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3458><colcolor=#fff> 에드워드 말로리 알몬드[1] Edward Mallory Almo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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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년 12월 12일 | |
미국 버지니아주 루래이 | ||
사망 | 1979년 6월 11일 (향년 86세) | |
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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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버지니아 군사대학 미 육군 대학교 미 육군항공 전술학교 미 해군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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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군인 | |
복무 | 미군 (1916~1953) | |
최종 계급 | 중장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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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 제92보병사단과 6.25전쟁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을 지휘했다.2. 생애 초기와 제1차 세계대전
1892년 12월 12일 미 버지니아 주 루레이 출생. 1915년 버지니아 군사대학(VMI)을 졸업하고, 1916년 11월 30일 미 육군 보병 중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프랑스 전선에서 소령으로 참전하여 1918년 말 백일 공세 당시 뫼즈-아르곤 공세에서 미 육군 제4보병사단 12기관총 대대장으로 종군했다. 프랑스 전선에서 전투 중 부상으로 은성무공훈장을 수훈했다.3. 전간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온 알몬드는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매리언 군사대학(MMI)에서 군사학 교관을 역임하고, 이후 1928년까지 조지아 주 포트 베닝에 위치한 미 육군 보병학교 교관을 지냈다. 이 당시에 보병학교 부교장이던 조지 C. 마셜 중령과 친분을 쌓았다.이후 주 필리핀 필미연합 필리핀 정찰대대장으로 필리핀 파병 근무를 마치고, 미 캔자스 주 포트 리번워스에 있는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입학하여 1930년 졸업했다. 이후 4년 간 미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 근무한 후 미 육군대학(USAWC)에 입학 및 졸업, 1938년 중령 진급, 미 육군항공 전술학교를 수료하고, 1940년 미 해군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그는 미 육군 제5군단 사령부 참모부에서 근무했다.
4.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개전 후 준장으로 진급하여 미 애리조나 주에 주둔한 제93보병사단 부사단장(ADC)으로 부임했다. 알몬드와 함께 미 육군 보병학교에서 함께 근무했고, VMI 동문이었던 조지 C. 마셜 장군이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하자 알몬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마셜은 알몬드를 동기들보다 먼저 소장으로 진급시킨 후, 1942년 10월 창설되었으며 전군에서 유일하게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사단급 부대로 매우 실험적인 부대였던 미 육군 제92보병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미군 역사상 최초의 사단급 유색인종 부대의 지휘관이라는 역사적이고 중대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알몬드는 1944~1945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92사단을 지휘했다.마셜은 참모 임무를 매우 유능하게 수행했던 알몬드가 이 어려운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지만, 그는 사단급 전투부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하지 못했고, 92사단의 형편없는 전투수행 능력을 자신의 탓이 아닌 유색인종 부하들 탓으로 돌렸고, 상급 지휘부에 앞으로 다시는 유색인종을 미군 전투부대에 투입하면 안 된다고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지인들에게 92사단의 형편없는 전투기록 탓에 자신의 진급이 지장이 생길까 걱정이 된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보여준 형편없는 지휘 능력 때문에 1946년 그는 일반적으로 퇴역 예정자들이 보임되는 한직이었던, 맥아더 원수의 극동사령부 인사참모부로 발령을 받았다. 전후 점령군 임무와 동시에 동원령이 해제되어 급격하게 군축업무를 수행하던 극동사령부에서 그는 참모업무를 매우 뛰어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여 그의 특출난 행정능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능력은 참모부 안에서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맥아더 사령관도 곧 그의 능력을 인정했으며, 1949년 맥아더의 참모장이던 폴 J. 뮐러 소장이 미 육군 제3군 부사령관으로 이임하자, 참모부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던 알몬드가 자연스럽게 극동사령부 참모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외아들, 사위가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벤 플리트 장군과 더불어 전쟁에서 자식을 앞세운 미군 장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 정부 역시 알몬드를 함부로 대할수 없었다.
5.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미 극동사령부의 관할지역인 한반도에서 북한군의 남한 침공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은 극동사령부 주도의 국제연합(UN)군을 편성하여 전쟁에 참전했으나 낙동강 방어선까지 계속 후퇴를 했다. 계속되는 후퇴로 한국 현지의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대구에 있던 미 제8군 사령부의 부산 철수를 요청하자 극동사령부 참모장이던 알몬드는 더 이상의 후퇴는 절대 있을 수 없다며 낙동강 방어선 사수를 지시하고, 그 즉시 맥아더에게 한국 방문을 건의하여 바로 다음 날 맥아더와 함께 대구로 날아와 워커 중장에게 현 위치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말 것"을 독려했다. 맥아더 원수는 대구에서 워커 중장에게 "미 제8군이 현 진지를 고수해야 된다"면서, "더 이상의 후퇴는 하지 말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미 제8군 참모장교들에게 "한국에서 철수란 있을 수 없으며, 한국 전선에서 제2의 됭케르크가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역설하였다.[2]1950년 6월말 한강 방어선 시찰을 하고 나서 구상했던 극동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결정해 놓은 상태였고, 미 육군부에 이미 보고까지 마친 상태였다. 낙동강 방어선이 반드시 확보되어야만 인천상륙작전도 가능했던 만큼 낙동강 방어선 사수는 맥아더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상륙부대로 미 육군 제10군단을 준비하고 있었고, 상륙부대의 지휘관으로는 전투지휘관 경험도 부족하고 상륙작전 경험도 없었지만, 극동사령부 참모부 내에서 가능 유능하고 믿음직스러운 알몬드 장군을 선택하여 그에게 미 육군 제10군단의 지휘권을 맡겼다.
