련의 비밀 문서들을 통해서 소련과는 관계가 없었음이 확인되었다.

후버가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는 공산주의자, 흑인, 동성애자였는데, 이런 사람들은 FBI의 감시를 받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후버 본인도 동성애자였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으며, 후버를 소재로 한 미디어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등 거의 학계의 정설 취급을 받고 있다. 부국장이었던 클라이드 톰슨과는 연인 사이였다고 하며, 어떤 증언에 의하면 "후버가 호텔에서 중년 여성으로 여장을 하고 방에 앉아서 어린 소년들과 성관계를 했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상술했듯 후버가 마피아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며 무시한 이유도 실은 후버가 동성애자라는 걸 약점으로 잡혀서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 후버 자신은 이런 소문을 불식하고자 자주 여배우들과 식사 자리를 공개적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각종 음모론의 뒤에 그가 있는데, 케네디 형제와 마틴 루터 킹의 암살 배후에 그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문만 무성할 뿐 진실은 알 수 없다.

3. 대중매체

[navertv(43994770)]

4. 같이 보기


[1] 공교롭게도 채플린은 후버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