사무실에서의 서류 업무에 특화되어 있던 알몬드 장군은 미 육군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의 상륙장갑차(LVT)를 처음 보고 저 무거운 게 정말로 물에 뜨는지를 물어보고 신기해 했을 정도로 기술발전에 둔감한 보수적인 군인이었고, 이에 최첨단 미래형 군대인 해병대 지휘관들은 경악하다 못해 아예 그를 경멸했다. 알몬드의 이 에피소드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수송함에서 바로 해수면으로 들어가 바다를 헤치고 해안에 상륙하는 상륙장갑차는 한참 전인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1943년 경에 이미 실전투입되어 활용된지 오래였다. 아무리 타 군의 무기체계라고는 하지만 ...
결과적으로 미 육군 제10군단의 인천상륙작전은 크게 성공했지만 이후 효과적인 추격섬멸 작전은 미흡한 점이 많았다.
일본에서 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10군단은 미 제8군의 지휘 하에 들어와야 했지만, 맥아더와 극동사령부는 10군단과 8군을 분리하여 작전하도록 했고, 이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이 때문에 10군단장 알몬드는 8군 사령관 워커 중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과도 마찰을 일으켰다.
특히 1950년 11~12월 북한 북동부로 북진하는 동안 그가 10군단 병력을 광범위하게 분산 배치하는 바람에 결국 10군단이 후퇴하고,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주변의 평가는 그가 신중해야 할 시점에도 너무 공격적이라고 말했다.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사망한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미 제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은 알몬드의 이러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알몬드에 대한 맥아더의 신뢰를 감안, 10군단 지휘권을 유지해 줬다. 리지웨이는 알몬드의 공격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했지만 그의 대담함이 그 부대원들을 위태롭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면밀한 지도, 감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알몬드의 10군단은 이후 1951년 중공군의 2월과 3월 공세와 미 제8군의 반격작전인 킬러 작전에 참여했다. 알몬드는 1951년 2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또 1951년 5월 현리 전투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10군단 관할 내에 있던 국군 3군단의 병참로 '오마치(=오미재) 고개'에 대한 방어를 소홀히 하고, 심지어 중공군에게 피탈되고도 이를 3군단에게 알리지 않아 3군단 와해의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알몬드의 10군단 휘하 국군 사단들인 5사단과 7사단의 추태는 알몬드를 옹호할 수 있는 요인이다. 특히 중공군의 공세를 처음으로 받고 패주하던 국군 7사단이 결정적인데, 주위 아군에게 알리지 않고 도주했다. 중공군은 국군 7사단을 돌파한 후 오마치 고개를 점령했다. 즉, 알몬드는 중공군이 오마치를 점령할 진격로에 국군 7사단을 배치해놓은 것이다. 국군 5사단과 국군 7사단의 패주 과정의 추태는 현리 패전의 도화선이 되었다.[3]
반면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당시 민간인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현봉학 박사 등 한국군 지휘관의 요청에 한국 민간인들의 해상철수를 지휘하여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선정 2020년 9월의 6.25전쟁영웅에 선정된 위인이기도 해 그에 대한 평가가 갈린다.
게다가 총탄이 빗발치는 야전에서도 쓸데없이 안락함을 추구해서 부하들은 물론이고, 다른 장교들에게도 상당한 위화감을 샀다. 장진호 전투 전에 알몬드가 해병 1사단 지휘부를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한적이 있는데, 은식기에 아마포로 된 테이블보 등 고급 레스토랑 수준의 상차림과 서비스가 제공되었다고 한다. 당시 1사단 연대장이던 루이스 풀러 미 해병 대령도 '옆에서는 병사들이 죽어나가는데 전장에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치'라고 회고했고, 다른 참석자들도 차라리 차량 조수석에 앉아 식어빠진 전투식량을 먹는게 마음이 편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데이비드 헬버스템의 '콜디스트 윈터',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아웃' 등 한국전쟁 관련 역사서적에 모두 등장한다(...)
종합하자면 이전부터 행정군인이자 참모장교로는 유능했고 후방에서 전투와 관련없는 작전 수행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야전지휘관으로는 상당히 졸장이었음에도 야전에서의 공적을 탐하다가 수많은 참패의 원인이 된, 전형적인 멍청한데 부지런한 상사형 인물. 그리고 참모장교로서 뛰어났다는 점도 사실 맥아더의 심기를 살피고 듣기 좋은 것만 보고하는 등 맥아더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이 뛰어났다는 것이지 진짜로 참모로서의 역량이 훌륭했는지도 좀더 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다.
1951년 7월 알몬드는 10군단을 떠나 미 육군대학 총장으로 취임했고, 1953년 1월 31일 중장으로 퇴역했다.
여담으로 후일 미 국무장관이 된 알렉산더 헤이그 미 육군 대장(퇴역)이 6.25 전쟁 당시 알몬드의 보좌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5.1. 퇴역 이후
퇴역 후 사망할 때까지 보험회사에서 임원으로 재직하였으며, 사후에는 미 버지니아 주 알링턴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다.[4]
[1]
실제 발음은 Almond(άːmənd) '아몬드'나 '아먼드'에 가깝다.
[2]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207,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5집 낙동강선 방어작전, 76페이지.
[3]
문제는 이를 해결해야 할 상급제대인 육본과 미8군 사령부의 책임도 컸다는 점이다. 전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미8군은 알몬드의 손을 들어주어 한국군의 오마치 고개 확보를 거절했다.
[4]
157보병연대 대위로 복무 중 1945년 3월 19일 프랑스에서 전사한 그의 아들 에드워드 말로리 알몬드 주니어가 안장된 곳이기도 하다.